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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삼월 날아든 제비를 보며 인연을 되새기다 / 스텔라 박
영사님 나라인 미국에서는 제비들이 몇 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나요?” 남편 핀커톤 중위가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 근무하는 동안, 자신을 현지처로 삼아 결혼식을 올린 것을 알 길 없는 나비부인 초초상. (푸치니의 오페라 Madama Butterfly의 주인공 이름)
갑작스런 나가사키 주재 미국 영사의 방문에, 차 한 잔을 대접하며 나비부인이 했던 질문이다. 미국에 돌아가는 즉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여성과 정식 결혼을 올린 핀커톤의 편지를 받은 나가사키 주재 미국 영사는 이 순진무구한 어린 신부에게 진실을 전달할 만한 용기가 없다.
떠나기 전부터 돌아오겠다는 의지는 눈꼽만큼도 없었으면서 “나, 돌아올께. 제비가 집을 지을 때쯤이면.” 이라는 헛된 희망을 여자 가슴에 남기고 떠난 그 나쁜 남자의 말을 나비부인은 철썩 같이 믿는다. 매일 같이 나가사키 항구를 내려다 보며 떠난 서방을 기다리는 그녀의 대가 없는 기다림은 오페라 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
제비축제 열리는 마을, 샌후안 카피스트라노
새가 남자보다 낫다. 핀커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강남 갔던 제비는 봄이 오면 어김 없이 돌아오니까 말이다. 그 작은 체구를 가진 새, 제비가 아르헨티나의 고야(Goya)로부터 미국의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까지 비행하는 마일리지는 독수리에게도 쉽지 않고, 보잉기로도 13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LA에서 약 한 시간 거리의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에는 매년 봄, 아르헨티나에 갔던 제비들이 돌아오고 이를 축하하는 제비 축제(Fiesta de Las Gondrinas)가 열린다. 올해 역시 예년과 마찬가지로 미션을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의 제비 축제가 펼쳐질 예정이다.
남가주의 산천 경계 좋은 곳을 다 놔두고 제비들이 굳이 카피스트라노의 미션을 찾은 이유는 무얼까. 사연을 캐봤더니 흥부만큼 마음씨 고운 신부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1910년부터 1933년까지 약 23년 동안 San Juan Capistrano 성당에 재직했던 St. John O'Sullivan 신부는 그의 저서, “Capistrano Nights”에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해 봄, 존 설리반 신부는 카피스트라노 마을을 걷고 있다가 한 상점 주인이 손잡이가 긴 빗자루를 들고 처마 밑의 제비들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게 된다.
“아니, 주인장, 지금 뭐 하시는 게요?”
“이 몹쓸 놈의 제비들이 지금 내 가게의 지붕 아래다가 집을 지었단 말이오. 이 지저분해진 것 좀 보시오. 그래서 지금 이놈들을 쫓아내고 있는 중이요.”
“주인장께서 쫓아내시면 이 불쌍한 것들은 어디로 간단 말이오?”
“그야 내가 알 바 아니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람. 어찌됐든, 여기에서 살면서 내 가게의 건물을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되거든요.”
“쯧쯧. 불쌍한 것들. 제비들아. 이리 오너라. 내가 쉴 곳을 마련해줄 테니. 미션으로 와라. 우리 미션에는 너희들 모두가 집을 짓고 살기에도 남을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단다.”
