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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주석
유다의 배반(누가복음 22:1-6)
"구속자의 해(年)"가 이제 "이르렀다." 그 때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안에 계획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위로의 고대하던 자들이 기다리던 때였다. 수많은 시대의 변혁을 거쳐 이제야 마침내 "이르렀다"(사 63:4). 그리고 그 구속이 실현될 때는 바로 그 해 "첫째 달"이기 때문에 구속자가 그처럼 서둘러 자기의 할 일을 마치고, 구속이 "완성되기"까지 그처럼 "수난" 당해야 하셨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달이 바로 그 때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그 달이며 원형(原型)이 형태로 성취된 바로 그 달이었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1절) 그리스도는 여기서 넘겨지셨다. 이미 그 유월절 훨씬 이전부터 그를 체포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우리를 위해 드려질 유월절의 희생 제물로 준비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알 수 있다.
Ⅰ. 그에게 욕을 먹는 적대자들이 음모를 꾸몄다(2절). 성직의 "대제사장들"과 학문의 "서기관들"이 강제로든 아니면 계교를 써서라도 "그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였다. 그들 생각대로라면 더 일찍 처치할 수도 있었으나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하고" 게다가 이제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몰려드는 무리가 늘기만 하는 것을 보고 주저하였다.
Ⅱ. 그들은 돕기 위해 한 제자가 배반하고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는 가롯이라는 불리는 유다였다. 그는 구별된 숫자라는 의미의 "열둘 중의 한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인간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배반자를 "열둘"이란 "숫자"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될 "그 숫자" 속에 포함시켜 그를 배반하도록 버려 두셨는가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유다를 제자로 삼으신 데는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그처럼 잘 알고 있던 자가 어떻게 그를 배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단이 들어가니"(3절) 이것은 악마의 소행이었다. 사단은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업적을 무너뜨리고 그의 기를 꺾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누가 그리스도를 배반하든, 혹은 그의 진리와 길을 배반하든 배반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이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고 또한 그들이 예수가 쉬는 곳을 잘 아는 자의 도움이 없이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계획을 진행시키게 만들었다(4절). 그리스도의 나라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무리의 권력과 계략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더 해를 입힐지 아니면 친구인 것처럼 꾸미고 자기 욕심만을 차리는 배반자가 더 해를 입힐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배반자 없이는 적대자들이 의도하는 대로 진행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만나고 있을 땐 뭔가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Ⅲ. 그들 사이의 거래 관계.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무런 소동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만 하였다. 그들도 이것을 기뻐하였다.
2. 그들은 이 일을 하는 대가로 그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그도 이것을 기뻐하였다(5절).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아마도 그는 자기보다는 더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 교활하게 물었을 것이다. 주님이 언제 어디에 계시겠는가를, 유월절 후에는 어디로 가실 것인가를, 그들은 그를 의심할 만큼 예리하지 못하였다. 좌우간 그는 곧 알고자 하던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무리가 없을 때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을 훈계하심(누가복음 22:21-38)
이제 식사 후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내용을 읽게 된다. 많은 내용이 여기에 새롭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또 다른 내용이 첨가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식탁에서 이렇게 가족과 친구들에게 훈계하고 권면하는 대화가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목회자들은 이점을 명심해 교인들에게 시도해 보도록 할 것이다. 특히 주의 만찬에 참석한 후 기독교 회의를 소집하면 서로 원만히 결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나누신 대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그 목적이 다 있었다.
Ⅰ. 그는 지금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배반당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1. 그는 그들 가운데, 그들 중에 그를 팔아 넘길 자가 있음을 암시하였다(21절).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만찬 이전에 이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에선 만찬 후에 이 말씀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다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였고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엄숙한 장면이 끝난 뒤, 그리스도께서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한 자들 가운데 그를 배반할 자가 있었다.
2. 그는 그 음모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가 배반당할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신 계획에 따라 올라 갈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유다라도 그를 그곳으로 올라가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쫓겨서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몸소 "고통을 받으러 나가셨다." "보라. 내가 가리라"고 말씀하셨다.
3. 그는 배반자에게 경고하셨다. "그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고통 중에도 성도들이 잘 참으며 그 고통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고통을 주는 일에 관련되었거나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도록 "예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받으셨다 해서 유다의 죄와 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4. 그가 그 배반자가 그들 가운데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이름을 대시지 않으심으로 제자들은 서로 놀라 의심하게 되었다(23절). "저희가 서로 묻되" 서로 질문하되, 서로 물어보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 이처럼 선한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일까?" 하였다. 그들의 질문은 "너냐?" 혹은 "그가 아닐까?"가 아니라 "저입니까?"였다.
Ⅱ. 제자들 가운데 우선권과 우열에 대한 분쟁이 일어남.
1. 논쟁의 내용. "그 중 누가 크냐."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기 "전에" 이와 같은 권위와 지위에 대한 많은 다툼이 있었는데 이는 성령이 오셔서 그런 문제들을 버리라고 하신 이후라도 교회에서 자리다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바로 전에 했던 일과 이처럼 모순되는 일이 또 있을까! 바로 전에 그들은 누가 배반자가 될 것인가 서로 묻더니 지금은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고 묻고 있다. 이처럼 가깝게 지내는 똑같은 사람들 입에서 자만과 허영심에 불타 우둔한 자의 소치를 들어낼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마치 한 샘에서 동시에 "맑은" 물과 "썩은"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간교한 마음이 가지는 자기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2. 이런 논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 그들을 호되게 꾸짖으실 것 같았는데(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날카롭게 책망하시곤 하셨다) 오히려 부드럽게 그 논쟁의 죄와 잘못을 깨우쳐 주셨다.
