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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세기]의 저자 고려국 수시중 행촌 이암의 위상
1. 투철(透徹)한 민족주의(民族主義) 사상가(思想家)
이암(李嵒)선생은 유불선(儒佛仙)을 지닌 투철(透徹)한 온건주의(穩健主義) 사상가(思想家)인 면모(面貌)를 볼 수 있다.
고찰(考察)컨대, 행촌(杏村)의 인생(人生)은 조국(祖國)의 민족사상(民族思想)을 기반(基盤)으로 평생(平生) 점철(點綴)되어 표출(表出)되었고, 단군시대(檀君時代)의 선(仙). 고려(高麗)의 불(佛)과 유(儒)를 조화(調和)롭게 인식(認識) 체득(體得)하였다.
유교적(儒敎的)으로는 일찍이 1308년 주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 외종조(外從祖) 백이정(白頤正)의 문하(門下)에서 13세의 나이로 수학(修學)하였다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생(門下生)으로는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백문보(白文寶), 이인복(李仁復) 등이 두드러진다.
불교적(佛敎的)으로는 고려(高麗) 숭불정책(崇佛政策)에 호응(呼應)한 불가(佛家)에 깊은 교리(敎理)를 숙부(이정.李精)가 각진국사(覺眞國師)로 입신(立身)되는 가문(家門)을 이루었다.
장성현(長城縣) 백암사(白巖寺*백양사白羊寺)는 사실상(事實上) 행촌(杏村)의 원찰(願刹)로서 그의 숙부(叔父) 각진국사(覺眞國師) 이정(李精*法號:復丘)이 오래 머물렀던 절이다.
그후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원찰(願刹)로 되었는데, 계제(季弟) 매촌(梅村) 이군보(李君保*改諱)가 밀직사 직(密直司 直)의 관직(官職)을 버리고, 숙부(叔父)의 곁으로 갔다.
당초 초휘(初諱)는 행촌(杏村) 군해(君侅). 도촌(桃村) 군서(君土胥). 매촌(梅村) 군보(君保) 3형제였었다.
1359년 군해(君侅)를 암(嵒). 군서(君土胥)를 교(嶠). 군보(君保) 를 징(澄)으로 함께 개휘(改諱)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징(李澄)은 운암대사(雲菴大師)로 시호(諡號)를 제수(除授)된 것을,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이 묘지명(墓誌銘)에 기록(記錄)하였으며, 따님만 두고 무후(无后)하였다.
고찰(考察)컨대, 이와같은 사실(事實) 때문에 행촌(杏村) 이암(李嵒)과 목은(牧隱)이, 조선시대(朝鮮時代) 정통(正統) 성리학파(性理學派)의 반열(班列)에서 제명(除名)시켰을 것이다.
선가적(仙家的)으로는 고려말(高麗末) 범장(范樟)등과 교유(交遊)하며 터득(攄得)한 단군시대(檀君時代)부터 우리 고유(固有)의 민족신앙(民族信仰)인 선도사상(仙道思想)에 깊었다.
이는 태백진훈(太白眞訓)이라는 단군시대(檀君時代)의 선도사상(仙道思想)이 저술(著述)로서 나타났다
.
2. 행촌(杏村)의 양심적(良心的)인 정치역정(政治歷程)
행촌 이암(李嵒)은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함에 있어서, 정통적(正統的)인 관료(官僚)로서 평생(平生) 공정무사(公正無私)하게 관직(官職)을 수행(修行)하여 후세(後世)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또한 승묵[繩墨*법도(法度)]에 근수(謹守)하여 이에 어긋나면 엄하게 하였으며, 어떠한 불법적(不法的)인 부류(部類)와는 물론 어떠한 파당(派黨)에도 속하지 않고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도 스스로 행하였다.
행촌(杏村)은 충선왕(忠宣王)때에 문과급제(文科及第)후 정통관료(精通官僚)로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비롯한 전선(銓選), 대언(代言)등의 요직(要職)을 역임(歷任)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의 선위(禪位)에 따라 세자(世子)때에 숙위(宿衛)한 바 있는 16세 나이의 충혜왕(忠惠王)이지만, 정도(正道)의 국정(國政)을 기대(期待)하였다.