다음 날 아침, 존 오설리반 신부는 어제 상점에서 보았던 그 제비들이 후니페로 세라 교회(Father Junipero Serra’s Church) 건물 밖에 집을 짓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후 제비들은 성 요셉 축일인 3월 19일을 전후해 매년 카피스트라노 시를 찾아와 미션의 처마 밑에 둥지를 튼다고 한다. 제비들이 특히 좋아하는 집터는 세라 신부 기념 성당의 처마 밑과 성당 옛터. 한때 이곳에는 제비 집이 수백 개가 달하기도 했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처럼 신부님과 제비에 얽힌 우화는 아름다운 무주상보시의 공덕을 가르쳐준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우화가 무척 아름답기는 하다만, 실제 제비들은 왜 남가주의 여러 지역을 놔두고 샌후안 카피스트라노를 찾는 걸까? 진실은 이렇다. 이 지역에는 제비들이 좋아하는 먹을 거리인 곤충이 무척 많이 있고 미션 건물의 처마 밑이 안전하기 때문에, 제비들이 새끼들을 키우기 최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년 2월 18일, 아르헨티나의 고야(Goya) 지방을 떠난 제비들은 한 달 동안의 긴 여정 동안 그 작은 날개를 퍼득여 7500마일의 거리를 날아온다. 카피스트라노에서 새끼를 낳아 키우며 여름을 지낸 그들은 10월 23일, 후안 성인(San Juan) 축일이 되면 미션 주위에 빙빙 원을 그리며 도는 것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뒤 다시 아르헨티나 고야로의 비행을 시작한다.
제비 축제는 3월 19일을 전후한 일요일, 오전 이른 시각의 타종 행사로 시작된다. 성 요셉 축일 처음으로 카피스트라노에 날아 들어온 제비들은 진흙과 마른 풀을 이용해 세라 신부의 동상이 서 있는 종각 근처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주황색의 꼬리를 가진 작은 새들이 자신들이 작년에 살던 둥지를 다시금 자기들의 집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종소리에 제비들이 날개 짓을 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우리들은 ‘인연과 업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주제를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어어 제비들이 카피스트라노에 돌아올 때(When the swallows come back to Capistrano)라는 노래를 부르는 순서. 리온 레느(Leon Rene)가 1939년도에 불러 히트한 이 노래는 덩그마니 미션 하나밖에 볼 것 없던 소도시 카피스트라노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들어 주었다. 미션에는 리온이 사용하던 피아노가 전시돼 있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주변 경관을 돌아보며 감상에 젖어볼 수 있다.
성요셉 주일 성당에서는 성 요셉 축일 미사가 거행된다. 방문자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미사에 초대된다. 미사 후에는 시대 의상을 입은 학생들이 스페인 왕국이 대관식 장면을 재현하는 순서가 마련된다. 대관신 재현은 수십년째 계속되어 온 제비 축제 전통 가운데 하나다.
축제 기간 내내 마련되는 전시들은 교육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제비와 카피스트라노 인근에 서식하는 조류 전시, 초기 미션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역사 전시도 알차게 꾸며졌다. 제비로 분장하거나 스페인 풍의 멕시코 의상을 입은 어린이들이 민속 춤과 전통 민요 연주 마당을 꾸미고 멕시코시티에서 제비축제를 위해 미국을 찾은 아즈텍 댄서들과 라모나 패전트 댄서들이 공연을 쳘지는 등, 축제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어진다.
세라 신부로 분장한 자원 봉사자는 어린이들과 사진도 찍고 옛날 이야기도 들려준다. 아즈텍 페이스페인팅과 풍선 아티스트들의 시범도 축제의 흥을 한껏 돋운다. 도자기 만들기 등 예술가들의 수공예품 제작 시범도 마련된다.
미션의 앞마당에는 인디언들의 튀긴 빵, 멕시코 음식 초기 캘리포니아 음식을 판매하는 부스가 마련돼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수공예품과 기념품 역시 하루 종일 판매된다.
제비 축제의 중심지인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 미션(San Juan Capistrano Mission)은 1776년, 건축됐던 때부터 이 도시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 왔다. 프란체스코회의 수사, 후니페로 세라 신부(Padre Junipero Serra)에 의해 지어진 이 미션은 10에이커의 넓은 공간에 캘리포니아 초기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전시관과 채플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부들이 도포 자락 같은 사제복을 휘날리며 주랑이 늘어선 공간을 걸어가는 모습은 로마의 시스틴 채플 안뜰에라도 온 것 같은 감회에 젖어들게 만든다.