(1) 이런 논쟁은 그들을 세상 권력, 세상 명예를 탐하는 "이방인의 임금들"처럼 만들 것이다(25절). 그들은 자기 백성들을 "주관하며"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제왕들도," 그들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자기보다 강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여지없이 그들을 주관하려 한다. 이 "주관"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목회자들보다는 "이방인의 임금들"에게 더 어울리는 말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또 명심할 것은 권력을 멋대로 행사하며, 법을 만드는 그 Euverge,taj-즉 집권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아첨배들은 그들을 은인이라 부르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섬기게 된다. 그들이 "은인이었다"는 것처럼 꾸며지고 그런 이유로 그에게 "법도 소유하도록" 일임해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집권하면서 은인이 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진실로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들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프톨레미(Ptolemy; 기원 전 3, 4세기의 이집트 왕조; 역주) 왕조 중에도 Euergetes-즉 은인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왕이 있다. 이제 우리 구세주께선 이것을 아시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1] "큰 것을 구하는 것"보다 "선을 행함"이 더없이 큰 영광이다. "힘센 자의 두려움"이었던 임금들은 영광을 얻지 못했지만 오히려 "없는 자의 은인"은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고백에 따른다면 자기 나라의 통치자보다는 자기 나라의 은인이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된다.
[2] "선을 행함"이 크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밖에 달리 통치자가 되려는 자들이 "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만이 최고의 영광을 얻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줌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은인"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와 같은 명칭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여라. 그들이 진정 그 "명칭에 합당한" 자들이 되면 누가 가장 크냐는 등의 논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보다 큰 자," 세상에 집권하는 제왕들보다 더 큰 축복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명하게 "더 큰" 명예, 은인 되는 명예를 소유하였다면 이보다 적은 명예, 통치자가 되려는 욕심은 버리게 될 것이다.
(2) 이런 논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겐 어울리지 않은 일이며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 27절), "진리와 은혜의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지배하도록 부탁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는 섬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유익과 영향을 받아 외적인 권력을 쥐고 행사하는 것은 자기의 직분을 남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처럼 임금을 세우려고 했던 불경스런 잘못과 같은 예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들을 주의해야 한다.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통치권. "너희 중에 큰 자, 즉 나이가 많은 자"는 그 나이 때문에 당연히 우선권이 있겠지만 일이나 "행실"에서 뿐 아니라 "지위"에 있어서도 "젊은 자"와 같아야 한다(그런 자는 젊은 자와 함께 앉아 자신을 낮추며 젊은 자들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 Juniores ad labores seniores ad honores-즉 젊은 자는 일하게 하고 나이 든 자는 그들의 영광을 받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이든 자도 젊은 자와 마찬가지로 수고하여야 한다. 그들의 나이와 관록은 비록 이젠 쉬어도 된다고 보증하고 있지만 오히려 힘을 배로 내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o` h`gou,menoj-즉 두목 학교나 공회의 대표자는 섬기는 자, w,j o` diakonw/n-즉 직원처럼 되어야 한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천하고 고된 봉사를 서슴치 말아야 한다.
[2] 그 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모시는 자가 더 크냐? 모심을 당하는 자가 더 크냐?" 지금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처럼 하시고 있다. 그는 지금 거기 참석한 자들에게 시중들라고 명령하시며 "자리를 잡고 앉아 편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기 위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계셨다. 그들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자기들 스스로 따른다고 하는 그 주인이 "종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임금의 모습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3) 그들은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논쟁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런 것과는 반대되는, 전혀 다른 성격의 더 나은 영광, 하나님의 "나라," "만찬," "보좌"의 영광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영광을 공유(公有)하게 된 제자들은 앞에 말한 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28-30절).
[1]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당부. 이 믿음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영광이었으므로 누가 더 크냐와 같은 것으로 다툴 필요는 없었다. 약간 칭찬하는 기분으로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내게서 등을 돌릴 때에도 내 옆에 서서 내게 의지한 자들이다" 하셨다.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사람들부터로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계속 그와 함께 머물렀으며 그가 받은 고통을 함께 받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줄 수 있는 도움이나 봉사는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계속 "그와 함께 있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은총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고맙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군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단히 둔하고 잊기를 잘했으며 때로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그들의 선생은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잊어버리셨다. 그는 그들의 부족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처럼 기념비적인 찬사를 하셨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자들이다." 이처럼 그는 헤어지는 마당에 칭찬하셨다. 이는 그가 그와 함께 굳게 설 수 있는 자들의 마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가 보여 주고 있다.
