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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여(北夫餘)의 건국 >>
#1.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는 그의 선조가 고리국(고離國) 사람으로 47대 고열가 단군 57년 (BC 239)에 웅심산(熊心山 : 현재의 舒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현재의 농안)을 점거해 북부여를 세우니 고열가 단군이 BC238 년에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현재의 하르빈)로 들어갔다.
#2. 이에 진조선은 5가(五加)가 6년 동안 공치하다가 해모수가 번조선(番朝鮮)의 왕인 기비(箕丕)와 결탁하여 BC 232년에 진조선 (眞朝鮮)을 멸망시켰다.
#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고구려 비기에 보면 900년에 미치지 못하여 80대장(당의 이적의 나이)이 있어 이를 멸한다"고 하였는데 이때(AD 668)에서 900년을 거꾸로 계산하면 BC 232년이 되는데 이 해는 북부여가 진조선을 멸망시킨 해이다.
#4.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를 합하여 고구려의 건국년대로 보았다. 고주몽(高朱蒙)이, 해모수 → 고진(해모수의 둘째아들) → 고모수(고진의 손자) → 고주몽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가졌으며 동부여에서 탈출, 졸본부여로 와 부마가 되어 그 통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창건하였기 때문이다.
<< 동호(東胡)와 고리국(고離國) >>
#1. 고리국은 서요하 상류(현재의 임동, 임서지역)에 있던 나라로 색리(索離), 탁리(탁離), 고리(藁離)등으로 불리었다.
#2. 동호(東胡)란 흉노와 번조선 사이에 있던 나라로 번조선의 북쪽에 있었기에 북호(北胡)라고 불리워졌다.
#3. 단군세기에 보면 "BC 350년에 북호가 조공을 하고 번조선과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공격했고, BC 298년에 조공을 했으며, BC 248년에 북막이 와서 같이 연나라를치자고 하나 거절하자 원망하고 조공을 하지 않았으며, BC 229년에는 북부여를 공격해 왔다".
#4. 이러한 북호(또는 동호)는 BC 206년에 흉노(匈奴)에 멸망당한 이후 그 활동이 나타나지 않고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 상곡(上谷)의 동쪽을 차지하여 예맥조선 (번조선)과 접하게 된다.<주:BC 195년에 한에서 흉노로 망명한 노관을 동호노왕 (東胡盧王)에 봉한 것을 보면 북부여가 고리국지방을 회복한 BC 115년까지 흉노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이들의 활동 무대를 보면 동일한 지역이고 동일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고리국=북호=동호가 된다.
#6. 북부여가 위만조선과의 대치상태에서 고진(高辰)을 고리군왕(藁離郡王)에 봉한 것을 보면 북부여가 위만조선의 북쪽인 서요하 상류지역을 다시 회복한 것 같다.
#7. 고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에 봉해진 것을 보면 고리란 원시 고구려족으로 고려(고구려)라는 명칭이 여기서 나왔으며 고대에는 고이(高夷)라고 불렀고, 대수(大水 : 압록강)에 살던 대수맥(고구려)에 대해 소수(小水:서요하 상류의 지류)에 살던 소수맥이 바로 고리국이다.
#8. 또 이들을 고구려와 분리해 구려(句麗)라고도 불렀는데 BC 107년에 요하 서쪽 (서)옥저 지역에 설치되었던 현도군이 이맥(夷貊) (졸본부여)의 공격을 받아 구려(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구려가 바로 고리국이 있던 곳이다.
#9.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고리=동호=북호=구려=고이=원시고구려이다.
③ 【부여사】삼한(三韓), 낙랑국(樂浪國)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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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三韓), 낙랑국(樂浪國)의 건국 >>
#1.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이 그를 저격하나 실패한 후 BC 209년에 진숭의 난이 일어나 혼란해지자 연(燕), 제(薺),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번조선(番朝鮮)으로 망명해 와 이들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군을 파견해 감독하게 하였다.
#2. 이 당시 진(秦)나라는 전국시대의 연(燕), 조(趙),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을 단시간에 연결, 보수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는데 그 동쪽 끝은 산해관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으로 진시황과 호해(진의 2대황제)가 다녀갔으며 이곳을 요동(遼東)으로 표기하고 있다.
#3. 이때 진나라는 장성밖에 요동외요(遼東外邀)를 설치, 이곳과 번조선 사이에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즉 상하운장은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와 육율하(六율河) 사이로 지금도 그곳에는 황지(荒地:유중 부근)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당시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중전소동하이다.
#4. BC 206년 진(秦)을 멸망시킨 항우는 전국에 16명의 왕을 봉했다. 그 중에 한광을 요동왕(遼東王:도읍은 무종), 장다를 연왕 <燕王 : 도읍을 계(계)>에 봉했는데 후에 장다가 한광을 멸하고 한(漢)나라가 BC 202년에 장다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 노관(盧관)을 연왕(燕王)에 봉했다.
#5. 이로써 한나라는 요동고새(遼東故塞:산해관)로 경계를 삼았다. 이 당시의 패수는 난하이다.
#6. BC 195년에 한의 연왕인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그의 부인인 위만(衛滿)이 새(塞:산해관)→패수<浿水:진나라 당시의 패수였던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상하운장 <중전소동사하와 육율하(六율河) 사이>→왕검성<번조선의 수도인 광녕(廣寧)부근>으로 이동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그를 중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둔 상하운장에 봉하였다.
#7.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 짐에 위협을 느낀 최숭(崔崇)은 이 해 겨울에 낙랑(樂郞)으로부터 재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막조선(莫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현재의 평양(平壤)>에 이르러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
#8. 이 당시 이곳에는 진조선이 BC 238년에 망한 이후 막조선이 쇠약해져 그 일부는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고 잔류세력은 낙랑국에 흡수된 것 같다.
#9. 북부여 제 2세 모수리 원년(BC 194)에는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을 멸망시키자 그 왕 기준(箕準)은 바다로 달아나고 상장(上將)인 탁(卓)이 그 무리들을 이끌고 중마한(中馬韓)을 세웠으며 변한, 진한 역시 각각 그 무리로써 100리에 봉함을 받고 도읍을 정하였는데 모두 마한의 명령을 들었으며 세세로 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0. 한편 동사년표(東史年表)에는 기준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파하고 금마군(익산)에 도읍을 정한 후 죽자 그 아들인 탁(卓)이 BC 193년에 마한의 시조인 무강왕(武康王)이 되었다고 한다.
#11. 이것을 보면 번조선이 위만에게 멸망당한 후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동, 마한을 세우고 만주와 요동에서 이동해 온 진한(진조선의 유민), 변한(번조선의 유민)을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다.
<< 위만조선과 북부여(北夫餘)의 경계 >>
#1.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漢)의 요동태수를 꾀어 재물과 군사를 얻어 그의 동쪽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쳐서 얻어 그 땅이 수천리가 되었다.
#2. 이에 대비해 북부여(北夫餘)에서는 BC 193년에 평양(현재의 해성)<주:신채호, 조선상고사>에 성책을 쌓았고 BC 192년에는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여 왕제인 고진(해모수의 둘째아들)으로 지키게 하였으며 BC128년에는 남려성(南閭城)에서 위만 조선을 파하고 BC 120년에는 우거(위만의 손자)를 치다가 불리해져 서압록(西鴨錄:현재의 요하)을 지키고 성책을 세워 방비했다.
#3. BC 118년 침략해 와 아군이 대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 땅을 뺏았겼으며 BC 117년에는 해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석달이 지나도록 이기지 못하였고 BC 115년에는 정예 5천으로 해성을 격파한 후 추격해 살수(薩水)에 이르러 구려하(九黎河)의 동쪽이 모두 항복해 왔다.
#4. BC 114년에는 좌원(坐原:태자하의 상류)에 목책을 설치하고 남려(南閭)에 군대를 배치해 방비하였다.
#5. 이들의 전투지역을 보면 해성(海城)을 중심으로 한 서압록(현재의 요하)과 구려하(현재의 서요하 상류의 신개하로 추정됨), 살 수(?), 남려성(?)등으로 서요하와 요하의 중하류가 위만과 북부여의 경계선이였음을 알 수 있다.
#6. 초기에는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동쪽에 있는 진번과 임둔을 차지해 요하까지 진출하고 다시 해성 부근을 점령하나 BC 115년에 북부여가 해성을 다시 찾고 서요하 상류지역을 점령해 고진(고주몽의 아버지)을 고리군왕(고離郡王)에 봉했다.
#7. 위략에 "위만조선이 망하기 전에 역계경이 2천호를 이끌고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당시 진국은 진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이며 이들이 망명한 사실이 BC 115년 북부여가 위만조선(우거)에게 대승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 같다.
#8. 이와 아울러 살수와 남려성에 대하여 고찰해 보면 중국의 사서에서는 "예맥군장 남려(南閭)가 BC 128년에 한(漢)나라로 투항하므로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그 지역은 천친부근이라고 한다.
#9. 그러나 당시 한나라는 만리장성 안쪽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위만조선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천진(天津) 부근에 예맥국(남려)<주:水經注의 濁章水조에 淸潭水가 濊水이고, 章武縣이 옛날의 濊邑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BC 3-7세기에 이곳에 濊族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李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 敎保文庫, 1984. 9)>이 있을 수 있으며 BC 128년 북부여가 남려성(南閭城)에서 위만조선을 격파한 것을 보면 예맥군장 남려는 위만조선과 북부여 사이에 있다가 북부여로 투항한 것이다.
#10. 부여는 선세 이래로 망한 적이 없다. 부여인 중에는 스스로 부여로 망명하였다고 하는데 남려가 내속하였으므로 부여의 예 (夫餘之濊)라 하며 예성(濊城)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보면 남려는 위만조선에서 한(漢)으로 투항한 것이 아니라 북부여로 투항한 것으로 북부여 BC 115년에 살수까지 우거를 격파하고 다음 해에 남려성(南閭城)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을 보면 이들이 요하의 서쪽에 위만조선과 북부여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11. 이러한 예맥군장 남려는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후 다시 동쪽에 있던 진번, 임둔을 쳐서 현재의 요하(서압록)에 이르렀던 것을 보면 그 지역이 서로 같은 지역으로 위만에게 최후로 복속되었고 북부여와 연접해 있던 이 지역의 저항이 가장 완강했을 것이다. 즉 우거 당시 역계강이 동쪽에 있는 진국(북부여)로 투항한 것도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다.
<< 졸본부여(卒本夫餘)의 건국 >>
#1. BC 108년에 한(漢)의 무제(武帝)는 우거(위만의 손자)를 쳐서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고자 많은 군사로 사방으로 침입해 왔다. 이 당시 한의 육군은 요동(遼東:산해관)에서 출발하였고 해군은 제(齊:산동반도)로부터 북쪽으로 발해(渤海)를 건너 공격해 왔다.
#2. 여기에 참전한 한의 장수들 중에 순체, 공손수, 위산은 사형당하였고 섭하는 전사하였으며 양복은 폐서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중에는 한 명도 후(侯)에 봉해진자가 없고 우거도 망하였으니 양쪽이 다 패한 전쟁인 것이다.
