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설교]2012년 3월 4일 사순절 두번째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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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1-7,15-16절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창세기17:1-7, 15-16 사라는 자식이 없고 시간은 흘러갔다. 사라는 아브람에게 상속자를 낳아 주지 못했다. 계약은 두 당사자 간에 존재한다. 당사자들 각각은 이익과 의무를 갖는다. 계약은 두 당사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두 당사자에 의해서 종결된다. 그러나 아브람과 한 하나님의 계약은 다음과 같이 다르다. * 하나님이 계약을 만드시고(2,6절), 세우신다(7절) 5절에서 아브람의 이름이 바뀌는 것은 중요하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삶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국면을 갖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의 변화는 한 사람의 인격과 운명을 바꾸는 것으로 믿어졌다. 8절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아브라함이 아직 살지 않는 땅)을 영원히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이 약속의 증표로서, 모든 남자들은 태어난 후 곧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이집트인과 가나안인의 관습은 결혼적령기에 할례를 하는 것이다). 갓난아기 때 할례를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동질성의 흔적을 갖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에게 계약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것을 삶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사라는 그녀의 이름이 변경된 것에 의해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공유한다(15절). 그녀는 다산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또한 민족들과 왕들을 일으킬 것이다(16절). 17절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잉태하는 상상을 할 때, 의심을 하면서 웃는다(아들은 이삭이라고 이름이 지어질 것이고,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웃을 것이다”는 뜻이다).
시편22:23-31 이 시편은 전체를 볼 때는 병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위한 기도이다. 크게 병이 들은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느끼고 있다. 과거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도우셨다(4-5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 그를 도우실 것이다. 그의 험담꾼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그를 조롱한다(6-8절). 그의 고통은 험담꾼들이 그의 병은 하나님의 노여움의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때문에 더 심해진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아기였을 때 하나님은 나를 도우셨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9절)고 말한다. 나는 성전에서 모이는 공동체의 집회에서 감사를 드릴 것이다. 22절은 그것에 대한 맹세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가난한 사람(26절, 혹은 고통 받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성한 삶을 공급하신다. 세상 어느 곳에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27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다(28절). 죽을 운명의 모든 사람들이(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들, 29절) 하나님을 예배한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길을 따라 살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자식들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고 미래의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로마서4:13-25 2장과 3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가져오는 것은 믿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바울의 주장은 복음의 핵심사상이다. 지금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예로 들고 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런 랍비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반대한다. 아브라함은 그가 믿었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민족의 조상과 “모든... 족속들”(창12:3)을 위한 축복의 근원이 된 것이다. 만약에 오직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믿음은 무의미한(“가치없는”, 14절) 것이고, 보편적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한 것이다 - 율법은 계약이기 때문에, 각각의 당사자들은 계약 속에서 책임을 갖는다. 각자는 그가 무엇을 받을 것인지를 안다(즉, 보수, 4절). 그러나 약속은 선물이다. 그러므로 약속된 것은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대상이 존재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율법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처벌(“하나님의 진노”, 15절)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 살고 있지 않는(법이 없는) 우리에게는, 위반할 계약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다음과 같이 그의 중심주장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관계는 법률적인 근거로 존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믿음(16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사랑의 선물(“은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의 관계가 법률적으로 존재한다면 계속해서 계약은 깨질 것이고 그것은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관계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는 것이다 - 그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장되는 것이다. 창세기17장5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17절)의 영적 아버지이다.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을 때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사라가 아기를 잉태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이삭은 출산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기대와 희망의 반대상황, 즉 희망할 수 없는 중에도 희망하면서(18절) 그는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이유를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는 희망 때문에 믿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즉, 이삭)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만큼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20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에까지 도달하였다(그가 의로 여겨졌다, 22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마가복음8:31-38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음으로 그의 고난을 예언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기치 않는 어떤 것을 가르치신다. 메시아(인자, 31절)가 고난을 당할 것이고, 배척당할 것이고, 죽임을 당할 것이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격렬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베드로는 인간의 가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가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33절). 그 다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참된 제자도를 언급하신다. 먼저, 제자는 자기중심성을 버려야만 한다(“그들 자신을 부인하라”, 34절)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한다. 예수님의 목적과 복음(35절)전파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조차도 내어 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세속적으로 잘 살기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참된 본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실패자가 될 것이다(35-37절). 인간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으로부터 사물들을 보라!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때에) 그리스도는 자신과 복음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설교 함께 구성하기
이번 주 설교에 포함될 다음의 내용들을 숙고하라. ▶ 언약과 약속(창세기)
묵상을 위한 질문 1. 아브람과 사래의 호칭이 달라진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헌신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담겨있다. 마치 대부분의 세례명이 과거엔 어떤 특별한 의미의 기능을 가졌던 것처럼 말이다. 설교자 당신은 당신의 회중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관계를 얼마나 유의미한 기억으로 남아있게끔 도울 수 있을 것인가? 2. 회중들에게 마가복음 8장 34절의 깊으신 뜻을 깨닫게 하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3. 왜 우리는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는가?(로마서)
설교구상 창세기 17:1-7절, 너무 늙어버려서 이젠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은 75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창 12:4). 그가 99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다시금 그에게 찾아오셔서 오래 전에 약속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와 아내 사래가 바로 그 약속의 성취의 한 상징으로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번주일의 창세기 본문 구절은 다행하게도 로마서 본문의 구절과 대단히 잘 어울린다.
