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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론 5월 칼럼
제목 : n번방 시대에 다시 생각한 인간의 행복
저자 : 안재오
n번방 시대에 다시 생각한 인간의 행복
서론 : 아동 청소년 음락 학대 동영상 유포와 가치의 전도
요즘 우리 사회는 방향을 잃고 있다. 자살과 살인이 매일 일어나고 친척간 이웃 간의 증오와 질투 그리고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충동적인 살인과 폭력이 판을 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2020.3월) n번방 사건이라고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동영상 사건으로 온 국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텔레그램 사이트를 이용한 미성년자 성학대를 촬영하고 이를 팔고 유포한 조주빈이다. 이를 이용하고 또 스스로 공범이 된 가담자가 몇 만에 이르런다.
기사에 따르면 조주빈 일당은 고액의 임금을 준다고 청소년들 및 여성들을 유인하여 모은 뒤 신상 정보를 강압적으로 탈취한 뒤 이들에게 옷을 벗기고 텔레그램 게시판에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온갖 가학적인 일을 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심지어는 나체의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칼로 몸의 일부를 베라는 등의 엽기적인 행동을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다가 구독자들이 배신하거나 신고하지 못하도록 구독자들 역시 범죄에 가담하게 했고 구독자들은 조직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지인 수치의 영상을 만들어 유포시켰다.
또 피학의 연기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대소변을 먹게 하는 등의 범행도 저질렀다. 이들의 범행은 뜻밖에도 음란물 취재를 비밀리에 하던 두 여자 대학생에 의해서 알려졌다. 이들은 박사방의 회원인척 하고 계속 영상을 모니터링했고 결국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SNS에서 조건 만남이나 스폰 알바를 구하던 여성들이었다. 박사는 트위터 등에 고액 알바 모집 글을 올려 신상 정보를 먼저 수집한 뒤, 본 알바가 조건만남임을 가장하고 이들에게 주민등록증 사진, 계좌번호, 연락처를 요구했다. 이렇게 얻은 개인정보는 성착취물을 유포할 때 생년월일, 집 주소, 전화번호 등 피해 여성들의 신상을 함께 공개하는 데 사용되었다. 피해 여성의 더 세부적인 신원정보를 캐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활동하는 사회복무요원도 매수했다.
이후 박사는 '폭스밤'이라는 이름의 허위 고객 계정을 만들고 해당 계정과 피해자를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으로 연결시킨다. 고객은 성적 행위를 하는 사진과 영상을 요구한다. 새끼손가락을 펴고 찍은 얼굴 사진도 요구했는데, 이것은 사진과 영상을 유포할 때 피해 여성이 박사의 '노예'임을 알리는 워터마크 역할을 했다. 몸과 얼굴이 같이 나오면 5장, 얼굴이 안 나오면 10장의 사진을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박사는 고객이 통장으로 160만 원을 보냈고, 사진을 보내면 곧바로 피해자의 계좌로 입금시켜주겠다는 말로 회유한다. 피해자는 해당 대화방의 대화 내용이 3초 뒤면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객만 잠깐 보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진을 보냈다.
고객을 가장한 폭스밤 계정은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 쓴 사진, 인증마크로 활용하기 위해 몸 위에 칼로 '노예', '박사' 등의 글씨를 쓰고 나체로 찍은 사진, 나체로 물구나무서기 및 몸 흔들기, 눈을 뒤집고 파르르 떨며 영상을 찍으라는 등 점점 이상한 요구를 했고, 주저할 때마다 박사는 협박을 했다. 신체에 벌레등 이물질을 넣게하거나 촬영이나 변기물을 먹이거나 대소변을 누는 사진을 찍게 하거나 '화장실 배수구를 핥게 하는 등 인간성을 짓밟는 심각한 영상도 있었다. 이후 박사 조주빈은 나체 상태로 잘못했다고 비는 영상을 찍으라고도 강요했다. 피해자가 또 주저하자 조주빈은 미리 얻은 피해자 SNS의 친구 목록을 공개하면서 영상을 보내지 않으면 피해자의 나체 사진이 피해자 친구에게 갈 것이다, 성매매하려고 했다고 가족들에게 알리겠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이름, 연락처, 주소를 다 안다, 집 주소로 직원들을 보내서 죽이겠다 면서 협박한다. (나무위키)
이처럼 조주빈 일당이 흉악한 인간 모독의 범죄를 저지른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황금만능주의 풍조 때문이다. 거기다가 청년 실업이 심해서 취업은 안되니 더욱 인터냇을 이용한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가치관과 도덕에 대한 무시와 타인의 인격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정립할 필요를 느낀다. 현대처럼 물질과 황금이 세상을 지배할 때 필연적으로 욕심으로 인한 폭력과 살인 등의 반사회적인 행위를 피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한번 공부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생활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아서 밝고 건전한 개인과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보면 조주빈 일당이 소녀들을 노예취급하고 손님들은 이를 즐기기 위해서 큰 돈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노예를 부리고 싶은 욕구가 있음이 드러났다. 조주빈은 회원(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소녀들을 학대하고 그를 영상으로 찍어서 다시 자기에게 보내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약점이 있는 아이들은 시키는대로 한다. 또한 조주빈의 일당에는 불과 16세에 불과한 청소년이 '태평양'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태평양원정대'라는 이름의 별도 대화방에서 성 착취 영상 등을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이군은 조씨가 운영했던 '박사방'에서도 운영진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박재현 기자 = 미성년자 등의 성 착취물을 만들어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 조주빈(24·구속)의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조씨 공범들의 추가 혐의 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태스크포스(총괄팀장 유현정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는 7일 오전 닉네임 '태평양' 이모(16) 군을 불러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유포한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군은 중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 '태평양'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태평양원정대'라는 이름의 별도 대화방에서 성 착취 영상 등을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이군은 조씨가 운영했던 '박사방'에서도 운영진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군은 지난달 5일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 음란물제작·반포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이군의 첫 공판기일은 지난달 30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검찰이 조씨와 공모한 범죄 혐의에 대한 추가 기소 가능성을 고려해 기일 연기를 신청하면서 미뤄졌다.