넓은 정원은 오색의 꽃들로 장식돼 있고, 중앙에는 분수가 물을 뿜어내며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인다. 연못에는 잉어들이 황금빛 지느러미를 휘날리며 헤엄을 치고 수련과 아이리스가 모네의 정원만큼 화사하게 피어있다. 가끔씩 나비와 새들도 날아드는 미션 앞들은 천국의 정원처럼 평화스럽다.
미션은 신부들과 스페인 병사, 그리고 신부를 보좌하며 노동력을 제공했던 인디언들이 실제 생활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가축 사육장, 옥수수 밭, 과수원, 와인 양조장, 벽돌 굽던 가마, 양초와 비누를 만들던 시설, 등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던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200여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 온 느낌이다. 수도사들의 침실과 부엌, 기도실은 그들의 청빈했던 삶의 편린을 헤아리게 해준다. 성인의 몸을 겨우 누일 수 있는 크기의 딱딱한 침상을 보며, 법정스님의 오두막집을 떠올려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라 신부가 미사를 이끌었던 세라 채플에 들어서면 천상의 노래처럼 영롱한 성가가 울려퍼진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내온 300년 된 황금 제단은 모두 336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922년 들어서야 그 조립을 마쳤다고. 화려한 금박의 모티브는 다소 투박한 천사 조각과 비조화의 조화를 이루며 반짝인다. 실제 미사가 거행됐던 대 석조 성당은 1812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포로 로마노처럼 그 잔해가 남아 미션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고 있다. 대 석조 성당은 복원 공사가 계속 되고 있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습을 보며, 세존 앞에서 삼배를 드리는 노보살님들의 깊게 주름 패인 얼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신앙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어쩜 그들은 이 여정의 종착역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흥보전에 등장하는 보은의 제비
제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래 소설, ‘흥보전’에도 등장한다. 중국 강남으로 매년 날아가는 철새, 제비는 자기 새끼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흥부에게 온갖 금은보화로 갚는다. ‘흥보전’에서 제비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을 형상화 시켜준 소재인 것이다. 그렇고보니 어릴 적, 삽화가 많이 들어간 동화로는 읽었지만, 원문으로 된 ‘흥보전’을 읽은 기억이 없다 .3월호 글을 준비하며 도대체 ‘흥보전’의 원문은 어떤지,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줄거리야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다름 없다. 연생원의 두 아들, 놀부와 흥부가 있었는데 놀부가 유산을 다 차지하고 동생 흥부를 내쫓는다. 흥부는 아내와 자식 11명을 데리고 발이 튀어 나오는 움집에서 헐벗고 굶주린 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묵묵히 살아간다.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음에도 흥부의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흥부는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새끼제비를 보게 된다.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니, 이를 그냥 보고 넘어갈 리 없다. 제비 새끼를 정성껏 돌보고 날려 보냈더니 이듬해 봄, 그 제비는 흥부에게 보은(報恩)의 박씨를 물어다 준다. 가을이 되어 잘 익은 박을 따서 톱으로 잘랐더니 온갖 금은보화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놀부가 흥부에게 달려와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자기도 새끼제비 한 마리를 잡아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뒤 실로 동여매어 날려 보낸다. 놀부 역시 이듬해 박씨 하나를 받게 되지만 그 씨를 심어 키워낸 박 속에서는 도깨비와 괴물이 나타나 놀부의 집은 풍지박산이 된다. 하지만 마음씨 고운 흥부는 형 놀부를 지성으로 섬기며 함께 행복을 누렸다고 한다.
