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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기는 정치적 증오가 지적으로 조직화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 쥘리앵 방다(Julien Benda), 『성직자들의 배반』(La Trahison des clercs, 1927)
1. 피아 식별
1934년 2월 6일의 극우 폭동으로부터 사흘이 지났습니다. 콩코르드 광장과 부르봉 궁전 주변에서 터진 폭력은 아직 신문 지면에서 식지 않았고, 파리의 카페와 전차, 조합 사무실과 구청 복도마다 같은 말이 떠돌았습니다. 공화국이 흔들렸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파시스트 쿠데타의 전조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부패한 의회정치가 마침내 응보를 맞은 사건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노동자들이 또다시 남의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게 되리라는 예감이었습니다.
2월 9일 금요일 밤, 파리 10구 포부르 생마르탱 거리 근처의 작은 인쇄협동조합 뒷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아래층에서는 내일 아침 배포될 전단이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를 풍겼고, 위층의 좁은 교정실 뒤편에는 서로 다른 정파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이 회합은 단결을 약속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서로를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적은 훨씬 낮고, 그래서 훨씬 절박했습니다. 2월 12일 월요일, CGT의 24시간 총파업과 SFIO의 동조행동,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PCF의 거리행동이 서로를 향해 충돌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종이를 끌어온 사람은 SFIO 좌파와 가까운 언론인 겸 분석가 마르셀 포쿠아였습니다. 그는 “통일전선”이라는 말을 일부러 피했습니다. 그 말은 사회당 내부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대신 그는 조직의 독립, 노동자의 자유, 공화국의 방어, 파시스트 폭력에 대한 침착한 대응이라는 표현을 골랐습니다. 그렇게 나온 핵심 문장은 간명했습니다. 거리에서 같은 적을 앞에 둔 노동자 대열은 서로를 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강령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쓸모 있었습니다. 어느 정파도 자기 깃발을 내릴 필요가 없었고, 어느 정파도 다른 정파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월요일 하루 서로를 향해 주먹을 들지 말자는 약속만 남았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그 초안을 보고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현실을 짚었습니다. 거리의 노동자와 행동원들은 각자 자기 정파의 신문과 전단을 볼 것이며, 공산당원이 SFIO 선전물을 보고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그 말은 회합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나의 완벽한 공동문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문과 전단 속에 비슷한 문장, 비슷한 행동원칙, 비슷한 금지선을 심어야 했습니다.
급진사회당 좌파 시의원인 미셸 부스케는 그 지점에서 급진당의 처지를 읽었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적 제도감각을 가진 인물이었고, 거리의 열기보다 그것이 당과 의회 안에서 어떤 균열을 만드는지 먼저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확인한 급진당의 상황은 단순한 좌우파 의견차가 아니었습니다. 에리오, 쇼탕, 사로 같은 원로들은 두메르그 내각을 질서 회복으로 받아들이려 했고, 달라디에계와 청년 튀르크파는 그것을 우익 폭동 이후의 굴욕적 후퇴로 보고 있었습니다. 급진당은 아직 하나의 당명과 의회그룹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공화주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미셸은 급진당 좌파를 움직이려면 사회주의나 노동자 단결이 아니라 공화국 방어를 앞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미셸이 회의의 첫 문장을 꺼냈습니다. 이 방에 모인 이들이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반공화국파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급진당 쪽 인물들과 망데스 프랑스는 편안해졌고, SFIO와 CGT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PCF 쪽의 젊은 서기는 곧장 중얼거렸습니다. 공화국 수호라면 부르주아 공화국 수호를 말하는 것이냐는 반응이었습니다. 그 한마디로 방 안의 균열이 드러났습니다. SFIO, CGT, 급진당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과 공산당 사이에는 세느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세느 강의 폭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레옹 드 클레르퐁이었습니다. 그는 국제연락과 선전 업무를 맡은 공산당 인물이었고, 코민테른의 문장과 프랑스 현장의 문장이 얼마나 자주 어긋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PCF는 아직 공식적으로 사회파시즘 노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SFIO 지도부와 손잡자는 말은 당 중앙도, 모스크바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2월 6일 이후 따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한다는 공포가 PCF 내부에 스며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레옹은 논리를 바꾸었습니다. SFIO와 단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SFIO 노동자들이 있는 거리로 들어가 그들을 지도부로부터 떼어내자는 논리였습니다. 그 말은 SFIO 앞에서 여과 없이 꺼낼 수는 없었지만, PCF 중앙에는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미셸은 PCF 서기를 설득하려 애썼습니다. 부르주아 공화국이라도 공산당에게 연단은 줄 수 있지만, 반공화국파는 연단이 아니라 감옥 쇠창살만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서기는 자신이 배운 문장 그대로 답했습니다. 부르주아 공화국이 노동자에게 주는 연단은 노예에게 노를 쥐여주는 노예선과 같다는 식이었습니다. 회의는 답답해졌고, 서기 자신도 답답해 보였습니다. 그때 CGT 현장활동가 마르그리트 데쉴리가 거칠게 끼어들었습니다. 세탁노동자 출신인 그녀는 이론보다 현장의 분노와 생존의 언어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공산당 서기를 러시아 공산당 대표 양반이라고 부르며 계속 둘 것이냐고 말하자, 젊은 서기는 겁에 질린 채 레옹에게 당 중앙에 대책을 요청해야 한다고 중얼거렸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PCF 말단은 현장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레옹은 바로 그 틈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레옹은 별실로 나가 PCF 중앙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뤼마니테》의 논설 방향이 참여와 불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파펜-히틀러 비유와 CGT의 강경한 압박을 명분으로 삼아, SFIO 지도부가 아니라 SFIO 기층 대중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라도 12일 행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모스크바의 지침을 기다릴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PCF 중앙이 행동한 뒤, 그것을 독일의 교훈으로 사후 정당화할 수는 있었습니다. 두메르그는 프랑스의 파펜이고, 그를 방치하면 프랑스의 히틀러가 나타나 PCF의 합법적 활동공간까지 파괴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논리는 당 중앙을 움직였습니다. PCF는 원역사보다 빠르게 2월 12일 총파업 참여를 확정했고, 다음 날 《뤼마니테》는 프랑스 노동계급이 프랑스의 파펜을 타도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문구를 전면에 실었습니다.
그동안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은 거리의 공기를 잡아냈습니다. 몰락한 귀족적 이름을 지녔으나 작은 지방지 《공동의 목소리》를 운영하는 좌파 독립 언론인인 그는, 2월 6일이 일반 시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살폈습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공화국이 언제든 거친 폭력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의 갈색 셔츠와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공화국을 지지하는 기층 대중은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마르셀은 그 “어떻게”를 문서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2월 12일 총파업과 반파시스트 행동에 참여하는 공화국 민주시민을 위한 행동지침서를 작성했습니다. 옆사람과 싸우지 말 것, 경찰을 공격하지 말 것, 극우파가 공격하면 무리하게 응전하지 말고 후퇴할 것, 다른 정파의 대오를 만나면 뒤엉키지 말 것, 시위를 격화시키려는 바람잡이를 조심할 것. 당연한 말들이었지만, 바로 그 당연함이 필요했습니다. 이 행동지침은 마치 누군가가 전체 행동을 조율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었습니다. 미셸은 그 인상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반파시즘 대중행동위원회, CAPA였습니다. 지도부도 조직도도 없는 빈약한 외피였지만, 누구도 완전히 책임지지 않았기에 누구도 당장 부정하기 어려운 이름이었습니다. CAPA는 총파업이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니라 파시즘을 막고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평화적 대중행동이라는 인상을 거리 위에 심었습니다.