그러나 충혜왕(忠惠王)의 폐정(廢政)으로 인하여 폐위(廢位)되어 충숙왕(忠肅王)이 복위(復位)하는 문책(問責)의 숙청(肅淸) 대상(對象이 되어 야인(野人)으로 8년의 세월을 보냈다.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후에도 본태적(本態的)인 성정(性情)으로서 자의(恣意)대로 폐정(廢政)을 농단(聾斷)함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여, 정치적(政治的)인 좌절감(挫折感)을 갖었다.
오직 국정(國政)은 이들을 위해 존재(存在)하는 상황(狀況)이었고, 심지어 정방제조(政房提調) 찬성사(贊成事) 행촌(杏村)이 고용보(高龍甫)에 의하여 유배(流配)되어 좌절(挫折)된다.
이어서 김용(金鏞)의 반란(叛亂)으로 마지막 장상(將相) 행촌(杏村)의 정치(政治) 구도(構圖)는 고려말기(高麗末期)의 혼탁(混濁)한 정치적(政治的) 역학(力學)과 정서(情緖)에서 평생(平生)을 도도(滔滔)하고 고고(孤高)한 정치(政治)를 지향(指向)하였다.
그러나 행촌은 시대적인 상황과 병행할 수 없는 정치철학의 와중에서 번민과 갈등으로, 결국 번번히 꽃을 피울 수 없이 좌절(挫折)되고 말았다.
고려말기(高麗末期)에 신흥(新興) 성리학파(性理學派)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과
쌍벽(雙璧)으로 훌륭한 신료(臣僚)로서 당대(當代)는 물론 후세(後世)에도 숭앙(崇仰)받아 왔다.
정통주의자(精通主義者) 두분은 고전역사학파(古典歷史學派)로서
이암(李嵒)은 충정왕(忠定王)의 추대세력(推戴勢力)이고,
신흥성리학파(新興性理學派) 이제현(李齊賢)은 공민왕(恭愍王)의
추대세력(推戴勢力)된 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었다.
* 행촌(杏村)에 대하여 후인(後人)들의 인품(人品) 평(評)
1. [塹城壇 詠誦]<杏村(1297-1364)의 詩에서>
情겨워 절로 나는 興趣 江都 물 탓다 하여 가시련만
檀君님 세운 塹城壇위에 仙風이 휘몰아 쳐오네.
山川은 依舊하지만 우리 東方의 美風은 어디가고
해와 달은 언제나 새로워지는데
와글거리는 外國官吏(*몽고병)가 웬 말인고
父母님 그리워 山에 올라갔다가
그 옛날 泰山에 오른 孔子님처럼
나도 큰 波濤를 쳐다본다.
어두운 우리 東邦의 거리에
누가 밝은 燈불을 비출 것인가.
우리 東邦世界의 平安을 .위해 只今 내가 나서리.
라고 하여, 杏村이 10세의 나이로 江都 塹城壇에 올라 蒙古(元)의 官員이
득실거리는 祖國의 땅을 恨歎하며, 主體意識을 갖는 意志를 가져보고 있다.
2. [塹城壇 詠誦]<杏村(12967-1364)의 詩에서>
靜趣何嫌煙火寰 어쩐지 강도에 밥 짓는 연기가 싫어
仙風猶烈塹城壇 단군님 제단에 오르면 신선의 풍모가 가득한데
江山依舊非吾俗 강과 산은 변하지 않으나 백성의 풍속은 변하여 가네
日月方新多僑官 부모님 그리워 공자님 태산에 오름을 생각하고
陟岵嘗億孔登泰 해와 달은 새롭게 뜨고 타향생활은 배울 것이 많네
臨海O思孟觀瀾 바닷가에서 맹자님 생각하고 파도를 구경하니
孰將燭喝昏衢志 어려운 이 세상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求我自今天下安 천하의 평안을 위해 나도 일했으면
라고, 이기문(李基文) ‘행촌선생연보’에서 소개(紹介)하고 있으니,
몽고(원)의 간접지배에 한탄을 하며 [위국애민] 펼 것을 다짐하고 있다.