[2] 충성된 자를 위해 마련된 보상.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맡기겠다. diati,qemai-즉 남기겠다." 혹은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이 말씀의 뜻은. 첫째,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알려 주고 있다.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 가운데 한 나라," 복음의 교회를 주셔서 그로 교회를 살리며, 용기를 주며, 통치할 머리로 삼으셨다. 이 "나라"를 그가 그의 제자들과 복음의 후계자들에게 "맡기셨으므로" 그들은 복음의 평안과 특권을 누리며, 복음의 성례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나누어주며, 교회의 조직적인 훈련과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직도 믿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고, 복음의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교회의 참된 관리로써 보좌에 앉아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위해 마련된 영광이다.
둘째, 하늘나라에 너희를 위해 마련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섬기는 일을 다하여라. 그 보상을 하늘에서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나라를 주셨다. 그들이 그 나라에서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a. 진수성찬.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의 나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16, 18절). 그들은 그의 섬김과 고통의 보상으로 얻은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쁜 모습을 보며 영혼의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은 만찬과 같이 사랑이 완전히 성취된 최상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b. "최고의 영광." "므비보셋이 다윗의 상에 앉았던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상에 앉을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거룩한 보좌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내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다(계 3:21). 그 날에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실 때 찬미하며 함께 할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면(고전 6:2) 교회는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베드로가 부인할 것에 대하여. 이 부분을 읽으며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미칠 사단의 궤휼에 대해 일러주신다(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내가 하려는 말을 명심하라. "사단이 밀까브르듯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모두를 손에 쥐고 흔들고자 하였으나, 다른 제자들의 입노릇을 하던 베드로가 여기서는 다른 제자들의 귀 노릇을 하고 있다. 제자들 모두에게 경고하실 말씀을(나로 인하여 너희 모두가 배척을 받으리라) 베드로에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흥분을 잘하는 특별난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로 그에게 관련된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아마도 사탄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키울 목적으로 욥을 비난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하나님께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그들은 정직한 자들이며 순결한 자들이다" 하셨고, 사탄은 "그들을 시험하게 해주시오, 특히 베드로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청구해 "밀 까부르듯 까불어" 그들이 알곡이 아닌 쭉정이들인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까불림"이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 속에 무엇이 있나 시험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그들을 까부를 뿐 아니라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그들로 죄를 짓게 만들도록 애를 쓸 것이다. 옥수수를 까부를 때 쭉정이를 제일 위에 모으듯, 아니면 알곡을 모두 골라내고 쭉정이만 남겨두듯 그들을 이런 식으로 정신 못 차리게 하여 떨어져 나가게 할 것이다.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들을 까부를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라. 사탄은 욥을 시험하고 유혹하기 위해 하나님께 허락을 구했듯이 VExuvth,sato -즉 그들을 청구하였다. "그가 너희에게 도전하였다. 너희가 위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희에게, 특히 너희 중에 제일 앞장 선 베드로에게 도전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그들이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다툼 때문에 그 벌로써 그들을 까부릴 허락을 사탄이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아마 베드로가 그 논쟁에 제일 열을 올렸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을 까부르시겠다면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십시요"라고 사탄이 요구했을 것이다.
2. 이런 시험에 대비하여 베드로에게 베푼 특별한 배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왜냐하면 사탄은 너희 모두를 넘어뜨리고자 원하고 있으나 다만 네게만 그의 수단을 다해 시험하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가장 강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네 믿음이 송두리째 남김없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시험에 넘어갈지라도 한 시간이라도 우리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완전히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사탄의 불화살도 끌 것이다.
(2) 진실된 믿음의 사람들도 수차 믿음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믿음이 완전히 떨어지는 일은 없다. 믿음은 그들 속에 씨앗으로, 뿌리로 남아 있다.
(3) 제자들의 믿음이 때로는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지만 그대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와 간섭 때문이다. 만약 그들끼리만 버려 둔다면 그들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기도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어느 "특정한 "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3. 베드로에게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원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우라고 분부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 굳게 하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켜 회개한 다음에 다른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너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라. 너는 하나님의 자비가 너와 함께 있음을 발견한 후에 다른 형제들에게도 그들 역시 자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어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죄를 지은 자들은 "죄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샛길로 나간 자들은 "돌아와야만" 한다.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처음 행실을 행해야만 한다.
(2) 은혜를 통하여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자기의 형제들이 굳게 서서 떨어지지 않게 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시 51:11-13; 딤전 1:13 참조).
4. 베드로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33절).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이 말은 참으로 위대한 말이었다. 당시 그가 의미했던 뜻과 어떻게 하든 "잘해 보려"는 생각 외에 달리 생각할 수는 없다. 유다는 종종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리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베드로처럼 이렇게 완강히 항의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마음은 악한 것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었지만 유다는 완전히 악한 것에 마음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를 따라 그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또 그가 어느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든지, 감옥으로든, 죽으로든 따라 갈 준비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5.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다(34절).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너는 네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이나마 네게 맡기는 것은 네가 네 마음을 알게 되어 다시는 네 마음을 신뢰하지 말기를 바람이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며,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에 의해 나타나게 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도 우리의 약한 점을 더 잘 아셔서 충만한 은혜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시험에 들게 될 것인가 아시고 "이 정도까지 될 것인데 그 이상은 안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니 다행스런 일이다.
Ⅳ. 모든 제자들의 준비 사항.