레옹은 CAPA의 등장을 PCF 중앙에 알리며 공산당 기층조직들이 이 이름을 선점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는 토레즈의 책상보다 먼저 생드니 시장 자크 도리오의 밥상에 올라갔습니다. 붉은 벨트의 보스정치가이자 사회파시즘 이론의 반대자인 도리오는 CAPA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생드니 반파시즘 행동위원회를 실제로 만들어버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 조직은 공산당원이 다수였지만, 일부 SFIO와 CGT 인물도 끌어들이는 형태였습니다. 레옹의 의도는 PCF가 CAPA를 선점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리오의 생드니 노선이 예상보다 빨리 제도적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레옹은 PCF가 총파업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통보했습니다. 마르셀은 곧바로 단일 구호와 공개 성명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공화국 수호라는 표현은 PCF가 거부했으니,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를 수호하자는 말이 더 적절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서로 맞는 것 하나 없는 집단들이 오랜만에 같은 방향으로 모이게 되었고, CAPA라는 외피까지 생겼으니 최소한의 공동언어는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공화국 수호, 민주주의 만세, 우익 리그 해산, 파시스트 물러가라, 두메르그 퇴진 같은 구호가 정리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인 의제는 빠졌습니다. 그 덕분에 구호는 오히려 넓어졌습니다.
마르그리트는 그 넓어진 언어가 현장에서 흩어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CGT 내부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챙길지, 어느 직장 대열이 어디서 합류할지, 흥분한 조합원을 누가 붙잡을지, 부상자와 체포자는 누가 확인할지 정리했습니다. 사람들은 SFIO도, PCF도, CGTU도 완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조합원과 자기 직장, 자기 동네 사람들은 믿을 수 있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그 신뢰를 총파업의 대열로 묶었습니다.
루이앙리도 자기 방식으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공동의 목소리》에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의 옹호, 그리고 생디칼리슴 좌파가 의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논조를 실었습니다. 공화주의와 생디칼리즘, 의회와 거리, 자유민주주의와 노동자의 직접행동은 쉽게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설은 그 이질적인 재료들을 한 지면 안에서 충돌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급진공화파 독자에게는 공화국 방어의 언어로, 생디칼리스트에게는 작업장과 거리의 힘을 의회가 무시하지 못하게 하자는 언어로 읽혔습니다. 작은 신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파의 공식문서보다 덜 수상해 보였습니다. 그 글은 CGTU 서기장 가스통 몽무소의 눈에도 들어갔고, 루이앙리의 이름은 공산당 쪽 연락망에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여들수록 급진당 내부의 균열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미셸은 마지막으로 당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지만, 그가 확인한 것은 결속의 중심이 아니라 균열 그 자체였습니다. CAPA의 이름, 총파업의 규모, 두메르그를 향한 좌익 전체의 공세, 그리고 망데스 프랑스 같은 인물들의 독자적 움직임은 거리에서 “급진당 좌파가 반파시스트 대중행동의 한 축”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당이 그렇게 결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리에서는 이미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제 급진당 지도부가 이를 부인하면 당 좌파는 배신자로 보였고, 인정하면 원로들은 공산당과 SFIO의 뒤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급진당은 아직 갈라지지 않았지만, 이미 두 개의 공화국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질서와 수습의 공화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거리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렇게 2월 12일이 왔습니다. 《뤼마니테》는 PCF의 총파업 총력 참여를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공산당 대열은 거칠고 시끄러웠지만, 판을 깨지는 않았습니다. SFIO는 조직의 독립과 공화국의 자유를 말했고, CGT는 정당 시위에 종속되기를 거부하면서도 24시간 총파업을 강하게 수행했습니다. CAPA는 실체가 빈약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행동지침을 만들고, 충돌을 피하라고 말하고, 이 파업을 파시즘에 맞선 평화적 대중행동으로 부르고 있다는 신호로 보였습니다. 원역사의 2월 12일이 현장에서 발견된 단결이었다면, 이 세계선의 2월 12일은 조금 더 의식적으로 연출된 단결이었습니다. 완전한 공동전선은 아니었지만, 인민전선의 조직적·선전적 원형이 너무 일찍 모습을 드러낸 셈이었습니다.
그 여파는 곧바로 번졌습니다. 생드니에서는 도리오가 반파시즘 행동위원회를 실제 조직으로 만들어버렸고, 시위가 끝난 뒤에도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토레즈는 SFIO와의 상설 협력기구를 유지하는 도리오에게 코민테른 강령 위반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도리오는 자신이야말로 CAPA가 주도하는 총파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당원이라고 버텼습니다. PCF 지도부는 그를 쉽게 찍어낼 수 없었습니다.
급진당 쪽에서도 후폭풍이 일었습니다. 공공부문 노동자와 교사,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철도역과 공립학교와 대학 정문에는 삼색기와 “파시즘을 거부한다”는 걸개가 붙었습니다. 공립학교 교사들의 입에서 두메르그 내각은 물러가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 에리오와 쇼탕, 사로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달라디에는 두메르그 내각이 국민연합을 추구하기에 적절한 정부인지 의문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장 제는 당 지도부가 두메르그 지지 입장을 고수한다면 집단 탈당도 고려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급진당은 두메르그 내각 입각을 포기했습니다.
그 순간 두메르그 내각은 버틸 힘을 잃었습니다. 《뤼마니테》가 두메르그를 프랑스의 파펜이라고 부르고, 다른 신문들이 그 비유를 주워섬기기 시작하자 두메르그는 심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대전쟁 이전의 총리이자 대공황 이전의 대통령이었던 자신이, 공화국을 수습하기 위해 돌아왔는데 파펜 같은 자와 비교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급진당이 입각을 포기하자 그는 르브룅을 찾아가 내각 구성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타르디외가 격분해 찾아갔지만, 되레 짜증 섞인 꾸지람만 듣고 돌아왔습니다. 두메르그 내각은 100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르브룅 대통령은 좌파의 거리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두메르그가 실패했다면 공화국의 다른 원로를 내세우면 될 일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프랑스 공화국을 위협하고 있었고, 르브룅은 거리의 좌파들에게 공화국을 맡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가 고른 인물은 루이 바르투였습니다. 바르투의 선임은 국제적으로 대독 포위외교와 국제연맹 중심 노선에 대한 강력한 신임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정치적으로는 실망스러운 인선이었습니다. 급진당은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고, 달라디에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급진당이 곧바로 불신임에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다가는 정말 페탱이 총리에 임명되는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2월 12일의 거리에서 누구도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SFIO는 PCF를 믿지 않았고, PCF는 여전히 SFIO 지도부를 의심했으며, CGT는 정당정치에 종속되기를 거부했고, 급진당은 자기 안의 두 공화국이 서로 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월요일 하루 서로를 향해 주먹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하루가 두메르그를 무너뜨렸고, 바르투를 불러왔으며, 프랑스의 반파시즘을 아직 불완전한 모습으로 너무 일찍 성장시키기 시작했습니다.
