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의 참극. 석달개의 이탈. 천왕의 탐욕. 태평군이 망국으로 가는듯한 지름길 속에서 비틀거릴 무렵, 청군은 1856년 말부터 가을에 거쳐 무한과 호구를 탈환하는 대공세를 가했습니다. 증국번의 상군은 광서와 안휘의 여러 거점을 차례로 빼았았고, 1857년 말에는 진강 역시 점령했습니다. 수만 명의 청군이 천경 부근으로 진군하여 긴 호를 파고, 높은 벽을 쌓았으며,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했습니다. 당시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갔던 증국번은, 자신의 아홉번째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유럽인들이 태평군을 돕지 않는다면, 금년 난에 반드시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수성. 그림에선 묘사되지 않지만, 그는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사태가 이쯤되자, 홍수전 역시 자신의 에덴동산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평판이 나빴던 자신의 형들, 곧 홍인발과 홍인달의 왕호를 박탈했고, 젊고 유능한 지휘관들을 최고사령관에 임명하여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총 다섯명이었습니다.
첫번째. 광서성의 빈농 출신으로 태어나, 14세에 태평군에 참가하여 중요한 전장에서 늘 선봉을 맡아 용맹을 칭송받던 21세의 맹장 진옥성,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인 이수성, 이수성의 연하인 종형제 이세현, '천경의 참극' 에서 몸을 피하는데 성공했던 양수청의 아우 양보청, 위창휘의 아우 위지준 등 5명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알력다툼은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아, 게중에 위지준은 청군에 투항하여 태평군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궁전에서 틀어박혀 있던 홍수전이 모처럼 적극적인 조취를 취하자, 많은 장군들은 호감 있게 받아들여서 통일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했습니다.
진옥성, 이세현, 이수성은 작전회의를 열었고, 이후 8월 무렵에 진군하여 노주를 탈환하고, 강포와 육합 일대의 청군을 격파하고 1만명의 사상자를 안겼습니다. 그 후, 11월 무렵에는 6,000여명의 상군과 증국번의 여섯째 아우, 증국화(曾國華)를 모조리 전사시켰습니다.
소위 '삼하 패전' 이라고 불리우는 이 싸움의 충격은 대단히 커서, 증국번은 장남 증기택(曾紀澤)에게 보낸 편지에서 "봄, 여름 사이에는 이 적이 가까운 사이에 평정될 것으로 바랬지만, 뜻하지 않게 노주의 변이 있었고, 강포와 육합의 변이 있었다. 여기에 또 심하의 대변이 있어 국면이 파괴되었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상군 출신으로 호북 순무에 임명되어 있던 호림익(胡林翼) 역시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삼하 궤패 후, 원기가 완전히 상하였다. 4년 규합한 정예를 하루아침에 엎어버렸다. 게다가 용감하게 싸운 병사와 총명한 전사 또한 거의 전멸하였다."
천경에 대한 청군의 압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증국번은 호림익의 도움을 받아 궤멸된 상군을 수복하는데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1859년 봄 무렵 태평군은 그 이전보다는 분명히 한결 여유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홍수전의 사촌 동생인 홍인간이 천경에 도착했습니다. 홍수전과 그는 1849년 이후로 단 한번도 보지 못하다가 이때 처음 만났고, 천왕은 매우 놀라고도 기쁜 태도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홍수전은 홍인간이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태평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 중에 하나에 임명합니다. 곧 홍인간은 태평군 내에서 간왕(干王)으로 불리었습니다.
홍수전이 광시의 산 속에서 신도를 규합하고 있을때, 아직 과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홍인간은 계속해서 시험에 응시했지만, 모두 합쳐 다섯 번을 번번히 낙방했습니다. 1850년이 되자 청군은 홍수전의 추종자나 친척들을 체포하기 위해 홍수전의 고향을 공격했고, 홍인간은 몸을 피했으나 청군의 방어선을 뚫을 방법도 없고, 또 태평군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지라 찾아가기도 힘들었습니다. 일단 홍인간은 홍콩까지 몸을 피하기로 결정합니다.
