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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해강, 해성 남매의 글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너무 시니컬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비판적이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
자신이 마주하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눈으로 찬찬히 들여다보고 본질을 파악해내는 힘이 참 놀랍니다.
이 글은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란 주제로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 있다.
귀농을 한 이방인,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는 이방인, 이 사회에 구조에서 벗어나고픈 이방인인 나와 우리가족에게도 해당되는 주제이다.
한번 꼭 읽어보시길... 혹시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끼신다면~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영화 <초콜렛>과 <마농의 샘>을 통해 본 이방인의 삶
해강
스물두 살의 남성,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조사하던 ‘나의 꿈’란에 ‘농부’라고 적었다가 장난하냐며 야단을 맞은 전적이 있다. 다음해에는 ‘나무꾼’이라고 적었다. 현재 산골마을의 외딴집에서 논밭도 일구고 나무도 하며 살고 있음. fan2015@yahoo.co.kr
하나의 글을 시작하는 일은 늘 글쓰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더욱이 한편의 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재를 준비하는 일임에야... 어떻게 해야 각각의 글들이 따로 놀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다.
민들레를 볼 때면 가끔씩 이 잡지에 별로 나오지 않는 생뚱맞은 글을 한번쯤 써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긴 지금까지도 몇 번쯤 분위기가 좀 다른 글을 써온 것 같기는 하지만... 민들레는 ‘대안교육 전문지’라고들 한다. 그래서 잡지의 내용은 교육에 관한 것들이다. 물론 ‘교육’이라는 화두는 작금의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너무 하나의 주제에만 몰입하는 건 조금 식상한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가끔씩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 말고 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더러 주변 분위기를 잘 못 맞추고 생뚱맞다는 얘기들을 하곤 하는데 그런 특성을 살려 조금은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진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들은 영화와 책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딱히 영화평이나 서평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두 미디어를 통해 이 세상을 조금 생뚱맞게 그려보려고 한다.
<초콜릿>그리고 <마농의 샘>
여기 달콤하고 서늘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프랑스의 벽촌동네를 무대로 삼고 있는 <초콜릿>과 <마농의 샘>.
영화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메시지를 영상 속에서 읽어내도록 한다. 많은 이들에게 <초콜릿>은 달콤한 멜로 영화로 보일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원주민과 이방인의 투쟁이라는 오래된 설화의 현대판 버전으로 보인다. 물론 <마농의 샘>도 마찬가지. 그건 아마도 내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골마을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하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환상을 가지고 있다.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초목으로 둘러싸인 오솔길, 그리고 순박하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 사람들.... 하지만 실제로 시골마을에 살다보면 현실은 환상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되고 어느 샌가 이런 영화들 속에서도 현실의 은유적 표현을 읽어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초콜릿>은 소위 ‘천박한’ 마을 사람들이 한가득 살고 있는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에 마치 옛날이야기 속의 마녀처럼 두건달린 빨간 망토를 쓰고 북풍과 함께 비앙이 찾아오며 시작된다. 그것도 새끼 마녀에 투명 캥거루까지 한 마리 달고. 어디서나 있을법한 꽉 막히고 낡디 낡은 마을, 마을의 주민들은 세계대전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과 술 취한 남편이 지긋지긋한 여자들, 용기 없는 늙은 독신남과 폭력 남편, 그리고 이 마을을 다스리는 시장이신 멋진 콧수염의 독실한 신자 백작님. 부활절 기간의 금식을 꼭 지켜야하고 미사시간에 졸아서는 결코 안 되고 그럼에도 못 볼 걸 봤을 때는 모른 척 해줘야 한다는 무언의 율법이 지배하는 이 낡은 마을에 초콜릿 향이 섞인 북풍이 불어온다.
마을의 낡은 빈 가게를 빌려 초콜릿 가게를 연 비앙은 전형적인 마녀 캐릭터다. 그녀의 가게는 잿빛의 석조건물과 곰팡내 나는 신앙심의 색깔로 채색되어 있는 마을 한 가운데서 원색으로 빛난다. 새빨간 핏빛 커튼과 푸른색 터키석 장식의 골동품들 시장님께서 질색하실 바다건너 신대륙에서 건너온 이단의 상징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짙은 고동색을 뿜으며 사람을 유혹하는 향기로운 초콜릿...
비앙과 그녀의 딸 아눅은 처음부터 이질적인 이방인이다. 온갖 종류의 매혹적인 초콜릿을 만드는 비앙은 부활절 금식기관에 초콜릿가게를 버젓이 열고 바로 코앞의 교회 미사에도 가지 않고 결혼을 한적이 없다며 ‘부인’이라고 불리길 거절한다. 그녀의 대척점에 선 사람은 마을의 질서와 규율을 총괄하며 젊은 애송이 신부의 설교문까지 알아서 써줄 정도로 독실하신 마을의 시장님 백작나으리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과 대결을 축으로 진행된다.