Event 2. 모스크바에서 온 답장
1934년 2월 12일의 총파업은 프랑스 좌파에게 승리이자 굴욕이었습니다. 극우 리그가 기대했던 거리의 공포는 노동자의 대열 앞에서 멈춰섰고, SFIO와 CGT, PCF와 CGTU는 같은 날 같은 거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곧바로 좌파의 정치적 주도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사태의 수습은 바르투 정권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좌파 내부에서는 누구도 2월 12일의 의미를 완전히 독점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자기 언어로 바꾼 사람은 생드니의 자크 도리오였습니다. 그는 2월 12일 이후 구성된 생드니 반파시스트 연합조직의 해산을 거부했습니다. 토레즈와 PCF 중앙이 보기에는 당의 독자성을 흐리고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계급적 폭로를 무디게 하는 우익기회주의적 일탈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오는 3월 말, 당 중앙을 우회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사회당 지도부를 신뢰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당 노동자와 CGT 조합원을 계속 “사회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순간 PCF가 파시즘에 맞설 대중을 스스로 밀어내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 외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루이 바르투가 총리에 오른 뒤 동방조약과 집단안보 구상은 속도를 얻었고, 독일을 고립시키려는 프랑스 외교는 소련과의 안보협력이라는 금기를 문 앞까지 끌고 왔습니다. 1934년 6월 23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소비에트연방 국방인민위원을 수석대표로 하는 소련 고위대표단이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공식 목적은 프랑스 정부와의 안보협력 및 동방조약 협의였습니다. 그러나 대표단에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의 드미트리 마누일스키와 빌헬름 크노린도 비공식적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루려는 문제는 프랑스 공산당이었고, 도리오의 서한이었으며, 더 깊게는 사회파시즘론의 운명이었습니다.
6월 25일 밤 9시, 그르넬가 79번지의 소련대사관 오텔 데스트레 후원 쪽 작은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리스 토레즈와 자크 도리오는 짧게 인사를 나눴지만, 그 인사는 권투선수들의 글러브 체크에 가까웠습니다. CGTU에서는 브누아 프라숑과 외젠 에나프가 참석했습니다. 토레즈는 러시아어와 코민테른 문체를 아는 젊은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레옹 드 클레르퐁을 데려왔습니다. 마지막으로 CGTU 측 요청에 따라 CGT 파리 11구 분회 책임자 마르그리트 드술리가 불려왔습니다. 그녀는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이론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2월 12일의 거리에서 공산당 노동자와 사회당 노동자, CGT 조합원과 CGTU 조합원이 망설이고 충돌하다가 결국 함께 서는 장면을 직접 본 증인이었습니다.
마누일스키는 이 자리가 도리오의 서한을 심판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필요하다면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크노린은 문제는 외로움이 아니라 계급적 명료성이라고 못박았습니다. 명료성을 잃은 공동행동은 혁명적 전술이 아니라 투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오는 곧바로, 다음번 생드니 노동자들이 라로크 패거리와 마주쳤을 때 옆에 선 SFIO 노동자를 사회파시스트라고 비난하고 나서 같이 얻어맞으라는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처음에는 사회파시즘이라는 말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레옹은 그녀에게 그것이 사회민주주의가 겉으로는 좌파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파시스트와 극우를 돕는 세력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거리에서 자신이 본 것과 그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토레즈를 살폈습니다. 토레즈는 분노한 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가 둘이나 파리에 들어와 프랑스 당을 사실상 감찰하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는 매우 불편해 보였습니다.
레옹도 당 중앙의 처지를 다시 계산했습니다. PCF 중앙은 사회파시즘론의 신념적 수호자라기보다 코민테른 지령에 강하게 종속된 조직이었습니다. 1928년 이후 계급 대 계급 노선이 강요되면서 피에르 세마르와 노조계 간부들은 밀려났고, 바르베와 셀로르 같은 맹종적 당관료들이 당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토레즈가 그 폐해를 일부 수습했기에 2월의 제한적 협력이나마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리오가 당 중앙을 우회한 것은 토레즈에게 중앙권위에 대한 직접 도전이었습니다.
논쟁이 공회전하자 마누일스키는 마르그리트를 불렀습니다. 그는 다음번 극우파와 충돌할 때 공산주의자와 온건사회주의자 대열이 분리되어 있으면 어떤 피해가 예상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당장의 물리적 충돌만 놓고 보면 단일대오와 분리대오의 차이가 항상 결정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충돌 이후였습니다. 한쪽이 먼저 밀리면 다른 쪽은 곧바로 배신을 말할 것이고, 승리의 해석도 패배의 해석도 둘로 갈라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불신이 누적되면 결국 서로를 우익보다 더 지독한 적으로 여기게 되고, 그 뒤에는 각개격파가 기다릴 것이었습니다. 독일처럼.
마르그리트의 말은 투박했지만, 마누일스키가 찾던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의 배신성을 폭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폭로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대중에게 공산주의자와 나란히 서지 말라는 신호로 들린다면 우리는 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그 적의 품 안에 밀어넣는 것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에나프는 그것을 훨씬 거칠게 번역했습니다. 지도부끼리는 계속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만, 현장에서는 손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레옹은 그 말에서 마누일스키의 진의를 읽었습니다. 마누일스키는 사회파시즘론을 폐기하고 싶어하는 전환파에 가까웠지만, 코민테른이 틀렸다고 정면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대중을 분리하려 했습니다. 지도부는 계속 적으로 남겨두되, 그 아래의 노동자 대중은 공동행동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었습니다. 레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PCF가 사회민주주의 기층조직과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반파시즘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밀리던 크노린은 전선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공동행동 자체보다 민주집중제와 프랑스 당 지도부 문제를 공격했습니다. 전술은 변할 수 있지만, 전술을 변화시킬 권한은 개별 시장이나 지방조직에 있지 않으며, 도리오가 옳은 것을 보았다고 해도 당 중앙을 우회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방적 성공이 국제노선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혁명적 대담성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자만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도리오의 얼굴은 붉어졌습니다.
도리오가 폭발하려는 순간 레옹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도리오를 진정시키며, 여기서는 코민테른을 차분하게 설득해야 한다고 귓속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리오에게 동의하기에 주는 조언이라는 말이 도리오를 붙잡았습니다. 도리오는 자신의 독단적 행동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혁명의 전위당이어야 할 프랑스 지부가 오히려 현장 인민대중의 후열을 좇느라 바빴고, 이는 파리 지도부의 방법론 문제라고 반격했습니다. 도리오는 규율 문제에서는 물러섰지만, 지도력 문제에서는 토레즈를 다시 가격했습니다.