1. 그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형편에 대하여 물으셨다(35절). 그는 제자들이 그에게 충성된 종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인정하셨다(28절). 이제 그들과 헤어지면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과연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른 이후 그들의 친절하고 다정한 주인이 되었는지 알고자 하신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1) 그는 제자들을 보낼 때 맨발로, 전대에는 돈도 없는 대단히 궁핍하고 어려운 형편으로 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먼 곳으로 가거나 오래 동안 나가 있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만을 의존하고 그 섭리 안에서 그들의 친구들의 도움에만 의존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형편으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우리는 우리가 시작했던 보잘 것 없는 형편에서 더 나아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때도 그들은 여전히 풍족하게, 평안하게 살았으며, 그들도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없었나이다.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였나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우리도 때때로 우리의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재고해 보며, 우리가 당했던 고란과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 생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2] 그리스도는 선한 주인이시며 그의 보살핌은 부족함 없는 보살핌이다. 그의 종들이 때로는 낮은 곳으로 끌어내려 갈지라도 그를 도울 것이며, 그들을 "시험"할지라도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 이레"이다.
[3] 우리에게 충분한 양식의 여유가 없을지라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 처지라 할지라도,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일용한 재물만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해야 한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헌물에 의존해 살았으나 자신들의 형편이 말도 못할 정도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며 풍족했노라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2. 그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다가올 그들의 형편의 대변화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1) 왜냐하면 그들의 주님되신 그리스도는 전에도 누차 말한바와 같이 이제부터 수난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37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감이니라. 그리고 이 일은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리라. 그는 범죄자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리라. 또한 흉악한 범죄자들과 함께 죽으리라. 이 일은 아직 이루지 못한 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짐으로 내게 관한 일이, 내게 관하여 기록된 일들이 끝을 맺으리라. 그때에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리라." 고난받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고난이 예언된 것으로 하늘의 섭리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실을 잠시 후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된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며, "끝을 맺게 될" 것이며, 유종의 미를 거두어 영원히 남게 되리라.
(2)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예상하고 지금까지와 같이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계속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하였다. 그게 아니라, 이제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약간의 고난을 받으나, 그가 가면 그들도 선생과 "같은" 고난을 받을 예상을 하고 있어야만 되었다. 종이 그 주인보다 낫지 못한 것이다.
[1] 친구들이 예전처럼 그들을 그렇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대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며 될 수 있는 한 검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의 적들이 이제는 전보다 더 지독하게 그들을 못살게 굴 것을 예상해야 한다. 쌀뿐만 아니라 되도 필요할 것이다. 강도와 자객으로부터 자신을 지킬(고후 11:26) "검이 없는 자"는 검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며 언제라도 자기 옷을 팔아 검을 살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단지 누구나 옆에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면 목숨을 지키기 힘든 대단히 위험스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녀야 할 검은 "성령의 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한다(벧전 4:1). 우리는 다가올 고난을 예비하여 "갑옷을 입고"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며, 고난 중에 배척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겉옷을 팔아 검을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에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검 둘"을 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의 것이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평소에도 검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스도는 검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셨지만 그의 제자들이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을 금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족하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그가 검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냉소적인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열둘 중에 검이 두 개 뿐이라! 너희 적들은 지금 수없이 몰려오는데, 그것도 한 사람이 검 하나씩 들고 달려오는데 고작 이것이라니, 참으로 대담무쌍하구나." 그러나 검이 필요없는 자들에겐 두 개라도 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손수 "그들은 돕는 방패시오 그들의 영광의 칼"이시기 때문이다(신 33:29).
감란산의 고뇌(누가복음 22:39-46)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배반당하시기 바로 전, "동산에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읽게 된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고뇌로 그리스도는 그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하나의 사업-자신의 영혼을 죄의 대속물로 바치는 일의 한 부분에 자신을 적응시키셨다. 그가 갚아야 할 (인간의) 죄로 인하여 얻은 슬픔 속에 그의 영혼은 괴로움을 겪었으며, 죄로 인하여 인간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이 미웠을 것이며,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남김없이 태우는 것이 그 제물은 흠향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므로 이제 그야말로 이와 같은 제물로 드려지기에 합당한 자임을 느꼈을 때 괴로워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력이 짜놓은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을 그들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정복하고 말았다.
Ⅰ. 내용.
1. 밤중이었는데도 그리스도는 나가 먼 길을 걸었고 "제자들"(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도 "그를 쫓았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한 그들이었으므로 지금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
2. 사사로운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습관적으로 쉬는 곳이 있었으며 종종 홀로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마음의 거리낌없는 대화를 위하여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에겐 등산밖에 편안히 쉴 만한 장소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을 찾아가 쉬셨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석한 후 특히 실천에 옮길 일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시간을 요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3. 그는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그 시련으로 죄를 짓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즉 그들에게 너무나도 놀랍고 위험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리스도를 버릴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절대로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당부하셨다. "너희가 죄를 멀리 하도록 기도하라."
4. 그리고 그는 그들을 떠나 혼자 기도하셨다. 은혜의 자리엔 그들 각자의 용무가 있고 그리스도도 자기의 용무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들이 각기 떨어져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며 그들이 연합해서 이룰 용무가 있을 때엔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는 "돌 던질 만큼" 더 동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 거리를 50, 60보 정도로 추산한다. 그리고 거기서 맨 땅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는 "얼굴을 땅에 대신" 후에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고통의 잔들, 이 쓴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이 말씀은 죄 없는 인간이 고통을 두려워함으로 나온 말이었다. 진정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그러나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만 하며, 현재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구속과 구원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나서 그는 그 간구를 포기하고 계속 조르지 않고 완전히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내 인간의 본능대로 마옵시고, 두루마리 책에 관해 기록한 대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시 40:7, 8).