마을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비앙을 몰아낼 궁리를 하는 백작을 상대로 비앙은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키며 나름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비앙의 첫 친구는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남편에겐 늘 얻어맞으며 사는 도벽이 있는 여자 조세핀과 가게 건물의 주인인 병든 노부인이다. 비앙은 마을에서 소외된 두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순식간에 두 사람을 확고부동한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린다. 조세핀에게는 폭력남편에게서 벗어나는 길을, 노부인에게는 소원해진 손자와 친해지는 시간을 마련해주면서 마녀 비앙의 초콜릿 마법은 승승장구한다. 물론 백작도 손 놓고 보고 있지만은 않다. 마을에 비앙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흘리는 건 기본, 조세핀의 폭력 남편을 신사로 개조해서 신성한 결혼제도에 그늘을 드리우는 비앙에게 한방 먹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많은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비앙의 달콤한 초콜릿에 중독되어 간다.
마을에 보트를 타고 유랑하는 집시 루와 그의 일당들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시장과 비앙의 대결을 극한을 맞는다. 배척해야 마땅한 집시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는 비앙을 백작님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마을에서 몰아내고 싶어 한다.
<초콜릿>에서 읽혀지는 것은 전형적인 이방인과 마을원주민의 갈등이다. 관성의 법칙은 비단 물리세계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심리세계에서도 관성의 법칙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계속해서 살아온 세계를 고집하는 경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삶의 운동패턴에 변화가 적은 시골마을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향이 훨씬 강해서 이방인이 이 시골 원주민들 사이에서 관성을 거슬러 살아남는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이방인이 마을에 들어 올 때는 대게 두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어떻게든 마을사람들과 동화되려하고 다른 하나는 마을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려 한다. <초콜릿>의 마녀 비앙이 후자의 전형적인 경우라면 <마농의 샘>의 비극의 주인공 장(제라르 드 빠르디유)은 전자의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프랑스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마농의 샘>은 <초콜릿>보다 훨씬 음울하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며 시골마을사람들의 심리적 행동패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은 세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다. 프로방스 시골마을의 토박이 세자르와 그의 조카 위골랭, 세자르의 옛 연인의 아들이자(나중에 사실은 세자르의 아들이었음이 밝혀진다) 마을부근의 넓은 토지를 상속받은 꼽추 아저씨 장과 그의 어린 딸 마농.
시골에서 소박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꿈을 가진 꼽추 장은 물려받은 땅으로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귀농을 한다(프랑스판 귀농과 홈스쿨링의 선구자다). 선의와 열망으로 가득 찬 장은 모든 일이 잘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마을사람들은 친절하고 땅은 풍요롭고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그가 모르는 일이 있었으니 친절한 이웃 세자르 영감과 그 조카 위골랭이 그의 기름진 땅을 싸게 사들일 음모를 꾸미고 그 토지의 샘물을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순진하기만 한 장은 친절한 이웃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수맥도 없는 곳에서 샘을 파다가 돌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샘을 막은 사람이 친절한 이웃이라는 사실도, 마을사람모두가 농장 안에 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샘을 막은 사람이 누군지 알면서 자신에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영화의 2부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양치기 노부부의 양녀가 되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위에서 처녀로 성장한 마농이 사건의 모든 전말을 알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세자르와 위골랭,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한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마을의 물의 근원인 샘물의 물길을 돌려 복수를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사이 위골랭은 근접할 수 없는 마농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괴로워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자르는 꼽추 장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되어 회한에 잠기는 등등 영화는 전형적인 인과응보의 결말로 나아간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내게 더욱 와 닿았던 것은 그러한 사람의 업에 대한 인과응보보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시골마을사람들과 요 얼마 전부터 급증하는 ‘귀농인’들을 너무나도 닮은 그네들의 인간성과 삶의 패턴이었다.
<초콜릿>과 <마농의 샘>은 원주민들 사이에 들어온 이방인 들이 택하는 두가지 삶을 각각 보여준다. 철저히 시골사람이 되려고 하다 결국은 죽음을 맞은 꼽추 장과 마녀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초콜릿의 마법으로 관성에 빠져든 마을사람모두를 바꿔놓고 마는 비앙. 어쩌면 현실세계에서는 <초콜릿>과 같은 동화 같은 일은 잘 일어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는 <마농의 샘>과 같은 리얼리즘적 상황이 99%센트를 이루고 그나마도 마농처럼 샘물을 끊어 복수를 할 수 있는 수단 같은 건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농의 샘>과 <초콜릿>은 시대에 몸을 맡긴 채 관성의 법칙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이방인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물과 땅과 초목을 모두 하찮은 심리게임에 사용하는 사람들의 본성, 마을에서 살아남는 방법들에 대해...