#3.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우거의 압제하에 있었던 번조선의 유민들로 위만조선의 북쪽에 있던 고리국(고離國)에 근거를 둔 동명(東明 : 고두막)이 한이 우거를 멸하자 의병을 일으켜 그 유민을모아 한의 세력을 격퇴시킨 것이다.
#4. 위만조선이 멸망당할 때 한나라로 투항한 자들은 후(侯)로 봉해졌다. 그 지역은 연(燕:하북성), 제(齊:산동성)에 있었고, 그들 중 평주후(平州侯:협), 온양후(溫陽侯:최), 추저후(萩저侯:음)등은 죽은 후에 후사가 없어 없어졌으며 획정후(획淸侯:삼)는 BC 99년에 조선의 망노를 감추어 주었다가 감옥에 갇혀 죽었고 기후(幾侯:장)는 BC105년 조선과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5. 현 사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이 망한 후에도 이들과 내통한 조선이 엄존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동명 고두막한이 BC 108년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 졸본부여는 한나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동부여와 졸본부여 >>
▣ 동명과 주몽은 별개의 인물
#1.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의 세력을 축출한 동명(東明) 고두막은 현재의 요하를 건너 졸본(卒本:환인지역)에 BC 108년에 졸본부여를 건국한 후 BC 86년 북부여(北夫餘)를 멸망시켰다.
#2. 현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자를 동명(東明)으로 보고 있다. 그는 주몽(朱蒙), 추몽(鄒蒙), 추모(鄒牟), 중해(衆解), 도모(都慕), 등으로 불리고 있어 동명과는 별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3. 또 동명이 빛나는 왕업을 열었고 주몽(朱蒙)이 그 여파를 계승하였다.([해동역사])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北夫餘)를 계승하여 흥하였고 졸본주에 도읍하여 졸본부여라 하였으니 고구려의 시조이다.([삼국유사])
#4. 고구려는 동명으로부터 나왔는데 동명은 고리왕(고離王)의 아들이다.([양서])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부여는 고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고리(고離)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 역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만주원류고])
#5. 삼국유사 동부여조에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解夫婁:북부여 마지막왕의 동생)가 동쪽으로 옮긴 이유를 동명이 장차 흥할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 동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6. 동명 고두막(高豆莫)이 졸본부여를 세운 후 BC 87년에 북부여를 위협, 고우루(高于婁 :4대)가 근심으로 병사하고 그 동생인 해부루가 섰으나 그 다음해에 북부여는 졸본부여에게 항복하였다.
#7. 이에 해부루는 국상인 아난불의 건의에 따라 통하(通河)의 물가인 가섭원(迦葉原 : 현재 의란 부근)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우고 그 유민을 모았다.
#8. 이러한 동부여를 훈춘(훈春)으로 보고 있는데 고구려가 AD 22년에 동부여를 멸망시키자 그 한 부류가 훈춘지역으로 달아나 그 곳에 갈사국(曷思國)을 세운 사실을 보면 훈춘에 동부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9. 동부여에서 BC 79년 유화는 주몽을 낳았다.그는 고모수(弗離支)의 아들로, 고모수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의 손자이다.
#10.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BC 59년 엄리대수(淹利大水:송화강)를 건너 졸본부여에 이르러 그 마지막 왕(高無胥)의 딸 서노와 결혼한 후 BC 58년에 그 대통을 이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졸본부여와 한(漢)의 경계
#11. BC 108년 한의 세력을 격퇴하면서 건립된 졸본부여는 BC 106년 5천의 군사로 한과 싸워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 (西安平)에 이르렀다. 이곳이 옛고리국(고離國)의 땅이었다.
#12. BC 87년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에서 한(漢)을 파하고 그 수장을 사로잡았고, BC 86년 서압록(西鴨錄)에서 한나라와 여려차례 싸워 이겼으며, BC 59년에 한나라와 요좌(遼佐:요하의 왼쪽)에서 여러번 싸워 승리하였다.
#13. 여기서 보면 이들의 전투지역이 구려하(서요하 상류의 新開河), 서압록(요하의 중하류), 요하(현재의 대능하)로 초기 한나라 세력은 서요하 상류지역(임동 부근)과 현재의 요하까지 팽창되었으나 BC 106년에는 서요하 상류지역을, BC 59년에는 대능하와 요하 사이를 상실하여 대능하(당시의 요하)에서 졸본부여와 대치하게 되었다.
#14. BC 82년 한이 진번과 임둔군을 파하고 낙랑, 현도군에 통함시킨 후 현도군을 구려(句麗:성요하의 상류)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주:우북평에 속한 土根縣 부근에 현도군의 上殷台縣이 설치된 적이 있다> BC 86년 서압록 전투에서 한이 패하여 대능하까지 후퇴함으로 대능하와 요하 사이에 있던 임둔, 진번, 현도, 낙랑의 일부를 상실하게 되자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 된 것.
#15. BC 75년에는 대능하 서쪽의 요동군 지역에 임시적으로 현도성(玄도城)<주:城이란 郡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설치된 [지점]을 나타낸다.(곽창권, 한국고대사 탐색,일선기획, 1987. 12)>을 설치하게 되었다.
<< 열국출현의 배경 >>
#1. 고조선은 진한이 삼조선(辰國)을 통괄하고 진왕(辰王)으로 단군이라 칭하였고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번한은 번조선을 마한은 막조선을 다스렸는데 3한의 밑에는 각각 5가(五加)가 있었다.
#2. 3한(三韓)의 정치, 경제, 문화ㅊ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 (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주:尹乃玄, 韓國古代史新論, 一志社, 1986. 4>
#3. 단군세기에 나타난 제후들의 국읍을 살펴보면 군(君)이 다스렸던 남국(藍國), 고죽국(孤竹國), 청구국(靑邱國), 구려국(句麗國),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 여국(黎國)등이 있고, 욕살(褥薩)<주:고구려의 지방장관에 褥薩이 있었고, 그 밑에 성주인 處閭近支 혹은 道使가 있었다.(古代篇, [韓國史], 乙酉文化史, 1959. 6)>등이 다스렸던 청해(靑海), 정아(정我), 서옥저(西沃沮), 맥성(貊城), 개사원(蓋斯原), 백민성(白民城), 열양(列陽), 해성(海城)등이 있으며 일반적 기층읍은 예읍(濊邑), 육읍(六邑), 십가지읍(十家之邑), 허락(墟落) 등이다.
#4. 이러한 제후국들은 BC 232년에 진조선이 망하고, BC 86년 북부여가 망하는 가운데 서서히 독립하게 되어 BC 194년 번조선이 망하고, BC 195년에 낙랑국, BC 193년 삼한이 성립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음은 이들에 대한 분포상황이다.
⑧ 【열국시대】동옥저, 남옥저, 북옥저 및 서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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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 및 서옥저 >>
#1. 동옥저는 고구려와 개마대산(개마고원)의 동쪽으로 큰 바다에 연해 있으며 서북으로는 읍루, 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해 있으며, 5천호로 동북으로는 좁고 서남으로는 천여리이다.
#2. 동옥저는 함흥지역에 있다가 AD 56년 고구려에 멸망당했다.
#3. 세형동검시대보다 선해하여 동포(銅泡)가 나타나는 함북의 나진(草島), 무산(虎谷洞), 종성의 유적과 함남의 영흥군에 있는 소라리 토성<주:황기덕, 기원전 5- 기원후 3세기 서북 조선의 문화, 고고민속논문집3> 등이 그 문화를 나타내 주는 것 같다.
#4. 북옥저(北沃沮)는 치구루라고도 부른며 남옥저(南沃沮)와 8백여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읍루와 접해 있었다.
#5. [요사지리지], [대진국본기], [성경통지]에서는 해성(海城)을 남옥저로 보고 있으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장춘(長春)을 북옥저로 보고 있는데 북옥저는 BC 28년에 고구려에 멸망당하였다.
#6. 한편 [단군세기]에는 서옥저(西沃沮)가 나타나 있다. 서옥저는 현재 요하 중류의 서쪽 지역으로 전한(前漢) 때에는 BC 107년에 현도군(玄도郡)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7. 즉 [삼국지] 동옥저조에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고 한 것은 바로 서옥저를 말함으로 현 사학계에서 동옥저로만 보고 있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 낙랑국과 대방국 >>
#1. 낙랑국은 북쪽에 고구려, 동에 예맥, 남에는 마한이 있었는데 [삼국지]에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이 있다}고 함은 낙랑국(樂浪國)이 막조선(莫朝鮮)의 도읍이었던 평양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馬韓 王儉城, 今西京地(帝王韻記) 西京留守官 平壤府 本三朝鮮舊都 (高麗史地理志)>
#2. 번조선이 낙랑(樂浪) 지역에 살던 최숭(崔崇)이 위만의 세력이 강성해져 반란의 기미를 느끼자 재물을 가지고 바다를 통해 평양 (平壤)에 와서 BC 195년에 낙랑국을 건국하였는데 그 마지막 왕이 최리(崔理)인 것을 보면 이들이 최씨 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낙랑국은 북으로 청천강, 남으로 강원도 북부와 황해도 전역, 동으로 함경도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고 백제와 신라의 건국기에 강력한 타격을 주기도 하였으며 현과 태수를 두었던 것 같다.
#4. 그러나 고구려에게 AD 37년에 멸망당하여 5천여 명은 신라로 투항하고 그 잔류세력은 황해도 지역에 있던 대방국으로 이동하였으나 매우 미미한 상태로 있다가 AD 300년에 대방국과 함께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5. 또 이들은 BC 169년에 북부여의 해성에 300석의 양곡을 바쳤는데 당시 이 지역은 위만조선을 방어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6. 북부여와 졸본부여, 고구려가 이어지는 와중에 낙랑국이 해성을 중심으로 한 요동반도 남부를 차지했으며 낙랑국을 멸망시킨 고구려는 살수(薩水:해성 부근의 州南河) 이남을 차지하지 못하였는데 이들은 AD 44년 염사의 소마시<주:왕망 때 진한 (辰韓)의 우거수 염사치가 나오는데, 蓋平과 金州은 옛날 진한의 땅으로 본 것(요사지리지, 성경통지)를 참조하면 요동반도가 전에 辰韓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가 후한(後漢) 광무제의 회유책에 휘말려 이 지역(요동반도)이 낙랑군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동반도 남부에 한의 묘(墓)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7. 현 사학계는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아 평양지역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8. 대방국(帶方國)은 황해도 지역<주:黃海都, 古朝鮮, 馬韓舊地(潛確類書)>에 위치, 이들은 번조선의 대방지역에서 이동해 온 것이며 낙랑국의 비호아래 있었다.
#9. 낙랑국이 망한 후에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엄존해 있었는데 백제의 책계왕(責稽王)이 이들의 부마였다.
#10. AD 286년에 고구려가 대방국을 치자 백제가 도와 위기를 모면했으나 AD 300년에 고구려에 멸망당하여 낙랑국의 잔류세력과 함께 신라로 투항하게 된다.