프라숑은 사태를 진화하려 했습니다. CGTU가 CGT 현장조직을 추수하려 한다면, CGT도 CGTU 노동자들을 빼가려 할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현장에서는 CGT와 CGTU를 서로 잡아먹을 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옹은 다시 위험한 선을 밟았습니다. 그는 도리오의 주장이 결국 파리 지도부의 소극성 때문에 먼저 행동해 현장의 인민대중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의 형태였지만 사실상 도리오의 논리를 정리해주는 발언이었습니다. 토레즈는 드물게 당황했고, 도리오는 더 기세등등해졌습니다.
그때 마누일스키가 개입했습니다.
그는 도리오에게 5일 내로 자신의 조직적 오류에 대한 자아비판서를 당중앙에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레옹에게는 오늘 논의의 결론을 문서 형태로 정리해 파리 지도부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토레즈에게는 사회민주주의 조직 지도부의 기만성에 대한 폭로를 지속하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대중과의 공동행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전술적 방법론을 개발하도록 당 관료조직에 지침을 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도리오는 독단을 인정해야 했지만 생드니의 문제제기는 살아남았습니다. 토레즈는 권위를 지켰지만 기존 문법을 그대로 밀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마누일스키는 코민테른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전술전환의 길을 열었습니다.
레옹은 곧바로 타자기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 대중과의 현장 협력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회의록을 작성했습니다. 동시에 PCF가 사회민주주의 기층조직 속으로 파고들어 반파시즘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도 명시했습니다. 그의 문장은 회의장의 모순들을 하나의 전술공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와는 싸우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대중 속으로 들어간다는 문장이었습니다. 그 공동행동 속에서 PCF가 행동력으로 주도권을 획득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마누일스키는 그 문서를 보고 내부문서로만 쓰이기에는 아깝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의 칭찬은 없었지만,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레옹은 토레즈에게 따로 사과했습니다. 토레즈는 별일 아니며 오히려 자신이 실수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레옹은 이것이 이전 관계의 원상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관계의 시작임을 알았습니다. 토레즈는 레옹을 더 이상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만 보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일전선의 공식 얼굴은 토레즈일 것이었지만, 그 통일전선을 가능하게 만든 문장은 레옹의 것이었습니다.
한편 도리오는 마르그리트에게 생드니 반파시스트 행동위원회에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노동자 대표와 여성 대표의 발언권을 늘리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먼저 프라숑을 보았습니다. 프라숑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도리오가 마르그리트를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려는 것에는 선을 그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들어간다면 어디까지나 CGT 측 위원이어야 했고, CGT의 정치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 원칙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레옹 주오에게까지 보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도리오는 사람 하나 초대했을 뿐인데 벌써 국제조약이 되었다며 웃었지만, 결국 물러섰습니다. 그는 마르그리트가 생드니에 온다면 개인 자격이 아니라 CGT 대표 자격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도리오는 마르그리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CGT와의 공식 외교관계를 복구해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뒤 사태는 회의실 바깥으로 번졌습니다. 마누일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만났습니다. 라이히슈타크 방화 사건 재판에서 살아 돌아온 디미트로프는 독일의 패배 속에서도 끝까지 투쟁해 생환한 반파시즘 투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레옹의 문서에 적극적으로 찬동했고, 마누일스키와 함께 1928년 제6차 코민테른 대회가 낳은 사회파시즘론을 사실상 묻어버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작성된 회의록은 이제 다가올 제7차 대회에서 새로운 노선을 정당화하는 문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보로실로프의 소련 대표단과 막심 베강 장군의 프랑스 국방대표단은 독일의 팽창주의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데까지는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응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바르투의 복안은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심지어 이탈리아까지 포함하는 다자 대독포위망이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구상이었습니다.
PCF 내부에서는 레옹을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승격시키는 문제가 잠시 논의되었지만, 곧 코민테른이 그를 ECCI 서유럽 반전반파시즘 분과위원회 부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논의는 들어갔습니다. 레옹은 프랑스 당 안에서는 조심스러운 위치에 머물렀지만, 코민테른 안에서는 반전반파시즘 전술의 프랑스어권 실무자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레옹이 문서로 정리한 방침은 세계반전반파시즘위원회, 곧 암스테르담-플레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 이 운동은 공산당원들이 좌파 지식인을 불러다 포섭하려는 조직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회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행동력으로 주도권을 획득한다는 방침을 앞세우며 다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1934년 8월, 스페인 공산당의 스페인 반전반파시즘위원회 대표단이 파리로 파견되었습니다. 세계여성반전반파시즘대회가 열렸고, 스페인 대표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생드니를 방문했습니다. 실제 역사와 달리, 그녀는 프랑스에서 파시스트에 맞선 노동자 통일전선의 실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의문이 아니라 지방도시의 조직과 피켓, 구호, 회의, 충돌, 타협 속에서 돌아가는 장치였습니다.
그 장치의 중심에는 이제 마르그리트 드술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리오의 사람이 되지 않았지만, 도리오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CGT 대표 자격을 가진 그녀가 들어오자, 생드니 반파시스트 행동위원회는 도리오의 사조직에서 진짜 통일전선 지방정부에 가까운 조직으로 변했습니다. 이바루리는 그 가능성을 보고 마드리드로 돌아갔습니다. PCE 지도부가 즉시 통일전선론을 채택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프랑스에서 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에마누엘 골드스테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독립사회주의자 아슈케나지 유대인 망명객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거리에서 시작된 질문은 소련대사관의 회의실에서 문장이 되었고, 그 문장은 모스크바를 거쳐 스페인으로 향했습니다. 2월 12일의 총파업은 이제 프랑스 좌파만의 기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코민테른의 새 노선, 생드니 모델, 암스테르담-플레옐 운동의 재가동, 그리고 다가올 스페인 위기의 복선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3. 마르세유의 총성
1934년 10월의 프랑스는 이미 여러 방향으로 당겨지고 있었습니다.
바르투 중도우파-우파 내각은 국내적으로 보수적이었습니다. 제르맹마르탱의 재정긴축은 공무원 감축, 봉급 삭감, 연금과 참전군인 보상 축소, 철도와 교육 부문 감축으로 이어졌고, 좌파에게 이는 위기의 비용을 노동자와 하급공무원, 교사와 철도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정책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달랐습니다. 바르투는 독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가능하다면 폴란드까지 포함하는 동방안보망을 구상했습니다. 독일과 폴란드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프랑스-소련 양자조약이라는 우회로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문제는 특히 민감했습니다. 바르투는 이탈리아와의 재접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헝가리 수정주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지원한다는 사실은 프랑스-유고슬라비아 협의를 더 빠르게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알렉산다르 1세는 1927년 프랑스-유고슬라비아 우호조약의 보충의정서에 서명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자동참전 조약은 아니었지만, 군사협력, 위기 시 연락체계, 공동 외교대응, 소협상국과 동방안보망의 조율을 담은 준방위조약이었습니다.
좌파 쪽에서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7월의 SFIO-PCF 행동통일협정은 아직 완전한 정치연합이 아니었지만, 2월 총파업의 경험과 생드니 반파시스트 행동위원회는 기층 공동행동을 조금씩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PCF는 여전히 사회파시즘론의 잔재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고, SFIO는 공산당을 경계했으며, CGT와 CGTU의 통합도 아직 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위기가 오면 서로를 찾아가야 한다는 감각은 생겼습니다.