그럼 어디 원주민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마녀의 비법을 살펴보자. 이 비법들은 한번쯤 시골생활을 꿈꾼 적이 있는 분이라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 해도 알아놓으면 좋을 것들이다. 나에게는 꿈만 있지 세상을 모르는 바보 꼽추선생보다는 마농과 비앙이 훨씬 지혜롭게 보이고 마농의 권선징악적 복수보다 비앙의 사랑과 유머정신 풍부한 마법 쪽이 훨씬 멋있어 보인다. 그러니 마녀의 마법서는 잘 읽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1. 노인을 공경하라: 비앙의 초콜릿이 제일 처음 효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마을의 늙은 노인네들이다. 수십년동안 소심하게 살아온 노인네들이 비앙의 초콜릿을 먹고 갑자기 회춘을 하는 걸 보라. 어딜 가든 노인을 공경하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이라 하면 무조건 흰눈을 뜨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심정적으로 마을을 지배하는 노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짓이라 할 수 없다. 인생의 활력을 잊은 노인들에게 다시 한 번 활력을 가져다주면 그 이들은 누구보다도 당신의 편이 되 줄 것이다.
2. 당신의 집 주인이 누군지를 잊지 말라: 비앙의 가장 확실한 친구는 비앙의 가게건물 주인 할머니다. 시장님의 비서 캐롤린의 어머니인 가게주인 노파는 비앙이 찾아오기 전까지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비앙의 초콜릿 가게를 드나들며 소원해진 손자와 다시 만나고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비록 마지막엔 초콜릿 과다섭취로 인한 당뇨병 악화로 사망상태에 들지만 비앙이 힘겨워 할 때 가장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다. 만약 비앙이 그이의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시장이 마을에서 비앙을 쫓아내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역시 이방인은 집주인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3. 상대방을 몰아세우면 될 일도 안된다: 궁지에 몰린 백작이 가게의 초콜릿을 모두 먹어치우고 쇼윈도에서 잠이 들었을 때 비앙은 그에게 따뜻한 우유한잔을 내민다. 가장 궁지에 몰린 상대를 용서할 때 그 사람은 항복을 할 통로가 생긴다. 만약 그때 비앙이 가엾은 시장을 끝까지 몰아붙였다면 그가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4. 제대로 된 동반자를 구해라: 모든 대결이 끝이 나고 더 이상 마을에서 나갈 필요가 없어졌어도 북풍은 계속해서 분다. 그 북풍은 여름이 되고 집시 루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완전히 그친다. 정착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화 밖의 세계
요즈음의 세상은 온갖 것에 대한 ‘대안’이 유행하는 세상이다. ‘대안교육’, ‘대안의학’, ‘대안적인 삶’.... ‘대안’ 혹은 ‘새로운 종류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쉼 없이 어떤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사회심리적 관성에서 빠져나온다는 걸 뜻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의 삶, 마녀로서 사는 삶이다. 그리고 마녀는 정말로 마녀가 아니라면 화형대의 연기가 되어 타 죽을 수밖에 없다. 가엾은 꼽추선생처럼.
<초콜릿>과 <마농의 샘>은 이방인으로서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과 자기 자신에 대한 쉼 없는 관심이라고 나에게 속삭인다. 마농의 샘의 꼽추 아저씨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꿈만을 쫓다가 누가 자기의 적인지, 누가 친구인지, 땅이란 어떤 것인지, 결국 자신이 정말로 살고 싶었던 삶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어 죽어버리고 만다. 반면 비앙은 끝없는 갈등과 충돌 속에서도 주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초콜릿을 끓이는 마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관성의 대열에서 벗어나 이방인으로서 살려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요즘, 가엾게도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지 않은 채로 원주민들 사이에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런 이들은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 없이 막연한 자신의 꿈만을 뒤쫓는 경우가 많은데 마을 사람 속에 스며들어 정착을 하던지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며 정착을 하던지 간에 어느 쪽이든 주위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 분들에게 이 영화를 보며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인식능력을 길러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호의든 적의든 단순한 분석이든 간에 원주민에 대한 관심,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적 관성법칙에 대한 관심 없이 자신에 대한 생각만을 하며 지냈다가는 북풍이 불면 또 다른 곳으로 날려가는 수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재가 되어 연기와 함께 사라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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