#11. 고구려와 백제의 첫 충돌은 이들이 멸망당한 후인 AD 369년인 것을 보면 둘사이에 대방국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2. 낙랑국과 대방국의 유적으로는 토성리(평양), 어을동(평남 온천군), 운성리(황해도 은율군), 청산리(황해도 신천군)의 토성(土城)이 있는데 이것은 세형동검이 쓰이던 기원전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원후까지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특히 평양의 토성리 토성에서는 건물터가 남아 있어 이곳이 낙랑국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주:이곳은 패수(대동강)의 남쪽에 있고 얕은 구릉으로 적의 침입이 용이해 사기 조선전에 위만조선 (번조선)의 왕검성이 패수의 동쪽에 있고 물이 깊고 지세가 험하다고 한 사실과 위배되어 낙랑군의 치소로는 볼 수 없다.>
#13. 요녕식 동검이 평남지역에 4곳, 황해도 지역에 1곳으로 이것은 요녕지역(번조선, 진조선)의 문화가 유입된 것이며 그 시기는 BC 4-5세기경으로 막조선 시대의 유물이다.
#14. 요녕식 동검을 본떠서 만든 세형동검이 나타나는데 I, II, III 식으로 나누어 I식은 BC 4세기 말- 3세기 초로 동모, 동과, 다뉴세문경등이 나타나며 II식은 BC 2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로 동부, 동착(銅鑿), 동녕(銅녕), 동복(銅복)과 마구(馬具) 등 수레 장식이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철제품들이 점차 증대되어 갔다. <주:尹武炳, 韓國靑銅器文化硏究, 藝耕産業社, 1987. 3>
#15.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남지역에는 I, II, III식이 계속 나타나고 있고 황해도 지역에는 III식이 나타나고 있어 대방국의 출현이 낙랑국보다 뒤졌음을 알 수 있다.
#16. 평양 정백동의 토광묘에서 발견된 [부조예군(夫組濊君)]의 인장은 번조선 지역에 있던 서옥저의 예군<주: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에 있었음>이 이 시기에 이 지역으로 이동해온 것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서옥저는 남려의 예, 낙랑군의 영동의 예가 있던 지역임을 전술하였다.
#17. 그러므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와 황해도의 문화는 막조선, 낙랑국(대방국), 고구려 및 한인(漢人)포로들의 유물<주:鄭寅普, 朝鮮史硏究 /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 崔棟, 朝鮮上古民族史 / 李裕립, 大倍達民族史>이 혼재되어 있어 앞으로 고고학적인 분류작업이 요망된다.
<< 고구려와 동부여 >>
#1.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남에는 조선(낙랑국), 예맥이 있고 동에는 동옥저, 북에는 부여(동부여)와 접했는데 지방이 2천리이며 3만호이다.
#2. 또 부여는 현도(玄도)의 북쪽 천리에 있는데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는 선비와 접했으며 북에는 약수(弱水)가 있는데 지방이 2천리이며 8만호가 된다.
#3. 이러한 동부여(東夫餘)는 AD 22년 고구려에 멸망당하여 그 왕의 종제가 만여인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여 낙씨(낙氏)의 성을 받고 연나부에 안치되었다가 AD 23-27년 사이에 다시 자립하여 개원(開原)의 서북쪽<주:현도군의 북쪽 천여 리를 말하며 서요하의 중류 이북이다>으로 옮아 갔는데 이들을 현사학계에서는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어 필자는 이들을 망명부여 (낙씨부여, 백량곡부여)로 구분해 부르고자 하며 이들은 AD 49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당한다.
#4. 한편 동부여가 멸망당할 때 왕의 아우는 백여명을 이끌고 갈사수로 가서 AD 22년에 갈사국(曷思國:현재의 琿春)<주:이곳은 (冊城)으로 고구려와 발해(동경 용원부)의 중요 거점이었다>을 세웠으나 AD 68년 에 고구려에 투항한다.
<< 예맥 >>
#1. 예(동예)는 남에 진한을, 북에 고구려, 옥저(동옥저)를, 서에 낙랑(낙랑국)과 접했으며 동쪽은 큰 바다로 2만호이다.
#2. 이러한 동예(東濊)를 현 사학계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을 개마고원<주:현도군에 西蓋馬현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東蓋馬이다>으로 보아 낙랑군(樂浪郡)의 동부지역에 있던 영동(嶺東)의 예(濊:7현)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 단단대령은 의무려산(醫巫閭山)<주:李裕립, 大倍達民族史, 高麗家, 1987. 2>이며 영동의 예는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의 해안지역에 있던 낙랑군으로 AD 30년에 서부 낙랑에서 왕조의 난이 일어났을때 동부 낙랑의 예가 한나라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3. 이러한 예와 구분하여 우리는 강원도 지역에 존재한 예를 동예라고 부르며 이것을 맥국(춘천), 예국(강릉)으로 분리해 보기도 한다.
#4. 춘천지역에서는 번조선 지역의 요동식 동검이 2개나 나와 이 지역의 주민인 예맥족의 요동에서 한반도로의 이동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5. 이들 밖에 요하의 서쪽인 태자하 부근에 있던 양맥(梁貊), 서요하 상류에 있던 소수맥(小水貊:구려), 고구려인 대수맥이 있다.
<< 읍루 >>
#1. 읍루는 부여의 동북 천여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를 임했고 남쪽은 북옥저에 접했으므로 이들은 흑룡강 유역의 만주 동북 연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시대에 따라 이들은 숙식(한), 읍루(위), 말갈(수), 여진(금), 만주(청) 등으로 불리웠으며가장 추운 지방에 살았고 동이족(東夷族) 중에서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낙후되었는데 규원사화에는 이들을 신지씨(神誌氏)의 후예로 보고 있다.
#3. 이들의 후예인 청(淸)나라가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되었고 일제의 식민학자들이 만선 사관으로 이들을 우리의 역사와 분리시켰는데 이것은 만주의 영유권 때문이다. <주:청과 조선은 間島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간도협약(1909년)으로 끝나 이것은 아직도 미해결된 문제로 남아 있다.>
#4. 특히 이들은 발해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중공, 일본, 현 사학계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고 말갈족은 우리와 다른 이민족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읍루(말갈)은 고조선의 후예이며 진조선(眞朝鮮)이 멸망한 후에 등장하는 열국(列國) 중에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5. 고구려가 망한것은 AD 668년이요, 발해의 건국을 AD 699년이라고 볼 때 고구려가 망한지 불과 31년 사이에 만주에서 고구려족은 사라지고 마치 말갈의 7부족이 만주 전체를 뒤덮은 것으로 오도하고 있고 이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6. 그러나 대진국본기에는 발해(大震國)의 건국을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으로 보고 있으며 그 건국자를 고구려의 진국장군 (振國將軍)인 대중상(大仲象)으로 보고 있다.<주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續日本紀)나 삼국유사, 구당서에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삼한 >>
#1. 마한(馬韓)은 북으로 낙랑(낙랑국)에 접했고 남으로 왜(倭)와 접했으며,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어 북으로 예맥과 접했고, 변한(弁韓)은 진한의 남쪽에 있어 남으로 왜와 접했다.
#2. 마한은 54개국이요 진한은 12개국이고, 변한은 12개국인데 이 중 큰 나라는 만여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3. 이들 모두는 옛날의 진국(辰國)이었으며 마한이 제일 커서 진왕(辰王)이 되어 월지국(月支國:익산)에 도읍해 삼한(三韓)을 다스렸다.
#4. 진조선이 망하기 전인 전삼한(前三韓)시기에는 만주지역에 있던 진한(辰韓)이 바로 진왕(辰王)이며 진한, 마한, 번한을 합한 진국(辰國)을 다스렸는데 진조선과 번조선이 망하여 막조선의 유민이 있던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온 후삼한(後三韓) 시기에서는 한반도가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이 바로 진왕이 되어 진국(진한, 마한, 변한의 전체)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주:신채호, 조선상고사>
#5. 마한은 BC 193년에 건국되어 무강왕, 안왕, 혜왕, 명왕, 효왕, 양왕, 원왕, 계왕, 왕학에 이르러 AD 9년에 백제에게 망하였다.
#6.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청동기 유물의 분포상태를 보면 철기를 반출하지 않은 단계의 순수한 청동기 유물의 절대량이 마한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아산만과 금강유역 일대에는 BC 4-3세기 이래 석관묘 계통의 주민들을 주축으로 요녕지방(번조선)문화에 원류를 두는 대전 괴정동계의 청동기문화를 배경 <주 : 대전 괴정동에서 나오는 검정토기는 요녕성 심양의 청동기인 묘에서도 나온다>으로 발달된 정치집단이 성립 대두하고 있다.
#7. 이것은 평양지방(막조선)의 세형동검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막조선이 쇠퇴하고 낙랑국이 성립되는 기간에 남하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8. 한편 BC3-2세기에 동모, 동과와 같은 무기류를 가진 토광묘 중심의 익산(益山)과 청동방울과 같은 의구(儀具)를 가진 옹관묘 계통의 화순(和順)의 청동기는 전국(戰國)청동기와 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이 단계에 이르러서 청동기의 보급이 중남부 각지로 확산된다.
#9. 특히 옹관묘는 요녕지역과 연결되어 있어 이들의 문화가 바다를 통해 이동해 온 것 같다.
#10. BC 2세기 이전의 청동기는 충청, 전라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경상도 지역에서는 BC 2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금속제의 유물의 숫자가 현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그 주된 묘제는 토광묘로 BC 1세기 경에는 경주, 대구, 영천, 김해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주: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1984. 2>
#11. 경상남도 의창 다호리 고분에서 발견된 철기는 AD 2-4세기의 낙랑의 것보다 훨씬 앞선 국내 최고의 것이고 BC 1세기로 추정되는 이 고분에서는 쇠괭이, 쇠따비, 쇠자귀 등 철제 농기구와 쇠창, 쇠검 등 철제무기들이 나와 한반도의 철기 문화가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조작된 한사군의 영향으로 꽃피워졌다는 것이 거짓임이 증명되었고 이 시대에 삼한 지역에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이미 형성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백제, 신라, 가야 >>
#1. 백제(百濟)는 마한의 북부 지역인 한강 유역에 자리 잡고 낙랑과 마한에 조공을 하던 작은 나라로 그의 초기 영역은 북으로 낙랑국(대방국), 동으로 예맥, 남으로 마한이며 서로는 바다였다.
#2. 이들은 졸본부여의 유민으로 고주몽의 아들인 유리가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오자 소서노(召西弩)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BC 32년에 고구려를 떠나 요동반도의 대수(帶水 : 復州河)와 패수(浿水:해성의 어泥河)<주:신채호, 조선상고사>사이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는데 BC 19년에 소서노가 죽고 비류(沸流)가 섰는데 이것이 바로 비류백제인 것이다.
#3. 이에 동생인 온조(溫祚)는 마여, 오간등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BC 18년에 마한의 미추홀에 이르러 한산의 부아악(용인 부근)에 이르러 지형을 살핀 후 한수(漢水:한강) 부근에 도읍을 정하니 하남위례성이요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4. 그 후 비류가 죽자 그 백성들이 백제로 투항해 왔는데 아마 AD 25년에 해성(海城) 부근의 남옥저인들이 백제로 투항해 온 것은 사실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본다.