6. 그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제자들도 그때엔 각자 기도하고 있어야만 하였다(45절). 그가 "기도 후에 일어나" 보니 "제자들은" 그의 슬픔엔 관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엔 다른 복음서에선 읽을 수 없는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 그날 저녁 선생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눈물겨운 이별의 슬픔으로 그들의 영혼은 지쳐 있었고 몸도 마음도 둔하게 만들어(이제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들을 잠들게 하고야 말았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으면 거기에다 약점들을 모두 전가시키도록 가르치고 있다.
7. 그들을 깨우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어찌하여 잠이 오도록 가만 두었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기도하기에 합당하도록 졸음을 떨쳐 버리라. 그리고 능히 너희가 졸음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간구하라." 이 말씀은 폭풍 속에서 선장이 요나에게 한 말과 같다(욘 1:6).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외부의 환경으로나 내적인 감정으로 시험에 들려고 하면 우리는 "일어나 기도"해야만 한다. 주여, 이 "궁핍한 때"에 나를 도우소서.
Ⅱ. 다른 복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사실이 세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실 때 "사자(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그의 힘을 도왔다"(43절).
(1) 우리 주 예수께서 천사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깊은 굴욕을 나타내는 예가 된다. 당시로써는 신성(神性)의 힘이 없어졌으므로 그의 인성(人性)만으로는 "천사보다는 약간 낮은" 상태에서 천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처지에 있었다.
(2) 그는 고통에서 해방되지는 않으셨지만 천사들을 통해 힘을 얻고 격려 받았다. 그 고통이나 위로는 서로 상쇄되었다. 하나님께서 각자 어깨에 짐을 지워 주실 때엔 우리로선 불평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분배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다윗은 고난받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해 주신"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시 138:3). 다윗의 자손(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같은 응답을 받았다.
(3) 천사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를 돌보았다. 그는 천사들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잡으려고 찾아오는 무리들을 물리쳐 굴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군대의 힘을 단지 그의 "힘을 돕는 데"만 썼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잠들어 있고 그의 적들은 깨어 있을 그때에 슬픔 중에 있는 그를 천사들이 방문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에겐 대단한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천사)는 아마도 그에게 힘을 돕기 위하여 "무언가 말했을" 것이다. 그가 받는 고난은 그의 아버지의 영광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며, 그 앞에 기쁨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 열매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의 마음속에 일러 주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말로 천사는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계속 나갈 것을 격려하였을 것이다. 위로가 곧 힘이 되었다. 천사는 아마도 그의 힘을 돋우기 위해 "무언가 했을" 것이다. 그의 땀과 눈물을 씻어 주었다든가, 시험이 끝났을 때처럼(마 4:11 참조) 그에게 다소나마 용기를 북돋우었거나, 아니면 그의 팔을 끼고 땅에서 일어나 것을 돕거나 또는 그가 기진 하였을 때 부축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천사의 수종을 통하여 성령은 evniscu,wn auvto,n -즉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힘을 돕는다란 말의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다. "그를 상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그의 권능으로 그를 대적하였는가?" 아니다. 시편 89편 21절, 이사야 49장 8절, 50장 7절에 약속하신 대로 오히려 그는 "그에게 힘을 넣어 주셨다"(욥 23:6).
2.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44절). 슬픔과 괴로움이 그를 덮치면 덮칠수록 그는 기도에 몰입하였다. 전에 그가 기도할 때엔 냉냉하고 성의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여느 때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목소리와 몸짓에 나타나고 있다. 기도란 때를 타는 것이어선 안 되지만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 하는 기도는 특히 간절해야 한다. 우리의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도는 더욱 힘있게 자주 해야만 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듯 그는 두려움 중에 "힘쓰고 애썼다."
3. 이와 같은 괴로움 속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같이 되었다." 땀은 죄와 함께 생겨났고 저주의 내용이었다(창 3:1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와 저주를 지셨을 때, 그는 슬픔의 땀을 흘리게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으로" 그의 떡을 먹게 되었고 그는 우리에게 닥칠 모든 시험을 속량 하시고 갚아 주셨다. 이 구절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땀은 보통 때 흘리는 땀방울보다 더 "크거나" 평소보다 땀구멍이 더 크게 되어서 땀을 "핏방울로 비유한" 것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모세혈관이 터져 "진짜" 피가 나와 땀이 핏빛으로 보였으며 그런고로 "피땀"이라고 부른 것은 타당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던 때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피 흘림 없이는 용서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땀구멍은 피가 맺힌 상처처럼 되었을 것이고 그의 피가 옷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고뇌"에 빠져있는가 보여 준다. 그는 당시 쌀쌀한 계절에, 깊은 밤중에, 그것도 찬 땅 위에서 바깥 공기를 쐬며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땀을 흘린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유다의 배반(누가복음 22:47-53)
사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렵게 하여 정신을 잃게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늘 하는 식으로)무력과 무기로 그를 잡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무리를 동산으로 끌어 왔다. "그들 가운데엔 사단이 있었다."