하나님의 완벽한 해결을 기다린다는 것. 사래와 아브람은 신앙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에 폐경기가 온 한 여성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결국, 사래와 아브람이 선택한 길은 이스마엘이었다. 아브람이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대를 잇고자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후에, 말하자면 하나님의 때에 그가 약속하신 자,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의 출생 이후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고가 이스마엘 모자에게 닥쳤다. 아브람의 일가족이었던 그들이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말 기다렸어야만 했다! 마가복음 8장 34절은 성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설교 중의 하나이다. 의당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기꺼이 원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이 그에 앞서 수행해야 할 것들이 있다 : ▶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 - 그것은 과연 자신의 의지와 자기 탐닉을 꺾거나 카톨릭의 수덕적 삶을 의미하는 부르심인가?
랍비주석
창세기 17:1-8, 15-16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뀌었습니다. 1. "아브람"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람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모국인 아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된 이가 "아람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무수한 이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라쉬). 우리 말 성경 개역개정판에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고 번역이 있고, 한글 개역판에는 "열국의 아비"라도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직역을 해서 "무수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하겠습니다. 2. 이러한 의미에서 탈무드 베라콧에서는 절대로 아브람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름으로,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긍정적인 의미의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아브라함을 절대로 아브람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3.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측면으로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람밤은 미쉬나 비쿠림을 설명하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역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신 것은 개종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된 의도"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전도에 대해서는 큰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나, 개종에 대해서는 관대한 거죠. 4. 사래의 이름이 사라로 바뀌어 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랍비 히르쉬는 아브라함이 이름을 바꾸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 역시 그 임무에 합당한 이름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사래(히브리어 원래 발음은 "사라이"입니다)는 "나의 공주"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의 공주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나의"라는 접미사를 빼 버리고 그냥 "공주"라는 이름만을 사용하여서 한 개인의 공주가 아니라, 개인을 뛰어 넘은 모두의 공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라쉬). 친절하게 16절에서는 사라의 자손들이 여러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그 의미를 더 쉽게 설명해 놓았지요.