검찰은 이날 오후에는 춘천지법에서 재판을 받는
'켈리' 신모(32)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 신씨는 성 착취 영상 공유방의 시초인 'n번방'을 '갓갓'으로부터 물려받아 재판매해 2천500만원 상당의 이득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으며 지난해 9월 구속됐다. 검찰은 신씨를 상대로 조주빈의 '박사방' 범행에 관여한 부분이 있는지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이런 혼란은 우리 사회가 가치의 혼동 상태(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 윤리는 붕괴되고 새로운 윤리, 가치관은 정립이 안 된 상태에서 발생한다. 조씨 일당은 본래적 가치와 수단적 가치를 모르고 있다.
2. 본론 : 수단적 가치와 본래적 가지
선(善) 혹은 가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자체를 위하여 좋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을 위해서 좋은 것이 있다. 달리 말해서 “본래적인 가치” (intrinsic good)가 있는가 하면 “수단적인 가치” (instrumental good)가 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목적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은 결혼도 하고 가정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이 바로 본래적인 가치이며 최종적인 가치이고 “자기충족적 가치” (self-sufficient value) 이다. 이에 비해서 다른 가치 즉 좋은 성적, 좋은 대학 등은 모두 행복이라는 목표에 봉사는 수단적 가치이다.
따라서 “행복은 어떤 최종적인 것이고 자기-충족적(=자족적)인 것이며 모든 행위의 끝(end)이다”. 이 끝(end)는 달리 말해 목표(goal) 혹은 목적이라고도 한다. 또한 행복은 최고선(最高善)이다.
행복이 최고선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행복이란 어떤 즐거운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또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국가 등으로 행복이 형용사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행복(eudaimonia)이란 happiness 보다는 더 정확히 living-well 로 번역된다. 즉 행복은 잘 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시해야 할 목적이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거창한 질문에 앞서 현실적으로 어디에서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식, 쾌락, 부, 그리고 명성(=인기)를 추구하는 것을 본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하루 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민중들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또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목적은 행복이요 잘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종교인들은 신적 소명(godly calling)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답도 행복과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 소명을 다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쾌락, 부, 명성 등) 각각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고 선(the chief good) 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려면, 행동은 자급자족하고 최종적이어야 하며, "그 자체로 항상 바람직하며(desirable)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7a30-34)
조주빈 일당은 이런 최고선 개념을 돈과 인기로 바꾸었다. 조주빈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사회 봉사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유명인과의 친분을 자주 언급했다. 예를 들어 자기가 JTBC 사장인 손석희씨와 친분이 두텁다고 자랑했다. 즉 그는 명예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 것이다.
사람들의 불행은 왕왕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그 하위 가치인 쾌락이나 돈 혹은 명예와 동일시함으로서 발생한다.
이를 보면 요즘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원인이 행복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즉 돈이나 쾌락 자체를 행복과 동일시 한 결과 “돈만 벌면된다” 혹은 “돈이면 된다”는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또한 조현아 땅콩회항 사건에서 보여지는 재벌가 사람들의 안하무인적인 행위나 재벌 2~3세들의 마약 투입 사건을 보면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혼동되어 있거나 아니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행복과 외적인 조건
“행복은 탁월함(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덕(탁월함)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이 또한 필요하다고 한다. 즉 친구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자녀도 잘 되어야 한다. 물론 재물, 건강 심지어는 좋은 출생까지 필요하다. 출생은 아마도 당시 희랍 사회적 여건을 반영한 것이다. 즉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 탁월한 덕을 연마하거나 행복할 수는 없다.
