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주 주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김해에 다녀왔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김해에 갔다오면 가지고 있는 돈이 '제로'가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이 아이들을 보고 싶어하시고
예배도 드려야 했기에 김해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경산에서 국도로 청도까지 갔다가 청도에서 고속도로를 올려서 김해까지 갔는데 사도 도마가 이 길을 따라서 경산에서
김해로 오고 갔다는 것에 많은 감동을 받았고 계곡을 따라난 국도가 청도에 가까이 와서는 낮은 산을 하나 넘었는데 산을
넘자 말자 빨간 벽돌로 지은 제법 큰 예배당이 눈에 들어 왔는데 그곳은 청도 시내에서 떨어진 시골이고 마을도
크지 않았기에 신기하였습니다.
밀양을 거쳐서 김해에 도착하여 집에서 휴식을 가졌다가 김해전도를 나갔습니다.
김해는 1990년에 인구 20만명에 중도시였는데 신도시를 개발하여서 부산,창원보다 땅과 집값이 저렴하고 출퇴근이
가능한 김해로 주변 지역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서 지금은 인구 50만명에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집을 나와서 삼방동,어방동,내외동,김해시내,장유등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을 다니며 차량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오래전에 이곳이 기독교 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저에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김해 시내에서 복음을 전할때는 주말이라 여전히 많은 외국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는 영어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어실력이 좋지 않은 것도 적용하였지만 그 사람들도 어느정도 한국어를 알기 때문에
영어가 안되면 한국어로 복음을 전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해시내를 지나서 예전에 살았던 장유로 가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어느 장소에서 신호를 받으며 말씀을 전하다가
환기를 시키려고 썬루프를 열었는데 위에서 여러 남자학생들의 아멘.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위쪽을 쳐다보니깐 빌딩 2층에 교회가 보이고 창문이 열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멘. 이라는 소리가 최전방에서 수많은 적군들과 싸우는 군사에게 보내는 응원가로 들려서 많은 감동과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는 성도들의 기도와 응원으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김해전도를 하면서 오래전에 이곳에서 사도 도마가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에 많은 자부심과 감동을 받았고 그런 곳에서
마지막 때에 다시 복음을 전할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에 의하면 김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해군 고현면에는 '도마리'라는 지명과 도마초등학교가 있는데 영주시에
도마 석상의 도마의 이름이 글자로 새겨졌다면 사도 도마가 머물렀던 김해와 가까운 남해에 지명으로 도마의 이름이
남겨져 있습니다.
서기 70년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티투스의 군대에 패하여 예루살렘의 석공이 이탈리아로 잡혀가서 만든 건축물이
이탈리아 콜로세움입니다. 유럽 전도여행 때에 로마에 갔다가 콜로세움을 보았는데 도저히 그 시대에 그런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마리 인근에 '정태성'이라는 성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대국산성'이 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석공은
세계 최 일류의 석공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사도 도마가 대국산성을 쌓는 일에 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사도 도마가
지도하여 쌓은 성이 경북 청도군 화양읍의 읍성과 경남 김해시에서 한눈에 보이는 분산성이 있는데 분산성은 2000년
부터 복원을 하여서 위용을 들어 내었지만 대국산성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또한 저의 어머니의 고향은 김해 평야에 위치하는 '중리'라는 마을인데 그 마을 입구 주변의 지명은 '평강'입니다.