그 무렵 스페인에서는 CEDA의 정부 참여에 맞서 좌익 봉기가 일어났고, 특히 아스투리아스에서는 광부 봉기가 무장투쟁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좌파는 아직 그 전모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난 몇 달간 프랑스 좌파가 극우 폭력에 맞서 침착하게 단결하고 중도좌파 공화주의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온 만큼, 일부는 스페인 좌익을 성급한 모험주의자로 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마르세유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1934년 10월 9일 마르세유, 알렉산다르 1세는 프랑스 땅을 밟았고, 그를 맞이한 것은 프랑스 공화국 총리 겸 외무장관 루이 바르투였습니다. 오픈카 퍼레이드는 화려했지만, 군중과 행렬 사이의 거리는 턱없이 가까웠습니다. 한 남자가 군중 사이에서 튀어나왔고, 총성이 울렸습니다.
처음에는 국왕이 쓰러졌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곧 바르투도 피를 흘린다는 말이 따라왔습니다. 오후 늦게 파리에 도착한 첫 문장은 유고슬라비아 국왕 피격, 바르투 총리 중상, 외국인 암살자 체포였습니다. 몇 시간 뒤 국왕 사망이 확인되었고, 저녁 무렵에는 프랑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루이 바르투 사망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총리실과 외무부가 동시에 비었습니다.
마르세유 현장에 있던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은 누구보다 먼저 사건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는 항구 인근 호텔 방에서 취재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종이 위에는 마르세유 의정서, 프랑스-유고슬라비아 안보협력, 동방안보망, 이탈리아의 침묵 같은 단어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호텔 복도에는 외국 기자와 외교관, 경찰과 직원들이 뒤섞였고, 바르투 총리도 죽었다는 말이 너무 빨리 도착한 악몽처럼 퍼졌습니다.
루이앙리는 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거리에는 환영식의 흔적과 수사의 흔적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라는 말,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말, 로마의 파시스트라는 말,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라는 말까지 뒤섞였습니다. 그는 경찰에게 실행범이 잡혔는지 물었고, 발칸 쪽 반체제 분자라는 짧은 답만 들었습니다.
그는 곧 외교관도 기자도 경찰도 아닌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미행은 들통났고, 루이앙리는 도리어 붙잡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기자라고 둘러댄 뒤, 그 남자가 꿈꾸는 이상이 무엇인지 묻는 척했습니다. 뜻밖에도 그 말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남자는 크로아티아인의 일이라고 했고, 유고슬라비아라는 감옥을 부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로마가 눈감았고 부다페스트가 길을 열었을 수도 있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자신들이라고 했습니다. 루이앙리는 그 말에서 우스타샤와 IMRO, 그리고 이탈리아·헝가리의 묵시적 후원망이라는 사건의 윤곽을 잡아냈습니다.
파리의 PCF 중앙당 회의실에서는 레옹 드 클레르퐁이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마르세유 지부의 전보가 들어오자 회의실의 공기는 변했습니다. 레옹은 토레즈에게 전화를 걸었고, 토레즈는 가능한 인원만으로 중앙위원회 긴급회의를 열겠다고 지시했습니다. 레옹은 생드니의 도리오와 소련대사관의 코민테른 연락책에게도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리오는 중앙위원 자격이 정지되어 당장 올 수 없었지만, 사회주의 세력이 지금을 혁명의 기회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레옹의 판단을 이해했습니다.
긴급회의에서 토레즈는 먼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레옹은 지금은 파리 코뮌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뒤 나로드니키가 혁명정세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탄압의 빌미가 된 사례를 떠올렸습니다. 바르베는 기다리자는 말이냐고 반발했지만, 토레즈는 클레르퐁이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구실을 주지 말자는 말을 하고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PCF 중앙위원회는 예상 밖으로 온건한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모험주의적 단독행동 금지, SFIO와 CGT와의 긴밀한 연락, 파시스트 정치테러 규탄, 바르투 암살을 국가적 비극으로 규정하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표하는 성명, 그리고 이를 당리당략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분노했지만 먼저 자신을 통제했습니다.
생드니의 CGT 반파시스트 행동본부 사무실에서도 같은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마르그리트 드술리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 거리로 뛰쳐나가면 우파 신문은 총리 사망 직후 좌파가 거리를 장악했다고 쓸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평화행진 계획도 나왔지만, 사람들은 너무 혈기왕성했습니다. 도리오는 뜻밖에도 신중하게 개입했습니다. 지금 저들은 걷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경찰선 앞에서 한 명이라도 밀치면 페탱이든 라로크든 누군가가 그 제목 위에 올라탈 것이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도리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진은 하지 않고, 대신 작업장과 분회에 공화국 질서수호 연락망을 깔았습니다. 각 작업장에는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민주헌정 수호. 노동자는 불순한 도발에 응하지 않는다. 국가적 비극을 반동의 명분으로 삼지 말라. 거리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파리 정치권과 언론 쪽에서는 미셸 부스케와 마르셀 포쿠아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와 만났습니다. 페탱이라는 이름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쿠데타의 이름이 아니라 안정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 위험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는 페탱을 당장 티에르라고 부르기에는 이르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프랑스가 또 한 번 티에르의 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셀은 그 판단을 문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페탱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총리의 빈 의자는 공화국 바깥에서 채워져서는 안 된다고 썼습니다. 그 문장은 SFIO와 급진당 좌파가 함께 삼킬 수 있었습니다. 미셸은 우파가 좌파의 작은 움직임도 비상권력의 명분으로 키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면 망델과 라발이 사건의 의미를 독점할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행동의 형식 통제였습니다. 급진당과 SFIO, PUP는 공화국 수호와 민간정부 계승 원칙을 중심으로 임시협의체를 만들었습니다. 공산당도 연락을 보냈지만, 직접 한 테이블에 앉기보다는 각자의 언어로 공조하는 방향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루이앙리가 마르세유에서 가져온 정보는 새로운 전장을 만들었습니다. 우스타샤와 IMRO의 연결망, 그리고 이탈리아·헝가리의 보호와 통행의 빈틈. 이것을 어떻게 쓸지가 문제였습니다. 미셸은 외교적 파장을 계산하려 했지만, 선들이 너무 많이 겹쳤습니다. 이탈리아를 너무 몰아붙이면 라발이 냉정한 외교를 말하며 부상할 것이고, 너무 약하게 말하면 유고슬라비아와 좌파 대중이 프랑스가 진실을 삼켰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셀이 해법을 냈습니다. 밝혀진 사실은 윤색 없이 보도하되, 이탈리아와 헝가리를 직접 살인자로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 프랑스 공화국이 양국 정부와 공조하여 국제테러망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루이앙리는 이 지침에 맞춰 기사를 썼습니다. 암살자는 외국인 단독광인이 아니었고, 우스타샤와 IMRO의 연결망은 유럽의 특정 국가들에서 보호와 훈련, 통행의 여지를 얻어왔다는 문장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분노를 지우지 않았지만, 라발이 전쟁선동이라고 공격할 만큼 어설프지도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곧 SFIO, PUP, 급진사회당 좌파의 공동선언문이 되었습니다.
