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를 극복한 성악가 최승원 ▣
아마 누구라도 인생을 살면서 '이것은 나의 한계다. 이 이상은 안 돼.'라고 생각하며 누가 정해놓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도전하기를 멈췄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로부터 "이건 네 수준에서 하는 게 아니다. 허튼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는 말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나모리 가즈오나 스티브 잡스 등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언제나 스스로 한계를 정해두지 않았었다. 남들에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일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왜 안 돼?'라는 질문을 던지며 과감히 도전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모두가 존경하는 성공을 거머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자신과 동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인생의 법칙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그래도 나는 이 수준밖에 안 돼. 나는 이 정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력하고 있는 한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테너가 된 최승원 씨이다. 최승원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나도 할 수 있겠다. 나도 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승원 씨는 네 살까지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네 살에 소아마비에 걸리는데, 거동이 불편하여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과거의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도, 떠올리는 것도 너무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때로 다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그의 소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스스로 몸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대학 진학에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목사님이 '노래를 해라'고 말씀하시어 노래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성악을 시작하였지만, 그는 대학교에서 학교 합창단에 지원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학교 합창단에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등․ 퇴장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걸리적 걸리고)… 15초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다리, 악보를 쥘 수 없는 손 등을 가진 그는 그렇게 배척당했었다.
그는 그때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졸업해도, 대한민국 어디에도 합창단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의 집이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면서 크게 바뀌게 된다.
미국에서 그는 성악 이외에 다른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성악을 2년만 더 해봐라"고 말씀해주시어 다시 성악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미국 LA에서 그는 정말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아주 소중한 스승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최승원 씨가 한국에서 꽃 피우지 못했던 그 성악의 재능을 미국에서 꽃 피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만난 스승님은 그에게 오페라를 가르쳐 주고 싶었는데, 그는 오페라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테너인데, 왜 오페라를 배우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는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도 저보고 오페라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은 화를 내시며 "노래는 목소리로 하는 것이다. 누가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오페라를 가르쳐주셨었다.
그리고 최승원 씨는 그 스승님으로부터 '파티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라'는 말씀을 듣고, 파티에 참석하였었는데― 그곳은 파티장이 아니라 오페라 콩쿠르였었다. 그 콩쿠르에서 그는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최승원 씨가 그의 스승님께 "왜 파티라고 하셨나요?"라고 묻자, 그의 스승님은 "네가 긴장할까봐 오페라 콩쿠르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답하였었다. 그렇게 그는 더 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 대회를 앞두고 최승원 씨는 그의 스승님께 "이런 몸으로 도전이 가능한가요?"라고 물었었는데, 그의 스승님은 "Why not?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러냐?' '미리 결론짓지 말고 시도하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렇게 그는 두 번째에 참가한 대회에서도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였고, 1등 24명이 경합을 벌이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서도 우승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한계를 뛰어넘어선 것이었다. 그 당시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서 동양인으로서 우승한 것은 최승원 씨가 최초였었다.
만약 그가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그는 절대로 그 무대를 밟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재능의 싹이 뿌리도 내리기 전에, 잔인한 사람들에 의해 뿌리째 뽑혔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육과 사회적 인식 문제를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육과 사회는 늘 겉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 속에 진주가 들었는지… 아니면 빈 깡통이 들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숨겨진 재능을 길러 내지도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최승원 씨는 자신의 강의를 마치며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 제 강의가 '나의 한계는 내가 정한다.'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한계는 스스로 만드셨나요? 아니면 환경이 줬을까요? 저는 환경이 줬고요, 제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제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넘어서다 보니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나름의 결과를 이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넘어가는 도중에 좋은 결과가 제 앞에 떨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늘도 저의 한계를 내가 정할 때까지 열심히 노래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삶. 그것이 진정으로 멋진 삶이고, 아름다운 삶이고, 성공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하며 도전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누군가는 '왜 안 돼?'라고 생각하며 과감히 도전하여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성공을 거머쥐고 있을 것이다. 실패와 성공은 그렇게 갈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받는 '넌 안 돼.' 혹은 '네 주제에 무슨, 네 분수를 알고 살아라', '네까짓 놈이 뭘 한다고?'등의 말은 정말 쓰레기통에 넣어서 버려야 할 쓰레기다.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그 이외에 아이에 많은 영향을 주는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완전히 박멸해버리는 것이니까.
나는 장애를 극복한 성악가 최승원의 성공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안 돼.'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또한 그렇게 조금씩 도전하고 있다. 무조건 한 발짝을 뗄 필요는 없다. 일단 먼저 반 발짝을 먼저 떼어보자. 그러면, 언젠가 그 반 발짝이 나를 크게 변화시켜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해줄 것으로 확신한다.
2014. 11. 6 옮겨온 글
첫댓글 많은 글 과 사진을 문흥제일노인대학 카페에 올리시는데 왕성한 활동과 실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무궁한 발전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