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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景行錄에 云하되 觀朝夕之早晏하여 可以卜人家之興替니라
(경행록 운 관조석지조안 가이복인가지흥체)
경행록에 이르길 “아침과 저녁의 늦음을 보고서 그 사람의 집의 흥함과 쇠함을 점칠 수 있다.”고 하였다.
⋇ 朝夕(조석) : 아침과 저녁. 여기서는 아침밥과 저녁밥의 의미로 해석.
⋇ 早晏(새벽 조. 늦을 안) : 이름과 늦음.
⋇ 興替(흥. 쇠퇴할 체) : 흥함과 쇠퇴함.
(해설)
식사시간이란 시대와 환경, 나라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인다.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던 원시사회에서는 정해진 시간은 없고, 음식물을 구한 때가 되었을 터이고, 농경을 시작하여 정착생활이 시작된 후에 비로소 정해진 식사시간에 식사를 하는 습관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극한의 환경인 극지와 사막, 정글 등에서는 그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음식문화가 발달하면서 식사시간 또한 거기에 맞추어 이루어졌을 것이다. 언제부터 하루 3식이 정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하루 2식, 혹은 1식이 정상적인 식사로 인정하던 때도 있었다. 어느 민족은 하루 5식을 하는 풍습도 있었다 하니 다양한 식사풍습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경우 3식을 기준으로 한다고 할 때 아침은 7시부터 9시 사이가 많지만 필요한 경우 5시 혹은 6시로 앞당겨지기도 한다. 점심은 12부터 1시 그리고 저녁은 5시부터 8시 사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생일이라든가 제사, 혹은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거나 해외여행을 떠날 때 또는 집안의 애경사에 따라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게 된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불을 지펴야 한다. 그래서 그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식사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의 추억 가운데 기억나는 풍경은 특히 저녁 무렵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나와 산자락을 휘감는 안개처럼 온 동네를 감싸는 아늑하고 정겨운 광경의 연출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은 끼니를 잇지 못하는 빈곤에 허덕이는 집이라 단정을 했다. 보릿고개라 하는 춘궁기에는 많은 집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시절도 있었다 한다.
집안이 번성하고 윤택해 지면 밥 짓는 연기가 여러 굴뚝마다 솟아올랐고,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왕래도 빈번한 반면에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집안은 늘 적막하고 냉랭한 분위기로 쓸쓸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입에 넣어 소화가 되지 않고 무사통과하니 변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다른 견해로는 굶기를 자주하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하여 그렇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뭐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다.”란 표현이 나왔고, 아침인사조차도 “식사 하셨습니까?”일까. 슬픈 이야기지만 그토록 먹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라 상차림을 풍성하게 차리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잘 먹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리라. 지금도 TV화면에 등장하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아프리카 등의 어린이의 모습을 보며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제때의 식사시간을 지키기가 쉽지만은 아니하였으리라. 오죽하면 부자 집이어야 세끼식사를 제대로 하고 나머지 서민들은 한 끼 식사에 두 번 죽을 먹는(보리 혹은 쌀이나 조, 수수 등을 갈아 넣고 푸성귀나 산야초를 더 많이 넣어 끌인)형태였다고 하였으니, 부황이 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배만 볼록 나오고 팔 다리 등은 삐쩍 마른 기형적인 몸 상태를 갖게 한다. 바로 멀지도 않은 60년 전인 1950년대의 일이다. 6.25 전란도 한 몫을 하였지만.
