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안 갈맷길 7백리 九浦八臺 七十二景을 찾아
-고산 윤선도 유배지 죽성에서 송정 가을포까지-
한 사내가 있었다. 때는 광해군 8년(1616)으로 세상은 이이첨(李爾瞻)의 그늘 아래 있었다. 전횡과 부정이 횡횡하던 시절, 한 젊은 유생이 차마 그 꼴을 보기 싫어 입을 열어 상소문(병진소: 丙辰疏-이이첨의 독선과 횡포에 대한 죄를 물어 목을 베고, 그 무리들을 처단하라는 내용)을 올렸는데, 군왕이란 자는 그 상소를 읽지 못하고 되려 이이첨에게 처리를 맡김으로서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를 왔던 이가 있었다. 요즘 말로 괘심죄에 걸린 것이다. 그이가 고산 윤선도였다. 나이 서른살 때였다. 함경도 경원땅으로 갔다가 1618년 겨울 기장으로 이배되었다. 그 기개가 장하건만, 권력은 터럭만큼도 용납하지 않았다.
회한이 서린 그 팍팍한 길을 따라 걷는다. 기장읍에서 죽성 바닷가까지 십여리, 아버지는 관직을 파직당하고, 이듬해는 죽음까지 전해졌다. 그렇지만 달려가지 못했다. 한맺힌 세월, 그가 즐겨 찾았음직한 황학대는 이름만 남았다. 예전에 황학대는 뭍과 떨어져 있던 모래해안가의 섬이었다. 대숲과 솔숲이 어우러진 섬이었다. 죽성천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는 누런빛의 크고 작은 바위가 듬성덤성 놓여있다. 해안을 굽어보기 위해 국수당으로 오른다.
수령 300년의 여섯 그루 해송이 병풍처럼 당집을 에워싸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늘에 제를 올리던 국수당은 서해와 동해 두 곳이 있는데, 동해의 국수당은 죽성에 있다. 멀리 달음산을 배경으로 왜성이 보이고 죽성천이 신앙촌을 관통하여 흐른다. 신앙촌을 보자니 마음이 불쾌해진다. 애초 일광에서 학리를 거쳐 죽성으로 올 예정이었만 그 아름다운 길은 닫혀 있다. 길을 걷는 사람 열이면 열 모두다 한마디씩 한다. 신앙의 불씨를 온전히 간직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나 폐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학리 해안길이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국수당을 내려와 월전으로 향한다. 그길에 모 방송사가 드라마 촬영장으로 세운 교회가 발길을 붙잡는다. 이국적 풍취의 셋트장은 죽성의 하늘과 바다와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죽성을 방문하면 꼭 한번 들려보길 권하는 죽성교회는 정작 찾는 이들이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무려 49번이나 형무소 생활을 했던 항일운동가 최상림 목사가 세운 죽성교회는 마을 가운데 있어도 모남이 없다.
죽성교회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 월전포구가 있다. 옛날에는 달밭이라 하고 포구를 달밭개(月田浦)라 하였다. 대변으로 길은 이어진다. 옛날 사람들은 해안길 대신 공동묘지가 있는 대변고개를 지름길로 이용했다. 해안도로가 생기고 고개는 잊혀졌다. 어쨌든 포구로부터 약 5분 정도 거리에서 도로를 벗어나 해안으로 내려 선다. 거기 ‘바람의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구포팔대 칠십이경에서 다섯 번째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군당국에서 해안초소를 두고 있는데 주간에는 이동이 가능하다. 그 언덕에 흰 등대 하나가 서 있어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다. 해국이 다시 잎을 내고 있다. 여름이 오면 보랏빛 꽃들이 등대와 조화를 이루리라. 언덕을 넘어 영진수산까지 길은 낚시꾼이 다니는 길로서 1km 남짓한 거리다. 해안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길로 올라선다. 여기서부터는 좋으나 싫어나 도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약 2km를 들쭉날쭉 해안을 따라 걷는다. 그나마 시야는 터여서 해안을 조망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영화 친구의 촬영자 였던 파래정을 지나 대변항에 든다. 멸치와 미역이 깔렸다.