3. [草堂]<杏村(1297-1364 實紀拾遺의 詩에서>
沙泉帶草堂 모래섬이 초당과 마주하고
紙帳卷空牀 책갈피가 책상위에 뛰논다.
靜是眞消息 고요함은 이것이 진정 소식이러니
陰非俗肺腸 읊조리는 시구 속세의 마음이 아니 라네
園林坐淸影 정원 숲속의 맑은 그늘 아래 앉아
梅杏嚼紅香 매실과 살구 씹으니 붉은 향기 그득하다.
誰住原西寺 누가 원서사에 머물러
鐘聲送夕陽 종소리를 저녁 햇살아래 보내는가.
4. [流配懷書]<杏村이 流配地에서 詩>
風霜九月冷颼颼 바람서리 몰아치는 九月이라 바람이 차가운데
湖海飄然一布裘 世波에 나부끼는 벼슬없는 선비가 되었네
親見伏羲欲畵卦 親히 伏羲氏가 卦를 그은 것을 보니
轉頭三十萬春秋 지나 온 三十年 人生이 一萬年의 歲月이라
라는, 시는 杏村이 1332년 31세 나이로 忠肅王이 復位하여 流配된 後의 心境을 말하고 있다.
5. [過密州次韻趙明叔喬禹功]<杏村先生 實記에서>
先生依舊廣文貧 先生께서는 그 옛날 廣文 鄭虔처럼 가난했는데,
老守時遭醉尉嗔 太守 蘇東坡가 술에 醉한 縣尉의 나무람을 만났지
汝輩何曾堪一笑 ‘너희들이 어찌 한바탕 웃을 수 있으리오?’
吾相對復三仁人 우리만이 相對하여 세 사람이 돌아가리
黃鷄催嘵凄凉曲 새볔을 알리는 닭의 우름소리 凄凉하고
白髮驚秋見枉身 가을에 놀래본 흰머리에 몸은 굽혀졌네
一別膠西舊朋友 한번 膠西땅 옛 친구와 離別하고 나면
扁舟歸釣五湖春 조각배로 돌아가 五湖의 봄을 낚으련다.
이 詩는 杏村이 忠定王을 帶同하여 1353년 9월 元나라에 갔다 돌아오면서 使行길에 密州(옛이름은 膠州)를 지나면서 지은 作品으로 이를 통해 當時 그가 現實을 대하던 心情의 一端을 이 地域 사람으로 몹시 가난했지만, 學問을 좋아했던 趙明叔을 본받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다짐을 읊어 지은 것이다.
6. [夜製]<杏村(1297-1364) 逸稿에서>
玉輦親臨松嶺上 임금타신 옥 가마 솔 재 위에 오르시니
靈芝秀發石亭間 영지의 향기로움 바윗 틈에 피어나네
吾王盛德那能說 우릿 님 크신 덕을 어찌 말로 다할 손가
先賀天齡等此山 비옵나니 님의 천수 이 상처럼 무궁하시길
* 위의 시는 東文選에 記錄되어 있다.
7. [聞琴]<杏村(1297-1364 實紀拾遺의 詩에서>
萬物都寂寂 세상의 만물이 모두 고요하여서
堪聞彈正聲 정성을 연주함을 들을 만하다.
人心直如此 사람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다면
天下自和平 천하는 저절로 화평하리라
湘水瀉秋碧 상수가 가을에 급히 흐르듯 하더니
古風吹大淸 옛 선현의 맑은 바람 크게 부는 듯하구나
往年廬嶽奏 지난날 조자기는 여산같이 높다더니
今夕更分明 오늘 밤 다시금 더욱 분명하구나.
*湘水 : 廣西省에서 發源하여 洞庭湖에 이르는 中國의 江.
