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진주 남강 진양호
이재영
나는 초, 중, 고교를 경남 진주에서 다녔는데, 집은 시내 중심에서 3km 거리의 시 외곽인 교육대학교 옆, ‘신안 정미소’ 맞은편에 있었다.
집에서 시내 쪽으로 1km쯤 가면 ‘나불천’이라는 폭 40m 정도의 개천이 흐르고, ‘개량 다리’ 교량을 건너면 홍수로부터 시내를 보호하는 길고 큰 둑과 만나게 된다.
‘가마 못’ 아래 ‘진주 형무소’ 근처에서 높이 약 7m로 출발하여 1km 넘는 거리를 이어온 이 둑은, 개량 다리에서 3백 미터쯤 남강 쪽으로 더 가다가 서장대 바로 밑에서 끝났다.
우리 집에서 남쪽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7백 미터쯤 걸어가면 남강이 나오고, 강 건너에 해발 172m인 망경산(망진산)이 우뚝 서서 나무 한 그루 없는 가파른 위용을 자랑했다.
딱 한 번, 강을 건너 겁도 없이 정상까지 기어 올라갔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서장대에서 남강 상류로 6km쯤 거슬러 오르면, 홍수조절 목적으로 지어진 높이 21m, 길이 975m의 거대한 남강댐이 나온다.
이 댐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1970년에 준공됐는데, 그전에는 거의 1년에 한 번 이상 남강이 넘쳐서 온 들판이 누런 황토물에 잠기곤 했다.
내가 하동 악양에 살던 1959년 9월의 ‘사라호’ 태풍 때는 마당이 물에 잠겼다고 전해 들었고, 진주로 이사 온 3학년 이후에도 거의 매년 아래 텃밭까지 침수됐었다. 그때는 시내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개량 다리도 물에 잠겨서, 아침에 등교를 못 하거나, 수업 도중에 일찍 조퇴한 적도 있다.
학교 마치고 한가하게 올 때는 개량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불천 강변을 따라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농로로 내려와 집으로 왔다.
오다가 길가의 채소밭에서 당근, 무, 우엉을 슬쩍 서리해 먹는 재미도 있었고, 자갈길인 도로를 걷는 것보다 발바닥이 훨씬 편하고 좋아서였다.
작은 논들이 나불천 대밭에서 우리 집 근처까지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고, 농로에서 갈라져 우리 집까지 두 명이 겨우 비킬 논두렁길이 나 있었다.
홍수가 지나간 어느 날, 논두렁 옆으로 졸졸 흐르는 좁은 물고랑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갇혀있는 큰 메기 한 마리를 발견했다. 가끔 작은 물고기는 봤지만, 메기는 처음이라 신나서 풀대에 꿰어 집에 가져왔다.
어머니가 메기탕을 끓여서 제일 큰 동강이를 내게 주셨는데, 여태껏 먹어본 생선 탕 중 최고로 맛있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던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가 지금은 진양호에 수몰된 진양군 귀곡면에 있었다. 그래서 몇 번 아버지를 따라가서 풍금도 치고 놀다 오곤 했다.
우리 집 앞에서 하동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자갈길을 10여 분 달려가면, 북쪽 산청에서 내려온 경호강이 서쪽에서 온 덕천강과 만나는 ‘너우니’라는 곳에 이른다.
그곳에, 수면에서 높이 1m나 될까 싶은 아치형 ‘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큰 장맛비가 온 뒤엔 다리가 물에 잠겨, 운전사가 눈짐작으로 건너느라 애를 먹었다.
그 다리를 건너 삼거리에 내리면, 우측에 마을로 들어가는 들판 길이 나 있고, 2km쯤 걸어가면 좌측 야산 등성이 너머에 ‘귀곡 국민학교’가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남강댐으로 만들어진 진양호에 놀러 갔다. 막 개장된 ‘진양호 공원’에 노 젓는 2인승 물놀이 보트가 있어, 한 척씩 유료로 대여해 타고 놀았다.
보트는 노를 젓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므로, 뒤를 돌아보고 살피며 저어야 한다. 양손에 잡은 노를 힘껏 저어 속도를 내고, 급회전도 하며, 초등 동창인 죽마고우와 모처럼 신나게 놀았다.
수몰되기 전에 몇 번 와봤던 곳이라서, 검푸른 수면 아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아니까, 오히려 무서움이 덜했다.