#5. 또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같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비류백제가 한(요동)과 고구려 사이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6. 백제는 AD 9년에 마한을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7. 신라(新羅)는 부여왕(동부여의 해부루)의 딸 파소가 남편없이 애를 배어 의심을 받자 눈수(嫩水)로 부터 도망하여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로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러 박혁거세(博赫居世)를 낳았다.
#8. 이에 소벌도리(고허촌장)가 데려가 키워 13세가 된 BC 57년에 진한 6부의 왕(거서간)으로 추대하여 서라벌에 도읍하고 사로라 하였는데 진한은 만주에 있던 진조선의 유민이며 동부여 또한 진조선 → 북부여 → 동부여로 이어지는 진한의 왕통이기 때문에 박혁거세를 그들의 왕으로 세운 것이다.
#9. 가야(加羅)는 AD 42년에 김수로에 의해 금관(김해)에 건국되는 데 김수로를 흉노 휴도 왕의 후예로 보기도 하나 필자는 마한의 후예로 보고자 한다.
#10. 왜냐하면 단서대강(檀書大綱)<주:李固善, 心堂全書, 冠文社, 1981. 6>에 보면 AD 9년에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하자 그 왕인 영왕(寧王:學)이 동쪽이 낙동강가로 달아나 가야(加羅)라 칭하고 구비봉 밑에 거하며 가야왕이라고 하고 그 아들 이비가지 (夷毘가之)로 세자를 삼았다.
#11. AD 16년에 영왕이 9간(九干)을 쳐서 그들을 차지했으며 AD 17년에 가야의 영왕이 죽고 이비가지가 섰으나 AD 42년에 가양의 이비가지가 죽자 그의 둘째아들인 뇌실청예(惱室靑裔)가 9간의 추대를 받아 금관에 도읍을 정하고 가락(駕洛)이라하였으며 수로(首露)왕이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형인 뇌실주일(惱室朱日)은 고령에 대가야를 세웠다. <주 : 崔致遠이 지은 釋利貞傳에도 나옴(東事)>
⑫-1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삼국사기를 통한 고찰 1.
목차로
<< 낙랑국(樂浪國)과 대방국(帶方國) >>
#1. 한국 고대사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의 도식화와 더불어 (이들은 같은 지역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 이들 사건의 중심을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고정 시킴으로써 (이병도(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傳英社,1976.3.) 고대사를 왜곡해 왔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있던 낙랑국(樂浪國)과 요동 지역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본문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바로 잡아 보고자 한다.
#2.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이 마치 현재의 평양(平壤)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실제 그는 한(漢)의 군현인 낙랑군, 대방군과 한반도 내에 있었던 낙랑국, 대방국(帶方國)을 뚜렷이 구별하여
#3. 이것을 후세 학자들이 잘못 오인해 왜곡시켜 왔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더욱 조작, 심화되었다.
▣ 신라
#4. 1) 박혁거세 30년 (BC 28), 낙랑인(樂浪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침범하다가 이 지방 사람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노적이 들에 가득함을 보고 말하기를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니 가히 도가 있는 나라라 우리가 가만히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음습하는 것은 도적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랴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5. 2) 박혁거세 38년 (BC 20), 호공을 마한에 보내어 수빙하매... 우리나라는 2성이 일어나심으로부터 인사가 바로 잡히고 천시가 고르고 창름이 충실하고 인민이 경양하여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되...
#6. 3) 남해차차웅 원년 (AD 4), 7월에 낙랑군사가 와서 두어 겹으로 에워쌌다.
#7. 4) 남해차차웅 11년 (AD 14), 낙랑이 우리의 내부가 빈 줄로 알고 와서 급히 금성(金城)을 칠새 밤에 유성이 적진에 떨어졌다.
#8. 5) 유리이사금 13년 (AD 36), 8월에 낙랑이 북변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쳐서 함락하였다.
#9. 6) 유리이사금 14년 (AD 37),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음습하여 멸하매 낙랑사람 오천이 와서 육부로 나누어 살게 되었다.
#10. 7) 유리이사금 17년 (AD 40), 9월에 화려(華麗), 불내(不耐)의 2 현인이 공모 연합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경을 침범하므로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군사로써 곡하(曲河) 서쪽에서 가로막아 이를 깨뜨리니 왕은 기뻐하며 맥국과 호의를 맺었다.
#11. 8) 기림 이사금 3년 (AD 300), 3월에 낙랑과 대방의 두 나라가 귀복하였다.
▣ 고구려
#12. 9) 대무신왕 15년 (AD 32), 4월 왕자 호동이 옥저(동옥저) 지방에 유람하고 있던 차에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출순하여 그를 보고 "군의 얼굴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닌듯하니 혹 북국신왕(北國神王:고구려)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13. 10) 대무신왕 20년 (AD 37), 왕이 낙랑을 침습하여 멸하였다.
▣ 백제
#14. 11) 온조왕 4년 (BC 15), 8월에 사신을 낙랑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15. 12) 온조왕 8년 (BC 11), 7월에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주2:낙랑국의 지방 장관인 태수이다. 가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근자에 사빙을 보내어 우호를 맺었기에 일가(一家)와 같이 여기었는데 지금 우리 강역 가까이 성책을 만드는 것은 혹시 잠식할 계획이 있어서가 아닌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싸워서 승부를 결하자" 고 하였다.
#16. 13) 온조왕 11년 (BC 8),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쳐서 파하고 백여인을 죽이고 혹은 사로잡았다.
#17. 14) 온조왕 11년(BC 8), 7월에 독산과 구천의 두 성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8. 15)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19. 16) 온조왕 17년 (BC 2), 봄에 낙랑이 내침하여 위례성을 불질렀다.
#20. 17) 온조왕 18년 (BC 1),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여 구곡에까지 이르렀으나 대설을 만나 돌아왔다.
#21. 18) 책계왕 즉위년 (AD 286), 대방을 치니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帶方王)의 딸인 보과를 취하고 부인을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르기를 "대방은 우리의 구생의 나라이니 그 청을 응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22. 삼국사기에 나타난 1) - 18) 까지의 기록중에 낙랑국, 대방국이 8)에 낙랑왕 (樂浪王)이 9)에 대방왕(帶方王)이 18)에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왕국(王國) 체제였음을 나타내고 있고 낙랑국의 마지막은 최리(崔理)로 최씨 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23. 더구나 12)에서는 백제(百濟)와 낙랑국이 "同一家"로 같은 조상(고조선)을 가진 일가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 나타난 낙랑태수(樂浪太守)는 낙랑국 변방의 태수로 이들이 군현(郡縣)제도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4. 또, 낙랑군이 멸망(AD 37)한 후인 7)년에 나타난 화려(華麗), 불내(不耐)의 2 현도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데 이들의 지명이 낙랑군 속현이 명칭과 같은 것은 이들이 이동해 온 지역이 그 지역이었고 그 지명들이 이들과 함께 이동해 온 것이로 볼 수 있다.
#25. 왜냐하면 평양지역에서 나타난 "부조예군(夫租穢君)"은 평양지역이 옥저라는 것이 아니고 부조예군이 옥저(西옥저)지역에서 남하한 세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26. 이러한 2개의 현은 낙랑이 멸망한 후 황해도의 대방국(帶方國)지역으로 밀려내려 온, 낙랑국의 잔존세력으로, AD 286과 AD 300년에 걸친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대방국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27. 대방국은 낙랑국이 멸망 당한 이후 백제와의 결혼정책을 통해 고구려에 멸망당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가 직접적인 충돌을 벌이게 된다.
#28. 1)- 18)의 기록들이 한서(漢書), 후한서, 진서(晋書), 자치통감 등의 중국정사에 한 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것이 중국과의 관계가 아닌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⑫-2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삼국사기를 통한 고찰 2.
목차로
<<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
▣ 백제
#1. 19) 고이왕 13년 (AD 246), 8월에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주3: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 (王遵)) 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민을 쳐서 뺏었다.
#2. 20) 책계왕 13년 (AD 298), 9월에 한(漢:낙랑)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 오므로 왕이 나아가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시었다.
#3. 21) 분서왕 7년 (AD 304), 2월에 왕이 몰래 군사를 보내어 낙랑서현(낙랑서현)을 공취하였다.
#4. 22) 분서왕 7년 (AD 304),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시었다.
#5. 23) 개로왕 18년 (AD 472), 사신을 위(魏:북위)에 보내어 글월을 전하여 가로되 "...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弗斯侯) 장사 여래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해도에 배를 띄워 명진으로 길을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기고 정성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내노라.... 게다가 빙족(北燕)의 군사와 군마는 조축의 연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제군(樂浪諸郡)은 수구지심을 품고 있으니 ..." 고 했다.
▣ 고구려
#6. 24) 대무신왕 27년 (AD 44), 9월에 후한(後漢)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쳐 그 땅을 뺏어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에 속하게 되었다.
#7. 25) 민중왕 4년 (AD 47), 10월에 잠지부락의 대가 대승 등의 만여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에 귀부하였다.
#8. 26) 태조대왕 94년 (AD 146),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漢)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침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樂浪郡太守)의 처자를 잡았다.
#9. 27) 동천왕 20년 (AD 246), 8월에 위(魏)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시켜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玄도)를 나와 침략해 오매......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丸都城)을 쳐서 함락시키자...... 왕은 남옥저(원래는 북옥저)로 달아날새...... 유유는 식기 속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어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의 군사가 드디어 어지러워졌다. 이때 왕이 군사를 세길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해 진을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방면을 거쳐 물러갔다.
#10. 28) 미천왕 14년 (AD 313), 10월에 낙랑군을 침습하여 남녀 2천여 구를 사로잡았다.
#11. 29) 미천왕 15년 (AD 314), 9월에 남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12. 위의 19)-29) 까지는 거의 다 한(漢) 또는 위(魏)라고 표기하고 있어 김부식은 이러한 사실들이 중국과의 관계임을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다.
#13. 여기서 19)-23) 까지는 송서, 제서, 양서, 위서, 구당서 등 중국 사서에 보이는 백제(百濟) 요서(遼西) 지역의 활동을 나타낸 것으로, 19)는 백제 고이왕때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 대방태수 등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간 공백을 이용해 고이왕때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공격해 들어간 것을 말하고 있다.
#14. 24),25)는 고구려가 낙랑국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 대항해 남아있던 요동반도의 잔존세력이 후한(後漢) 광무제의 회유에 말려들어간 것을 나타낸다.
#15. 더구나 26)은 요동군의 서안평현과 낙랑군의 대방현이 인접지역임을 나타낸 것이며, 대방군은 후한말 요동지역에 독립했던 공손강에 의해 낙랑군을 분리시켜 만든 것으로 23)에 보듯이 백제가 대방군 지역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⑫-3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삼국사기를 통한 고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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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平壤) >>
▣ 고구려
#1. 30) 동천왕 21년 (AD 247), 2월에 환도성이 난리를 치루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王儉)의 구택(舊宅)이다.
#2. 31) 미천왕 3년 (AD 302),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쳐서 8천인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기었다.
#3. 32) 고국원왕 13년 (AD 343), 7월에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하니 성은 서경(西京 : 고려당시)의 목편 목멱산중에 있다.
#4. 33) 고국원왕 41년 (AD 372),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치매 왕이 군사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이달 23일에 돌아가시었다.