반면 PCF와 《뤼마니테》는 더 뜨거운 문장을 택했습니다. 이탈리아와 헝가리를 직접 살인자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무솔리니가 만든 총을 호르티가 장전해 거실에 두었고 우스타샤가 그것을 집어 쐈다는 식으로 국제 파시스트 테러망을 공격했습니다. 온건한 좌파 정당들은 공화국과 책임 있는 국제공조를 말했고, 공산당과 급진 노동자층은 국제 흑색테러를 규탄했습니다. 말투는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습니다.
10월 12일 정오부터 16시까지 CGT·CGTU·PCF가 조직한 점심시간 총파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하루 전체를 마비시키지는 않았지만, 공장과 철도, 항만, 우편에서 네 시간 동안 작업을 멈추었습니다. CGT는 삼색기를 들고 공화국 수호를 외쳤고, PCF와 CGTU는 적기와 《인터내셔널》로 응답했습니다. 서로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간에 함께 멈춰 섰습니다. 총파업은 질서 있게 끝났고, 경찰과의 충돌도 폭동도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급진 노동자들은 SFIO와 급진당 좌파가 필요한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분노를 가장 선명하게 말한 것은 공산당이라고 느꼈습니다. PCF는 단순한 폭동세력이 아니라, 분노를 통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UP·SFIO·급진사회당 좌파도 공산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동행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좌파 연합은 단순한 선거 계산이 아니라 위기관리의 기술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르브룅 대통령은 페탱 기용을 실제로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좌파가 거리에서 폭발하지 않았고, 공산당은 애도했으며, CGT는 노동자 대오를 붙잡았고, 사회당과 급진당 좌파는 민간정부 계승을 말했습니다. 페탱을 부르기 위한 명분은 약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좌파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르디외의 국가개조론, 라발의 외교관리론, 망델의 공안국가론, 제르맹마르탱의 재정보수주의는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우파의 기류들을 휘어잡을 총리 후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르브룅과 우익 정파들이 합의해 옹립한 것은 프랑수아 피에트리였습니다. 그는 공화좌파 계열의 중도우파 기술관료였고, 식민장관과 재무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전쟁영웅이 이끄는 강고한 질서내각이 아니라, 차갑고 행정적이며 지루한 민간 질서내각이 탄생했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에는 급진사회당 인사 몇 명이 포함되었지만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더 눈에 띈 것은 PSdF-UJJ의 신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아드리엥 마르케가 노동장관을, 폴 라마디에가 사회보험·노동조정 담당 장관을 맡았습니다. 본래 좌파로 인식되었지만 국가주의적 계획경제와 계급협동을 주장해 SFIO에서 외면받았던 이들이 우익 중심의 민간 질서내각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SFIO는 장 조레스의 이름을 달고 우익 정부에 붙어먹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라발은 외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리한 외무장관이 아니었습니다. 우스타샤-IMRO 연결망과 이탈리아·헝가리의 묵시적 후원 문제는 이미 공론장에 올라왔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국제연맹에 이탈리아와 헝가리를 제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 우파가 이탈리아 책임론을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것을 막을 명분은 부족했습니다. 라발은 외교라인을 쥐었지만, 상처 입은 채 출발했습니다.
망델은 내무장관으로 수사권을 장악했습니다. 경찰 보고서와 외교자료는 국가의 파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좌파 언론이 책임 있는 방식으로 사실을 제기했기 때문에, 정부도 이를 단순 선동으로 몰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국가의 파일 안에 들어갔지만, 시민사회는 그 파일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익 리그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좌익이 무질서하게 거리로 나오고, 제도권 우파가 그것을 이용해 강한 국가를 말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밥상을 엎을 준비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밥도 차려지지 않았습니다. 라로크는 좌익의 조직화를 보고 순수한 거리정치의 한계를 감지했습니다. 불십자단은 보훈단체, 구호단체, 산재보상연맹, 비좌파 노동조합, 가족조직 같은 기관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악시옹 프랑세즈와 애국청년단, 프랑시스트 운동의 더 격한 우익은 분노했습니다. 외젠 델롱클 같은 인물은 공개 리그가 아니라 비밀 행동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기울었습니다. 훗날 혁명적행동비밀위원회(CSAR), 즉 ‘라 카굴’로 불릴 지하조직의 첫 세포들은 이때부터 빠르게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파시스트 음모라는 말은 그들에게 경고가 아니라 유혹처럼 들렸습니다.
피에트리 내각의 첫날, 망델은 마르세유 관련 보고서를 내무부 파일로 묶었고, 라발은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표현을 하나씩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뤼마니테》와 《르 포퓔레르》와 《마리안》은 서로 다른 제목을 달았지만, 모두 마르세유를 잊지 않겠다고 썼습니다. 생드니의 작업장에는 아직 접히지 않은 삼색기와 적기가 따로 놓여 있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치우지 않은 채 다음날 출근했습니다.
4. “4분의 1” 작전
마르세유의 총성 이후 두 달, 바르투의 빈자리는 피에트리 내각이 메웠지만 프랑스 정계의 긴장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라발은 외교적 균형을 말했고, 망델은 경찰 보고서와 증언 속에서 파시즘의 위협을 읽었습니다. 한쪽은 감정 없는 외교를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감정 없이 파시즘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패배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무렵 자르 문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국제연맹 관리 아래 있던 독일의 석탄지대 자르는 1935년 1월 주민투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선택지는 독일 귀속, 국제연맹 관리 지속, 프랑스 편입이었지만 실제 질문은 달랐습니다. 독일로 돌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니라 히틀러의 독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습니다.
12월 17일, 루이앙리 드 콩티브리삭, 마르셀 포쿠아, 미셸 부스케는 파리의 한 독일계 서점 2층에서 조르주 보름세르를 만났습니다. 망델의 측근인 그는 장관이 투표 결과 자체를 뒤집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독일이 이를 아무 대가 없이 가져가게 둘 생각도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내놓은 자료에는 도이체 프론트의 선전과 협박 사례가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보름세르의 목표는 프랑스 편입운동이 아니라, 현상유지파가 프랑스의 대리인이 아니라 히틀러 체제를 거부하는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미셸은 즉시 외교적 위험을 지적했습니다. 프랑스가 결과 자체를 부정하면 독일은 피해자 행세를 할 것이고 영국과 이탈리아도 등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도 보았습니다. 결과를 거부하는 대신, 그것이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보름세르 역시 정면 불복은 패배지만 절차와 보호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세 사람에게 SOPADE와 브라이트샤이트 관련 자료, 자르 SPD 연락망, 그리고 CVIA 설득용 문건을 넘겼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내무부의 지원 아래 진행될 계획이었습니다.
루이앙리는 CVIA를 설득하는 글을 썼지만 조직 내부의 입장 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반나치 세력을 돕는 데는 공감했지만 그것이 프랑스 정부의 공작처럼 보이는 순간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자크 수스텔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독일 망명자들이 직접 말하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소르본에서 열린 모임에는 랑주뱅, 리베, 알랭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습니다. 특히 독일 망명 자유주의자 도리나 리하르츠슐러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마르셀은 독일이라는 이름을 히틀러가 독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도리나는 독일인을 프랑스의 부속물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고 응수했습니다.