暴虎馮河(포호빙하)
- 범을 맨손으로 두드려 잡고, 큰 강을 배 없이 걸어서 건넌다는 말로, 용기는 있으나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를 이르는 말임. -
감히 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거나 큰 강을 배 없이 건너지 못함을 사람이 알면서 나라와 집이 망함을 알아채지 못하니, 이를 아는 자는 전전긍긍하여 심연에 이른 듯, 엷은 얼음을 밟듯 조심함이라(不敢暴虎 不敢馮河 人知其一 莫知其他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 불감포호 불감빙하 인지기일 막지기타 전전긍긍 여임심연 여이박빙). 이는 詩經(시경) 小雅(소아)에 나오는 시이다. 어느 날 공자가 수제자 顔回(안회)에게 “王侯(왕후)에게 등용되어 도를 행함에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를 잠자코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해 두기 힘들다. 그러나, 나와 너 두 사람만은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勇武(용무)를 좋아하고 과단성 있는 제자 子路(자로)가 이 말을 듣고는 은근히 시샘이 나서 “그럼 도를 행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임할 때는 누구와 더불어 가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거야 자네지.”라는 공자의 말이 떨어지기를 자로는 은근히 기다렸으나, 공자는 “나는 죽어도 暴虎馮河(포호빙하) 즉 뉘우침이 없는 자와는 더불어 같이 하지 않는다(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 포호빙하 사이무회자 오불여야 필야임사이구 호모이성자야).”고 말했다고 한다.(출전 論語 述而篇)
愛蓮說(애련설) - 周敦頤(주돈이) -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陶淵明明獨愛菊 自李唐來世人甚愛牧丹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 予謂菊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 噫菊之愛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何人 牧丹之愛 宜乎衆矣 : 수육초목지화 가애자심번 도연명명독애국 자이당래세인심애목단 여독애련지출어니이불염 탁청련이불요 중통외직 불만불지 향원익청 정정정식 가원관이불가설완언 여위국화지은일자야 목단화지부귀자야 연화지군자자야 희국지애도후선유문 연지애 동여자하인 목단지애 의호중의”
- 水陸草木(수륙초목)의 꽃에 사랑할 만한 것은 무척 많다. 陶淵明(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사랑했고, 李唐(이당) 이래 세인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나는 홀로 연꽃이 淤泥(어니)에서 나와 물들지 않고, 淸漣(청련)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고, 속은 통하고 겉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정정하게 깨끗이 서 있고, 멀리서 바라볼 수 있되, 褻翫(설완)할 수 없음을 사랑한다. 내가 생각건대, 국화는 사람으로 말하면 은자 같아서 고요하고 우아한 멋이 있고, 모란은 부자나 신분이 높은 사람 같아서 화려하고 의젓하다. 그리고 연꽃은 학덕이 높은 군자의 風度(풍도)가 있다. 그런데 도연명 이후 국화를 진정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들은 바 없으며, 연꽃을 진정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와 같이 은자 같은 국화나, 군자 같은 연꽃을 사랑하는 자는 극히 드물어도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으니 부귀공명을 탐하는 이 세상으로서는 차라리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출전 古文眞寶)
※ 蕃(우거질 번), 淤(진흙 어), 泥(진흙 니), 漣(물놀이 련), 蔓(덩굴 만), 亭亭(정정) : 우뚝 솟은 모양, 褻(더러울 설), 翫(가지고 놀 완), 褻翫(설완) : 함부로 다름, 噫(탄식할 희).
15-8. 文仲子曰 婚娶而論財는 夷虜之道也니라
(문중자왈 혼취이논재 이로지도야)
문중자가 말하길 “시집가고 장가드는데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일이다.”고 하였다.
⋇ 文仲子(문중자) : 수(隨)나라 때의 학자 왕통(王通)을 가르킴. 자는 중암(仲俺)이고, “문중자”는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부른 사사로운 시호임.
⋇ 婚娶(혼인할 혼. 장가들 취) : 시집가고 장가들다.
⋇ 夷虜(오랑캐 이. 포로, 오랑캐 로) : 오랑캐.
(해설)
결혼은 양가의 축복인 동시에 당사자들에게는 일생 중에 가장 중요하고 행복하며 비로소 일가를 이루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축복 받고 성스러워야 할 결혼이 절차나 빈부, 학벌 등의 이유로 우여곡절을 겪는 예는 많다. 특히나 지참금이라는 제도가 상존할 때에는 그에 대한 갈등이 많이 표출되며, 더 많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파탄지경까지 몰리는 경우도 다반사였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지금도 혼수문제로 심한 갈등과 파탄까지 가는 사례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 멍에는 쉽게 벗어지지를 못하고 있다.