전에 들판 길을 걸었을 때 우측 멀리 보였던 높은 산마루가 작은 섬이 되어 호수 위에 떠 있고, 수십 미터에 달했던 포플러라 불리는 사시나무의 우듬지가, 불과 몇 미터 높이로 수면 위에 우뚝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수영을 제대로 못 했는데, 고여 있는 넓고 깊은 저수지나 웅덩이가 집 근처에 없어서 그랬다.
남강은 흐르는 물이라, 농구공을 안고 떠서 개구리 흉내를 내거나, 자맥질로 물속에 들어가도, 둥둥 떠내려갈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녀 수영 잘하는 ‘조일 견직’ 아들 성정수로부터 배우기로 하고, 섬처럼 된 산등성이 기슭에 보트를 대고 모두 내렸다.
공원에서 1km나 떨어진 한적하고 후미진 곳이라, 수영복 없어도 팬티만 입고 수영강습을 받았다.
“몸에 힘 빼고 가만히 누워있어도 물에 안 빠져 죽는다.”
수영 강사가 된 정수가 물속에서 시범을 보이는데, 정말 몸만 잠기고 머리는 숨 쉴 수 있게 코가 물 위로 나와 있다.
그날 제대로 배운 개구리헤엄인 평형 영법으로 나는 어디서든 자신 있게 수영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형도 어설프게 물 튀기고 속도는 느리지만 가능하다.
그해 겨울방학 때, 사귀는 여자 친구와 단둘이 진양호에 가서 보트를 빌렸다.
코트 밑에 짧은 스커트 입고 부츠 신은 여자 친구와 마주 보고 앉아, 능숙하게 노를 저어 자랑하며 호젓한 그 산등성이 섬으로 향했다.
보트를 댄 우리는, 호젓하고 양지바른 곳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다가올 미래를 얘기하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 내 품속에 안겨 행복해하던 그 여자 친구는, 지금 결혼 48주년을 맞은 내 아내 구복자이다.
(언젠가 신혼 시절 여름에 합천 처가에 놀러 가서, 밤에 손위 동서와 인근 저수지에 멱감으러 갔는데, 나는 헤엄치며 폼을 잡았고, 수영 못하는 동서는 비누칠만 하며 멀리 가지 말라고 염려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부모 60세 이상인 독자로 방위병(防衛兵)으로 6개월 복무하면 되었다.
그러나 입대해서 6개월이면 의가사(依家事) 제대가 가능해서, 군대 생활 경험도 해볼 겸 입대했고, 논산 훈련소를 거쳐 후방인 원주 시내에 있는 제1 군수지원 사령부 산하, 307 병기대대의 ‘802 화포 수리반’ 서무병으로 복무했다.
중대장과 대원 대부분은 장기 출장으로 각 화포부대를 순회하며 점검, 수리 업무를 수행했고, 내무반에는 내무반장 중사와 월남전 참전 귀국 병장 등 고참 세 명과 내 사수인 황 일병만 있었다. 내무반 구석에 통신부대에서 파견된 상병 한 명이 종일 교환대 앞에 앉아 근무했다.
한창 땡볕이 내리쬐는 7월 중순, 나는 4박 5일 유격훈련 교육에 차출되어 카빈총 메고 완전군장으로 참가했다.
트럭에 실려 가서 산기슭에 내려진 우리는 2열 종대로 출발해, 산골짝 개울물도 말라붙은 강원도 험준한 산길 20km를 나중엔 한 줄이 되어 행군했다.
카빈총을 지팡이 삼아 거의 기다시피 산등성이를 넘고 넘어, 개구리가 헤엄치는 논의 물 떠 마시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찬물 실컷 마시며 세수하고, 미리 와서 대기한 식당차에서 배식받은 늦은 점심을 꿀맛으로 먹어 치웠다. 특별 반찬 불고기에 사과도 한 개 지급됐다.
휴식 후, 아픈 몇 명은 앰뷸런스 타고 자대로 복귀하고, 나머지 200여 명은 자갈길을 한 시간쯤 행군하여, 큰 강변에 있는 유격훈련 교육대에 도착했다.
지금은 ‘간현 유원지’로 용도가 바뀌었고, 영화 ‘박하사탕’에 나온 긴 철교가 있는, 바로 그 ‘섬강’ 유역의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교육대 막사 주변 산비탈 숙영지에 개인용 삼각텐트를 치고, 지급된 얼룩무늬 없는 국방색 CS복으로 갈아입고, 올빼미(훈련병) 번호가 새겨진 철모를 받아 썼다. 첫날은 정신 교육과 약간의 몸풀기 체조만 하고, 저녁 식사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교육 2일 차에는 20명 정도씩 10여 개 분대로 편성되어, 빨간 모자 쓴 조교로부터 체력 단련 PT 체조 15개 중 몇 개씩 배우고, 힘들게 여러 번 실시하면서, 교육대 주변에 흩어져 있는 훈련코스를 순서대로 돌았다.
