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사장’으로 살았다. 서른여섯에 건설회사 사장이 돼 무려 25년이다. 몇 해 전에 업종은 ‘호텔’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최고책임자로서의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서 그의 직업은 ‘CEO'로 통한다.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코리아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 CEO다. 1980년대 요르단 지사장으로 중동 건설 현장에 파견을 나갔고, 거친 건설 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고자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돌아올 때는 사장이 돼있었다. 계획했던 자리는 아니었으나 달라진 ‘소명(召命)’에 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고 한보건설, 유원건설, 극동건설, 효명건설 등을 거치며 경영인으로서 만날 수 있는 단맛 쓴맛을 모두 맛봤다. IMF때 회사가 부도난 후 창업도 해봤으나 남은 것은 ‘전문경영과 사업은 다르다’는 경험뿐이었다. 이후 무려 2년이나 강원도 산속에서 칩거 생활을 했지만 2005년에 호텔 사장으로 화려하게 재기해 사업 확장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자 주변에선 다시 ‘역시 CEO 권대욱'이라는 말이 나왔다.
CEO가 운명인 듯 다시 경영일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던 그가 최근 일대 ‘사건’을 저질렀다. 일요일 저녁 전국에 방송되는 TV 오락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한 것. 그는 KBS 2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모집한 ‘청춘합창단’ 오디션에 응시했고 여느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긴장되고 상기된 모습으로 애창곡을 불렀다.
심사위원들과 시청자들은 그가 중후하고 안정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향수’에 감탄했고, 이어 “한번도 사장이란 자리를 내 삶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는 그의 고백에 또 한 번 놀랐다. 그의 발언들과 노래실력은 방송 직후 큰 화젯거리가 됐고, 이후 그는 합창단에 합격해 활동하며 지난여름 온 국민을 노래로 감동케 했다.
“합창단 활동으로 바람 빠진 풍선 같던 삶이 다시 탱탱해졌다”며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권대욱 사장을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서울 호텔에서 만났다. TV에서 본 것만큼 말쑥했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세련된 말솜씨와 몸에 밴 매너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리고 눈에는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다. 그에게 지난 30여년의 경영인생과 3개월여의 합창단원 생활을 들어봤다.
◆ 고대생들 앞에서 ‘단장의 미아리 고개’ 부르던 소년, ‘엔지니어’를 꿈꾸다
권대욱 사장은 다섯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했다. 당시 집은 안암동 근처였는데 동네에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맛깔 나게 부르는 꼬마’로 유명해 하숙하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그를 불러 유행가를 청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바느질하며 흥얼거리는 노래들을 어깨 너머로 주워듣고 기가 막히게 재현했다는 후문.
하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겨하던 소년은 철이 들고 집안형편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사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친척집과 친구집을 전전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농업토목과에 수석 합격했다. 1970년대에는 중동 건설 특수를 타고 건설 관련 기술자들이 최고 유망 직업 중의 하나로 떠오를 때여서 매우 인기가 높은 학과였다.
그는 졸업 후 농림수산부 농업토목기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이 공무원에 맞지 않았고, 엔지니어로서 유명 토목기사가 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민간 건설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 36살의 건설회사 사장, “이명박 대통령(전 현대건설 사장)과도 경쟁”
‘엔지니어 권대욱’이 CEO로 거듭난 계기가 된 것은 중동 건설 현장 파견. 권 사장은 토목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현장을 다뤄보고 싶은 마음에 해외 파견을 지원했고, 1984년 34살의 나이로 요르단에서 7명의 현장 소장들을 지휘하며 댐 건설에 성공한다. 당시 건설현장은 매우 열악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먼 타국에 노동력을 팔기 위해 온 산업인력들은 힘든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세게 행동했다. 이런 거친 작업환경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수한 권대욱 사장은 1986년 귀국과 동시에 36살의 젊은 나이에 사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이후 그는 도로, 댐, 항만, 철도, 아파트, 병원, 공항, 발전소 등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냈고 열사의 사막에서 범 같은 현장소장들 통솔하며 죽어가던 현장을 모두 살려냈다. 댐이 무너지고 턴넬이 붕괴되는 사고를 당해서도 눈 깜짝 않고 순식간에 수습했다.
하지만 그는 사장이 된 후 엔지니어로서의 일과는 점점 멀어졌다. 첨단토목기술 대신 매니지먼트, 마케팅, 세일즈 등을 공부했고 건설 현장보다는 회의실과 접견실 등에서 바이어들을 만나는 일이 더 많았다. 당시 국내 건설회사의 경쟁은 치열했다. 이명박 대통령(전 현대건설 사장)을 비롯해 걸출한 인물들이 활약하며 해외 건설붐을 이끌던 시기다.