오랑캐나 논하는 일이라 했지만, 정작 혼례라는 중대사 앞에서는 평소에 하여왔던 언행을 접는 사람들이 있기에 혼수에 대한, 혹은 가문에 대한 또는 학벌에 대한 핸디캡의 간격은 늘 상존해 왔다. 그 신분을 뛰어 넘는다거나, 원수 가문의 자제들의 로맨스가 각광받고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주는 이유가 그러한 인습의 벽과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용기 있는 도전이기에 열광하지 않는가 싶다. 반면에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극으로 막을 내린 로맨스도 숱한 사연을 안고 대비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나가 꿈꾸는 자유스럽고, 열정적인 로맨스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직접 겪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만으로도 상상을 만족시키기에 더 심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할 때 모든 것을 다 갖추면 살아가며 채워야 하는 빈자리가 없기에 살림 늘어나는 재미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물건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련한 성취감과 소유욕에 대한 기쁨도 갖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생활이 될 수도 있다. 자수성가한다고 말하는 그 고난과 하나하나 목표를 달성해 갈 때의 기쁨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쌓이고 풍족해 지는 살림살이에 대한 뿌듯함 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그래서 더욱 애착을 지니게 되고, 부부간의 정도 더욱 살가워지게 된다. 가정이란 공동체는 혼자서 가꾸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합심해 이룩해 나가는 것이기에 그 노력에 대한 결실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격려와 사랑의 깊이를 더욱 공고하고 깊게 만든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사람을 제대로 보고 선택하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예부터 여자 하나 들이는 것이 그 집안의 흥망을 좌우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몸에 대한 체형과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등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맞는 며느리 감을 찾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壽則多辱(수즉다욕)
- 오래 살면 욕됨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고생이나 망신이 많음을 이르는 말임. -
어느 날 堯(요)가 華(화)라는 곳에 갔을 때, 그곳 封人(봉인)이 요를 보고 장수하시길 기원하니, 그는 장수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부자가 되라 하니 그 또한 원치 않는다고 했다. 多男(다남)하기를 바란다고 하니, 그것도 싫다고 하면서 “多男(다남)하면 못난 아들이 있어 걱정이고, 재물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일이 많이 생겨 귀찮고, 장수하면 辱(욕)을 많이 보게 되니 다 원치 않소.”하고 말했다. 그러자 封人(봉인)은 “소인은 요가 성인인 줄 알았더니, 군자 정도 밖에 안 되는구려. 아들이 많으면 각기 분수에 맞는 일을 맡기고, 재산이 많으면 나누어 주고, 장수하여 천세를 누리다 세상이 싫어지면 선인이 되어 上帝(상제)가 계신 곳에 이르면 되지 않소.”라고 말하며 돌아갔다고 한다.(출전 莊子 天地篇)
(堯觀乎華 華封人曰 “憙聖人 請祝聖人 使聖人壽” 堯曰辭 使聖人富 堯曰辭 使聖人多男子 堯曰辭 封人曰 壽富多男子 人之所欲也 女獨不欲何邪 堯曰 多男子則多懼 富則多事 壽則多辱 是三者 非所以養德也 故辭 封人曰 始也我以女爲聖人邪 今然君子也 天生萬民 必授之職多男子而 授之職 則何懼之有 富以使人分之 則何事之有 夫聖人鶉居而鷇食 鳥行而无彰 天下有道則與物皆昌 天下无道 則脩德就閒 千歲厭世 去而上倦 乘彼白雲 至于帝鄕 三患莫之 身常无殃 則何辱之有 封人去之 堯隨之曰 聽問 封人曰 退之 : 요관호화 화봉인왈 “희성인 청축성인 사성인수” 요왈사 사성인부 요왈사 사성인다남자 요왈사 봉인왈 수부다남자 인지소욕야 여독불욕하사 요왈 다남자즉다구 부즉다사 수즉다욕 시삼자 비소이양덕야 고사 봉인왈 시야아이여위성인사 금연군자야 천생만민 필수지직다남자이수지직 즉하구지유 부이사인분지 즉하사지유 부성인순거이구식 조행이무창 천하유도즉여물개창 천하무도 즉수덕취한 천세염세 거이상권 승피백운 지우제향 삼환막지 신상무앙 즉하욕지유 봉인거지 요수지왈 청문 봉인왈 퇴지)
※ 憙(기뻐할 희), 鶉(메추라기 순), 鷇(새끼 구), 无(없을 무), 脩(포 수), 倦(게으를 권).
해장 콩나물국
우리 한국음식으로서 이미 세계음식이 돼 있는 것이 두부요 급속도로 세계음식이 돼 가소 있는 것이 김치라면 미구에 세계음식으로 각광받을 유망 음식이 콩나물이다. 콩 자체에는 비타민 C가 없다. 한데 콩나물로 길러 먹으면 많은 비타민 C가 생겨 콩나물 1백g만 먹으면 하루 필요량의 1/3을 취할 수 있다 한다. 露日戰爭(노일전쟁) 때 일이다. 일본군에 포위된 여순 要塞(요새)에서 러시아 장병들이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집단 壞血病(괴혈병)에 걸리는 바람에 낙성하고 만 것은 세계전사에 유명하다. 한데 그 여순성 안에는 콩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던데 만약 러시아 사람들이 콩나물을 길러 먹을 줄 알았던들 승패는 역전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요 우리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판도도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노일전쟁까지 소급할 필요 없이 6·25 한국전쟁 때 만약 콩나물과 된장이 없었던들 군량을 댈 수 없었을 것이요 싸울 기운도 얻지 못했을 터인지라 전세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콩나물은 한국인에게 고맙디 고마운 식물이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 내린 憂國食物(우국식물)이기도 하다.