잠시 홍콩의 외국인 선교사들 밑에서 일을 하며 지내던 그는, 태평군이 난징을 천경으로 바꾸고 근거지로 삼자 그것으로 가려고 했지만, 과거 이사카 로버츠가 그랬던 것처럼 청군의 포위 때문에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는 일단 상하이의 외국인학교에서 천문학과 천문계산법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서양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인간은 이 시간 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게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레그(James Legge)입니다. 그는 유교와 도교의 주요 경전을 번역했는데, 중국인이나 동양인을 얕잡아 보고 경멸하는 다른 백인들과는 달리, 중국인을 신뢰했고, 그들에게서 많은 희망과 장점을 보았습니다. 레그의 학술조수로서 그와 함께했던 홍인간은 이내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레그는 홍인간이 인상깊은 친구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내가 아는 중국인들 가운데 가장 친절하고 재주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를 생각하면 실로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걸었던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어느날, 레그는 (그 대상이 홍인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홍인간으로 추정되는)한 친구와 길을 건너다가, 천둥 같은 예포를 쏘아대는 두 함선을 보고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과거에 대한 조종(弔鐘)일세. 이 거선들에 맞서서 저항할 수는 없어."
홍인간과 레그는 같은 예배당에서 함께 설교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느날, 홍인간은 천경에 있는 사촌의 옆으로 가서 함께 하고 싶다는 취지의 말을 꺼냈지만, 레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홍콩에서 조용히 목사로 살아가는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1858년 여름, 홍인간은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선교단체의 회원들이 도와준 경비를 가지고 홍콩을 떠나 천경으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위험천만하게도 증국번의 부하 장수 한명과 연락을 취하면서 이를 통해 천경으로 진입하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태평군이 그 무렵 청군을 격파하므로서 그 연락끈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곧이어 난리통 속에 자신의 행장마저 잃어버린 홍인간은, 그러나 어느 한 지현의 병악한 아들에게 의학적인 자문을 해주면서 휴식을 취하고, 필요한 돈을 벌었습니다. 1859년 홍인간은 그동안 번 돈으로 한 점의 물건을 사서 상인으로 위장하여 청군의 전선을 우회한 뒤, 4월 경에는 마침내 천경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잠시 여독을 풀고 난 뒤 5월경, 홍인간 ─ 이 태평천국의 간왕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상주문을 천왕 홍수전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는 우체국의 신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편들은 제 날짜에 도차할 것이고, 편지는 무게에 따라 배송비를 지불한뒤에 화륜선이나 증기선 같은 운송수단으로 이동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한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는 대신, 새로 짓는 주택들은 높고 튼튼하게 줄을 맞춰 나란히 건설해야 하며, 지폐를 발행하여 3퍼센트 한도의 수수료를 받는 은행을 설립할 것도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여행자들이 강도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괴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상인들을 습격할 도적은 별로 많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또한 도로는 확장하여 직선으로 만들며, 하천수송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는 준설작업을 해야 합니다. 훌륭한 제품에 대해서는 5년에서 10년 정도 전매권을 부여하고, 가장 유용한 상품에 대해서는 보다 긴 기간의 전매권을 인정하며, 생명보험 제도 및 재산보험제도 역시 시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입할 테니, 수해나 화재로 인한 주택, 선박, 상품, 인명의 손실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 간왕은 의사선발시험, 노예제도 폐지, 영아살해 금지, 일체의 도박과 연극 금지, 나태함 방지 등을 제안했습니다. 홍수전은 간왕의 모든 주청에 대해 승낙했습니다. 다만, 이런 정책들이 언제, 또 어떤 방식으로 시행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애매한 부분은, 홍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는 홍수전이라는 사촌 형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실용' 적인 태도와 관점이 몸에 배였기 때문에, 자기를 만나러 온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아리송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왕이 외국인 선교사들을 맞이 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영어로 "안녕하세요." 라고 외칠 때, 그는 붙임성 있는 사람이었지만, 용을 수놓은 황색 단자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보석이 박힌 금관을 쓰고 있으며, 일군의 소년들이 그에게 부채를 부치는 와중에 만난다면,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홍인간은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자신이 천왕의 신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홍인간은 홍수전에 대한 존경심과, 그가 보았던 하느님에 대해서는 일고의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양수청에 대해서는 달랐습니다. 그는 양수청이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음성을 대신한 사실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결정적으로 외국인에 대한 태도 역시 양수청과 달랐습니다. 간왕은 홍수전에게 외국인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모욕적인 태도는 언쟁을 벌일 때나 유용하지, 중대한 사건을 처리할 때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으며,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런 표현은 섬라, 안남, 일본, 류쿠 제도 같은 우리 주변의 소국들에게 사용한다 하더라도, 듣는 쪽에서는 분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들의 지위가 낮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 설령 그들이 열등한 지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황의 강요' 에 의한 것이지 진정한 마음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권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내적으로 국경을 안정시키고 대외적으로 신의를 보여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외국인과 상대해서 굴하지 않는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예컨대 그들과 우리가 각각 상점을 연다면, 우리는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는 반면, 외국인은 임대료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적은 일꾼을 이용하는 반면, 그들은 많은 인원을 고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팔고, 그들은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이익을 낼 것이고, 그들은 손해를 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번영할 수 있고, 저들은 몰락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동시에 홍인간은 자신의 대담한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구상을 내었습니다. 태평군이 동남쪽에 있는 상하이까지 진격하자는 것입니다. 일단 상하이를 점령한다면, 태평군은 공동창고에 저장된 은 백만 냥으로 20척의 근대식 증기선을 구입하여 하나의 함대를 구성할 수 있으며, 이 함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천경 일대를 세워싸고 있는 청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리면 서정을 다시 재개할 수 있습니다.