#5. 34) 소수림왕 7년 (AD 377), 백제가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침범하였다.
#6. 35) 장수왕 15년 (AD 427),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 백제
#7. 36) 근초고왕 26년 (AD 371),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치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8. 37) 근수구왕 3년 (AD 377), 10월에 왕이 장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9. 삼국사기에 나타난 평양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AD 37년에 낙랑국을 멸망시킨10) 후, 27)과 같이 동천왕(東川王)이 위의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30)과 같이 천도를 하였다.
#10. 윤두서의 평양지(平壤志)에 "자록(紫麓)은 평양의 북동 30리에 있어 여러 행의 새긴 글자가 남아 있는데, 고구려 동천왕의 묘이며 자원(紫原)이라고도 부른다"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양조엔 "자원(紫原)은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그의 덕을 돌이켜 보안 능소(陵所)에 가서 자살한 자가 많으므로 자(紫)를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 주었기에 그 지명이 되었다." 고 하였다.
#11. 김부식은 평양을 왕검의 도읍지(王儉之宅)라 하였으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마한 왕검성은 지금의 서경(西京:평양)이다."라고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엔 "서경 유수관 평양부는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지다."고 하여 이곳이 막조선(또는 마한)의 도읍지였음을 나타낸다.
#12. 더구나 문헌비고에 "당나라 이후로부터 모두 대동강을 패수(浿水)라 하나 실은 한(漢)나라 군현은 패수가 아니다" 라 하였고 양수경(楊守敬(주5:日海明軒考))도 한나라 당시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평양은 대동강의 서쪽에 있어 모순된다고 하였으며 실학자인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만약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 또 평양이 있다니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냐고 나무란다....... 아! 후세 사람들이 지역의 경계를 자세히 밝히지 않고 망령되게 한사군의 땅을 가져다가 압록강안쪽에 끌어넣어 억지로 구차하게 사실을 만들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안에서 찾아내려고하여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은 그 옛 땅을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축소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13. 더구나 수(隋)의 양제는 고구려치기에 앞서 조를 내려 "고구려 소추가 혼미불공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사이에 군취하고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하니 ...... 저 화양(요동, 현도, 낙랑군)을 돌아보니 죄다 이류가 되고 역년이 오래어 적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 좌군 12대는 누방(누方), 장잠(長岑), 해명(海溟),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토, 부여,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의 길로 향하고, 우군 12대는 점제,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 후성, 제해(提奚), 답둔(踏둔), 숙신, 갈석, 동시(東시), 대방(帶方), 양평 등의 길로 향하여 낙역인도하여 평양에 총집하라"하여 우문술은 부여도(道)로 향하고 우중문은 낙랑도로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웅은 옥저도로 신세웅은 현도도로 조효재는 갈석도(碣石道)로 최홍승은 수성도(遂城道)로 위문승은 증지도(增地道)로 향하여 모두 압록수(현재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14. 이것을 보면 요동, 현도, 낙랑군이 모두 압록강의 서쪽인 현재의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누방, 장잠, 해명, 조선, 옥저, 낙랑, 점제, 함자, 혼미, 제해, 동시 는 낙랑군의 속현이다.)
#15. 31)에서 미천왕은 현도군을 쳐서 얻은 8,000명의 포로를 평양 지역에 두었다.
#16. 고국원왕은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자 32)처럼 다시 평양의 목멱산(木覓山) 기슭 동황성으로 천도하였다.
#17. 그전 서천왕 17년 18) 에 대방국을 치고 봉상왕 9년에는 황해도 지역의 대방국을 멸망8) 시킴으로써 33), 34), 36), 37)과 같이 백제와 직접 충돌해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18. 장수왕은 35)와 같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멸망당할 때까지 수도로 삼았다.
#19.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평양(平壤)은 막조선(莫朝鮮)과 낙랑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낙랑국이 멸망당한 후에는 포로 수용소 및 임시 피난수도로 쓰이다가 장수왕 이후 수도로 확정된 곳임을 알 수 있어서 이곳과 황해도 지역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⑬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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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
▣ 진개(秦開)와 연(燕)의 오군(五郡)
#1. 번조선(番朝鮮)은 BC 350년에 북막(北漠:중국측에서는 東胡)와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가, BC 343년에 연이 화친을 청해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았았다.
#2. 그러나 BC 341년에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고 BC 339년엔 안촌홀(安寸忽:安市城)을 돌파하여 험독(險瀆: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주가 은을 멸망시키자 箕子가 번조선이 있던 요동지역으로 망명해 왔는데 그 족속을 말함) 기후(箕후)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3. 이에 연이 화친을 청하고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연의 장수인 진개가 번조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다.
#4. 그후 BC 323년에 연의 역왕(易王)이 왕이라 칭하는데 번조선에서는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기후가 이를 계승하여 번조선왕(番潮鮮王)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를 한다.
#5. BC 305년에 북호(동호)와 함께 번조선이 연의 상곡을 공격했고 연이 진개를 보내 BC 300년에 동호(북호)와 번조선을 쳐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上谷),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하기도 한다.
#6. 여기서 번한이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엿던 창여(昌黎)를 말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BC 226년에 연을 치자 왕인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가 BC 222년에 멸망을 당한다. 이에 진시황은 BC 214년에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 조, 연의 장성을 연결한 것이다.
#7. 진시황이 BC 215년에 갈석산을, BC 209년에 2대 황제인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갈석산은 즉 요동에 있었다.
#8. 한서지리지엔 요동왕 한광의 도읍이 무종(無終)이었으며, 후한서 원소열전엔 "양평(襄平)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하며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盧龍縣)의 서남에 있다"고 하였으며, 진서 당빈전엔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터 갈석에 닿았다"고 했고, 통전(通典)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고 했으며, 진서(晋書)에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고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 주고 있다.
▣ 위만(衛滿)과 번조선(番朝鮮)의 멸망
#9. 한(漢)의 고조(유방)는 BC 202년에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관)으로 연왕에 봉하였는데 그가 죽자 노관은 BC 195년에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10. 이때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그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 (上下雲障)을 지키게 하였다.
#11. 이 당시 이곳에는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해 온 연, 제, 조의 무리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위만은 이들을 이끌고 BC 194년에 번조선을 쳐서 멸망시킨다.
#12. 상하운장의 서쪽 경계에는 진나라 당시 변방 초소인 요동외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멀어 지킬 수가 없어서 연과 진이 쌓았던 옛 요새인 요동고새 (遼東故塞)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요동고새란 산해관(山海關)이다.
#13. 위만은 새(塞)-> 패수(浿水)-> 상하운장(上下雲障)-> 왕검성(王儉城)으로 이동해 갔는데 새와 패수 사이는 말을 달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여기서 패수란 한나라 당시 패수인 난하가 아니라 요동외요가 있던 진나라 당시의 패수 중전소동사하(중전소동사하 : 高麗河(崔棟, 朝鮮上古民族史, 東國文化史, 1969.2)) 로 상하운장은 100리 였으며 이곳과 육율하 사이였고 지금도 그 사이엔 황지(荒地) 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진(秦)과 번조선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한사군(漢四郡)의 허실
1) 한과 위만조선
#14. 사기(史記) 조선전에 보면 한무제는 양복으로 해군을 이끌고 제(齊 : 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고 순체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요동)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15. 이 당시 발해(渤海)란 현재와 같이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며 요동은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로 (주8:윤내현,한국고대사신론,일지사,1986.4) 산해관에서 출발했고 위만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발해의 북쪽과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 즉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 이며, 왕검성은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에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2) 전쟁의 결과
#17.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에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는 공을 도둑질 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樓船: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18.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섭 하 : 전사 ㉡ 위 산 : 사형 ㉢ 공손수 : 사형 ㉣ 순 체 : 사형 ㉤ 양 복 : 서인(庶人)이 됨
전쟁의 결과를 보면 한(漢)도 우거(위만의 손자)도 모두 패한 전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일까?
#19. 여기에 대한 답을 북부여기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의 유철(무제)나 평나를 쳐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고 하였다.
#20.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유민(전에 번조선의 백성)을 이끌고 한의 세력을 격파한 것이다.
#21. 한편 한서에는 이 전쟁에서 한나라로 투항한 자들이 후(侯)에 봉해졌는데 그 지역과 이름은 다음과 같다.
#22. ㉠ 획청후 삼 (획淸侯 參) : 제 (齊:산동지역)에 봉해졌고 천한 2년 (BC 99)에 조선의 망노(亡虜)를 감춰 주어 옥에 갇혀 병사함.
#23. ㉡ 평주후 협 (平州侯 협) : 양부(梁父)에 봉해졌고 원봉 4년(BC 107)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24. ㉢ 온양후 최 (溫陽侯 最) : 남양에 봉해졌고 태초 3년 (BC 102)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25. ㉣ 추저후 음 (萩저侯 陰) : 발해(渤海)에 봉해졌고 정화 2년 (BC 91)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26. ㉤ 기후 장 (幾侯 長) : 하동(河東)에 봉해졌고 원봉 6년 (BC 105)에 조선(朝鮮)과 모반하므로 죽임
#27. 이들 5명은 연과 제나라의 땅에 봉해졌는데 3명은 수명이 다해 죽었고 2명은 조선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28. 만일 위만조선이 멸망당한 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여기에 나타난 조선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한의 세력을 격파하면서 고두막이 요하의 동쪽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인 것이다.
#29. 즉,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가 멸망하기 전에 조선상 역계영(歷谿영)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그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가니 그를 따른 자가 2천여 호나 되었다." 한 진국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족에 있던 북부여를 말한 것이다.
#30. 진국(辰國)이란 삼조선(진,번,막조선)의 통칭으로 (三韓營境本紀, 환단고기) 그 중심세력인 진조선을 이어받은 북부여 또는 진국으로 표기된 것이다.
3) 한사군의 진상
#31. 현 사학계에서 한사군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으로 되어 있고 이들 대부분을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병도)
#32. 사기 조선전에는 이러한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120년 후에 저작된 후한서에서야 그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만일 4군이 설치 되었다면 그 당시(한무제)의 인물인 사마천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林承國, 眞相 漢四郡의 陰謀, 자유, 1976.)
#33. 더군나 한서지리지에는 진번과 임둔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고, 가연전 (賈捐傳)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진번과 임둔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34. 이러한 진번과 임둔은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 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의 두 고을을 쳤다고 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35. 한서지리지에, BC 108년에 3군(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하고 BC 107년에 현도를 설치하였다고 하였고 BC 86년에는 낙랑을 남부도위 (7현)와 동부도위 (7현)로 나누었다고 하였다.
#36. 또 BC 81년엔 진번을 폐하여 낙랑에 포함시키고 임둔을 폐하여 현도에 포함시켰다고 무능서에 나오는데 이 책의 저자인 사마여상(司馬如相)은 한무제가 조선을 친 것보다 10년 전인 원봉 6년 (BC 117) 에 죽은 자로 그가 10년 후에 일어날 사실을 말했다는 것도 위증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37.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자 고두막이 이들을 격파하면서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으로 이동해 졸본부여를 세웠으며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다시 요하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이 당시 진번과 임둔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거나, 아예 설치되지 않았던 것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어 실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이며 그 설치 연대 또한 매우 혼돈되어 있다.