대변항을 지나 죽도가 있는 신암과 서암을 스쳐 지난다. 예전에는 일대를 통털어 무지포(無知浦)라 불렀다. 기장 구포중 가장 큰 포구로 세미(稅米)를 저장하는 창고인 대동고(大同庫)와 수군 주사(舟師:船軍)가 주둔했었다. 바다쪽으로 눈을 돌리면 등대들이 재미있게 조성되어 있다. 축구공에서 마징가젯트, 젖병모양 등 파격적이다. 단조로운 해안풍경에 맛을 더 한다. 2km 정도 걷다보면 오랑대 초입이다. 해안은 바다를 떠돌다 밀려온 쓰레기들로 가득하다. 쓰레기만 없다면 이 곳 역시 뛰어난 경관을 자랑할 터인데, 행정의 손길이 닿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 장담컨대 이곳과 거북바위 사이 군부대 담벼락길만 제대로 열린다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전국의 이름난 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코스가 될 것이다. 오랑대에서 사자바위 해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군부대 역시 올레길을 만드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해병대의 사례를 여기서도 재현되기를 희망한다. 전보다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해안 곳곳의 뛰어난 절경에는 군부대가 있어 길을 막고 있다.
거북바위에서 동암 사이의 바다는 거칠다. 파도가 물굽이를 세워 연신 달려든다. 검은 바위에 작열하는 파도가 시원하다. 비포장길에 겨울이면 오징어 덕장이 선다. 바람이 그 내음을 실어와 소주 한잔이 절로 생각난다. 해청횟집을 돌면 동암포구다. 포구를 따라 휘어 돌면 국립수산과학원 담길을 따라 용궁사에 이른다.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두 번을 찾아올까 하는 생각에서는 자신이 없다. 절집이 가진 절다운 맛이 없다. 누군가 그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불만을 토로한다. “무슨 절이 이래? 온통 시주함 밖에 없어, 이런 절은 처음이다”. 서둘러 용궁사를 벗어난다. 시랑대로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시랑대는 기장팔경의 으뜸이라 자랑하지만 일반인이 찾아가기에는 너무 어렵다. 용궁사의 담장이 가로막고 철책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시랑대는 영조때 이조참의로 있던 권적(1675~1755)이 기장으로 좌천되어 왔다 이곳의 풍광에 심취하여 바위에 7언체의 시등을 금석화시켜 놓은 곳으로, 신라 때 수도하던 스님과 용녀의 아픈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한편 그 시절 시랑대 위에서 풍류객의 초청으로 춤을 추던 관기 추월이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져 죽기도 했는데 시체를 찾을 수 없어 가무덤을 만들어 두었다는데 찾을 길이 없다. 어쨌든 시랑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기장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뛰어난 경관을 가졌다. 시랑대길은 기장해안길의 백미다. 특히 주부끝, 공수로 이어지는 숲길은 호젓하면서도 상쾌하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주부끝에서 만나게 되는 그림도 흡족하다. 골골이 다 이쁜 해안이다.
장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와우산 꼬리(미포)를 바다에 담구고 공수둥둥바위와 송정죽도를 앞세운 형상이다. 포근함이 깃든다. 그동안 이 길을 두고 자동차로 기장해안을 다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참으로 자랑하고 싶은 길이다. 시랑산 입구에는 길이가 100m 정도 되는 아담한 모래해안이 있다. 후릿그물을 이용하여 어촌체험을 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뒤쪽에는 1970년대 만들었다고 전하는 LG그릅의 별장이 있다. 사람의 거주가 없이 방치된 듯한 저 건물을 여행자 숙소로 제공할 용의는 없을지 물어 볼 일이다.
내쳐걷자 공수포가 마중을 나온다. 이전에 비오리가 많아 ‘비오개’로도 불린 공수포는 고려시대 때 관청의 영선비, 출장중인 관리의 숙박이나 접대비 등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밭이 있던 공수전(公須田)에서 유래한다. 2003년 아름다운 어촌 100선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도로변에는 기장의 명물인 짚불곰장어구이집이 즐비하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참기름에 찍어 먹는 고소한 맛을 즐김도 이 길에서 찾는 별미다. 1km를 더 가면 송정이다. 기장 구포의 마지막 포구인 가을포(加乙浦)가 저무는 햇살에 성큼 다가선다. 이곳에서 나서 벼슬했던 이가 갯가 출신임을 숨기고자 송정으로 바꾼 지명 속에 얄팍한 인간의 처세가 가소롭다. 길이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그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 오늘은 여기서 발길을 멈춘다.
첫댓글 통합조사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다음 기행 때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