그래서 김해평야를 달리는 대저동에는 '평강역'도 있습니다. 예전에 그곳을 지날 때마다 평강이라는 말이 낯설지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지명도 기독교 국가였던 가야국에서 만들어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중리에는 예전에 다녔던 교회 사모님도 그곳 출신인데 남편 목사님은 지금 김해에서 대형교회와 한국에서 손꼽히는
노인 대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둘째 매형도 같은 마을 사람인데 사돈 어르신이 김해 평야에 땅이 많아서
농사를 짓고 있고 누나가 결혼을 하고 그곳에 땅을 팔았는지 아파트를 장만해 주었는데 매형의 실수로 집을 날리고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땅을 팔아서 매형과 누나가 새집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 소위 김해 평야의 땅부자입니다. 그런데 김해평야는 서기 48년 허왕후가 인도에서 시집올 당시에는 낙동강 하구이자 푸른 바다였고 현재의
김해 국제공항 지역과 을숙도 까지의 김해평야는 너비 12km 길이 20km의 김해 만이었습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되자 다른 나라보다 가라국은 뛰어난 철기를 생산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도 도마가 가져온 철의 기술 때문이였고 철을 생산하여 국제적으로 수출하였던 4세경에는 낙동강 상류의 나무가 베어지고 농경지가 넓게 개간
되면서 엄청난 토사가 내려왔고 철기 문화의 발달은 낙동강 유역 일대에 큰 변화를 주어 농업 생산은 증가하고 이구가
많아지고 낙동강 상류지역은 논밭을 많이 개간하였는데 이때의 흙이 홍수 때 떠내려와 김해만을 메우고 그러한
충적토는 김해평야가 되었으며 김해평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해평야가 원래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김해,부산 대부분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해에서 경산으로 가기전에 부모님은 먹을 음식과 아이들 옷을 사라고 돈을 조금 주시고 교통비도 주셨는데 부모님께
용돈은 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연로하신 두분께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연세가 많고 몸도 불편하신 두분이 아직까지
일을 하고 계셔서 자식 된 도리로서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그나마 누나들이 부모님의 생활비를 보태어 주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부모님은 그 생활비를 모아서 자신들은 쓰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저를 도와주었기에
더욱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 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사랑에는 못 미치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경산으로 올라 오는 길에 신실한 동역자 분께서 후원을 조금 해주셨는데 형제님께서 보내주신 돈과
아이들 옷을 사라고 받은 돈으로 일단은 주유비로 사용하고 나중에 형편이 되면 아이들 옷을 사주면 좋겠습니다.
정말 저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거의 바닥이 되어서 당장 내일 기름값도 없을 때에
이렇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사랑합니다.
가장 위대한 고백으로 일컫는 성경 구절과 '사도 도마 성지순례'에서 발체한 내용을 아래에 올리며
김해 전도일기를 마칩니다. 할렐루야!
"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 요 20:28 -
한국에는 불교보다 기독교(基督敎)가 먼저 들어
왔습니다.
서기 42년 한국의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습니다.
➣그 후 서기 372년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한국에는 불교보다 기독교가 330년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락국기에서 확인됩니다. 가락국기는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의 땅을 차지하면서 시작된 가야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인데 금관주지사라는 김해시장 쯤 되는 사람이 기록하였습니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한 가야국의 초대왕인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2일을 지난 음력 3월 15일 왕이 되었습니다.
음력으로 3월 15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명절날입니다. 이날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가 이끌고 나온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라는 명절날입니다. 유월절이라는 말은 재앙이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음력 3월 15일 날에 희생양을 잡아 죽이며 양의 피를 문에 발랐을 때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희생양의 의미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성 금요일이라 하는데 음력 3월 15일입니다.
가야국이 유월절 성 금요일인 음력 3월15일에 세워졌다는 것은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2009년 음력 3월 15일은 양력으로 4월 10일인데 성금요일과 꼭 같은 날입니다.
임금이 된 김수로왕은 총각왕으로 6년을 기다린 후 예수님을 믿는 인도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가락국기의 기록에 의하면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 있던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 왕후는 서기 48년 음력 5월 출발하여 긴 항해 끝에 음력 7월 27일 경남 김해에 도착하였습니다.
➣허 왕후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사실이 가락국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도 김해 지역에 가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 왕후가 시집올 때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이 현재 김해의 허 왕후 묘 앞에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파사석탑 부분에서 일연스님은 이 파사석탑이 들어온 허 왕후 시대에는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가정해보면 실제로 불교가 들어온 서기 372년부터의 불교전래의 역사가 거짓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장유사에 내려오는 전설을 가지고 불교가 허 왕후시대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락국기에는 분명히 가야국의 왕후사는 서기 452년, 그리고 장유사는 그 후 500년 뒤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야시대에 불교가 들어왔다면 가야시대의 유물에서 부처님의 석상이 나와야 하는데 불상이 없습니다.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흩어진 히브리인인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부모 신앙은 무엇인가?
