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무방
최용현(수필가)
10여 년 전 어느 일요일 늦은 밤, EBS TV에서 방영하는 한국영화 ‘만무방’을 보게 되었다. 아침 출근 때문에 조금만 보다가 자려고 했으나 끝까지 다 보았다. 깔끔한 영상에 흥미진진한 스토리,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다. 밤 한 시쯤 잠자리에 들었지만, 뇌리에 남아있는 영화의 잔상(殘像)들 때문에 밤잠을 설치다가 출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만무방은 염치가 없는 막된 사람을 뜻하는데, 주로 강원도에서 쓰는 말이다. 춘천 출신 김유정의 단편소설 ‘만무방’을 영화화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원작은 소설가 오유권이 1960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이역(異域)의 산장(山莊)’이란 중편소설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61년에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변강쇠’(1986년)와 ‘사노’(1987년), ‘변금련’(1991년) 등 에로사극으로 유명한 엄종선 감독이 1994년에 영화로 만들어 그해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6관왕,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 등 3관왕을 차지했고, 인도와 몬트리올, 마이애비 국제영화제에 출품하여 본선에 진출하였다. 또,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로더데일 국제영화제와 마이애미 폴라델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만무방’은 국내외의 많은 수상에도 불구하고, 제작한 지 1년이나 지나서 개봉한 탓인지 서울 관객 1만 4천명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그런데, 개봉한 지 24년이 지난 2018년 말에 한 유튜버가 유튜브에 영상을 공개하자, 불과 3년 만인 2021년 말까지 170만 명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유튜브의 ‘만무방’ 돌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접전지역의 눈 덮인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외딴 오두막집에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중년 여인(윤정희 扮)이 혼자 살고 있다. 낮에는 태극기를 걸고 밤에는 인공기를 걸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면서 살아가던 그녀의 집에 전쟁 통에 가족을 모두 잃은 노인(장동휘 扮)이 절뚝거리며 찾아든다.
여인은 노인의 다리를 치료해주면서 문간방에 거처하게 한다. 살을 에는 맹추위를 견디지 못한 노인은 안주인이 자는 안방에 입성하게 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두 남녀는 살을 섞게 된다. 방에 군불을 넣을 땔감이 바닥나자, 문간방의 마루를 뜯어서 불을 지피지만 이마저 금방 동이 난다.
그 무렵, 인민군에게 쫓기던 젊고 건장한 남자(김형일 扮)가 땔감을 해오면서 이 오두막집은 두 남자가 생존경쟁을 벌이는 전쟁터로 변한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전쟁에서 안주인에 의해 판정승을 거둔 젊은 남자는 따뜻한 안방에서 안주인을 안고 자게 되고, 패자로 전락한 노인은 다시 냉기 가득한 문간방으로 내쳐지고 만다.
팽팽한 긴장 속의 삼각관계는 인민군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새색시(신영진 扮)가 찾아와 문간방에서 하룻밤 추위를 피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자신을 재워준 노인의 은혜를 잊지 않은 새색시가 집에 가서 식량과 땔감, 이불을 싸들고 와서 문간방에 입성함으로써 노인은 다시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자, 젊은 남자는 동거중인 안주인 몰래 새색시에게 눈독을 들인다. 새색시가 산에 나무를 하러가자 젊은 남자도 따라나선다. 그는 새색시에게 ‘노인들끼리 안방에 살게 하고 우리 둘이 문간방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데, 새색시는 ‘인간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젊은 남자는 새색시를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이를 눈치 챈 안주인은 문간방에 신접살림을 차린 노인과 새색시를 쫓아내려 하는데….
욕망을 좇는 세 사람과 상식을 지키려는 새색시 사이의 긴장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젊은 남자가 휘두른 폭력에 넘어진 새색시가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고, 달려들던 노인마저 젊은 남자의 무자비한 폭력에 목숨을 잃는다. 이를 지켜보던 안주인은 호롱불이 넘어져 불붙는 안방에서 뛰쳐나와 젊은 남자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오두막집은 불길에 휩싸여 타버리고, 영화의 첫 장면처럼 혼자 남은 안주인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양손에 쥐고 어느 것을 걸어야할지 갈팡질팡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인간의 진면목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제대로 드러난다. 이 영화는 일시적으로 법과 질서가 정지된 전쟁 상황과 외딴 오두막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생존경쟁을 벌이는 네 사람의 삶에 대한 욕구와 원초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갈등과 투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두 만무방과 새색시를 죽음에 몰아넣고서야 끝이 난다.
기승전결의 전개가 깔끔하고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와 함께 엄종선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도 빛을 발한다. 한국전쟁이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남북이 분단된 원상태로 돌아갔듯이 이 오두막집의 전쟁도 세 사람의 주검을 남기고 안주인만 남은 처음 상태로 되돌아간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만무방’에서의 외딴 오두막집은 4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엄동설한에 무대에 선 배우와 스텝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60년대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장동휘는 70대 중반에 베테랑다운 열연으로 말년의 대표작을 만들어냈다. 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에서 가장 생명력이 긴 여자주인공 윤정희는 중년의 나이에 원숙한 연기로 또 하나의 값진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최근, 윤정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로 파리의 아파트에서 홀로 투병중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남편과 딸이 친정 쪽 형제자매들의 연락을 차단하고 환자를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 영화계의 큰 별 윤정희의 평안한 말년을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