⑭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한사군에 대한 일제하의 역사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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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군(漢四郡)에 대한 일제하의 역사조작 >>
▣ 조작과정
#1. 1) 1887년 : 일제(日帝)는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함.
#2. 2) 1889년에는 사학과 주임으로 실증사학(주:실증사학이란 수립된 자료의 재구성에 의해 역사를 조작할 수 있는 독소를 품고 있으며 이것을 일제가 악이용해 조선의 영구한 식민지화를 획책하였다.)의 거두인 랑케(Ranke)의 제자 독일인 리스(Riess)를 초빙하여 사학회(史學會 : 회원 40명)를 조직하고 사회학 잡지 (1892년엔 사학잡지로 개칭)를 발간하였다.
#3. 이 당시 요시다(吉田東伍), 하야시(林泰輔), 스가(管政友), 나까(那珂通世), 시라또리(白烏庫吉), 쓰보이(坪井九馬三), 시데하라(幣原坦) 등이 한국관계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주: 李萬烈, '한국근대역사학의 이해', 문학과 지성사, 1981)
#4. 3) 1907년에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 정부의 명령에 의해 {만주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어 동경제대 교수인 시라또리와 쓰다(津田左右吉), 센나이(箭內亘), 마쓰이(松井等), 이바나(稻葉岩吉), 이께우지(池內宏) 등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 등을 간행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의 주체적인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용시킴으로써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만선사(滿鮮史)를 주장하였다.
#5. 4) 1909년 동경제대 교수인 도리이(烏居龍藏)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 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해 남만주(南滿洲)에 파견하여 그는 [남만주 조사보고]를 제출하였다.
#6. 한편 조선통감부가 조선의 고적조사를 동경공대 교수인 세키노(關野貞)에게 의뢰해 {고구려([高句麗) 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平壤)지역의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7. 5)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이미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완료한 도리이(烏居龍藏)의 제언에 의해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여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조작하기 위한 전초작업이다.
#8. 이들은 평양지역 고분을 2차로 발굴해 벽돌로 쌓여진 현실(玄室)내에서 한 대의 양식인 동경과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다.
#9. 6) 1911년 10월에 세끼노(關野貞)가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이 이것을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대방군(帶方郡)이라고 조작하고 있다.
#10. 7) 1912년 4월 9일 세끼노등이 사리원역 부근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11. 8) 1913년 9월 23일에 대동강변의 고분분포 지역의 중앙인 강언덕의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고 실제 그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답사해 기와 파편을 채집하였는데 이 토성을 그들은 한의 낙랑군의 치소(治所)로 조작하였다.
#12. 또 9월 30일에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今西龍)가 5회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서 용강이 점제현(점제縣 : 낙랑군 소속)으로 조작되었다.
#13. 9) 1915년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에서 {편찬과}를 설치해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였고 12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4. 10) 19196년 7월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5. 11) 1919년 2월 조선총독부가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16. 12) 1920년 야마다(山田孝雄)에 의해 봉니(封泥)에 대한 가치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17. 13) 1921년 가을에 세노끼는 야마다가 수집한 '낙랑태수장'의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조사 하였으나 단 한점도 얻지 못했다.
#18. 14) 1922년 10월 30일 '낙랑태수장'의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50원이라는 고가로 사들임.
#19. 이 해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 64호에 의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위원에는 어윤적(魚允迪), 이능화(李能和), 정만조(鄭萬朝), 유맹(劉猛), 이마니시(今西龍), 이나바(稻葉岩吉),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등이었다.
#20. 15) 1923년 '조선우위'라는 봉니가 토성리 부근 촌부의 손으로부터 평양 이심법원 검사장인 세끼구찌(關口半)의 손에 들어감.
#21. 16) 1925년 5월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었고 6월 6일에 일제 천황(天皇)의 칙령 제 28 호에 의해 {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가 독립관청으로 설치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구로이따(黑板勝美), 핫또리(服部宇之吉), 나이또(內藤虎次郞), 야마다(山田三良), 이윤용(李允用), 위원에 최남선(崔南善), 이능화, 어윤적(1935년에 '東史年表'를 출간하였음), 윤필구(尹필求 : 1938년 조선사편수회가 끝난 후 고향인 나주로 내려가 민족의 正史가 말살된 것을 애통히 여겨 그이 제자인 徐繼洙와 함께 1939년 '朝鮮世家譜'를 간행함.(李相時, 檀君實史에 관한 문헌고증, 가나출판사, 1987)), 현채(玄采), 홍희(洪熹), 유맹, 이진호, 이마니시(今西龍: 삼국유사의 '桓國'을 桓因'으로 개작하여 역사를 신화로 조작하고 단군을 부정함), 도리이(烏居龍藏),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오따니(大谷勝眞), 후지다(藤田亮策), 간사에 김동준, 정교원, 손영목, 엄창섭, 이대우, 이동진, 신필구, 이병욱, 수사관에 이나바(稻葉岩吉: 한국사가 단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였다고 강조한 자임), 후지다(藤田亮策), 나까무라(中村榮孝), 스에마쓰(末松保和 : '任那興亡史'를 지어 가야지방이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조작함), 홍의, 신석호(申奭鎬), 수사관보에 이병도(李丙燾 :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吉田東伍, 津田左右吉에게 자극을 받아 한국사를 연구하고 조선사편수회에 관계하면서 今西龍, 稻葉岩吉, 黑板勝美와 접촉하고 池內宏의 격려를 받았다.
##22. 그는 [조선사]의 신라 이전 - 고려시대까지를 今西龍과 같이 편찬해 한국 고대사를 조작하는데 매우 공헌하였다. 필자가 자료를 제공하여 출판된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시인사, 1986)을 참조할 곳> 등이다.
#23. 이들은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고 위원회에서 편찬의 방침을 결정하고 수사관, 수사관보 등이 실제 편찬업무를 담당하였다.
#24. 17) 1926년 4월에 경성제국대학에 법문학부가 개설되었으며 5월엔 옛날 대마도(對馬島) 도주인 무네(宗)백작 집안에 소장되어 내려온 조선관계 사료 전부를 몰수하였다.<주 : 고문서 61469장, 고기록류 3576책, 고지도류 34장, 고화류 18권이고 1910-1911년에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 소각한 사적만 51종 20만여권이다. (李相詩)>
#25. 이 당시 평양경찰서 경부보 우시무라(牛村三郞)와 상공회사 기사인 모리오가(諸岡榮治) 등이 완전한 봉니와 파편 및 단편을 여러개 입수함.
#26. 18) 1930년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이었던 나까무라(中村榮孝)가 주동이 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조선사편수회 요인들로 구성되어 한국인으로서 최남선(崔南善), 이능화(李能和), 이병도(李丙燾), 신석호 (申奭鎬) 등이 있으며 이 회는 [청구학총]을 발간하였다.
#27. 19) 1931년 12월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사들였고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朝鮮史)]의 일부가 인쇄에 들어갔다.
#28. 20) 1934년 2월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구입함.
#29. 21) 1937년 [조선사([朝鮮史)]가 35책으로 완성되었는데 16년간 100만원이라는 거액이 투자된 것으로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모든 자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선택이 행하여져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을 되도록 많이 수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金容變, [일본,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 {역사학보})
⑮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조작된 유물과 비판
목차로
<< 조작된 유물과 비판 >>
▣ 1) 토성(土城)
#1. 소위 낙랑군 치소로 보고 있는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소재한 토성을 1913년에 처음 답사했던 세끼노(關野貞)는 그때의 상황을 "토축(土築)의 성벽을 위요(圍繞 : 둘러쌓다)하였던 흔적이 완연하다"고 말하고 있어 그 당시 토성의 토벽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
#2. 그런데 12년 후에는 "과연 토축의 성벽이 상존할 뿐 아니라 그 내부에 한(漢)식의 기와 수십개를 채집하였고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고 하여 매우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 비판
#3. ①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대동강(大洞江)을 패수로 본다면 낙랑군의 치소로 보고 있는 토성은 패수(대동강)의 남쪽에 있어서 모순된다.(주 : 楊守敬, 晦明軒考)
#4. ②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고 하였는데 이 토성이 위치한 지역은 물이 얕고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적이 공격에 의해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어 모순된다.
#5. ③ 이 토성은 동서로 약 709m, 남북으로 약 599m, 면적이 약 396605㎡로 25현, 6만 2812호, 40만 6748구의 규모인 낙랑군(樂浪郡)의 치소로는 비좁아 부적합하다.
#6. 이 토성과 어을동토성(평남 온천군), 운성리토성(황해도 은률군), 청산리토성(황해도 신천군), 소라리토성(함양 영흥군)은 BC 3-2세기의 것으로 이들은 BC 1000년 전반기의 고조선문화를 직접 계승한 세형동검문화로 볼 수 있는데(주 : 조선고고학개요, 사회과학원, 새날, 1989. 3) 이 토성은 평안도(평양)을 중심으로 황해도에 있었던 막조선(莫朝鮮)과 낙랑국(樂浪國)의 유적으로 낙랑국이 멸망당한 후에 이들 토성을 한인(漢人)의 포로수용소로 사용하였던 것이다.(주 :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柏文堂, 1969. 5)
▣ 2) 봉니
#7. 봉니란 한인(漢人)들이 물건을 넣고 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대개 그때 나무를 깎아 글을 적어 덮어대고 노끈으로 묶고는 불과 초와 같은 것을 흘려 묶은 곳에 붓고 그것이 채 굳어지기 전에 인장으로 그 위를 누른 것으로, 봉한 것을 열게 되면 봉니는 부서지게 되는 것이다.
▣ 비판
#8. ① 중국본토에서도 옛 군현(郡縣)의 봉니가 이와같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70여개씩 나타난 적이 없다.
#9. ② 모든 현이 문서를 태수부로 올리고 태수가 모든 현에 문서를 내릴 때 봉니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태수부에서는 태수의 봉니가 나올 수 없는 것인데 모순이다.
#10. ③ 낙랑군이 다른 군(郡)이나 유주자사(幽州刺史)와도 서로 연락했을 것인데 이러한 봉니는 한점도 없고 오직 낙랑군에 속한 봉니만 밀집되어 나오는 것은 모순이다.
#11. ④ 문헌에도 없는 군현의 이름이 다수 나오고 있다.
#12. ⑤ 2천여년 동안 땅 속에 있던 봉니의 형태가 완전하고 그 인영(印影)이 갓 찍은 것처럼 생생할 수 있겠는가.
#13. ⑥ 평양지방의 사람들이 그 당시 그것이 매우 비싸게 팔리자 전력을 다해 채집하였다는 점.
#14. ⑦ 모든 봉니의 토질(土質)과 색깔 및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후한 광무제때 복파장군인 마원(馬援)이 인장에 새긴 글씨가 서로 달라 이것을 하나로 획정하기를 청한 것을 볼 때 이들 봉니의 글씨가 한 사람의 솜씨인 것 같은 점은 모순이다.