Ⅰ. 유다를 통한 식별. 그곳에 수많은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 선두엔 유다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잡으려는 무리를 인도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으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유다가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하였다. 그들이 그곳에 와서도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유다는 그들에게 자기가 키스하는 자가 바로 그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습관적인 사랑의 표시로 허락하신 그대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다가왔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질문을 주목하고 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게 뭐냐? 이것이 암호냐?(48절) 이렇게 인자에겐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인자에겐 알리지 않고 그를 해할 계획을 진행시키듯 인자는 "배반당해야만" 하느냐? 제자들에겐 못된 교사가 되었던 것같이, 제자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같이 이렇게 자기 제자에게 버림을 당해야만 하느냐? 키스로 배반을 당해야만 하느냐? 우정의 표시가 배반의 도구로 쓰여져야만 하느냐? 영원한 사랑의 표시가 이처럼 더러운 일에 쓰여져야만 하느냐? 주 예수께서는 배반당하시는 것, 그것도 그와 함께 하겠다고,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자로부터 키스를 받으며 배반당하시는 것보다 더한 치욕은 없으셨을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자. 이처럼 그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꾸미며 그의 종들을 핍박하는 자들, 값없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을 행하는 것처럼 속이며 성결하고 엄격한 행실을 바탕으로부터 흔들어 버리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거룩한 듯 흉내는 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들에게 키스를 받으시며 배반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예는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양심에 그리스도께서 지금 유다에게 하신 질문.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그가 이것에 노하시지 않겠느냐?" "그가 이것에 그대로 갚으시지 않겠느냐?와 같은 질문들이 들여지게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Ⅱ.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들의 노력(49절).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무장한 자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온 것을 보고 그들은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주께서 우기가 검 두 개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셨나이다. 이제 그것을 쓸까요? 아직 한 번도 쓸 기회가 없었습니다. 검을 쓰지 않는다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마치 자기 선생의 허락 없이는 칼을 빼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너무도 "다급하고 흥분되어" 있어서 대답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다. 그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 중에 한사람의 목을 겨냥해 휘둘렀으나 빗나가 "그의 오른편 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물리치심으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보여 주셨듯이, 베드로도 이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가 허락만 받는다면 선한 목적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복음서에선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가르치고 있다.
1. 칼부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과. "이것까지 참으라"(51절). 휘트비(Whitby)박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잡으러 온 적들에게 한 말로써 그들을 무마시켜 그 일로 흥분해 제자들에게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불상사를 묵인해 달라. 내 허락 없이한 짓이었으며 다시는 칼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해치울 만한, 그들을 죽일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리고 보는 바와 같이 그를 따르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 그들에게 저지를 실수를 "용서해 줄 것을 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적들에게도 좋은 말로 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부상자를 치료함. 이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 이상의 행위이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그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다." 이는 그(대제사장의 종)에게 이와 같은 상처로 낙인찍힌 채 달아나도록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낙인이 그에게 찍힐 충분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
(1) 그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이렇게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반격을 가했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즉시 고치실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아프고 부상당한" 자를 즉각 고쳐 주실 능력이 있으니 이 작은 군대로 무슨 일인들 하실 수 없으려?
(2) 그의 자비와 선하심을 증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는 그의 율법의 예를 보여 주셨다. 후에도 그는 "우리를 귀찮게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예도 보여 주셨다.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같이 하라. 이와 같이 관용 있는 자비를 베풀면 그들이 굴복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대단히 부끄럽게 함으로 이와 같이 선을 베푼 자를 감히 행악자로 체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다.
Ⅲ. 그를 체포하러 파견되어 온 군관들에게 하신 훈계의 말씀. 이렇게 폭도들을 몰고 소란을 피우며 찾아 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깨우쳐 주셨다(52, 53절). 마태는 이 말씀을 무리에게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이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전의 군관들은 제사장들로부터 몇 가지 지시를 받고 왔을 것이며 그래서 여기에 "대사장들과 장로들" 사이에 언급되고 있는 성직자들로서 이와 같은 가증스런 일을 위해 채용된 자들이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들도 역시 비난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 그들의 방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추종." 이처럼 어두운 밤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연유가 무엇이냐?
(1) 그들은 그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며 무리를 선동해 그들에게 대적하게 하지 않을 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강도를 잡는 것과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
(2) 그들은 그가 "도망갈" 자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 그들 한가운데 있었으며 한 번도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고 그들도 그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의 때가 오기 전엔 그를 잡는 일이 그들에겐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제 그의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이 그를 잡으려 이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났다.
2. 그들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위. 우리는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이처럼 내게 닥친 일들이 괴로운 것일지라도 나는 따르리라. 이는 이미 결정된 대로 진행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희가 허락을 받아 너희 맘대로 나를 대적할 때이다. 이 모든 일을 보상받을 내게 약속된 때가 따로 있다. 지금은 어두움의 권세, 이 세상 어두움의 지배자, 사탄이 여인이 난 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갖은 악을 행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따르겠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버려 두어라.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시 37:13). 교회의 적들이 기승을 부릴 때엔 그대로 버려 두어라.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멋대로 하게 두어라.