8. [淸州拱北樓]<杏村(1297-1364) 逸稿에서>
古郡高樓逈 옛 고을에 높은 누각이 아득히 먼데
誰知結構初 뉘라서 처음 지은 그 때 일을 알리요
秋深萬山樹 가을이 깊어 가니 산마다 단풍인데
景入數行書 경치를 나타내는 두어줄 글을 쓰네
遠峀拱西望 먼 산 암굴은 공북루 서쪽으로 바라 뵈고
靑雲補北虛 푸른 그름은 빈 북녘을 메웠도다.
登臨忝侍從 임금님 뫼신 이 몸 높은 곳에 올랐으나
光寵自慙予 임금의 은총이 나를 부끄럽게 하네.
이 시(詩)는 행촌(杏村)의 아들 평재(平齋) 이강(李岡)이
경상도(慶尙道) 안렴사(安廉使)로 복주(福州)에 있으며
부친(父親) 행촌(杏村)과 함께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오직 개경(開京)을 점령(占領)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擊退)뿐이었다.
이때 이들 부자(父子)는 고려(高麗) 패퇴군(敗退軍)의 사기진작(士氣振作)을 위하여
정신적(精神的). 육체적(肉體的)인 고통(苦痛)의 갈등(葛藤)을 감당(勘當)하기란
사력(死力)을 다하는 자존심(自尊心)으로 혼신(魂神)의 힘을 다 하였었다.
20만 대군(大軍)을 모병(募兵)하여 전력(戰力)을 증강(增强)한 후 반격(反擊)하여
퇴치(退治)하는데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하였고, 두 부자(父子)는
이와 같은 과로(過勞)로 인하여 얼마 안 있어서 연속(連續) 별세(別世)하게 된다.
1964년 평재(平齋) 이강(李岡)은 부친(父親) 행촌(杏村)의 별세(別世)에 따른
3년의 여막(廬幕) 생활(生活)은 견디기 힘든 건강(健康)을 필요(必要)로 하였지만,
이를 피(避)할 수 없는 유가(儒家)의 불문율(不文律)인 당시(當時)였었다.
이는 평재(平齋)를 죽음의 전주곡(前奏曲)으로 상정(想定)하게 된다.
이때 지쳐버린 홍건적(紅巾賊)을 몰아내고 개경(開京)을 탈환(奪還)함에
순조(順調)로운 승전(勝戰)의 도중(途中)에 청주(淸州) 공북루(拱北樓)에서
공민왕(恭愍王)이 제신(諸臣)에게 시(詩) 한 수씩을 짓도록 하였다.
이때에 행촌(杏村)이 지은 시(詩)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또한 공민왕(恭愍王)이 신뢰(信賴) 총애(寵愛)한 그 아들 평재(平齋)도 시(詩)를
짓게 된 것을 소개(紹介)하여 보기로 한다.
9. [淸州拱北樓應製詩次第公韻)]
<高麗國慶尙道安廉使 平齋(李岡.1333-1368)詩에서>
扈駕南巡日 어가를 모시고 남순하던 날
登樓縱目初 루에 올라 처음으로 바라보니
山川渾似畵 산천은 모두 그림과 같고
雲物亦堪書 운물도 글로 표현할만 하구나
霜落長天靜 서리내린 하늘은 멀리가지 맑고
霜落長天靜 서리 내린 하늘은 멀리까지 맑고
煙消大野虛 연기 사라지니 큰 들이 텅 비었구나
端知千載下 알리라 반드시 먼 훗날에는
應製必嗤予 응제한 나를 외람되다 비웃으리.
*응제:임금의 명에 의하여 시문을 짓던일
이 시의 작자 平齋 李岡은 행촌의 4남으로서 開京을 홍건적이 함락하여
행촌 등이 호종하여 공민왕이 복주로 몽진할 때에 경상도안렴사였었다.