#15. ⑧ [낙랑대윤(樂浪大尹)]이란 봉니가 있는데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은 전한의 지명을 거의 다 바꾸어 버렸는데 낙랑은 낙선(樂鮮)으로 바꾸고 태수(太守)를 대윤(大尹)으로 바꾸었으니 [樂鮮大尹]이라야 맞고 낙랑대윤이란 있을 수 없다.
#16. ⑨ [遂○長印], [○成○印], [○成○尉]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큰 현(호수가 일만 이상)에는 영(令)과 하나의 승(丞), 좌위와 우위(右尉)가 있고 작은 현(호수가 일만 이하)에는 장(長)과 하나의 승(丞)과 하나의 위(尉)가 있었다.
#17. 만약 수성(遂成)이 큰 현이라면 [遂成長印]이 되어야 하고 작은현이라면 [○城○尉]와 같이 좌위나 우위가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위만 있으므로 [遂成尉印]이 되어야 하므로 모두 모순된다.
#18. ⑩ [동시장(東시長)]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동시령(東시令)으로 되어 있어 동시현이 작은 현으로 모순된다.
#19. ⑪ 영변(寧邊)에서 임회태수(臨淮太守)의 인장이 나왔는데 그곳을 한의 임회군(臨淮郡)으로 보지 않는다.<주 : 李裕립, 漢四郡正誣論 譯註, 大倍達民族史(II), 1987. 2>
▣ 3) 점제현신사비
20. 1913년에 이마니시(今西龍)가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가 1915년 3월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 1호에 3매의 사진이 나와 있는데 2매의 사진은 첫행이 "○○○○○午禾+占單○○○"로 되어 있다.
#21. 그런데 동경공과대학장(東京工科大學藏)이라고 되어 있는 1매의 사진은 "○年四月戊午禾+占單○○○"라 하여 방점이 찍힌 '年四月戊'라는 네 글자를 삽입시켰는데 이 사진들을 비교해 보면 6째줄의 3번째 "X"와 7째줄의 3번째인 "出"자 등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 당시 동경공대 학장인 세끼노(關野貞)가 사진기술을 동원하여 조작했음을 알 수 있다.
#22. 그 후 일제는 이 조작된 사진을 발판으로 하여 "漢章帝元和二年四月戊午禾+占蟬○○○"라고 하여 다시 "漢章帝元和二"라는 6글자를 첨가하여 해석하고 있으며 이 비문을 군거로 용강을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조작하였다.
#23. 한편 위당 정인보(주 : 조선사연구, 담원 정인보전집, 연대출판부, 1983. 10) 선생은 두번째 줄의 [○建丞屬國會○○○○○]를 [○建丞屬國壤烏冠遼西]로 보았고 4째 줄의 [○○山君德配岱嵩○○○○]에서 '山君' 앞의 글자를 '無'자로 보았는데 이것은 '德配岱嵩'이 '덕이 대산(중국의 泰山)과 숭산에 짝한다'는 말로 요동의 의무려산(醫無慮山)을 두고 하는 말이니 산군(山郡)의 앞의 2개의 결자중에 하나가 의무려산의 한 글자인 무(無)자임을 밝힌 것이다.
#24. 그러므로 이 글 전체를 풀면 "오환이 요동(또는 요서)을 쳐들어오니(주 :烏丸이 前漢의 요동을 치기 시작한 것은 BC 76년이며 AD 58년엔 後漢의 요동태수가 오환을 쳤고, AD 117년에는 오환이 후한의 요서를 쳤다.) 점제(주 : 동부낙랑으로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의 해안지역에 있었다)의 장, 위, 승이 군사를 모아서 구원해 물리쳐 몰아낸 후 의무려산을 지나가던 길에 신사에 풍요를 빌었다"는 뜻이 된다.
#25. 설령 이들이 주장하는 원화(元和) 2년을 인정하더라도 이엇은 AD 85년이 되어 이 비의 건립연대는 후한시대가 된다.
▣ 4) 동종
#26. 제 9호 고분에서 출토된 동종에는 영광(永光 : 전한의 원제 때 연호) 3년으로 되어 있는데 BC 41년으로 효문묘(孝文廟)<주 : 前漢의 文帝의 諡號는 孝文帝이며 廟號는 太宗廟이므로 孝文廟란 모순이다.(朴亭杓, 國史通論)>에 있었던 것이다.
#27 . 그런데 군국(郡國)의 묘는 그 황제(효문제)가 임행한 곳이 아니면 세울 수가 없는데 낙랑군에 온 적이 없다. 전한의 군국묘는 원제 영광 4년(BC 40)에 모두 폐지되었다.(주 : 郡國의 총수는 103개요 祖宗廟가 설치된 곳은 68곳이었다)
#28. 또 이 동종이 나온 고분은 전한시대 이후에 제조된 동경(銅鏡)이 나오므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후한(後漢)시대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
#29. 그러므로 이것은 이 지역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BC 40년에 중국 전체의 군국묘가 폐지된 이후 어떤 경로를 거쳐서 제 9호분 주인공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부장품으로 묻혔을 것이다.(주 : 尹乃鉉, 韓國古代史新論, 一志社, 1986. 4)
▣ 5) 칠기
#30. 왕간묘(王간廟)에서 출토된 칠기에는 '永平 十二年(AD 69)'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고분에서 수집한 목재를 방사선 탄소 측정한 결과 AD 133년으로 나타났다.
#31. "蜀君西工"에서 만든 칠기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낙랑국의 귀족들이 한의 값있는 물건을 대외무역을 통해 얻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주 : 황기덕, 기원전 5세기 - 3세기 서북조선의 문화, 고고민속논문집3, 1971)
▣ 6) 고분
#32. 평양지역 고분중에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정백리 1호 고분에서는 왕망(王망 : 新)시대의 화폐인 화천(貨泉)<주 : 왕망 天鳳 元年(AD 14)에서 몰락 때(AD 23)까지 사용됨>이 나왔다.
#33. 그러므로 정백리 1호 고분과 그 외의 평양지역 고분들의 조성연대는 왕망, 후한시대 이전이 될 수 없다.
#34. 평양지역 귀틀무덤에서 흔히 나온 화분형 그릇과 작은 배부른 단지는 중국의 질그릇에서는 전혀 볼 수 없으며 금, 은 장식의 띠고리도 중국에서는 볼 수 없고 평양지역의 귀틀무덤<주 : 이 土廣木郭墳을 낙랑군의 것이 아니라 오르도스 지역의 영향으로 파악한 주장도 있다.(李種宣, 오르도스 後期금속문화와 한국의 철기문화, 한국상고사 학보(2), 1989. 12)>과 벽돌무덤은 대부분이 장방형이고 평양의 벽돌무덤은 궁륭식 천장인데 중국의 한대의 것은 아아치식 천장이고 토동묘, 공심전묘이다.
#35. 또 세형동검, 세형동모, 독특한 형태의 수레부속은 중곡에는 없고 평양지역의 유물은 철기, 무기, 마구, 질그릇, 녹그릇, 거울 등이 있고 이 중에 철기가 가장 많은데 대하여 중국 한대의 유물은 질그릇, 거울, 무기, 철기, 몸치레걸이, 농기구, 화폐가 나오며 이 중에 질그릇이 가장 많다.
#36. 또 한(漢)에서 유해를 넣은 관(棺)은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감숙성(甘肅省)에서 나온 녹나무,잣나무, 전나무를 썼지만 평양지방에서 발굴된 고분의 관재는 그 지방의 산물이 아니다.
#37. 그리고 중국에서 목곽분(木槨墳)은 은대(殷代)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북방에서 사용되었고 벽돌무덤은 전한 후기인 BC 1세기 초에 나타나는데 반해 평양지역엔 AD 1세기엔 목곽분(귀틀무덤)이 지배적이었고 AD 2세기 전반기에 벽돌무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국과 비교해 목곽분의 종말연도는 150년간의 차이가 나고 벽돌무덤의 출현은 무려 200년간의 차이가 나고 있다.(주 : 황기덕, 앞의 책)
#38. 더구나 벽돌과 돌을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고 중국에서는 합장한 경우사 한(漢)의 문제(文帝)와 황후, 경제(景帝)와 황후의 두 차례뿐이나 평양지역에서는 동일한 분(墳)안에 합장한 경우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주 : 朴亭杓, 國史通論, 東明社, 1974. 2)
▣ 7) 장무이전
#39. 1912년 10월 15일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역 동남방 1500m 지점에서 "漁陽張"의 명문이 있는 벽돌조각 여러 개를 얻었고 그 부근의 고분을 발굴하여 현실(玄室)을 구축(構築)하고 있는 벽돌 중에서 "帶方太守 張無夷"라고 새겨진 벽돌을 발견하였다.
#40. [조선고적도보]에는 그 사진을 실었고 [조선고적도보해설]에는 그 전편(塼片)의 문장을 수록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41. ① 天人小人 供養君子, 千人造塼 以葬父母, 旣好旦堅 典覺說文, 使君帶方太守, 張無夷(하늘이 소인을 낳으시와 군자를 공양하게 하셨도다. 천명의 사람이 벽돌을 만들어 부모로 장사하나이다. 이미 좋고 또한 견고하니 이에 글을 새겨 예를 밝히노라. 사군대방태수 장무이여)
#42. ② 哀哉大人 奄背百姓, 子民憂戚 夙夜不寧 永則玄宮(슬프다 대인이여 문득 백성을 버리셨도다. 백성들이 슬퍼하여 아침 저녁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길이 현궁 곁에서 원통한 마음 다할 바를 모르나이다)
#43. ③ 趙主簿 令塼 勳意不臥○(조주부가 명령하여 이 벽돌을 만드니 은근한 뜻을 마지 아니하도다)
#44. 위의 글중에서 ③번에 '주부(主簿)'라는 벼슬은 그 당시 중국에서 쓰이지 않고 고구려에서 쓰던 5등관의 관직명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하급관리의 명령에 따라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전에 대방태수였던 장무이가 이때는 포로의 신분이었음을 나타낸다.
#45. 더구나 ②번의 "則"자는 좌씨전(左氏傳) 양공 25년에 "최씨가 장공을 북곽(北郭)에 매장(側)하였다가 정해일에 사손이라는 마을에 장사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장공(莊公)이 시해를 당해 초초히 예(禮)를 이루지 못하고 애매(애埋)하여 임시로 그 곁에 두었다는 것으로 장무이(張無夷)도 구(柩)를 한쪽 곁(側)에 묻은 것이니 그것은 그곳이 한(漢)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주 : 文定昌, 앞의 책)
▣ 8) 명문전(銘文塼)
#46. 우리나라 서북지역에서 출토된 명문이 있는 벽돌은 31개로 AD 182-407년 사이이다. 황해도 안악읍 부근에서 수집한 "逸民含資王君塼"은 그 주인공이 포로 내지는 유민, 식객이었음을 나타낸다.
#47. 또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永和九年(353) 三月 十日 遼東韓玄도(艸+免)太守領퉁(人+冬)利造"의 벽돌은 이곳을 낙랑군으로 보고 있는 것과 모순된다.
