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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청소재지 영양읍에서 31번국도 경유 918번지방도 10키로지점 일월산 기슭에 근원을 둔 맑은 샘물이 흐르고 월자봉(月字峰)으로 올라 가는 중간 쯤에 있는 마을이다. 계절 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원래 영양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으로서 신당(神堂)이 있어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고 일명 구도실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상부곡 (上部曲)을 합하여 도곡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되었다.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집적 바위와 장군천(壯軍川) 이야기가 전해 온다. 집적바위는 구도실 앞들에 있는 바위로서 넓이가 한 평 남짓하고 높이는 한 자 정도로 열십자 모양으로 갈라졌는데 그 아래에 돌탑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장군천의 이야기는 의병대장 오삼달(吳三達)과 걸림을 둔 냇물 이름의 사연에 근거하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는 조선조 영조 4년(1728) 무신(戊申)의 해에 이인좌(李麟佐)ㆍ정희량(鄭希亮) 등이 나라에 불만을 품고서는 난리를 일으켰는데, 그 세력이 자못 큰지라 전국적으로 이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양에서는 경상도 호소사(慶尙道號召使) 조덕린(趙德隣)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서 반란군을 무찌르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때에 일월면 도곡동에서는 취은당 (醉隱堂) 오삼달이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오 장군은 본군에서 많은 의병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다닐 만한 길이 별로 없어서,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행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 장군은 냇가를 따라서 가곡동과 주곡동 앞으로 다녔다고 한다. 때로는 진(陣)을 치기도 하였는데,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누구라도 나와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향토의 의병을 지휘하던 오 장군의 호령 소리하며 그의 활쏘는 솜씨는 널리 알려졌다. 지금도 주곡리의 동구 하천변에는 장수터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누워서 잠을 잔 듯한 곳이 있어서 이를 오 장군이 잠을 잔 터라고 하고, 해서 이 냇물을 일러 장군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주곡동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주계천(注溪川)이라고도 하였는데, 혹은 매화피는 도계동의 이름을 따서 매화천(梅花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로는 ‘장군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구도실,도곡은 약 400년 전 불자들이 마을 안에 절을 짓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심신 수련의 도를 닦은 마을이라 해서 구도실이라고 불렀다 하며 일설에는 구씨(具氏)들이 도를 닦은 곳이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의 풀이를 할 수는 있다. 도곡동에 신을 모시는 신당 (神堂)이 있어 신당에 다니는 이들이 많이 있던 것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부터 산신이 있다고 본다. 구도-굳-굿으로 걸림을 둘 때 굿을 하는 종교 공간이 예로 부터 있었던 것으로 풀이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본다. 본래 ‘굿’이라 함은 오늘날에 와서 무당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연희행위 일체를 통틀어 말하지만 옛말로라면 이는 굴 곧 종교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도곡의 ‘도(道)’가 뒤를 뜻함을 함께 고려한다면 물의 북쪽에 있는 뒷골 마을로서 신당을 모시는 굿을 하던 곳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서원골은 도곡리 서쪽 음지마을 상단부에 작은 골이 있으니,이름하여 서원고을이 라고 한다. 이 곳은 조선조 중엽에 병조참판을 지낸 야성정씨 정담선생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후학의 양성을 목적으로 서당을 지으니 명고서당(明皐書堂)이라고 하였다.그 뒤 순조 28년에 영해의 향현사(鄕賢祠)의 정담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봄 가을로 제향을 올렸다. 고종 7년(1868)에 서원 훼철령에 따라 앞에 있는 논들을 서원앞들이라고 한다.
장군천은 일월산 남쪽에 위치한 도곡리 월간(月簡)에서 발원하여 가곡리를 거쳐 주곡리 앞으로 흘러 도계리 입구에서 동쪽의 반변천과 합류 하는 내(川)가 바로 장군천이다. 조선조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나라에 불만을 품고 난리를 일으켰는데 그 세력이 자못 큰지라 전국적으로 이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무찌르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추대되어 영양군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오삼달 장군은 수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냇가에 진을 치고 훈련과 행군을 하였는데 아직도 삼달 장군이 잠잔 터라고 전해 오는 주곡리 동쪽 하천변에는 장수터라는 바위가 있다. 장수터를 흐르는 냇물을 일러 장군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계리에 매화가 많이 피는 것을 고려하여 매화천(梅花川)이라고도 하였으나 영조 4년 반란군이 평정된 이후 ‘장군천'으로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한다. |
도곡리道谷里 명고서원明皐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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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배경 |
명고서원(明皐書院)은 임진왜란 때 공신 장렬공(莊烈公) 정담(鄭湛, 1548~1592)과 황간(黃澗) 현감을 지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16)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세우고 매년 향사를 올렸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옮겼고, 종가 또한 이주하면서 명고서당을 서원으로 고치고 위패를 모신 뒤 명고서원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 서원에 황간현감을 지낸 오극성의 위패를 함께 추향하게 되었다. 많이 살고 있어서 춘추로 향사를 지내며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1871(고종8)에 전국 서원 철거령에 의하여 묘우는 철거되고 서당만이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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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구성 |
명고서원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이었으며, 좌측 2칸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하였고, 퇴칸은 헌함을 돌출시켜 누마루처럼 꾸몄다. 사방에는 토석담을 둘렀으나 많이 무너졌으며, 기단은 시멘트로 처리하였다. |
현판 |
명고서당(明皐書堂) |
정의재(正義齋) |
성인재(成仁齋) |
명고서당중수구기(明皐書堂重修舊記) |
-완산(完山) 류치명(柳致明, 1777~1861) |
명고서당기(明皐書堂記) |
-완산(完山) 류필영(柳必永, 1841~1924) |
취은당은 1712에 의병대장 오삼달吳三達이 건립한 정자로 구도실마을 뒤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좌측 2칸을 통칸으로 처리하여 마루방으로 꾸민 후 우측에는 통칸
온돌방을 연접시켰는데 배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고 전면에는
평난간을 세웠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도곡리진성이씨정려각은 일월면 도곡리 444번에 위치해 있으며 열녀이씨는
이수연李壽延의 아내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여
1815년에 정려가 되었다.
원래는 청기면 당리에 있었던 것을 후손들이 현 위치인 구도실 마을로 이건
하였으며비각의 뒤쪽에 취은당이 자리잡고 있다. 비각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정면에는 스테인레스로 제작한 2짝 대문을 설치하였다.
비석의 전면에는 열녀사인이명규일휘수연처진성이씨지려烈女士人李命圭一
諱壽延妻眞城李氏之閭란 비명을 각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