공민왕은 몽진 중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는데, 이강의 융숭한 마지함과
풍족한 군량에 매우 만족하였다. 행촌과 평재는 제장과 더불어 20만 대병을
모집하여 개경 수복을 하게 되었다. 이때 모든 신료들과 개경을 향하여 환궁하던 중
청주 공북루에 몇 개월 체류했는데 모두 응제시를 하였고, 평재도 함께 어가를 모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어가를 남순 하던 날]의 복주(안동)에서
개경과 청주는 [北向]인데도 이 시에서는 [南巡]이라 한 것은 의문스럽러운 대목이다.
10. [聞 鐵原 李侍中 辭位]<牧隱(李穡.1328-1396)集 에서>
萬里長城聳碧空 만리장성(萬里長城)같이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아서
妖煙散盡馬蹄風 요사(妖邪)스런 기운(氣運)을 질풍(疾風)같이 흩으셨네
臨朝高議如山重 조정(朝廷)에선 높은 의논(議論) 산(山)같이 무거웠고
遇事兇謀似雪融 일을 함엔 흉(兇)한 계략(計略) 눈같이 녹이셨네
昭帝見明知譖說 소제(昭帝)처럼 선견지명(先見之明) 참설(讒說)을 알았고成王學困致康功 성왕(成王)은 어려움 겪고 평강(平康)함을 이루었네.
託孤盛典今猶古 어린 임금 보필(輔弼)한 법도(法度)도 이제 옛날 되었으나
事業他年要比豊 옛일과 견주어도 풍성(豊盛)한바 있다네.
이 시(詩)는, 공민왕(恭愍王)이 원나라에 숙위시절 시종세력인 욕심쟁이 평양인 조일신(趙日新)과 교활한 안성인 김용(金傭), 우직하게 충성한 광주인 정세운(鄭世雲)의 대립 등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면서 홍건적을 격퇴시키는데 공헌한 행촌(杏村)은 사위(辭位)하게 되는데, 공민왕(恭愍王)은 그의 진실을 확인(確認)하게 된다.
아마, 행촌(杏村)의 [위국애민]과 [공정무사]한 원로대신(元老大臣)으로서는 연륜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볼 때에 자기의 시대적인 일대기(一代記)는 이미 상징적(象徵的)으로도 더 유(留)할 수 없었음을 예견(豫見)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공민왕(恭愍王)은 친위세력(親衛勢力). 유가세력(儒家勢力)을 버리고 불가세력(佛家勢力) 신돈(辛旽)을 택하게 되지만, 공민왕(恭愍王)은 정서적(情緖的)으로 깊은 수렁에 빠진 고려(高麗)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결국, 1374년 45세의 공민왕(恭愍王)은 정신적(精神的)으로 감당(勘當)할 수 없는 군주(君主)로서 시해(弑害)를 당하고 말았다. 목은은 이를 관찰(觀察)하였다.
이렇게 고려(高麗)는 더 지탱(支撑)할 수 없는 왕권(王權)의 권위(權威)와 신권(臣權)의 무능(無能)한 결집(結集)은 와해(瓦解)지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본,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 도은(陶隱)은 은자(隱字)라는 숨은 거사(居士)같이 무책임(無責任)하게 훌륭함을 잠칭(潛稱)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한 고려(高麗)의 열사(烈士)로 남아있음을 고려사(高麗史)는 말하고 있다.
11. [元巖驛七老讌集] <杏村(1297-1364) 逸稿에서>
秋風輦路稻花香 가을바람 임금님 행차 길에 벼꽃 향기로우니
當日憂民意自長 오늘도 백성 생각하는 마음 또한 길었어라.
更對一樽祈聖壽 한잔 술 다시 들고 성수를 비옵나니
坐看鱉骨屢成霜 편안히 거북이 평생 여러 번 보옵소서.
12. [奉賀壽春君之子登第]<杏村(1297-1364 實紀拾遺의 詩에서>
滿門桃李列成春 문하에 가득한 도리가 봄을 이루었구나
却怪儒冠例誤身 유관 쓰고 몸 망치는 이들 괴이하도다.
十載讀書非好事 십년의 글공부가 좋은 일만은 아니니
意深輔國孝慈親 나라 돕고 효도함에 뜻이 깊기를.