▣ 9) 기타
#48. 재령군 부덕리에서 나온 좁은 놋창에 새겨진 명문에 "○○皇朝用"이라 하였는데 좁은놋창은 좁은놋검(세형동검)과 더불어 중국에는 없는 것이다 토성동의 귀틀무덤에서는 국왕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옥도장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永壽康寧"이란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져 있고 그 무덤과 마주 놓인 벽돌무덤(파분)에서는 "大王"이란 글자가 있는 벽돌을 수집하였으며 정오동 5호 및 왕광무덤에서는 "巨王"이란 글자가 씌여져 있는 칠기 묶음이 나왔다.
#49. 또 평양의 토성(土城)에서는 "樂浪禮宮', 樂浪富貴", "千秋萬歲" 등의 글자가 있는 막새기와가 나왔는데 이것은 한(漢)시대 먼 변강의 태수(太守)정도가 감히 쓸 수 없는 왕(王)급을 표시한 유물로서 이들 지역(평양, 황해도)엔 고구려와 같이 국가적인 권력기구와 통치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주 : 황기덕, 앞의 책)
⑮-1【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한군현(漢郡縣)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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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군현(漢郡縣)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변천 >>
▣ 낙랑, 현도, 요동군
#1. 1) 현도군
#2. 현도군이 옥저(沃沮)의 땅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옥저에는 동옥저(東沃沮 : 함흥), 남옥저(南沃沮 : 해성), 북옥저(北沃沮 : 장춘)외에 서옥저(西沃沮)가 있었다.(주 : 崔棟, 朝鮮上古民族史, 東國文化史, 1962. 2)
#3. 현도군이 있던 옥저는 서옥저 지방인데 [단군세기]의 12세 아한(阿漢) 단군 때에 서옥저 욕살이 나오고 있고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엔 한(漢)이 AD 30년에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두었던 낙랑군의 동부도위(東部導尉)를 파하고 그들로 후국(候國)을 삼았는데 이중에 옥저(沃沮)가 있었다.
#4. 단단대령이란 의무려산(醫無閭山)(주 : 이유립, 앞의 책)으로 이곳과 요하(遼河) 사이에 있던 서옥저를 말하는 것으로 현도군(玄도郡)은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의 북쪽지역이다.
#5. ① 서개마현
정인보 선생은 서개마현의 개마(蓋馬)는 '검다'는 뜻의 "검"으로 보아 지금의 요하(遼河) 서쪽 북진(北鎭) 부근의 흑산(黑山)을 서개마현으로 보고 있으며 서개마란 동쪽이 있는 동개마(東蓋馬)인 개마고원(蓋馬高原)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6. ② 고구려현
고구려현이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이(高夷), 고리(고離),삭리(索離) 등으로 불리워졌던 해모수(解慕漱 : 북부여의 건국자)의 고국(故國)에 속했던 곳으로 요하(遼河) 중류 서안(西岸) 지방에 거류하(巨流河)란 지명이 고구려현임을 나타낸다.(주 : 李秉斗, 中國古代郡縣位置考, 檀大論文, 1987)
#7. 2) 요동군
원래 연(燕)과 진(秦)때의 요동군은 난하(난河)와 산해관(山海關 : 만리장성의 동쪽 끝)사이의 해안지역에 있었는데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에는 난하에서 단단대령(의무려산)까지의 북쪽지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8. 18개의 현 중에서 무려(無慮), 방(房), 험독(險瀆)은 후한(後漢)시대의 요동속국(遼東屬國)으로 편입되었는데 요동속국이란 난하와 산해관 사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위의 세현은 요동군 중에 가장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9. 그리고 후성(候城), 요양(遼陽),고현(高顯)은 후한시대에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아 요동군의 가장 동쪽에 있었던 것 같다.
#10. ① 안시(安市) : 밀운(密雲)현 동북 50리에 있다.<順天府, 直隷, 讀史方興紀要>
#11. ② 험독(險瀆) : 창여(昌黎)에 있다.<徐廣의 주석, 朝鮮傳, 史記>
#12. ③ 서안평(西安平): 임황(臨潢 : 林東지방)에 있었다. <上京道, 地理志, 遼史>,
<大震國本紀, 檀君古記>
#13. ④ 신창(新昌) : 노룡(盧龍)현에 있다. <永平府, 讀史方興紀要>
#14. ⑤ 번한(番韓) : 번한의 도읍지였던 탕지보(湯池堡)로 개평(開平)의 동북 70리에 있다.<高句麗國本紀>
#15. ⑥ 평곽(평곽) : 신당서에는 고구려의 건안성(建安城)이라 하였는데 고구려국본기에 건안성은 지금의 당산(唐山)에 있다고 하였다.<高句麗國本紀>
#16. ⑦ 무려(無慮) : 산해관(山海關) 동쪽<최동>
#17. ⑧ 양평(襄平) : 노룡(盧龍)의 서남<원소열전, 後漢書>
#18. ⑨ 요양(遼陽) : 고재의 요수(遼水)가 현재의 난하(난河)이니 그 동북쪽에 요양이 있었을 것이다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3) 낙랑군
#19. 낙랑군은 난하(난河)와 요하(遼河) 사이의 남쪽 해안 지역인 요동군과 현도군의 밑에 위치해 있었다.
▣ 서부낙랑
#20. 조선(朝鮮), 둔유(屯有), 사망(駟望), 혼미(渾彌), 수성(遂城), 누방(누方) 등으로 낙랑군이 대방군과 나누어진 후에도 계속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난하와 육율하(六율河) 사이에 존재했던 것 같다.
#21. ① 조선(朝鮮) : 노룡 (盧龍)현에 있다. <地理志, 隋書>, <永平府, 大明一統志>
#22. ② 수성(遂城) : 만리장성이 시작한 갈석산(碣石山 : 창여지방)에 있음.<地理志, 晋書>
#23. ③ 누방(누方) : 패수가 누방에서 나와 바다에 들어간다.<한서지리지>, 이때의 패수는 난하(난河)이다.
#24. ④ 둔유(屯有) : 금서(錦西)지역<최동>
▣ 중부낙랑
대방(帶方), 함자(含資), 해명(海冥), 열구(列口), 장잠(長岑), 제해(提奚) 등으로 후일에 대방군이 된 것으로 현재의 육율하에서 의무려산까지 존재했던 것이다.
#25. ① 대방(帶方) : 금주(錦州)지역<최동>
#26. ② 함자(含資) : 소능하 서안 해변<최동>
#27. ③ 장잠(長岑) : 대능하 동안<최동>
▣ 동부낙랑
탄열(呑列), 소명(昭明), 남감(남邯), 점제(점제), 패수(浿水), 증지(增地) 등으로 지금의 의무려산에서 요하까지 존재한 것이다.
#28. ① 패수(浿水) : 위만조선의 도읍인 광녕(廣寧)지역 옆을 흐르던 패수인 대능하(대능하) 부근
#29. ② 탄열(呑列) : 요하(遼河) 서안<최동, 조선상고민족사>
#30. ③ 증지(增地) : 패수인 대능하 하구<최동>
#31. ④ 남감(남邯) : 금주(錦州)의 서북<최동>, 북진(北鎭)지역<정인보, 조선사연구>
#32. ⑤ 점제(점제) : 탄열(呑列) 부근<최동, 정인보>
▣ 요동반도 남부의 낙랑
후한의 광무제는 AD 44년에 요동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하여 편입하였는데 그렇다면 전한(前漢)에 비하여 후한(後漢) 때에는 현(縣)의 수가 늘어나야 하는데 후한서에는 전한서의 현보다 줄어들고 있다.
#33. 이것은 전한서의 저작연대가 후한시대인 것을 감안해 보면 반고가 요동반도 남부까지 전한의 세력이 지배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34. 즉 동시(東시), 불리(不而), 잠대(蠶대),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組),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중에 잠지(또는 잠대)가 후한에 투항하므로 고구려가 살수(현재의 州南河) 이남의 요동반도 남부를 후한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35. ① 부조(夫組) : 이것은 남옥저(南沃沮)가 있었던 해성(海城)지역<地理志, 遼史>, 개평(蓋平)지역<최동>
#36. ② 동시(東시) : 장하(莊河)지역<최동, 조선상고민족사>
#37. ③ 사두매(邪頭昧) : 여순(旅順), 대련(大連)지역<최동>
#38. ④ 잠대(蠶대) : 봉황(鳳皇)지역<최동>
#39. ⑤ 전막(前莫) : 금주(錦州)지역<최동>
#40. ⑥ 화려(華麗) : 흥경(興京)지역<최동>
#41. ⑦ 불이(不而) : 고조선 후반기에 이궁이 설치되었던 해성(海城)지역<최동, 환단고기>
▣ 결론
평양지역은 막조선(고조선의 馬韓) → 낙랑국(樂浪國) →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나타나고 있는 낙랑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한(漢)의 유물 및 포로들의 유물을 들어서 평안도의 낙랑군, 황해도의 대방군을 설정해왔다. (주 : 의창 다호리 고분, 압독국 고분의 발굴로 삼한시대는 철기시대로 매우 분업화된 국가단계로 낙랑군 및 한사군의 설치로 인하여 철기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모순되게 되었다)
#42. 더구나 한사군(漢四郡)이라고 하여 실재 있었던 낙랑군(대방군 포함), 현도군 외에 가공의 진번군, 임둔군마저 인정해 한반도 내부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43. 이 중에서 특히 낙랑군은 BC 108년 - AD 313년까지 존속했으며 독립된 국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데 사실 군(郡)이란 지방행정 단위로 중앙정부에 의해 설치 또는 폐지되는 것인데 이것에 국가 단위의 "멸망"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매우 모순된 것이다.
#44. 사실 낙랑군은 전한 → 신 → 후한 → 위(삼국시대) → 서진 → 전연 → 전진 → 후연 → 북연 → 북위 때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수(隋) 이전에 폐지되었는데 AD 313년에는 낙랑군이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서진(西晋)의 잔류세력이었던 낙랑군(장통, 왕준)이 고구려에 밀려 전연(前燕)으로 투항하므로 그 세력 내에 다시 교치하게 된 것이다.
#45. 이것은 AD 313년 후에도 전연에는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6. 더구나 AD 432년에 북위(北魏)가 북연(北燕)을 공격해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 요동군, 영구군, 성주군 등 6군의 백성 3만가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킨 적이 있고 위서(魏書)지리지에 보면 북위(北魏) 때에 낙랑군이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가자 파하였다가 AD 525년 경에 다시 설치해 영주(營州)(주 : 치소는 和龍城이고 528년에 함락되었고 동위의 효정제 天平 초(534년)에 다시 설치되었다)에 속하게 하였는데 그 치소는 연성(連城)이었고 영락(永洛)과 대방(帶方)의 두 현을 가지고 있었다.
#47. 또 동위(東魏 : AD 534년에 건국) 때엔 낙랑국이 AD 537년에 설치되어 남영주(南營州)(주 : 孝昌 중(AD 525-527)에 영주가 함락되었으므로 永熙 2년(533)에 南營州를 대신 설치하였는데 그 치소는 英雄城에 우거하게 하였다)에 속하였고, 영락(永樂)(주 : 420년에 설치됨)이라는 하나의 현(縣)만을 가지고 있었다.
#48. 그 이후의 기록(隋書)에는 보이질 않는다.
※ 참고문헌
1. 오순범,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II)', 한배달, 1990.9, P.10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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