가락국기에서 김수로왕은「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하여(朕生而頗聖)」라고 하여 김수로왕의 부모가 세계에 흩어진 히브리인 중의 한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인 중 유다족속인 솔로몬 왕은 이집트에서 말을 떼로 사왔으며(왕상10:29) 당시의 무역업자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또 허왕후도 그 아버지 왕의 말을 인용하여 말할 때에「상제(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귀 언저리에 사라지지 않았으니 너는 이제 곧 어버이를 하직하고 저곳으로 향하여 떠날지어다」(上帝之言 其猶在耳 儞於此以 忽辭親 向彼乎往矣)라고 하여 부모가 흩어진 히브리인일 가능성이 있다.
김수로왕이 김해의 토착민인가 아니면 외래인인가 추정할 때 대부분 외래인으로 보고 있다. 또 기마민족의 후예로 보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사도도마의 이야기, 정학봉 지음)김수로왕은 기마 민족으로서 나라를 세울 뜻을 가지고 탁월한 무예실력과 재력을 가졌으나 토착민에게 해결해 주어야 할 군사력과 건축 그리고 건강 문제를 풀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었다.
김수로왕은 김해에 도착하여 토착민인 구간과 주민에게 황금 6개를 선사한다. 이때는 서기 42년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왕성하게 선교한 시기이다. 사도 도마는 인도를 거쳐 한반도의 김해지역에 도착하여서 김수로왕을 만나 군사력 증강으로는 철기생산을 지도하고 건축으로는 인도에서 왕궁을 건축한 경험이 있어 김수로왕의 왕궁건축을 도울 수 있었으며(참고문헌: 도마행전) 또한 김수로왕과 인도 공주와 국제결혼을 통하여 인도의 차를 들여와서 주민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에 김수로왕은 용기를 얻어서 김해에 가락국이라고도 하는 가야국을 세웠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전도하기를 원칙적으로 원하셨지만 사도시대의 전도법으로써 사도 도마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의 전도보다는 흩어진 히브리인을 전도하는 것을 훈련받았으며(마10:2-6)실크로드의 땅 끝(한국)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도 도마와 김수로왕과의 만남은 김수로왕이 흩어진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마민족의 대표되는 스구디아(스키타이)인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대에 사도 안드레는 스구디아인에게 가서 전도하였고 사도 바울은 스구디아인의 교인을 만났다(골3:11). 따라서 김수로왕은 스구디아인 중의 흩어진 히브리인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김수로왕과 함께 했던 6가야의 왕이 되었던 일행 중에는 소호 김천씨(참고문헌: 가야시대에 보이는 기독교 흔적, 김도윤 지음) 가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족보는 좀 더 분명하도록 연구 자료가 있어야 하겠으나 가락국기에 기록된 김수로왕의 신앙 형태를 보아서 김수로왕은 흩어진 히브리인의 신앙을 가졌다가 복음을 받았다.
일연 스님은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부분에서 김수로왕의 가야국 건국시기에는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기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고구려에 서기372년, 백제 서기 418년, 신라 528년에 들어왔었다. 서기 48년에 인도에서 가야국의 김수로왕에게 시집 온 허왕후와 불교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가락국기에서는 왕후사가 지어진 때는 서기 452년이며 장유사가 지어진 때는 그 후 500년 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변역한 강무학씨도 가락국이 설 때는 아직 불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교에 관련된 설화나 전설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허왕후의 아버지는 인도 아요오디아에서 왕이었다. 흩어진 히브리인으로서 훌(출17:10-12, 31:2-4)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참고문헌: 다도, 장은자교수 박사학위 논문)
사도 도마는 서기 41년 7월(음)에 한반도 김해에 도착하여 흩어진 히브리인인 김수로왕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가야국 건국을 돕다가 서기 47년 8월(음)에 인도에 도착하였고 흩어진 히브리인인 허왕후 왕족에게 총각 왕으로 허왕후를 6년을 기다린 김수로왕을 소개하였을 것이다. 허왕후는 시집오면서 차 씨를 가져왔다.
김해에 대엽종 차의 군락지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허왕후 시대의 다기가 남아있어서 허왕후가 인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것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었다.(참고자료: 도마박물관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