외나무다리 건너기, 철봉 잡고 건너기, 진흙탕 위 그물 건너기, 통나무 넘기, 밧줄 잡고 경사면 오르기, 그네 타고 웅덩이 건너기 등등.
PT 체조 8번 ‘몸통 받쳐 온몸 비틀기’가 제일 힘들었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양다리를 붙이고 쭉 편 상태로 지면에서 45도 들어 올린다. 고개를 들고 배꼽을 쳐다본다.
이 준비동작에서, 구호 하나에 양다리를 좌로 15도 기운다. 머리는 반대쪽 우측으로 들고. 둘에 양다리 좌로 30도, 머리는 더 들고. 셋에 양다리 좌로 45도, 머리 더 들고. 넷에 준비동작으로 원위치. 다음 둘 둘 셋 넷은 반대 방향으로.
이 PT 8번 네댓 번만 하면 반쯤 죽어 난다. 머리를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여성들 운동으로 PT 체조가 인기라니, 나 원 참.
교육 3일 차 훈련 중에는 아주 힘든 ‘화생방 훈련’도 있었다. 방독면 씌워 밀폐된 방에 집어넣고 ‘쪼그려 뛰기’ 시키다가, 가쁜 숨이 한창 차오를 때 방독면 벗게 하고, 최루가스 뿜어 넣어 눈물 콧물 쏟게 만드는 매우 고약한 훈련이다.
교육 마지막 날인 4일째, 훈련병 200여 명은 행군대열로 교육대를 나와, 이미 쉬어버린 목청으로 고래고래 군가를 부르며, 섬강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교육대 맞은편 기암절벽 소나무 숲 뒤로 들어갔다.
줄 타고 건너가기, 외줄 타기, 줄 타고 15m 절벽 오르기, 줄 타고 수직 절벽 하강, 등 산악 훈련코스가 차례로 펼쳐져 있었다.
코스마다 우리를 인솔해 간 조교 외에 현장 조교들이 배치되어, PT 체조 12번 ‘몸통 비틀기’와 13번 ‘팔 올려 발 닿기’로 얼차려를 주면서, 몸을 충분히 풀게 하고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심신이 느슨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큰 사고가 생기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절벽을 가로질러 만든 줄타기 코스는 바라만 봐도 아찔했다.
세 줄 타기와 두 줄 타기는 허공 20m로 긴 거리지만, 발 디디는 줄과 손으로 잡는 줄이 따로 있어, 간은 졸이면서도 그런대로 쉽게 건넜다.
그런데, 외줄 타기는 선박 닻줄 굵기의 팽팽한 줄 위에 엎드려, 그냥 기어서 건너야 한다.
“왼발을 아래로 내리고, 줄 위에 엎드려 오른발 발등을 줄에 걸친다. 머리는 줄에 밀착시키고, 시선은 전방 목표지점을 향한다. 왼팔을 뻗어 앞쪽을 잡고, 조금씩 당기면서 전진한다. 몸과 줄이 일치되어, 체중의 중심이 줄에 실리는 것이 요령이다.”
조교의 설명을 듣고, 철모 끈을 꽉 조여 맨 뒤, 땅 위 60센티 높이의 줄 위에 엎드렸다. 어릴 때 철봉 위에서 기어가기 몇 번 해봤지만, 흔들리는 밧줄은 처음이다.
중심을 잡고 왼발로 땅을 짚어 손으로 당기며 조금 나가자, 눈앞에 아득한 절벽 낭떠러지가 전개된다.
허리에 안전줄도 매여있고, 닻줄 아래에 보호망이 펼쳐져 있는데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왼발이 지면을 떠나 2m도 채 못 가서, 뱅그르르 돌면서 공중에 매달렸다. 다행히 돌 때 왼쪽 다리 무릎 안쪽이 줄에 걸려, 얼른 오른발을 끌어올리고 발뒤꿈치를 줄에 걸쳤다.
“00번 올빼미, 침착하라! 그 자세로 계속 전진하면 된다.”
조교의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앞서 하던 대부분 병사도 이 상태로 건너는 걸 봤다. 실패는 했지만, 거꾸로 매달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10여 미터 거리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빼미 바비큐 한 마리 잘도 건너갔다.