그 콩나물이 예찬 받을 또 하나의 다른 거리가 생겨난 것이다. 예부터 콩나물은 숙취를 푸는 해장에 좋다 하여 국으로 많이 끓여 먹어온 터이다. 국물이 기름지지 않고 시원하여 감각적으로 속을 시원하게 쓸어줄 것만 같아 해장국으로 선호돼 온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한데 그 콩나물 속에 알코올을 분해시키는 촉진 성분이 풍부히 들어 있음이 4일에 있을 서울대학교 외과대학 학술대회에서 발표될 것이라 한다. 술기운을 분해시키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스파트酸(산)”이 콩나물 뿌리에 87% 콩나물 몸통에 70% 콩나물 머리에 58% 들어 있음을 가려낸 것이다. 해장국으로서 콩나물을 썼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도 놀랍거니와 해장국으로서의 콩나물은 뿌리를 다듬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에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콩나물에 대한 최초의 문헌은 고려 고종 때 출간된 “鄕約救急方(향약구급방)”이다. 콩을 싹트게 한 大豆黃(대두황)을 약재로 썼다고 돼 있다. 중국 문헌인 “本草綱目(본초강목)”에 콩에서 돋은 싹이란 뜻인 豆芽(두아)란 말이 나오는데 콩나물이 아니라 녹두 싹인 숙주나물을 뜻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숙주나물은 흔하지만 콩나물은 생소하다.
희랍 로마시대 이래 콩나물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이미지는 형편없었다. 콩깍지가 지옥문처럼 절로 열린다 하여 死者(사자)의 넋들이 사는 곳이며 一足幽靈(일족유령)의 발이 콩나물 뿌리처럼 생긴 것으로 알았다. 한데 근간에는 야채에 굶주린 유럽의 高緯度(고위도) 국가일수록 콩나물을 옥내 야채라고 하여 반기는 추세라 한다.(이규태 코너 1993년)
16. 安義篇
- 부부와 부자 그리고 형제의 삼친(三親)에 대한 화목에 대한 글로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말함. 핵심 되는 요체는 바로 이러한 삼친을 온전히 하는 것을 뜻함 -
16-1. 顔氏家訓에 曰 夫有人民而後에 有夫婦하고 有夫婦而後에 有夫子하고
(안씨가훈 왈 부유인민이후 유부부 유부부이후 유부자
有夫子而後에 有兄弟하니 一家之親은 此三者而已矣라 自玆以往으로 至于九族
유부자이후 유형제 일가지친 차삼자이이의 자자이왕 지우구족
이 皆本於三親焉이라 故로 於人倫에 爲重也니 不可不篤이니라
개본어삼친언 고 어인륜 위중야 불가불독)
안씨 가훈에 말하길 “대저 백성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형제가 있나니, 한 집안 친척(일가)은 이 세 가지뿐이니라. 이에서부터 나아가 구족(九族)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삼친에 근본을 둔다. 그러므로 인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니 돈독하게 아니 하지 못할지니라.” 고 하였다.
⋇ 顔氏家訓(안씨가훈) :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가 지었음. 두 권으로 되어 있고, 자손에게 주는 훈계의 책.
⋇ 夫(어조사 부. 지아비 부) : “대저” “대개” “무릇(凡)”의 뜻.
⋇ 而已(이이) : ~일 따름. ~뿐임.
⋇ 一家之親(일가지친) : 한 집안의 일가(친척).
⋇ 三者(삼자) : 여기서는 “세 가지”의 뜻.
⋇ 自玆以往(자. 이 자. 이왕) : 이에서부터 나아가.
⋇ 九族(구족) : 고조. 증조. 조부. 부(父). 자기.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의 9대의 친족.
⋇ 三親(삼친) : 부부. 부자. 형제, 또는 부족(父族). 모족(母族). 처족(妻族)을 말함.
⋇ 焉(어찌 언. 어조사 언) : 지정을 나타내는 종결 조사.
⋇ 爲重(위중) : 가장 중요함. 아주 중요함.
⋇ 不可不(불가불) : 아니할 수 없음.
