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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6일 수요일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12-18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늘 순종하였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처럼 떨어져 있을 때에는
더욱더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14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15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7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18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는 윤리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것’은 마치 동방 박사를 그리스도에게 안내한 별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요한 17,15-16 참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마태 5,13-16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시류를 거슬러 가십시오.’ 세상 논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편협한 관점에서 자유로워져 사회의 비판적인 양심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프란치스코, 제36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1.11.21. 참조).
부의 분배, 공무 절차, 사회 갈등, 낙태, 환경, 기후, 전쟁, 난민 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비인간적이고 물신 주의적인 관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보통 이러한 시류 안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맺는 모호한 타협을 거부하고, 시류를 거스르며, 어두운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처음부터 일부분만 버리기로 작정하며 시작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바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종’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자기 소유입니다.
며칠 전에 성령 기도회 때 수원교구 윤민재 베드로 신부님이 하신 강의 중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제 기억이 올바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떤 자매가 병자성사를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재발하면 의사가 80% 이상 사망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발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에겐 누군가를 향한 깊은 미움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만나면 상해를 입히려고 옷에 칼도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상황에선 병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며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미사도 넣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발한 암이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혈액암은 치료가 되었지만, 그분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수술을 한 번 더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성사를 다시 달라고 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약을 그냥 먹으면 되지 왜 굳이 수술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수술하려면 한 달간 무균실에 있어야 하는데 거의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아픈 게 아니니 병자성사는 줄 수 없고 안수만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분은 고집을 부리며 수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른 성당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수술하였는데, 암이 세 군데로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신부님께 와서 신부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죄송하다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병자성사를 주었고 신기하게도 그 자매는 며칠 뒤 사진을 찍었는데 암이 다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당에 다닐 것이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을까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을 없애야 합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할 수 있는 주체인 내가 죽으면 됩니다. 아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악이요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윤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흰 뱀 2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의 말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분이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은 시어머니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남편입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내의 버릇을 고치도록 두들겨 패게 시켰다고 합니다. 남편은 지게 작대기로 아내를 때렸고 아내의 허리가 다쳤습니다. 아내는 남편도 밉고 시어머니도 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분들을 용서하고 미사를 넣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잠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고 나의 판단은 항상 옳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진리이시고 우리는 거짓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려면 죄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려면, 나 자신을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만약 나에게 좋은 게 있다고 여긴다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구정물로 얼굴을 씻고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일을 시키실까요? 우리 자신의 판단은 무조건 틀린다는 믿음, 나의 스승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준이 아닌데도, 어떤 분은 저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사.시., 7기도, 성체조배 매일 1시간을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에 들어오려면 단지를 통과해야 하고, 단지에는 문이 있습니다. 관리 사무소에서 3달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습니다. 10월 중순에 비밀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예전의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당연히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비밀번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을 보면 ‘비밀번호’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문을 등록하기도 합니다. 은행 계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은행에서는 복잡한 비밀번호를 요구합니다. 대문자, 숫자, 영문자, 특수기호를 조합해서 8자리 이상으로 만들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메일에도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의 문을 지키는 겁니다. 아무나 나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정보를 보호하는 겁니다.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겁니다.
예전에 서울의 밤거리를 밝히는 것 중에 ‘붉은빛의 네온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에서 십자가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의 죄를 구속하고 구원을 이루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구속과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희생을 통해 인류는 죄에서 구속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둘째,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지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과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이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넷째, 승리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부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과 영광을 상징하는 표식이 된 것입니다. 다섯째, 희생적 사랑과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길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 희생적 사랑과 헌신의 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도구가 아니라, 구속, 구원, 사랑, 승리, 희생적 헌신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내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 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바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기꺼이
나의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당신만을
가질 수 있기를
아니
당신마저
갖지 않고
다만
당신처럼
될 수 있기를
오늘의 성인
성 일투드 (Illtud)
활동년도 : 450-535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같은이름 : 일뚜드, 일띠드, 일투트, 일티드
일티드(Illtyd)로도 불리는 성 일투드는 웨일스(Wales) 지방의 성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돋보이는 분이다.
그의 전기가 1140년경에 기록되었으나 그 역사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어쨌든 그는 브리튼(Briton) 섬에서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그의 수도원 학교는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브리튼 섬의 기근을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한 것 때문이다.
어느 전설에 의하면 그는 원탁기사 중의 한 사람인 갈라하드(Galahad)라고도 한다.
성 레오나르도 (Leonard)
신분: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노블락(Noblac)
활동연도: +559년
같은이름: 레너드, 레오나드, 레오나르두스, 레오나르드
성 레오나르두스(Leonardus, 또는 레오나르도)는 서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성인이지만 그의 생애가 기록으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프랑크 왕국의 귀족 출신으로 용맹한 장군이었던 그는 국왕 클로비스 1세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둔 후 개종하여 세례를 받을 때 다른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장군으로서 국왕에게 충성을 다한 그는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군사로서 여생을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랭스(Reims)의 성 레미기우스(Remigius, 10월 1일)를 찾아가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성 레미기우스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은 그는 왕국 내의 비신자들을 찾아다니며 헌신적인 노력으로 놀라운 전교 성과를 올렸다.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자 클로비스 1세는 그를 궁정사제로 불러들이거나 주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겸손되어 모두 사양하였다.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국왕에게 감옥에 갇힌 이들의 석방을 청해 허락을 받은 후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는 오를레앙(Orleans) 근처로 가서 그곳의 미시(Micy) 수도원에 들어가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원장직을 맡기려 하자 더욱 고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그는 리모주(Limoges)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손수 조그마한 움막을 짓고 채소와 과일로 연명하면서 하느님만을 관조하며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로비스 국왕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비가 죽을 곤경에 빠졌을 때, 그의 기도로 왕비의 목숨을 건지자 왕은 감사의 표시로 많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마침 그의 성덕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그는 그곳에 공동체를 세웠는데, 이곳이 훗날 유명한 노블락 수도원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인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해 많은 비신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는 병자들과 수감자, 전쟁포로, 농부와 자물쇠 제조업자, 그리고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의 수호성인이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었던 일화 때문에 교회미술에서 그는 족쇄 또는 차꼬를 들고 있는 수도원장으로 주로 묘사되고 있다.
성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 (Nuno Alvares Pereira)
활동년도 : 1360-1431년
신분 : 수사
지역 : 포르투갈(Portugal)
같은 이름 : 노니오, 노니우스, 누뇨
성 노니우스 알바레스 페레이라(Nonius Alvares Pereira)로도 불리는 성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Nuno Alvares Pereira)는 포르투갈 중앙 세르타(Serta) 인근 체르나케 도 봄자르딘(Cernache do Bomjardin)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에 부친의 뜻에 따라 부유한 젊은 미망인인 돈나 레오노르 데 알빔(Donna Leonor de Alvim)과 결혼하였고, 1383년에는 포르투갈군의 지휘자가 되었다. 불과 23세의 나이로 아비스(Aviz) 기사들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들은 에스파냐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포르투갈을 건설하였다.
1422년 아내가 죽은 뒤에 그는 리스본(Lisbon)에 있는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성모 마리아(Maria)의 누뇨(Nuno)라는 이름의 평수사로 살다가 1431년 4월 1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그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기도와 참회 그리고 동정 마리아께 대한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를 일컬어 ‘대원수’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포르투갈의 국가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18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승인되었고, 2009년 4월 26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