차량이 날라다 준 점심밥, 반찬, 국을 배식판에 퍼서 담고, 어느새 동지애를 느끼는 분대원끼리 옹기종기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다.
집에서는 모두 귀한 자식들인데, 여기서는 영락없는 거지꼴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도, 다 지나고 나면 즐거웠던 추억이 되겠지.
배 속이 든든한 상태로 절벽 오르기와 내리기 코스를 연이어서 했는데, 줄 타고 수직 절벽 하강하는 코스는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마지막은 대망의 ‘레펠 하강’ 코스였다.
땅바닥에 누워 PT 체조 15번 ‘노 젓기’, 일명 ‘배 젓기’를 했다.
양다리를 붙여 뻗고, 팔을 펴서 올려, 팔과 다리를 좌우로 엇갈리게 젓는다.
치솟은 기암 협곡의 소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니, 멋진 시라도 한 수 나올법하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저 넓은 봄 바다에......’
적당히 몸을 풀고 비탈길을 조금 올라가니,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레펠 하강장’이 있다.
한 명씩 차례로 나가서, 가죽장갑 낀 손으로 활차(도르래) 손잡이를 잡고, 강 건너편까지 활강하는 것이다. 안전줄도 없고 잘못 떨어지면 물귀신이 될지도 모른다.
“활강하다가 건너편 조교가 깃발을 올리면 다리를 V자가 되게 들어 올린다. 깃발을 주시하다가, 깃발이 내려가면 손을 놓는다.”
몇 명 출발한 다음에 차례가 되어 ‘하강장’에 서니, 30m도 더 되는 절벽 아래는, 깊어서인지 시커먼 ‘용 소’ 같은 강물이 휘돌아 흐르고, 멀리 강 건너 거리 100m쯤의 모래밭 위에 빨간 옷 입은 조교 서너 명이 보인다.
철제 로프에 얹힌 활차 아래 수평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섰다. 조교 한 명이 뒤에서 내 혁대를 잡고 ‘하강장’ 끝에 세운다.
“깃발을 주시하고, 올리면 V자! 내리면 손을 놓는다.”
옆에선 다른 조교가 다시 한번 강조한다. 멀리 강 건너 조교가 커다란 빨간 깃발을 내려 들고 있는 게 보인다.
그 조교 뒤쪽, 로프 끝에 가마니 몇 개가 쌓여있다. 충격 방지용 같다.
“애인 있습니까? ” 조교가 묻는다.
“예, 있습니다.” 내가 대답한다.
“이름이 뭡니까?” “구 복자입니다.”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실시!” “복자야~”
“더 크게 부릅니다!” “복자야~! 복자야~!”
어느새 활차가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손잡이를 꽉 잡고 건너편 깃발만 쳐다본다.
속도가 너무 빨라 이대로 가다간, 가마니 더미에 처박힐 것 같다. 얼떨결에 오른손을 떼어 로프를 거머쥐었다. 하강 속도는 약간 줄어드는데, 가죽장갑에 불이 붙은 듯 엄청나게 뜨겁고 화끈거린다.
얼른 로프에서 손을 떼 도로 활차를 잡고 깃발을 주시하는데, 번뜩 깃발 올라가는 게 보인다.
다리에 힘주고 V자로 올리려는데, 군화가 무거워 절반도 안 올라온다. 몸은 쏜살같이 내려가고, 건너편 조교의 깃발은 안 내려진다.
이대로 가면 틀림없이 가마니 더미에 충돌할 거다!
‘에라 모르겠다.’ 손을 놓았다! 몸이 떨어지는데, 그제야 깃발이 내려간다.
“철버덕, 풍~덩.” 엄청난 수압의 물이 콧구멍 속을 때린다.
“어푸, 어푸~ 꿀꺽!”
물을 마시며 헤엄을 치는데, 군화가 무거워 제대로 안 뜨고 모랫바닥으로 빠져든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가슴 깊이로 나오자, 달려 들어온 조교가 부축해서 끌고 나왔다.
“깃발 내리기 전에 손 놓으면 어떡해? 송장 치를 뻔했잖아!”
제 잘난 올빼미 한 마리 익사할 뻔했다. 헤엄을 못 쳤으면 어찌 됐을까?
문득, ‘진양호’에서 수영 가르쳐준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진양호에서 수영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날 ‘섬강’에서 몽달귀신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도 아찔해진다.
아, 진주 남강 진양호.
내게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과 생존의 기술을 안겨준 역사적인 공간이다.
[ ‘남강문학협회’ 회지 「남강문학」 등재 예정임 ]
|
첫댓글 복자야~ 복자야~
오직 그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