자, 그러면 ‘흥보전’의 실제 주인공, 제비가 등장하는 장면을 살짝 들여다 보자. <삼월동풍 방춘화시(方春和詩) 비금주수(飛禽走獸) 즐길 적에,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 비입심상 백성가(飛入尋常百姓家)라. 흥보의 움막에 날아드니 흥보가 좋아라고 제비보고 치하한다. "소박한 세상인심, 부귀를 추세하여 적막한 이 산중에 찾아올 이 없건마는, 연불부빈가(燕不負貧家)라 주란화각(朱蘭畵閣)은 다 버리고 말만한 이 내 집을 찾아오니 반갑도다.”>
어째, 흥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존 오설리반 신부가 했던 말과 이처럼 비슷한지, 샌후안 카피스트라노의 제비 이야기는 미국 판 흥부전이라 불러도 될 만 한 것 같다. 제비 새끼의 발을 고쳐준 흥부는 이 제비를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원문 구절을 다시 인용해본다.
“흥보가 좋아라고, 집안에 있을 제는 제비하고 소일하고, 나갔다 돌아오면 제비 집을 보아 다정히 지내더니 칠월유화 팔월환위 이슬이 서리 되고 금풍이 삽삽하여 수의 구월 되어 오니 동방에 실솔이 울어, 깊은 수심을 자아내고, 장공에 홍안성은 먼데 소식 띄워 온다. … 사랑옵다 우리 제비 날 버리고 가려느냐. 강남이 멀다 하니 며칠이면 당도할꼬. 명춘에 돌아오거든 부디 내 집 찾아 오라. … 흥보는 본래 서러운 사람이라 눈물보씩이나 흘리고 이별을 하였구나.”
구절구절이 거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흥부와 제비의 러브스토리 같다. 운율도 3 4 3 4 3 5 4 3, 조상들이 좋아하시던 리듬을 딱딱 맞췄다. 있는 그대로 노래가 되니, 판소리 한 마당은 또 얼마나 신명이 났을까. ‘흥부전’의 주인공들은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남원시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은 흥부가 출생한 장소이고,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 유랑 끝에 정착하여 복을 누리고 살았던 곳이라고 문화재 고증 팀은 최근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다. 전래소설 ‘흥부전’과 판소리 ‘흥부가’에도 “전라도는 운봉이요, 경상도는 함양이라.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홍보가 사는지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운봉읍과 함양군 사이에 있는 성산리(성산마을)를 말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산리에는 연비봉, 화초장 바위, 흥부네 텃밭, 연하다리 등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모님, ‘제비 한 마리 키우시지요?”
이처럼 보은의 상징인 제비가 왜 유훙업소에서 돈 많은 여자 유혹을 일삼는 제비족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는지, 참 딱한 노릇이다. 제비족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은 1970~80년대 중동건설 붐이 한참 일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남편을 중동으로 보내고 독수공방 하던 젊은 부인들이 남편들이 보내주는 돈은 있고, 시간도 많고, 젊음은 주체할 수 없고 하다보니 캬바레로 춤을 배우러 다니다가 거기에 상주하던 쌔끈한 춤선생과 눈이 맞았는데 여차저차 해서 나중에는 이 춤선생한테 마음주고 돈주고 몸주고 했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이 춤선생들이 하나 같이 몸이 쌔끈날렵하고 춤 또한 잘 추는 것이, 마치 물찬 제비처럼 보인다 해서,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이후에는 춤선생이 아닐지라도 멀쩡한 외모와 여성들이 원하는 매너를 무기로 관계를 맺고 나중에 돈을 뜯어내는 남성들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제비족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제비족을 꽃미남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제 제비족을 수사한 형사들에 따르면 의외로 수더분한 옆집 아저씨 스타일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따뜻하고 다정하게 내 말 들어주는 다정다감한 언행이란 얘기다. 요즘 세대들은 ‘제비족’을 ‘픽업아티스트’ 또는 ‘선수’라고 부른다. 명칭이 뭐가 됐든, 핵심은 감언이설로 여자를 유혹한 후, 등쳐 먹는 것이다.
춘삼월, 푸른 하늘에 날개짓 하는 제비를 보며 보은과 인연이라는 인생의 커다란 화두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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