(해설)
나라를 이루는 근간은 백성이다. 백성은 그 나라의 자산이며, 국력의 상징이 되고, 國富(국부)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백성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가족을 형성하며 자손대대로 가풍과 전통을 계승한다. 두 가문의 자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친인척관계가 성립되면서 서로 다른 가문의 미풍양속과 전통이 통합되며 새로운 형태의 전통과 가풍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더 발전되고 개선되어지며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는 탄력성을 갖춘 바람직한 풍속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이때 신·구간의 갈등과 사고와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마찰이 빈번하기도 하는데, 발전을 위한 잠깐의 정체기라 할 수 있지만 심각한 경우에는 파탄지경까지 갈 수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어른과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도록 고쳐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세대 간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예부터 九族(구족)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다. 역적으로 몰리면 씨를 말린다고 남자들은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비로 전락되는 끔찍한 형벌로 한 가문이 몰락하는 비운을 맞이하는 청천벽력의 날벼락이지만 군주에 대한 거역은 하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최고의 벌로 응징하였던 것이다. 물론 모함과 政爭(정쟁)의 희생양도 많았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존비속의 血親(혈친) 관계의 확장은 家世(가세)와도 연관이 깊었습니다.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체제하에서 고착화된 남아선호사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민법의 개정을 통한 여자의 권리신장으로 점차 희석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녀평등이 말로는 쉬운데 긴 역사를 거치는 가운데 하나씩 개선되어 왔지요. 모계사회로의 희귀라는 반론도 있지만 여성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토양과 육아와 살림 등의 굴레에서 해방되도록 발전해 온 문명도 한 몫을 하며, 남자의 가사활동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사회적 반향도 큰 힘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핵가족화에 따른 부모와 형제자매 간의 거리도 엷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대개 결혼 후 처가와 밀접해 지는 관계가 대부분이고, 또 다른 이유는 직장과 자식의 교육문제(해외 유학 등)로 인한 것과 유산문제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맞벌이부부의 증가는 시대적인 요구로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있으며, 그와 맞물린 문제가 바로 출산문제와 고령인구의 증가와도 무관하지 못한 사회적 현상을 보입니다. 엥겔지수 보다는 문화적이건 육아건 학비문제 그리고 통신요금 등 과거에는 지출하지 않았던 새로운 지출요소의 비중이 높아지며 물물교환도 가능했던 시대에서 현금유통의 시대로 전환이란 생활패턴의 급격한 변화가 경제적 독립을 하도록 강요하면서 또한 힘들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특히나 다자녀의 가정에서 한 명 혹은 두 명의 아이를 갖다 보니 형제애와 자매애를 알 수도 없거니와 온갖 정성을 들이다 보니 자기만 아는 독선적이고 고집 센 아이로 성장하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생산현장의 생산인력의 부족으로 인한 평균연령의 상향화와 국방을 책임질 병력의 부족현상이 곧 닥칠 것이란 걱정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걱정은 걱정으로 끝나야 좋으련만?
座右銘(좌우명) - 崔瑗(최원) -
1. 無道人之短 無說己之長(무도인지단 무설기지장)
- 남의 단점을 입에 담지 말고, 나의 장점은 입에 올리지 말라
2. 施人愼勿念 受施愼勿忘(시인신물염 수시신물망)
- 남에게 베푼 것은 마음에 두지 말고, 남에게 받은 은혜는 삼가 잊지 말라
3. 世譽不足慕 唯仁爲紀綱(세예부족모 유인위기강)
- 세상의 명예는 마음에 둘 것이 못 되는 것, 오로지 인으로 기강을 삼아야
4. 隱心而後動 謗議庸何傷(은심이후동 방의용하상)
- 몸을 들어내지 않고 처신하면 남의 헐뜯음을 상심할 일 어디 있으랴
5. 無使名過實 守愚聖所藏(무사명과실 수우성소장)
- 실속 없는 헛된 이름을 멀리 하고 어리석음을 지켜 지혜를 감추라
6. 柔弱生之徒 老氏誡剛强(유약생지도 노씨계강강)
- 무릇 산 것은 유약한 법, 노자는 굳고 강함을 경계했다.(죽으면 뻣뻣해 지므로)
7. 在涅貴不緇 曖曖內含光(재열귀불치 애애내함광)
- 고결한 것은 검정 속에 있어도 검어지지 않고 희미한 것은 속에 빛을 품는다.
8. 行行鄙夫志 悠悠故難量(행행비부지 유유고난량)
- 분명한 체 하는 것은 못난이가 지키는 바, 여유로우므로 깊이가 무궁하다
9. 愼言節飮食 知足勝不祥(신언절음식 지족승불상)
-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여 족함을 알아 불길함을 이긴다.