1)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아버지 ‘파트리키우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어머니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아들의 신앙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카르타고 대학에서 법률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한때 주색의 포로가 되어 세속의 환상에 빠져 생활했지만, 사는 동안에도 늘 ‘이상(理想)’에 대해 생각하고 번민했다. 그는 19세 되던 해에 키케로의 <철학의 권유>를 읽고 진리 탐구에 일생을 바치려고 생각했으나, 그것 역시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무렵 성행하던 마니교에 마음이 끌려 9년 동안이나 자신의 번민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천문학을 연구하며 공부해 보니, 마니교의 논설에도 믿지 못할 점들이 있어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로마로 건너가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방황과 방탕한 생활을 괴로워하며 눈물로 기도만 할 뿐이었다. 특히 아들이 로마로 간 후에는, 더욱 애통한 심정으로 기도하며, 아들의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아들이 있는 로마로 갔다. 그러나 아들은, 그 사이 밀라노로 옮겨갔기 때문에, 로마에는 없었다. 모니카는 다시 밀라노로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 무렵,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신플라톤주의자’들 모임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관해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생각과 사상이 변해갔다. 자기를 위해 늘 기도하던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불행 안에서 살아 온 자신을 반성했다. 386년 여름, 그는 수사학 교사를 그만 두고, 어머니와 함께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다음 해인 378년 세례를 받았다. 이 날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의 소원은 없구나. 네가 바른 길로 가길 늘 기도했는데, 비로소 네가 회개하고 바른 길을 선택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2) 이홍균 씨 부부의 사랑의 실천 “소년원을 나와도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이 다시 범죄의 길로 빠져드는 걸 막기 위해서는,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두 아들 진국(31,목사)과 진영(30, 대학원) 씨도, 또래인 소년원 출소자들과 가족같이 지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의 생활 속에서 친부모와의 마찰도 있었다. 92년 소년원을 나온 한 씨를 처음 데리고 올 때, 무속인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수년 후, 아들이 올바르게 자라 선교사가 되자 “내가 데려왔으면 다시 방황했을지도 모를 아들을 이렇게 훌륭하게 인도해 줘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소년원 출소자들과 함께 생활하되, 실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에게 심어 주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삶 전체를 바꾸었다. 한두 번 선한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고의 사랑이다. 3)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 일본의 유명한 작가 중에 ‘미우라 아야꼬’라는 작가가 쓴 소설인 ‘빙점’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감명 깊게 읽혀진다. 빙점의 제일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전개되어 있다.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마음과, 또 자신의 출생의 비밀로 인하여,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하고,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눈 덮인 언덕길을 오른다. 드디어, 언덕위에 올라선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한번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분명히 자신은 똑바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앞만 향해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눈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은 흐트러진 발자국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용서하지 못했던 자기 어머니를 완전히 용서하게 된다. 4) 구원의 기준 서울여대에 ‘삼각 숲’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번은 그 삼각 숲을 산책하다가 믿지 않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학생이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예수를 믿어도 생활이 엉망진창인 사람이 많아요. 반면에,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착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해주시고, 착한 데도 교회에 안 다닌다고 구원하시지 않으면, 그게 무슨 공평한 하나님인가요? 저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고 싶지 않아요.”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착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건 좋은 것 같구나. 그런데, 네게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 첫 번째는 ‘얼마나 착해야 착한 걸까’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10만 원을 떼어먹었을 때에 화내지 않는 것이 착한 걸까? 그 기준이 궁금해. 10만원을 기준으로 정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9만 9천 원짜리는 너무 억울할 것 같구나. 두 번째는, 내가 보니까 착한 사람은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친구들과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 같아.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세상 그 누가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겠니? 하지만,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그러니, 사람의 성격이나 교양에 따라서 구원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공평한 것 같구나.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해. 네가 믿음의 자세만 가지면 하나님은 물 붓듯 은혜를 부어 주시지. 네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네 인격이 어떻게 망쳐졌든지 간에, 믿음의 자세로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의 은혜가 네게 임하는 거란다.” 5) 구원의 길은 준비되었나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길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너무 근시안적으로 현실에만 집착해서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생의 위기에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제목 :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라
일본의 소설가 중에 ‘미우라 아야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류소설가가 쓴 책 중에 ‘빙점(氷點)’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감명 깊게 읽혀지고 있는 책입니다. 빙점의 제일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전개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눈 덮인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높은 언덕위에 올라선 그는 자신이 방금 걸어온 발자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똑바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앞만 향해서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눈 위에 나 있는 발자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리 비뚤 저리 비뚤,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이 똑바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어머니도 그동안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썼을 텐데, 어쩌다가 그만 실수로 사생아인 자신을 낳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어머니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자살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나름대로 바람직하고 올바른 인생을 살고자 애쓰거나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지금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와 동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일부러 나쁜 짓을 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법의 심판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강호순이나 정승희 같은 사람도 좋은 일을 행함으로써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선을 행하려는 마음만 있는 게 아니라,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비롯해서, 분노와 다툼, 원망과 불평과 같은 죄를 짓게 하는 악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될 경우, 바르게 살려는 마음은 숨어버리고 악한 세력이 그 사람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이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그가 살던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하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라. 