“CEO가 되어 연간매출 수천억을 올리며 천명이 넘는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매우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업을 하다 보면 속에 없는 말도 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겉에서 보기엔 화려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 호텔 CEO로 재기까지…“좌초, 도전, 또 실패, 다시 도전”
1997년 IMF 한파는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고 권 사장이 해외담당사장으로 있던 50년 역사의 알짜배기 극동건설도 좌초됐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경영으로 건설업계에서 비교적 건실한 기업으로 통하며 업계 5위까지 올랐지만 신규 투자 계약사의 부실로 IMF를 맞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이를 계기 삼아 회사에서 나온 후 민간건설의 조달청 역할을 할 수 있는 온라인상의 건설거래소를 만드는 사업 아이템으로 창업했으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건설업계에서 실제로 하지 못했던 깨끗한 건설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해 소비자와 건축업계 사이에 신뢰를 쌓고, 건설인들이 대접 받고, 엔지니어들이 인정받는 풍토를 만들고 싶었죠. 하지만 전문경영과 사업은 달랐고, 창업은 실패했습니다. 이후 산중에 들어가 2년 정도 지냈는데 아주그룹의 문규영 회장의 제안으로 호텔서교 하얏트 리젠시 제주의 사장을 맡으며 호텔업과의 인연이 시작됐죠.”
현재 그는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코리아에서 일하고 있다.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매니지먼트 코리아는 56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고유의 호텔 그룹인 앰배서더와 세계적인 호텔체인 그룹인 아코르가 공동 출자한 호텔운영전문 기업입니다.
터프한 건설 업계에 있던 권 사장이 세심한 호텔 업계에 뛰어들며 사소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의 경험은 장소가 바뀌어도 빛을 발한다. 그는 직원들을 믿고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경영의 기본을 실천하고 있으며, 호텔을 확장하는데 있어 그의 부동산과 건설, 엔지니어링 정보는 정확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사장만 25년째인데도 사장으로서의 삶이 간단치가 않습니다. 내 생활이 없고, 겉에서 보는 만큼 화려하지 않고 고뇌가 큽니다. 오너와 직원들 사이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죠. 하지만 이제야 일과 생활의 균형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저 뿐 아니라 직원들도 함께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 한 바퀴 크게 돌아와 선 합창단원…“간절한 꿈을 이루자 새로운 꿈이 펼쳐졌다”
다섯 살 꼬마가 품었던 ‘노래하는 사람’의 꿈이 실현된 것은 그의 나이 환갑(還甲).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 시점이다. 지난해 남자의자격의 합창단 도전 과제를 보고 매료됐던 그는 올해 4월 청춘합창단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합창단에서 노래 한 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열망이 가득 차올라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후 서류심사 합격통보를 받은 후 그는 회사와 주주들에게도 사전 승인을 받았다. 지원했다고 회사에 말했다가 떨어지면 창피한 일이지만 오디션 합격 전에 회사에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제나 저제나 말할 시점을 고민하던 차에 권 사장은 서정호 앰배서더호텔그룹 회장과 같이 호텔 부지를 보러 가게 됐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업무와 관련한 성취가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겁니다. 그날 다들 기분이 매우 좋았고 이어진 저녁자리에서 취기가 올랐을 때 청춘합창단 지원한 걸 고백했죠. 만일 그때 회장님의 대답이 ‘아 그래요? 뭐 좋지요’ 정도라면 포기해야 했을 겁니다.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그건 하지 말라는 이야기니까요. 만일 묵묵부답 아무 말 없이 술만 드신다거나 화제를 딴 데로 돌린다거나 뭐 이런 일이 있으면 이건 차라리 말 하지 않은 게 나았다는 의미고요. 그런데 회장님이 ‘아! 좋아요. 사장님 노래 잘하시잖아요! 아 좋지요! 하세요’라고 대답하더군요. 표정과 분위기 보니 반 승락이 아니라 적극 지원이었죠.”
덕분에 권 사장은 오디션에 맘 편히 임할 수 있었고, 오디션 때 출근하고 오셨냐는 이경규 씨의 질문에 "출근 못했습니다"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었다.
화재가 되었던 권대욱 사장의 오디션 장면 ⓒKBS
“오디션에서 제가 했던 말들이 나중에 인터넷과 매체를 뜨겁게 달굴 화제의 말이 될 줄은 당시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장차림이었던 건 오디션 끝나고 바로 출근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중후하다’는 반응이 나오니 매우 멋쩍었습니다. 의도치 않았던 여러 말 말들이 저를 유명하게 만든 단초가 되었고 또한 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으니 세상은 참 알 수 없고 말은 참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습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는 노래 수업을 정식으로 받아본 적도 없고, 악보도 볼 줄 몰랐다.
“엄청나게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악보를 볼 줄 몰라서 계속 듣고 노래를 완전히 외워서 불렀지요. 특히 아이돌 메들리는 전부 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는데, 여직원들에게 도움을 받아 음악을 따로 구해 차에서 매일 들었지요. 신기한 것이 아이돌의 노래도 자주 들어보니 좋더라고요.”
그는 현재 청춘합창단과 관련해 두 가지 일을 계획 중이다. 하나는 방송에서 소개되지 않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자신의 메시지들을 책으로 엮어내는 것. 이를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다른 하나는 ‘청춘합창단’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합창단원 모두가 형제·자매·남매가 된 만큼 소중한 인연들을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 창단했다. 일정이 바빠 합창단원으로서 연습하고 노래하는 일은 많이 못하겠지만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지원기관을 연결하는 일 등을 맡을 계획이다.
“청춘합창단과 관련해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굉장히 즐겁습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일입니다. 합창단원으로서 하모니를 이뤄내는 꿈은 이미 이뤄졌으니 새로운 꿈을 꿔야지요. 하고 싶은 일 있으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도전하십시오. 주저하고 망설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을 꾸고 도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