13. [杏村書室梅花]<及菴 閔思平(1295-1359 詩에서>
一春泥酒壹芳埃 봄 술에 취함은 꽃나무 향기에 젖음과 같고
見兩迎梅又送梅 三月에 오는 비나 五月에 오는 비는
素質共拎天所賦 하늘이 내림을 알 수 있듯이
紅顔豈是自爲媒 홍안의 밝음은 스스로가 바른 생활 즐김에서 오고
分身陸放詩翁醉 술 취한 노옹이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乘輿林逋處士來 임금님의 수레를 타고 온 임보 처사로세
爲報淸乎隱君子 큰 덕 숨은 선비 모셔다 놓고
對花不飮也應猜 꽃과 더불어 술이 없으면 원망이 따르리.
라고 杏村의 큰 德과 高潔한 生涯를 노래하였으며, 임보는 북송의 은사로서 시서에 능하였다.
14. [淸平隱君子]<稼亭(李穀.1298-1351) 寄 李杏村에서>
烏頭容可白 까마귀의 머리가 어찌 희어질 수 있으며
俗眼豈終靑 俗眼이 어찌 靑眼이 될 수 있는가
遙羨明窓下 멀리 바라길 밝은 窓 아래서
焚香寫佛經 香을 사르고 佛經을 베끼고자 한다.
15. [與杏村李嵒]<冶隱(吉再.1353-1419)集 續集에서>
烏則山飛魚則水 새는 산에서 날고 고기는 물에서 노닐어
各隨其性世看斜 各各 그 性을 따라 世間에 어울리건만
如何園裏東風蝶 사향청창 어찌 庭園속의 봄 나비처럼
錄向紅花又白花 꽃들만 찾아 나서는가.
라는 詩句로 보아, 그가 俗世와 어울리지 않고,
얼마나 自己 現實에 充實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16. [杏村書事]<遁村 李集(1327-1387)雜詠에서>
벼슬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수레바퀴가 많이 상해있도다.
청산의 맑은 물은 사립문 돌아 흐르고
명월과 청평은 옷 속으로 시원하게 스며들도다.
미륵평 어귀에서 부천님 생각하옵고
관음포위에서 어부에게 묻노니
농사일 같이 예기할 사람 없어
외로이 큰 수심 석양에 의지하도다. 라 하여 官界에서 隱退후
充實한 信仰生活과 農事지으며 지내는 老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7. [杏村病中書事]<遁村(李集1327-1387)雜詠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해묵은 근심은 아니거늘
강변에서 노년을 보내도다.
먹고살 일을 생각하면 밭은 멀어도 좋고
집은 외딴집이라도 상관없다.
시원하게 나무에 기대어 앉아
비를 피하다가 도롱이를 쓰고 잠들도다.
다만 농사 얘기하길 좋아하여
벼農事 삼農事는 昨年보다 나으리.
亦是 杏村의 田園生活의 日常 面貌를 얘기하였다.
18. [寄息影菴]<杏村(1297-1364) 逸稿에서>
浮世虛名是政丞 덧없는 世上의 헛된 이름은 政丞이요
小窓閒味卽山僧 작은 窓가에 閑暇로운 맛이 山僧이라
箇中亦有風流處 그 속에 風流處가 있나니
一朶梅花照佛燈 梅花 한 가지 佛燈에 비치고 있어라
이 詩는 東文選에 記錄되어 있다. 식영선사는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 왕혜로 알려졌다.
행촌과 자별하였으나, 1361년에 원 나라로 도망갔다. 그것은 공민왕이 배원정책을 쓰게 되어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아 최유가 고려를 침략하는
반란대열에 썼던 것이다.
19. [望海雲堂李穡]<牧隱 李穡(0000-0000)의 詩에서>
巖繞金碧鎭風光 바위가 둘러 있어 경치가 뚜렷하고
八部龍天信妙茫 아득히 보이는 곳 용이 있을 것 같은데
獨有山窓堪靜坐 홀로 창가에서 고요히 사색하는 분은
杏村居士海雲堂 해운당의 행촌 거사 이겠지.
