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1-11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율법과 은혜 #정죄와 용서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구약 성경 중 모세오경(토라; 창-신)에는 율법을 613가지 규칙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하지 마라’가 365개로 1년의 날짜와 같고, ‘하라’가 248개로 인간의 뼈와 장기의 숫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했습니다(마5:17).
사람에게 있어서 죄가 많든 적든, 큰 죄든 작은 죄든 간에 죄는 죄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간음한 여인과 같은 죄를 짓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난 간음만이 죄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으로 짓는 간음은 죄가 아닙니까?
사람을 죽인 자만이 죄인입니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 역시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합니까?
본문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목적으로 시험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예수님께 드리되었지만 예수님은 은혜로 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사람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구원하려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봅시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고자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돌아갔다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땅에 두 번씩이나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을 쓰셨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가지고 온 돌판에 두 번에 걸쳐 직접 십계명을 쓰셨던 것을 상기시킵니다(출 31:18, 출 34:1,신 4:13, 신 9:10).
즉 예수님은 땅에 두 번에 걸쳐 쓰셨다고 하신 것은 계명을 땅에 쓰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과연 누가 죄가 없겠느냐는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스로가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찔림)을 느끼고 돌을 내려놓고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죄인을 구원하실 분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이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깊은 마음을 꽤 뚫어 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그 어떠한 사람도 비판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비판받을 자요 정죄받을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물고 뜨으면 즉 서로가 정죄하고 비판하는 삶은 공멸하는 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드리되는 율법대로라면 간음한 여인처럼 모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간음 죄는 십계명 중 제8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잡혔다고 이 여인만이 율법을 어긴 자입니까? 그리고 죽어야 합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으로 또는 은밀하게 죄를 짓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다면 율법대로 모든 사람은 죽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을까요?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의 법 아래 가두고 매인바 되게 하였습니다(율법의 저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이 지키지 못할 법을 주셨을까요?
그렇다면 율법과 계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말씀합니다(롬7:12).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을 정죄하라고, 지킬 수 있어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목적으로 주신 것이며, 나아가 구원함에 이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율법이 우리가 죄인됨을 알게 하고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통로)가 되어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갈3:22-24).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율법대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은혜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인 복음입니다.@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며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며 고발하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발 가운데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그 누구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크고 작은 죄를 다 범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사람보다는 작은 죄를 짓었기 때문에 나보다 큰 죄를 지은 자를 정죄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사함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 누구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하시면서 죄와 허물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간음한 여인의 죄와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율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것입니다.
여기서 간음한 여인이 바로 우리가 간음한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죄와 허물로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자유함을 얻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자유하고 기뻐겠습니까?
여러분, 이 간음한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자유하며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기쁜소식인 복음입니다.
어떠한 죄를 짓었든지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다시금 기쁨과 자유를 누리시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는 다시 범죄하지 않기 위한 죄인을 향한 주님의 가장 큰 은혜(배려)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인됨을 알고 예수님께로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삶은, 죄사함을 받은 은혜가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마18:21-35 -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빛진 자)
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신의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는 행태는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악한 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를 마지막 때 결산할 것을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받은, 용서받는 자라면 이웃을 당연히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로부터 죄사함 즉 용서받은 자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는 모르고 남의 티만 보는 행위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지 말고, 자신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죄사함 즉 용서받은 우리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큰 은혜와 큰 사랑을 안다면, 받았다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힘쓰게 될 것입니다.
어느 교정시설에 재 수감당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같이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잠 26:11).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의 은혜를 아직 중심으로 깨닫지 못했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큰 은혜와 큰 사랑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매일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어떠한 한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주님이 율법에서 자유하게 하셨기에 하라, 하지말라는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무엇으로 구원받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은혜와 큰 사랑을 알게되면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알고 믿게 되었을까요?
죄와 죽음에서 건지신 구원자로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함이 없다 하셨는데 우리는 이웃을 정죄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율법적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죄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큰 은혜와 큰 사랑을 베푸신 이유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을 죄인된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결혼한 자녀들이 서로 잘 사는 모습을 볼 때 부모의 마음이 기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신자들이 서로 용서하며 복음 안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율법과 은혜 #정죄와 용서
하나님, 율법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베푸신 은혜를 알게 하셔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정죄와 비판의 삶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신 은혜를 알게 하신대로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적용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만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셔서 온전한 순종으로 따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