10. 行之苟有恒 久久自芬芳(행지구유항 구구자분방)
- 실천함에 진실로 변함이 없게 하여 오래도록 스스로 향기에 취하라
※ 涅(개흙 열), 緇(검은 비단 치), 曖(가릴 애), 悠(멀, 걱정 유), 恒(항상 항), 芬(향기로울 분), 芳(꽃다울 방).
고구마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것이 올해로 꼭 5백년이 된다. 그 미국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여송(필리핀)으로 옮겨졌고 밖에 못나가게 단속했던 이 고구마 싹을 밧줄에 감추어 중국 福建省(복건성)에 빼내어 온 것은 미 대륙을 발견한 지 1백년 후의 일이다. 이 고구마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견문은 顯宗(현종)4년, 1663년 일이니 중국에 고구마가 건너간 지 70년 후의 일이다. 남해에 살던 金麗輝(김여휘)라는 이가 표류 끝에 琉球國(유구국)의 大島(대도)에 표착했을 때 뿌리의 껍질이 붉고 속살은 흰데 이를 쩌 먹으니 산마 같은데 맛이 달디 단 채소가 있어 기근을 이겨내는 데 십상이었다고 했다.
이 고구마를 일본 대마도에서 들여와 심은 것은 이 최초의 견문이 있은 지 1백년 후에 일이다. 趙曮(조엄)이 영조 39년(1763년)에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서 심고 기르고 가꾸는 법을 묻고 이를 몇 말 사서 부산에 갖다 심은 것이다.
이 使行(사행)에 서기로 따라갔던 金仁謙(김인겸)이 지은 紀行歌辭(기행가사) “日東壯遊歌(일동장유가)”에 고구마를 입수하는 구절이 이렇게 나온다. “섬이 土薄(토박)하여 먹고 살기 가난하니/효자 하나 土卵(토란)을 심어 그로써 救荒(구황)했다 하거늘/쌀 서되 보내 그 토란 바꿔먹으니/모양은 何首烏(하수오)요 그 맛은 극히 좋다/산마처럼 무른데 달기는 더 낫도다/이 씨앗 받아다가 우리나라에 심어두고/가난한 백성들 흉년에 먹게 하거든…”
고구마란 이름의 기원은 두 가지 설이 있다. 대마도에서 효자가 이를 길러 부모를 효양했다 하여 고고이모(孝行苧 : 효행저)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고, 고구마를 처음 들여왔을 때 古今島(고금도) 땅이 알맞아 그곳에서 많이 길렀기에 고금마(古今苧 : 고금저)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 曮(해가 돌 엄), 謙(겸손할 겸), 苧(모시 저).
고구마의 기원이 미 대륙이란 데 이설을 제기한 학자도 있다. 이미 중국의 광동성 이남에서 “껍질은 붉고 살은 희며 크기는 병 크기만 하고 쪄 먹으면 달디 단 甘藷(감저)를 남방해안에서 상식한다.”는 기록이 305년경에 저술된 “南方草木狀(남방초목상)”이란 문헌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에 보면 남쪽 사람들이 대체로 단명하여 백살까지 사는 사람이 없는데 이 고구마 먹는 지역에 국한하여 百壽(백수)노인이 흔하며 앓는 사람이 적다고도 적고 있다.
이 古代(고대)의 기록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한 연구결과가 근간에 속속 들어나고 있다. 고구마의 성분에 노화와 암 발생을 재촉하는 활성산소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抗酸化(항산화)작용이 입증되고 있고 또 일상적으로는 먹는 음식 28가지 가운데 강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식품으로 입증되고도 있다. 특히 고구마의 붉은 껍질은 폐암에 걸릴 확률을 절반 수준으로 약화시킨다는 사실도 약리적으로 입증되었다 한다. 거기에다 고구마 주식민족은 상대적으로 각종 호르몬 분비를 왕성하게 한다는 사실마저 드러나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자기나라 땅에 그 좋은 불로 장수약이 있는 줄 몰랐던 진시황이 안타깝기만 하다.(이규태 코너 1992년)
※ 藷(참마, 산마, 사탕수수 저).
16-2. 莊子曰 兄弟는 爲手足이요 夫婦는 爲衣服이니 衣服破時엔 更得新이거
(장자왈 형제 위수족 부부 위의복 의복파시 갱득신
니와 手足斷時엔 難可續이니라
수족단시 난가속)
장자가 말하길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으니, 의복이 찢어졌을 때는 다시 새것을 입을 수 있거니와 수족이 끊어졌을 때는 잇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였다.
