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밤 세부로 떠납니다. 밤 10시 비행기로..
이번 여행은 홈쇼핑을 보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결정된 것이다.
"세부 갑시다."
세부는 여름 날씨라서 추위를 피한다는 의미와 농사짓느라 애썼으니 보상 차원에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텃밭 농부로 땀을 흘렸고, 수확도 마무리했다. 농한기 돌입이다.
무, 배추 수확해서 배추김치, 깍두기, 쪽파김치, 갓김치 등 다양한 김치와의 전쟁을 한 바탕 치르고 난 후
달콤한 보상을 받을 시간이다.
목표를 이룬 후에는 보상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갖고 있다. 작게든 크게든.. 자신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한 해 목표를 이루면 좋은 곳에서 가족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가기로 했다. 보상을 받아야 새로운 힘을 가지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부 여행도 보상 차원이다. 코로나로 3년 넘는 동안 여행을 못 갔으니 남편도 몸이 근질근질한 듯하고
코로나 걱정이 있긴 하지만 해외여행이 가능하다니 일단 떠나기로 했다.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걱정과 염려가 많아지고 대비 계획도 더 많이 세우게 되는 것을 보니..
몇 년 전 중국 청도로 남편과 여행을 갔다. 비행기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한 시간 남짓 가까운 거리도 두려웠다. 혹시나? 만약에 나쁜 사고라도 생긴다면?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고 사고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두 아들은 20대의 성인이고 똑똑하지만 부모 눈에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로만 보인다.
그때는 큰 아들에게만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 안에 무엇 무엇이 들어있으니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동생과 잘 의논해서 하라는 당부 했다. (금고에 대단한 것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금물)
그때도 아무 일 없이 여행 잘하고 와서 아들에 대한 당부는 기우(쓸데없는 걱정)에 그쳤다.
쓸데없지만 이런 당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지인들의 경험 때문이다. 아무 일 없겠거니 생각하다가
일을 당하고 나서야 당황해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았다.
지인이 회사 동료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사연을 들려줬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시고 농사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었고 가정 경제와 재산관리는 어머니가 전부 하셨다.
농촌에서 악착같이 일 밖에 모르고 돈을 모으면 땅과 부동산을 사면서 자산을 불렸다.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아무런 얘기를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관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황당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어머니가 무엇을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고
관리했는지를 전혀 몰랐다. 어느 날 아들이 전화를 받았는데, 어머니가 서울에 사둔 부동산의 임대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다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해서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아들은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 가족은 늦게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지만 몰라서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 자식 간에 돈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하고 불미스러운 사건도 생기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가족 중 누군가에게는 자산상황을 알려주고 기본적인 자료는 공유를 해 두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돌아가신 그분도 가족을 믿지 못해서 알려주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오랜 기간 해오던 일이고 본인이 사고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을 접한 가족들의 당황스러움도 컸을 것이다.
친척에게 돈을 빌려준 채 갑자기 돌아가신 지인분도 있다. 돈을 빌려준 것은 분명한 데, 막상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돈을 갚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증빙자료 하나 없이 친척끼리 구두로만 약속하고 빌려주던 시절 얘기인데 결국 그분의 가족들은 빌려 준 돈을 한 푼도 못 받았다.
여행 떠나며 두 아들에게
엄마, 아빠 필리핀 세부로 여행 간다. (22년 11월 O일 출국, 12월 O일 귀국)
* 아들들에게 알려주는 O가네 자산 현황 및 참고사항(만일에 대비한...)을 알려주고 간다.
무사히 잘 갔다 올게.
1. 금고 비밀번호, 내용물은 표 참조
2. 통장. 도장 현황, 세부 내역은 표 참조
3. 국립현충원 안장대상 : 아빠(20년 이상 군 복무자) 및 엄마(부부합장 가능)
문의는 국가보훈처 전화번호는 OOOO-OOOO
4. 대출(빚)은 없고 타인에게 빌려준 돈도 없음.
이번에 작성한 내용은 지난 중국 여행 때보다 더 자세하게 정리했다. 비밀번호와 세부내역까지 포함
국립현충원 얘기는 직장 근무할 때 현충원 안장 대상인 분이 돌아가셨는데 쉰 살도 넘은 아들이
안장 절차와 방법을 몰라 문의한 전화를 받은 기억으로 적어 둔 것이고
대출과 타인에게 빌려준 돈의 현황 역시 지인의 경우를 생각해 추가한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유언장 쓰는 기분이 이런 걸까?
고작 4시간 남짓한 거리로 여행 가면서... 그래도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정리했다.
가족 단체 톡방에 간단히 A4 1장으로 타이핑한 자료를 올리고 나니 남편의 반응이 "ㅎㅎ"였다.
유언장 같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것 같다.
아들들에게 괜한 걱정과 불안을 안긴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되지만 그래도 알려주고 가는 것이 안심이다.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아들들에게 엄마의 노파심도 전한다. 엄마가 나이를 먹어서 이런저런 걱정과 당부가 많은 것을 이해해 달라는 마음이다.
걱정도 욕심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욕심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