(1) 이 때의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승리가 허락된 짧은 시간, 제한된 시간이다.
(2) 지금은 "그들의 때"이다. 그들에게 약속된 시간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시험할 허락을 얻었으나(그들의 시간이 지나) 그들이 무너지게 되면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더욱 빛날 것이다.
(3) "앞장 서 달리는 것은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그 길을 비켜 주어야 한다. 어둠의 권세는 빛의 왕이 오시는 길을 더 빨리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쟁을 모두 마치고 승리의 날을 기다리셨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하리라.
베드로의 타락(누가복음 22:54-62)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부인하는 슬픈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의 선생은 대제사장과 음모를 꾸민 자들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날만 새면" 산헤드린의 전에(66절) 그를 고소할려고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시험 당하신 것에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다"는 정도로만 기록하고 있다(54절). 그러나 그 표현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를 잡아끌고 들어갔다." 이 말씀은 사울에 관한 기록을 생각나게 한다(삼상 15:12). "그는 돌이켜 행하여 내려갔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이 비록 자기들이 바랐던 포획물을 얻었지만 그들은 대단히 혼란한 지경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렵거나 또는 그들이 보고들은 바에 의해 내부의 두려움이 생겨 그를 먼길로 우회해 데려 온 것 같다. 아니면 어디로 가야 그를 재빨리 데려 갈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들은 마음만 조급했을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베드로의 타락.
1. 그것은 "몰래 들어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 선생이 죄인으로 붙잡혀 갈 때 "그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의 선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위험에서 벗어날 정도로 "멀리서" 좇아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명예를 지킬 정도로 "멀리서" 따랐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따라갔다.
2. 계속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가 제사장의 종들과 한데 어울렸다. 그 때 그는 그의 선생 바로 곁에 있었어야 할 처지임에도, "종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날 밤에 있었던 모험담을 듣기 위하여 "함께 앉았다." 아마 말고(귀가 짧렸던 대제사장의 종)도 "그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처럼,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도록 "그들 가운데" 앉았다. 그가 그리스도와의 모든 친분, 그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고 그가 지금 절망과 위험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그를 모른다고 한 것이 그의 타락이었다. 그는 안타깝게도 그 집에 속한 비자에게 그가 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이야말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불가에 앉아 있을 때" 그녀는 전에 본 적이 없던 낯선 자가 앉아 있으므로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그리고 밤중 이 시각에 일없는 자가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는고로 그가 대제사장의 수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예수의 수행원으로 결론 내렸을 것이다. 아니면 언젠가 성전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그도 함께 있어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던 적이 있어 그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질문을 용기있게 "인정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치있게 "문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재주도 없었으므로 엉겹결에 부인하고 말았다.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3. 그의 타락은 두 번째 반복되었다(58절). "조금 후에" 그가 자신을 돌이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너도 그 당이라. 간교한 게시리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여기 앉아 있구나" 하였다. "나는 아니다."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다." 다시 "세번째 한 시쯤 있다가"(왜냐하면 유혹하던 자가 "그가 앉을 때 함께 앉자 우리가 지난날 손해 입은 것을 그로부터 다 얻어내기까지 계속 타격을 주자" 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이" 자신있게 냉담하여 말하길, "그가 아무리 부인을 하나 이 사람은 그와 함께 있었다.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거짓말을 한 자는 계속 그 거짓말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죄의 시초는 물보를 터놓는 것과 같다." 베드로는 이제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떼고 있다(60절).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이 예수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조차 없다."
Ⅱ. "베드로가 다시 정신을 차림." 그가 자신을 되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보라. 그보다 그를 돌이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그 과정을 살펴보자.
1. 그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깜짝 놀라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사소한 일을 통하여 중대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유의하라.
2. "주께서 돌이켜 그를 돌아 보셨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참으로 놀라운 장면임엔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선 "주"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이 사실을 통해 그에게 하늘의 지혜와, 권능과 은혜가 풍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증거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겐 등을 돌리시고 심문을 받고 계셨지만(당시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계셨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베드로가 하는 짓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심을 명심하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리스도도 그를 포기하고 다시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아버지 앞에서도 그를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루듯 그리스도도 우리를 다루시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베드로가 곧 깨닫게 될 것을 의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입술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자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방금 대단히 중대한 죄를 지었음에도 그리스도는 그를 "부끄럽게" 하거나 그의 잘못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를 부르시지" 않고, 단지 돌아만 "보았다." 이것은 베드로 외엔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1) 그것은 "깨닫게 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정말 나를 모르냐? 내 얼굴을 보렴, 그리고 그렇게 말해 보라"고 말씀하시듯 돌이켜 그를 보셨다.
(2) 그것은 "꾸짖는" 눈길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돌아보면서 얼굴을 "찡그렸을" 것 같다. 그리고 약간 "불쾌함"을 표시했을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돌아보시는 그리스도의 화난 얼굴을 생각해 보자.
(3) 그것은 "훈계하며" 질책하는 눈길이었다. "베드로냐, 이게 무슨 일이냐? 지금 나를 위해 와서 증인이 되어야 할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다니. 네가 제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장 자신있게 고백했고 결단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네가 아니냐?