논쟁 끝에 양측은 한 가지에 동의했습니다. 독일 민주주의자들이 스스로 말해야 하며, 프랑스는 그 목소리를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도리나는 막스 브라운, 브라이트샤이트, 사회민주주의자와 가톨릭 반나치 세력의 이름이 프랑스보다 앞에 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회의는 곧 KPD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의 동의를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마르셀은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목소리를 훔쳤다고 비판하면서 다른 독일인의 목소리를 대신 말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마르셀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편하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것에 생리적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반대로 미셸은 중도정치 급진당의 일원으로서 공산당의 지분을 과도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불편했기에, 코민테른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다른 방안 역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0
결론은 없었지만 브라이트샤이트는 중요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프랑스가 현상유지가 영구 분단을 뜻하지 않으며 자유롭고 질서 있는 귀속을 위한 유예임을 공식 보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셀은 이를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편 루이앙리는 자르 현장을 찾았습니다. 거리에는 도이체 프론트의 전단이 넘쳐났고 “귀환”이라는 구호가 반복되었습니다. 독일 귀속 지지자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현상유지파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막스 브라운은 독일 귀속 여론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히틀러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반대자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KPD는 지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SOPADE는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파리에서는 외무부가 움직였습니다. 알렉시 레제는 프랑스 정부가 자르의 영구적 국제관리를 원하지 않으며 독일 귀속 원칙 자체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다만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투표, 반대파 보호, 단계적 이양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이 선언은 현상유지파에게 중요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논쟁은 “독일이냐 프랑스냐”가 아니라 “히틀러가 주도하는 귀속이냐, 국제연맹이 감독하는 질서 있는 귀속이냐”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곧 구스타프 뵐러가 자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SPD와 KPD가 이미 기층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이앙리는 이를 바탕으로 독일어 전단을 작성했고, 전단은 예상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자유독일자르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가톨릭 반나치 세력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SPD-S와 DDP-S가 주도한 행진이 열렸고, 크리스마스에는 KPD-S도 합류했습니다. 이어 가톨릭 중앙당의 일부 진보파까지 거리로 나왔습니다. 흑적금 삼색기와 십자가가 함께 흔들리는 장면은 자르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1935년 1월 13일 주민투표 결과는 독일 귀속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압도적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독일 귀속은 약 62.4%, 국제연맹 관리 지속은 약 35.8%를 얻었습니다. 히틀러는 격노했습니다. 괴벨스는 패배한 35.8%를 반역자로 규정했고, 하이드리히는 즉각 보복에 나섰습니다.
투표 직후 폭력과 린치가 이어졌습니다. 국제연맹 병력은 거의 개입하지 않았고, 프랑스군도 자르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셸과 마르셀이 준비한 피난망은 작동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가톨릭 반대파, 유대인과 노동조합원들이 프랑스로 탈출했고, 그들은 난민이자 살아 있는 증언이 되었습니다.
망델은 즉시 각료회의에서 독일 정권의 평화주의가 허상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인도적 위기에 우려를 표하고 국제연맹과 질서유지군의 실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투표 결과를 그대로 인정했고, 폭력은 개별적 사후 혼란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 결정은 사실상 방치였습니다. 국제연맹은 절차를 지켰지만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라발은 국경을 닫았고, 망델은 격분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좌파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CVIA 내부의 평화주의는 흔들렸고, 랑주뱅과 리베 같은 방위주의적 반파시스트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UDIF로 이어질 흐름도 이 시기에 싹텄습니다.
독일 망명자들은 라발을 증오하게 되었고, 프랑스 좌파에 대해서도 실망을 품었습니다. 망델은 결국 내무장관직을 던지고 새로운 정치세력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훗날 프랑스사회당(PSF)으로 이어졌습니다.
루이앙리는 귀국 후 일련의 사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파시스트 국가들 사이의 균열을 분석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새로운 결합 가능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글은 PUP와 반스탈린 좌파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를 넘어 스페인 좌파 진영에도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자신 역시 여러 정치조직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SFIO와 PCF, 노동조합들이 손을 내밀었지만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PUP였습니다. 그들은 루이앙리에게 기관지 《민주 노동》의 주필과 정치국 서기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자르는 결국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히틀러가 기대했던 것만큼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주민의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다른 선택을 했고, 그 대가는 폭력과 망명이었습니다. 국제연맹은 절차를 지켰지만 책임을 회피했고, 프랑스는 개입했지만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르의 짧은 저항은 하나의 사실을 남겼습니다. 독일이라는 이름은 아직 히틀러만의 것이 아니었고, 유럽의 반파시스트들은 패배 속에서도 서로를 발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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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제국주의에 찌든 개량주의자들과 현지인들을 PCF가 계몽해야겠군요(?)
@로콘 어.. 세티엔 학살로요? (?)
@E.E.샤츠슈나이더 PCF가 나치한테 미드오픈해서 프랑스인 모두가 비시민이 되면 계몽될겁니다(...)
@로콘 도리오의 친독 협력정부 루트 ㄷㄷㄷ
@dear0904 이벤트 시작했습니다.
@차들어 홍차야 이벤트 시작했습니다.
Event 6. 공화국의 ‘신민’ - 오프닝
알제리는 프랑스였습니다. 적어도 파리의 법전과 행정지도 위에서는 그랬습니다. 알제, 오랑, 콩스탕틴은 식민성의 먼 영토가 아니라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으로 불렸고, 그곳의 유럽계 주민들은 프랑스 시민(citoyen)으로서 시장을 뽑고, 의원을 보내고, 공화국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는 프랑스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그 땅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무슬림 주민들은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고, 프랑스 국민(national)으로 분류되었으며, 세금을 내고 군복무를 하고 행정명령에 복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프랑스 시민이 아니라 신민(sujet)이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의 주권 안에 있었으나, 프랑스의 정치적 공동체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말과 청원은 공화국의 권리 요구가 아니라, 너무 쉽게 치안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1930년대 파리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이 문제는 아직 “알제리 독립”이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알제리가 프랑스라면, 알제리 무슬림에게도 프랑스 공화국의 법과 권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아랍어를 쓴다는 이유로, 이슬람 개인법의 세계에 속한다는 이유로 시민권 바깥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은 공화국의 보편주의가 자기 문턱 앞에서 멈춰 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순간, 다른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를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알제리는 개척과 희생의 땅이었고, 유럽계 정착민들의 삶과 묘지와 학교와 포도밭이 놓인 프랑스의 변경이었습니다. 무슬림 다수에게 정치권을 넓히는 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프랑스 알제리의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실험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알제리 문제는 언제나 같은 문장으로 미뤄졌습니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권리는 중요하지만, 질서가 먼저다.