⋇ 爲手足(위수족) : 손발과 같음. 손발이 됨.
⋇ 更得新(갱득신) : 새 것을 얻음.
(해설)
寸數(촌수)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여러 가지 뜻이 혼합된 복잡하면서도 또한 간단명료하기도 하다. 너와 나의 거리와 관계에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이 오갈 수 있는 반면에 쪼갤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말한다. 형제와 부부 모두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수족과 의복으로 비교함은 그 근원에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만남과 필연의 차이점도 있지만 자의냐 타의냐 혹은 천부적이냐 인위적이냐의 개연성도 개입된다. 혈연이냐 아니냐의 차이도 그러한 거리를 만들어 내는 요인 중 하나이며, 남과 여란 성의 개념이 엄격했던 사회구조가 남긴 유산이기도 한데, 모든 일에 힘을 필요로 한 노동력과 위험이나 전쟁 등에 맞서서 헤쳐 나가는 원동력의 근원이 되는 남성위주가 원인이기도 하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사상 또한 그를 뒷받침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女必從夫(여필종부)니 不更二夫(불경이부)니 하여 족쇄를 채우는 가혹한 규범이 생겨났던 것이 아닐까? 그만큼 혈연에 대한 확고하고 돈독함을 강조하였던 이유가 가문중심의 끈끈한 유대와 결속력이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는 믿음 때문이다. 절대 권력의 군주제 하에서 난무하던 모략과 중상의 틈바구니에서 아차하면 가문의 몰락이라는 나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최선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씨족사회로 한 부락을 이루며 집성촌으로 결속하며 상부상조하고 희노애락을 함께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혼인만큼은 타 부락의 성씨와 성사함을 고수했던 것이 대단한 성과로 근친결혼의 폐해를 그 당시에 벌써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러니 타 성씨나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으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일민족이란 자부심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도 개선되지 않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와 친화력에 대한 장점이자 단점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잦았고, 그와 더불어 여자와 아이들의 수난도 눈에 보듯 선한데, 고려조의 채홍사와 胡亂(호란)이나 倭亂(왜란) 후에 포로로 잡혀간 여자들의 매매시장이 성행했다는 기록과 異胎院(이태원)이란 지명의 탄생 비화와 중국등지에 잔존하는 高麗堡(고려보)에서 슬픈 우리네 역사의 단편을 볼 수 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뜨거운 일제시대의 정신대 문제는 국력의 중요성을 재삼 일깨워 주고 있다.
점차 희박해 지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교훈이 안타깝지만 더욱 심각한 것이 세계화란 미명하에 자기네 역사는 모르고, 타 국가의 역사에는 능통한 신 事大主義(사대주의)가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점이다. 특히나 영어의 습득을 위해 불붙기 시작한 조기유학은 그러한 데 일조를 하는 일등공신이 아닌가 싶다. 자기네 나라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습득하여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타 국가의 문화와 풍속 등을 접하고 그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위치와 태생에 대한 고민과 향후 진로에 대해 심각한 역기능을 경험할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타 민족에 대한 편견과 배타가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행태를 보면 아직도 미묘한 차이를 극복 못하였거나 일자리 문제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 준다. 어쩜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르는 간격이다.
