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작자 미상의 청구영언에 나오는 시조이다. 아둘람공동체는 토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10분 내외의 담화(다른 곳에서는 설교라고 하는) 후에 40분 정도 토론을 한다. 이 토론은 매우 유익해서 시야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말에는 항상 따르는 부담이 있다. 표현의 차이와 이해의 차이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현의 차이 보다 이해의 차이가 더 큰 문제이다.
옛말에 “맷떡같이 이야기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이 있지만 “찰떡같이 이야기해도 맷떡같이 알아들을 때”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토론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평생 말을 못하는 기성교회와 말을 많이 하는 공동체와 말이 없는 퀘이커 사이로 왔다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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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침묵은 금이 아니라 납 '인 자기 표현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사이에서의 일이고 신과는 침묵으로 통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점이다. 그 이유는 애초에 기도를 잘못 배워 신을 귀찮게 해야만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종교 생활은 너무 시끄럽다.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심지어는 토론 조차도 시끄럽다. 다석 유영모는 "참생각을 하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고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참생각을 하는 것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종교이다. 자기들 문화권에서 형성된 제 멋대로의 개념으로 신을 주조해서 주장하고 다르게 믿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만 찾은 탓이다.
인간은 애초에 설계되기를 일단 입을 닫으면 생각 모드로 전환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줄을 모른다. 잡생각이 떠오르거나 공상을 하게됨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누군가?"하는 것이다.
흔히 불교의 선에서 말하는 "내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등의 뜬구름 잡는 짓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나를 살피는 것이다.
의사의 진단이 단순한 고무줄인 청진기에서 X레이, CT, MRI 등으로 발전해서 인간의 육체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아갈 수 있듯이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방법도 여러 단계이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몸무게 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다.
가족들에게서 부터 친구, 이웃, 심지어는 윤석열에 대한 나의 감정에까지. 나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분노 등등의 상태에 대하여 살피는 것이다.
서부 영화에서 가끔 인디언들끼리 만나면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무뚝뚝하게 말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영어를 모르는 인디언의 세계를 야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전적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다. 인디언 세계에서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을 진정한 예의로 알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 보다 생각이 먼저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하여 온 관심을 집중 시켜서 표정에서라도 상대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하나님과 말로서 통할 수 있을까? 말 보다는 생각, 우리의 관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이 즉 오해할 만한 사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