(4) 그것은 "연민"의 눈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불쌍한 베드로, 네 마음이 이렇게 약하다니! 내가 돕지 않는다고 이렇게 넘어지고 실수하다니!"
(5) 그것은 무엇인가 "암시하는" 눈길이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은혜를 담은 눈길이었다. 닭이 울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를 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별한 효력 있는 은혜가 없으면 외적인 수단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이 눈길과 함께 권능이 나갔다.
3.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 주고, 그것을 양심 안에 안착시켜 영혼에게 행복의 계기를 줌을 명심하자. Tolle et lege-즉 그 말씀을 듣고 읽어라.
4. 그리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돌아보심으로 그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눈물이 쏟아졌다. 촛불은 방금 꺼졌다. 그런데 사소한 일로 다시 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감명을 주시지는 않았다. 베드로에겐 다시 일어날 만한 씨앗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눈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를 돌이키며 그를 올바른 상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스도가 당한 수모(누가복음 22:63-71)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Ⅰ. 우리 주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당한 수모. "하인"(下人)들, 천하고 야만스런 종들이 "서로 모여 그를 대적하였다." 그는 지난 밤 한잠도 못잤지만 그들은 그를 "쉬게" 버려두지 않았고, 급하게 재판 받아야 될 입장인데도 그들은 그가 "편히" 있도록 하지 않았으며 재판을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다. 그에겐 괴로운 이 밤이 그들에겐 즐거움의 밤이 되었다. 그리고 삼손처럼 거룩한 예수님은 놀이의 술래 역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눈을 가리우고" 어린애들이 잘 하는 놀이에 따라 그의 얼굴을 때리며 그가 자기를 때린 사람의 이름을 댈 때까지 그 놀음을 계속하였다(64절).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의 예언적인 기능과 그가 전에 말했던 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한 지식을 모욕하려는 속셈이었다. 거룩한 예수님께 이보다 더 수치스런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받은 수많은 수모 중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65절). 그를 모독자라고 정죄한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악독한 모독자였다.
Ⅱ. 공회에서 산헤드린에 의해 정죄 받으심. 산헤드린은 "백성의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이 문제를 처리하려고 "날이 새자마자," 아침 5시경 때 이르게 모였다. 그들은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날이 밝자마자 그것을 행하는" 자들이었다(미 2:1). 그들은 어떤 좋은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회당에서 심문 받으신 내용에 대해선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그들은 그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하고 물었다. 그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그를 그리스도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totidem verbis-즉 그 많은 말로써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고 증거를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이 말을 그들 앞에서 해보라고 강요한 것이다(67절). 만약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거나 만약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납득이 갈 만큼 설명해 주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행"한 것이며 그들에게도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를 믿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를 고소하려는 목적으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2. 그에 대한 그들의 부당하고 공정치 못한 대우를 당당하게 비난하셨다(67, 68절).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지금 이 시각에"도 기다린다고 고백하였다. 다른 메시야가 나타난 적이 없다. 나타났더라도 그는 메시야를 사칭한 가짜였다. 그에게 경쟁할 자는 없었다. 그를 필적할 만한 자가 더 이상 나타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하늘의 권능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보여 주었다. 그정도라면 자유롭게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할 때에도 메시야의 자격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를 자기들의 공회당에 끌고 와서 그곳에서 "형사적인" 법정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메시야 "후보자"로서의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1) "내가 그리스도라고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너희에게 제시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 하려고 작정하고 있다. 옳든 그르든간에 그것에 대해 이미 판결하였고 그것을 헐뜯고 정죄하기로 작정한 너희 앞에서 그 이유를 대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2) "내가 제시한 증거에 대해 너희가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는 전에 그가 그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그 질문은 그들로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었다(20:5-7). 그들은 공정한 심판자도 공정한 논쟁자도 못되었다. 다만 그들이 논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될 때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침물을 지키려 하였다. "너희는 내게 대답도 아니할 것이요 나를 보내지도 아니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그거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며, 만약 내가 그리스도라면 너희는 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 둘을 모두 하지 않을 것이다.
3. 그들은 지금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키려, 그가 그리스도임을 더 이상의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써 재림할 것을 말씀하셨다(6, 9절).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때엔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4. 그러자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처럼 군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물었다(70절).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는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는 인자"의 환상을 본 다니엘(단 7:13, 14)을 인용하여 자신을 "인자"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만약 "인자"라면 역시 "하나님의 아들"도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냐? 이것을 볼 때 유대교의 신앙에선 메시야는 "인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됨을 알 수 있다.
5.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였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즉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그니라"한 마가복음(막 14:62)의 말씀과 비교해 보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자신이 받을 시험에 대하여 자신을 가지게 하였다. 그때에 그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가 이 사실에 확고히 서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6. 여기서 그들은 고소의 증거를 얻었다(71절). "어째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증거는 충분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그의 입으로" 들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을 가지고 그를 모독자로 정죄하려면 먼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 그렇다면 그를 죽이므로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벌이 내릴 것인가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겐 늘 하늘의 권능과 은혜가 충만하였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상의 영광과 위엄 속에 나타나지 않은 그가 메시야가 될 수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눈은 세상것에 이끌려 멀어 버렸고,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말처럼 이와 같은 위험천만의 잘못에 돌진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