指鹿爲馬(지록위마)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속여서 권세를 함부로 부리거나, 남을 위압적으로 속여 곤경에 빠트림을 이르는 말임. -
진시황이 죽자, 승상 李斯(이사)와 趙高(조고)는 어진 태자 扶蘇(부소)를 죽이고, 아직 어리고 용렬한 胡亥(호해)를 추대했다. 호해는 즉위하자, “朕(짐)은 천하의 낙이란 낙은 다 맛보며 일생을 즐기겠다.”고 말했다. 이에 실권을 잡은 조고는 그러려면 먼저 법을 엄히 하고, 형벌을 가혹히 하여야 하며, 또 오랜 신하들을 모두 내쫓아야 한다고 충동질 했다. 호해가 이를 허락하자, 조고는 경쟁자 이사와 함께 先王(선왕) 때부터의 오랜 신하 및 왕자, 장군 등을 죽이고 승상이 되었다. 그런 다음,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한 계교를 생각해 냈다(趙高欲專秦權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 조고욕전진권 공군신불청 내선설험). 그는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을 바친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제는 “승상은 이상한 말을 하는구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다니요?(持廘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廘爲馬 : 지록헌어이세왈마야 이세소왈 승상오사 위록위마 )”하고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신하들 중에는 잠자코 있는 자, 그렇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말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다. 간사한 조고는 말이 아니라는 사람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그 후에 구실을 붙여 죽여 버렸다(問左右 或黙或言馬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莫敢言其過 : 문좌우 혹묵혹언마 고인음중제언록자이법 후군신개외고 막감언기과). 나중에는 황제마저 죽여 위세를 떨쳤지만, 마침내는 부소의 아들 子嬰(자영)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출전 史記)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박신 등이 모두 말하기를, ‘신 등은 삼성에서 임금을 속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임금을 속임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임금을 속인 사실을 국문하지 아니하였는가? 이것은 지록위마인 것이다.” 하였다. ; 柳廷顯等啓 朴信等皆曰 臣等不及知三省欺君之實 誠有罪矣 然臣等 不至於欺君也 上曰 何不鞫問欺君之實乎 是指鹿爲馬也 : 유정현등계 박신등개왈 신등불급지삼성기군지실 성유죄의 연신등 부지어기군야 상왈 하불국문기군지실호 시지록위마야』[태종실록 권제33, 64장 앞쪽, 태종 17년 6월 12일(병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欺(속일 기), 鞠(국문할 국).
별 값
동서고금에 군대 없는 나라는 없었고 군대를 거느리는 장군이 없었던 나라 또한 없었다. 다만 그 호칭만은 나라에 따라 달랐다. 통일신라시대에 장군은 大監(대감) 弟監(제감) 少監(소감)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 들어 上將軍(상장군) 大將軍(대장군) 將軍(장군)의 將官(장관) 호칭이 생겼다. 조선조에서는 금위영 어위영 같은 특수부대에만 大將(대장=中軍) 칭호가 있었을 뿐 일반부대는 上護軍(상호군) 大護軍(대호군) 護軍(호군)으로 불렸었다. 한말 甲午改革(갑오개혁) 후에 大將(대장) 副將(부장) 參將(참장)직제가 정립되었는데 당시 장성의 정원은 10명에 불과했다.
군대 고위 통솔자를 將(장)이라 부르게 된 뿌리를 “事物紀原(사물기원)”에 보면 周(주)나라에서 천자는 六軍(6군)을 거느리는데 1군이 1만2천5백 명 씩이요, 그 1군을 거느리는 자를 將軍(장군)으로 불렀던 데서 비롯됐다 한다.
“將(장)”이란 말은 거느린다(領 : 영)는 뜻과 지킨다(衛 : 위)는 뜻이 복합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晋(진)나라 獻公(헌공)이 두 개의 군단을 두고 그 우두머리를 公將(공장) 上軍(상군)이라 했는데, 그 끝 글자를 모아 장군으로 불렀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의 장성 계급장에 별이 들어가 있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데 그 동기에 대한 이설이 많다. 희랍 신화의 主神(주신) 제우스가 천공을 지배하는 싸움에 나갈 때 사자가 끄는 전차를 타고 오른손에 雷光(뇌광) 왼손에 월계관 그리고 두상에는 승리의 별이 빛났다 하여 그 제우스의 별을 상징한 것이라기도 하고, 중세 유럽의 기본 전투편제나 진지가 별모양의 五角形(오각형)-곧 펜타곤이었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미 국방부 건물이 펜타곤인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서양 민속에 별 값이라는 게 있다. 저별은 나의 별-하듯이 내가 태어날 때 지평선에 내별이 나타나며 그것이 솟아오르면 길하고 지면 불길하다고 알았다. 그래서 누군가 이 행운의 별임을 보고 와서 알리면 그 행운의 대가를 치르는데 이를 행운의 별 값이라고 했다. 중국에도 별 값이 있었다. 송나라 천재 楊億(양억)이 말도 못하는 어릴 적에 높다란 다락에 업혀 오르자 갑자기 말문이 틔어 “손을 들어 올려 별을 딴다.”는 摘星詩(적성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 고사가 연유가 되어 천재적인 자질을 시적으로 높이 평가할 때 별 딴 값이란 말을 곧잘 썼던 것이다. 이처럼 별 값은 고귀하고 엄청난 추상적인 값인 것이다.
한데, 어떤 이는 별을 파는 복덕방을 차려 적게는 2천만 원까지 세일을 했다 하니 별에 대한 모독도 유만부동이다. 차라리 별 하나에 20억 2백억 원을 주고 팔았던들-하는 억하심정이 드는 것이다.(이규태 코너 1993년) ※ 摘(딸 적).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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