그 구상은 점차 무르익어 갔고, 이에 홍수전은 이수성에게 군사작전을 맡겼습니다. 중국 서부와 중부에서 계속된 전투를 통해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859년 12월에는 충왕(忠王)에 임명되었습니다. 솔직하고 관대한 성격이었던 이수성은 그를 만난 병사들이나, 외국인들 모두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수성은 수천 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양쯔 강 삼각주를 빠르게 가로질러 대도시 항저우를 공격략했고, 천경의 포위망을 풀기 위해 양동작전을 구사했습니다. 천경 부근에 주둔하던 청군은 항저우를 구원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이에 이수성은 역으로 강행군을 구사하여 천경으로 되돌아왔고, 전력이 약화된 상태의 청군을 격파해버린 것입니다. 이후 군대를 동진시킨 그는 6월 2일에는 쑤저우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수성의 부대는 상하이의 코앞에 집결했습니다.
이수성이 외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판단은,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는 태평천국과, 그 이상이 천하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정의라고 최후까지 의심하지 않았고, 서양인들은 '이성에 따라 행동' 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정의인 자신들과 힘을 합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서양인들은 태평군과 '요괴'의 전투에서 중립을 유지해왔고, 태평군 역시 아편, 알코올, 담배를 제외한 모든 서양상품들에 대해 교역할 의사가 있음을 밝혀왔습니다. 따라서 이수성의 판단으로는 태평군이 상하이의 모든 '요괴'를 일소하면, 서양인이 환영할지언정 자신들을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선량한 성격의 이수성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실제로 자신들을 환영할 것이며, 중국인 주민들도(쑤저우에서 그랬던것처럼) 약간의 저항을 하다가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860년 8월 중순, 이수성은 약 3천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하이로 진군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상하이 주재 외국공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입장을 밝혔고, 모든 조계와 외국상인들의 건물은 자기 정체를 나타내는 황색 깃발을 걸어놓기만 하면 분명히 무사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또 이수성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모든 외국인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밖에 나오지 말고, 집안에 있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이수성의 선의를 보여준 다른 사례 하나는, 그가 외국인을 살해했던 태평군 병사 한 명을 처형한 부분입니다. 사실, 살해된 외국인은 청군의 앞잡이로서 태평군과 싸운 사람임에도 말입니다. 이수성은 자신이 성의를 다하면, 공통의 하느님을 섬기는, 사려 깊은 외국인들도 반드시 그 점을 알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기민함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이수성이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점은 그의 인격이 너무나 밝고, 또 이로 인해 순수했다는 점입니다. 서양인들은 곧바로 포와 소화기를 집중적으로 발포하면서 응사했습니다. 이수성이 앞서 취한 외국인들에 대한 호의를 나타낸 부분이 단순한 술수가 아니라는 점은, 서양인들이 처음 발포할때 이수성의 군단이 "마치 돌이라도 된 듯 총알 한 발 응사하지 않은 채" 꼼짝도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수성은 진심으로 외국인들을 믿었습니다.
1860년, 8월 21일, 이수성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외국공사들에게, 자신의 괴로움과 실망감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과 우리가 똑같이 예수를 경배하며, 우리 사이에 공통의 토대와 공통의 교리로 이루어진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나는 무역과 통상에 의해 함께 연결된 '우리'를 마음속에 그리며 조약을 맺고자 상하이로 왔습니다. 당신들과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곧바로 상하이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한 가족끼리 서로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 었을 것이고, 요괴가 우리를 비웃은 빌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상하이의 외국인들은 틀림없이 능력과 성질이 다양할 것입니다. 또 그 중에는 의를 알고,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잘 인식하는 사려 깊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요괴의 왕조가 가진 돈에 눈멀어서 우리나라와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통상이익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승승장구하는듯 했던 태평군의 동정군은, 그러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재앙으로 바뀌고 맙니다. 태평군은 적인 '요괴'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파편화 했지만, 이제 치명적으로 외국열강과 적대하게 된 것입니다.
첫댓글 사람 한둘이, 이미 굳어진 태평천국에 대한 인상을 바꾸지 못하였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