즉 행복은 유덕한 영혼의 활동일 뿐 아니라 그 활동을 하기위한 여건도 필요하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가치(external goods라고 규정한다.
이런 면, 즉 행복이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는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행복(happiness)을 행운(fortune)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 관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다른 관점은 “행복을 덕(virtue)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지만 그는 외적인 가치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은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라는 말도 한다. 즉 덕의 연마는 학습, 훈련이나 체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외부적 여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절충적이다. 즉 최고선으로서의 “행복” 개념은 잘 정립이 되었지만 문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 ① 주관적인 노력 ② 객관적인 여건 둘 다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뒤에 오는 금욕주의 학파(스토아 철학)이나 도덕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엄격주의와도(rigorism)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신적인 도움 내에서 인간이 최고의 탁월함을 연마, 실천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상이다. 실은 이게 또한 필자의 관점이기도 하다.
◉ 실천적인 덕론 – 중용(中庸)
행복을 구성하는 핵심인자는 덕 또는 탁월함이다. 따라서 행복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덕(virtue) 또는 탁월함(arete)이란 무엇이며 또 탁월함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적인 탁월함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탁월함이다.
지적인 탁월함이란 유전과 교육을 통해 생겨나며, 도덕적인 탁월함은 실천과 습관에 의해 얻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천학문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즉 윤리학의 목적은 “아는 것” (knowing)이 목적이 아니라 “하는 것” (doing) 이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함을(doing) 통해 됨을(becoming)을 이루는 것이 윤리학의 목적이다. 윤리(ethics)라는 희랍어 자체가 습관(habit)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따르면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꾸준한 덕의 실천을 통해서 유덕한 품성이 개발되고 또 거꾸로 유덕한 품성은 덕을 산출한다, 즉 유덕한 행동을 낳는다.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이는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덕(moral virtue)는 타고난,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과 습관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사실이다. 본성적(by nature)란 “무거운 것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와 같이 아무런 노력없이도 원래 그런 성질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도덕적인 덕성은 타고난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본성을 연마하여 본래와는 달리 만들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성을 가능태(possibility)와 현실태(actuality)라는 그의 형이상학적 범주를 통해서 풀이한다. 즉 태어날 때 인간의 도덕성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후천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불완전한 도덕성이 극복이 될 때 비로소 도덕적인 덕(moral virtue)는 형성이 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착하고 온순하게 보여도 도덕적이라 할 수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올바른 습관을 키워주는 학문이다. 그리고 습관은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있다. 따라서 (좋은) 습관의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경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방탕함(낭비)와 인색함 혹은 만용과 비겁함 등이다. 현대적으로 볼 때는 내향성과 외향성 등도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인간의 영혼 혹은 마음 가운데 이런 두 가지 대립적인 특성들이 있다.
이것이 이런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theory of virtue)로서 “덕은 양극단의 중용(mean)이다” 라는 것이다.
도덕적, 윤리적인 덕(德) 혹은 탁월함은 인간의 영혼이 중용의 원칙에 일치할 때 얻어 진다. 예들 들어 어떤 사람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이 위험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는 중용, 즉 용감함이라는 탁월함의 상태에 있지 않다. 즉 용감이란 덕은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간이다.
다시 말해서 극단은 모두 악이란 것이고 극단적인 악을 피하여 양자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선이요, 덕이다.
중용의 상태란 적절한 정도로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이며, 바로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용감하다’라고 부른다. 이런 중용의 상태는 산술적 중간이라기보다는 기하학적 중간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시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중간지점’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용의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이는 무슨 공식이나 획일적인 규칙으로 파악될 수 없다. 가령 불이 났을 때 소방수가 어떤 정도까지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면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양극단을 피하고 중용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이를 실천적인 지혜라고 한다.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공동체에서의 올바른 공적 행동과 실천을 위해 꼭 필요한 지혜이다.
3. 결론 : 가치 혼동 시대의 윤리 교육
위의 중용 개념에서 보듯이 덕(德)이란 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습관에 의해서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윤리학의 목표가 무엇ㅇ 옳은 것인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데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인성교육 혹은 윤리교육의 현실을 되돌아 본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 나라 교육은 완전히 입시위주의 학벌주의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윤리 교과서를 보면 상당히 복잡한 개념들과 각종 이론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론적 수준에서 보면 한국의 도덕 교과서는 거의 대학 수준의 지식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실천적 학문의 본질을 모르고 오직 시험과 입시를 지향해서 만들어 진 것들이다.
도덕의 목적이 아는 것이(knowing) 아니라 하는 것(doing)을 개선시키는데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앞으로의 교육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입시위주의의 교육, 학벌주의 교육을 지양(止揚)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조주빈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