그리고 바른 길만 걷도록 하라(창17:1)”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 아브람의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여러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 부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여러 나라의 조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99세까지는 일반 보통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의롭게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풍파를 다 겪고 난 후인 99세라는 나이에 하나님을 만나 그 말씀을 믿고 의지했을 때에 비로소 의인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땐 언제인 고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의롭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사회에 속하여 있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힘을 합쳐야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은 실수를 거듭 반복해야만 하고 실패와 좌절의 늪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복을 베푸신다(롬4:16)’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복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복이란 뭘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올바른 삶’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올바른 인생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이사하라고 했을 때, 그는 별다른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고, 사도 바울 선생이 로마서 4장 1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빛나’가 다니는 학교가 서울여대입니다. 그 학교에는 ‘삼각 숲’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계신 선생님이 그 삼각 숲을 산책하다가 믿지 않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인터넷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 중 하나가 교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예수를 믿어도 생활이 엉망진창인 사람이 많아요. 반면에,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착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은 구원해주시고, 착한 데도 교회에 안 다닌다고 해서 구원하시지 않으면, 그게 무슨 공평한 하나님이신가요? 저는 그런 하나님은 믿고 싶지 않아요!” 교수님은 그 학생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착한 사람을 구원해주는 건 좋은 것 같구나. 그런데, 너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첫째는 ‘얼마나 착해야 착한 것일까?’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10만 원을 떼어먹었을 때, 화내지 않는 것이 착한 것일까? 그 기준이 궁금하다. 10만원을 기준으로 정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9만 9천 원짜리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내가 보니까 착한 사람은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좋은 친구들과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세상 그 누가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겠니? 하지만, 자기가 직접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단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람의 성격이나 교양에 따라서 구원해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공평한 것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너에게 믿음의 자세만 있다면, 하나님은 물 붓듯이 은혜를 부어주시지. 네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든지, 네 인격이 어떻게 망가졌든지 간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이 네게 임하는 거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틀림이 없는 말인 줄 알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판단력은 정확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이 바로 진리와 생명의 길이요,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복된 길이며, 올바른 인생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가고자 할 때, 그 길에는 많은 장애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죽음의 길에는 별다른 장애물도 없고 고난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 때문에, 마귀가 장난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는, 사탄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믿는 사람을 시험하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사람은 갖가지 고난과 시련을 참으로 많이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막8:35)”라고 하셨습니다. 요컨대,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는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생명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겉보기에는 참으로 화려하고 멋있어 보여도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욕심이나 야망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결코 화려하거나 멋있는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9:58)”고 하셨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은 33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믿으며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가야할 올바른 인생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막8:3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막8:3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인용하는 성구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지켜 살기는 너무나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버리거나 십자가를 지는 일,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말씀을 자꾸 거론하게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생명과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들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 바다를 항해하던 배 하나가 파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 한 사람이 파도에 밀려서 어느 외딴 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섬의 원주민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그를 추장 앞으로 데려 갔습니다. 이 선원은 속으로 ‘내가 이제 저들의 손에 죽게 되는 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자기를 그 섬나라의 임금으로 추대했습니다. 그 선원은 갑자기 왕의 자리에 앉아 권세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하루는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신하들이 하는 말이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왕을 세웠다가 1년이 지나면 그 왕을 다시 무인도로 보내서 그곳에서 죽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된 그 선원은 깜짝 놀라‘구원받을 길이 없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하기를 ‘배를 한 척 지어서 그 배에 곡식과 과일 나무를 싣고 무인도로 가서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임금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1년이 지나자, 그들은 그 임금을 무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임금으로 있을 때에 구원의 길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여생을 편안하게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그리고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일찍 버리고 조금만 더 일찍 죽기를 각오한다면, 영원한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여러 가지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가 힘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집착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버리고 떠나기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막8: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 참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욕심을 열심히 버려야 합니다. 2. 언제나,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먼저 생각하고, 주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창17: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컨대, 바른 길로만 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 인간 스스로 힘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도우심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그 말씀을 지켜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쉬운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지켜 살 때에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만 가지고 노력하거나 애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한때 주색잡기의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방황과 방탕한 생활을 심히 괴로워하면서도 눈물로 기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거스틴의 사고방식이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밤낮없이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오랫동안의 방탕한 생활과 방황의 인생여정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불행스럽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지난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던 그날,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매우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소원은 없다. 네가 바른 길로 가기를 늘 기도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네가 회개하고 바른 길을 선택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오늘 우리는 선택을 잘한 것입니다. 하지만, 입으로만 주님을 찾으면서 주님의 길을 가겠노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길을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을 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아들딸과 우리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고 축복의 근원이 되는 신앙인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