그런 가운데 1935년 3월 30일, 각료회의를 거쳐 이른바 레니에 법령이 공포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를 알제리에서의 반국민적 시위와 프랑스 주권에 반하는 선동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표면상 그것은 질서의 언어였습니다. 폭동을 막고, 프랑스의 권위를 보호하며, 알제리의 평온을 지키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리의 진보좌파가 본 것은 달랐습니다. 이 법령은 단순히 폭력을 처벌하는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알제리인이 정치적으로 말하는 순간, 그 말을 프랑스 주권에 대한 공격으로 바꿀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시민권을 요구하는 청원도, 아랍어 교육을 요구하는 집회도, 행정폭력에 대한 항의도, 경찰처분을 비판하는 전단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반프랑스 선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더 섬뜩했습니다. 공화국은 알제리인을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민처럼 말하려 할 때, 공화국은 그 말을 범죄의 언어로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질문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알제리가 프랑스라면, 왜 알제리인에게 프랑스의 권리가 가지 않는가.
알제리가 프랑스가 아니라면, 프랑스는 무슨 권리로 그들의 말을 처벌하는가.
그리고 공화국이 알제리에서 신민을 만든다면, 그 공화국은 과연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가.
[이번 이벤트는 우선 미셸과 마르셀의 개별 댓글타래에서 진행됩니다. 개별 댓글을 기다려주세요.]
@E.E.샤츠슈나이더 뤼미나테 "진정한 사회주의와 제국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SFIO와 CGT는 알제리의 즉각적인 완전 독립을 지지하라!" "알제리는 프랑스가 아니다!"
오늘도 책임 없는 분탕을 치고 있는 공산당의 모습입니다(?)
@로콘 참고로 PCF는 인민전선 참여하고 나서부터는 알제리 독립을 주장하는 에투알 노르아프리칸(ENA)을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민족주의적 종파주의자로 마구 공격해댔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뤼미나테 "어제의 기사는 트로츠키주의자의 사보타주다! 알제리는 프랑스이고 알제리 독립은 트로츠키-파시즘이다!"(...)
@로콘 공산당 고증 ㄷㄷㄷ
1. 마르셀 포쿠아
1935년 4월 2일, 오후 7시 20분.
파리 9구, 《마리안》 편집실 뒤편 회의실.
마르셀 포쿠아의 책상 위에는 관보 한 부와 알제리 무슬림 선출직 대표들이 보낸 탄원서 사본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편집실 바깥에서는 식자공들이 늦은 판을 준비하고 있었고, 안쪽 작은 회의실에는 마르셀의 동갑내기인 SFIO 소속의 법률가이자 경제학자 앙드레 필립(André Philip)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필립은 법령의 문구에 밑줄을 그어두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주권에 반하는 선동.” 그는 그 대목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 말은 폭동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알제리인이 시민권을 요구하는 말, 아랍어 학교를 요구하는 말, 경찰의 자의적 처분을 비판하는 말까지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선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르셀은 언젠가 글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무엇을 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마르셀은... 법령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탄원서와 비교해보는군요... 어디가 제일 문제인가. 어디가 제일 위헌적인가. 어디가 "취약점"인가.
@dear0904 분석-법집행 굴림. 난이도 보정 없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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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기반의 좌파 사회주의자인 마르셀의 눈에는, 단연 ‘프랑스 주권에 반하는 시위나 선동’이라는 문구가 가장 거슬렸습니다. 레니에 법령은 총을 든 자와 탄원서를 든 자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즉, 알제리 무슬림이 시민권을 요구하든 아랍어 교육을 요구하든 행정폭력을 비판하든 총독부나 현지 경찰이 원한다면 그걸 ‘반국가행위’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 법령은 행위가 아닌 ‘의도’를 처벌한다는 점에서 공화국 법의 기본 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E.E.샤츠슈나이더 마르셀은 자리에 있는 필립에게 분석 결과를 공유하고, 이 행정명령이 행위가 아니라 의도를 처벌하고 있음을 법률가의 언어로써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2. 미셸 부스케
1935년 4월 2일, 오후 8시 40분.
파리, 팔레 부르봉 근처 급진사회당 의원단 소회의실.
미셸 부스케가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이미 법령 전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장 제(Jean Zay)는 창가에 서서 담배를 손에 든 채, 알제리에서 온 탄원서의 마지막 문단을 다시 훑고 있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웠습니다. 레니에 법령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급진사회당이 참여하고 있는 내각, 그리고 급진당 우파와 중도파가 묵인한 질서의 언어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망데스 프랑스가 낮게 말했습니다. “이건 알제리 문제만이 아닙니다. 행정부가 어디까지 법률을 대신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장 제가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공화국이 어디까지 공화국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미셀은 자리에 앉곤 처음에는 법령을 읽고, 다음에는 알제리인들의 탄원서를 읽은 후 말합니다.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당연히 모든 법령이 의회의 투표에 의해서 적용되어야 하는게 원칙 아닙니까?”
그리고 미셸은 이걸 그냥 어물쩍 넘어갈 경우 좋지 않은 선례가 될지 분석해보겠습니다. 선례가 쌓이고 쌓이면 관습법이 되고 관습법에 따라 국정을 하는 것도 가능하니…
즉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가 프랑스에서 반복될 수도 있나?라는 말입니다.
@차들어 홍차야 망데스 프랑스는 잠시 법령의 첫 장을 손끝으로 눌러 펴고, 미셸을 향해 낮게 말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1834년 7월 루이필리프 국왕의 ‘왕실 칙령’ 이후, 알제리는 본토와 같은 방식으로 법률 아래 편입된 것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이라는 특수한 행정공간으로 다루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정부와 총독부는 알제리의 행정, 치안, 원주민 통치에 관해 매우 넓은 명령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의회가 정한 일반 법률이 아니라, 정복 직후 만들어진 잠정적 행정체제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겁니다.“
장 제도 덧붙입니다.
“문제는 불법이라서만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합법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문제입니다.“
@E.E.샤츠슈나이더 일제가 여기서 벤치마크 해왔고요.... 탄원서에는 그러한 법적 소외? 초법적 행정?을 그만둬 달라는 내용도 당연히 있죠?
@차들어 홍차야 분석-의회로 들어갑니다. +6.
Rolling 3d6+6(to total) : 6, 6, 1, + 6, TOTAL: 19
관습법은 영미법적인 개념이지만, 어쨌든 이 법령은 “행정관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공화국 법질서 자체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행정부는 ‘정치 언어’를 ‘처벌의 대상’으로 전환하는 선례를 만들어낼 수 있고, 공화국 정부가 본토 밖 프랑스에 법률의 예외적용지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치 인권이 다르게 적용되는 실험실이 생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공화국의 자유는 상황에 따라 행정부가 유예할 수 있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동시에, 미셸은 이 위기의식이 장기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알제리 무슬림에 대한 실질적 침해행위라는 걸 빠르게 다시 깨닫습니다. (상당한 성공 결과)
@차들어 홍차야 1. 레니에 법령의 철회 또는 적용범위 제한
2. 정치적 청원권과 표현의 자유 보장
3. 이슬람 개인법 지위 포기 없는 시민권 확대
4. 차별적 행정처분과 경찰권 남용 감시
5. 교육권과 대표권 확대
이 정도가 탄원서의 주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