20. [挽杏村李侍中]<澹菴(白文寶.1303-1374)哀悼 詩에서>
泉裝河遽爾 저승행차가 어찌 이리 갑작스레 하셨나요.
吾謂老彌强 늙어 더욱 정정타고 노상 일컫더니
玉樹添風采 재주가 뛰어나고 풍채는 더욱 아름다워
銀鉤照日光 빼어난 필법은 햇살같이 눈부시고 빛나더니
淸新庾開府 시풍의 청신함은 개부 유신과 같았고
終始郭汾陽 충절의 일생은 자의 곽분양 같았네.
偶會還如昨 만나 뵈옴이 엊그제 같았는데
投亞意自長 투호랑 함께 즐기며 흐믓해 하였더니
라고 白文寶는 杏村과의 知己로서 無常한 人生을 回憶하였다.
22. [挽杏村李侍中]<樵隱(李仁復.1303-1374)哀悼 詩에서>
秉之忠兼孝 뜻한 바는 충성 효도 겸하였고
持身險若夷 몸가짐은 험한 길도 평탄하게 걸으셨네.
邇來方折지 요즈음 발걸음 뜸하시더니
誰謂忽乘箕 갑자기 별세할 줄 뉘 알았으리
黃閣風聲遠 황각(도당)에서 님의 모습 찾을 수 없고
蘭亭墨跡遺 난정에 쓰신 글씨 유물되었네.
含言更流涕 말하자니 다시금 눈물이 흐르나니
非獨爲吾私 나만을 위해 슬퍼함은 결코 아니네.
*蘭亭: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紹興市) 서남(西南)쪽의
란주(蘭渚)에 있던 옛 정자(亭子)를 말함.
23. [哭杏村李侍中嵒黃檜山韻]<柳淑(1324-1368) 侍中 李嵒 哀悼 詩에서>
淸高嗜好異時人 맑고 고상한 취미 시속의 사람과 달라서
種竹移梅手自親 대나무 심고 매화 옮기는 일 손수 직접하셨네.
再整朝綱方有望 조정기강 다시 바로잡아 바야흐로 명망얻으셨네.
忽歸仙府問何人 문득 선부로 돌아가시다니 어인 연고인지요?
風추玉樹悲涼日 바람이 옥수 꺽는 구슬픈 날이요.
雨打瓊花寂寞春 비가 경화 때리는 적막한 봄이로다.
一路泥丸先後耳 한결같이 진 흙덩이로 돌아가는 인생길 앞뒤만 있을 뿐이니
不須哀痛肺生塵 굳이 애통해 하여 가슴에 속진 일게 마시라.
24. [哭杏村李侍中嵒黃檜山韻]
<田得良:作者 未詳. 侍中 李嵒 哀悼 詩에서>
直節高標冠世人 곧은 절개와 고상한 인품은 세상사람 중에 으뜸이고
一身忠孝事君親 온 몸 가득 충성과 효성으로 임금님과 부모님 섬겼네.
堂開錄野遺淸興 집에서는 녹야당을 열어 맑은 흥취 달래고
會續白蓮修勝因 모임에선 백련사를 이어 좋은 인연 닦았도다.
庭下芝蘭繁奕葉 뜰 아래엔 지란이 대대로 번성하고
門前桃李尙靑春 문 앞엔 도리(문하생)가 아직도 푸른 봄이네
風流耆舊今何處 풍류 즐기던 늙은 벗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忍見琴書撲素塵 허연 먼지 쌓인 거문고와 서책을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25. [題杏村小樓]<陽村(權近.1352-1409)의 詩에서>
地僻輪蹄絶 궁벽한 땅에 수레바퀴와 말 발굽소리는 들리지 않고
樓成歲月賖 누각이 지어지고 세월이 흘렀는데 연
桐高能蔽日 오동나무는 드높아 해를 가리고
樹密欲藏家 빽빽한 나무들이 집을 감추네
遺構基將廢 유구의 터도 곧 허물어질 듯 하고
前修躅己避 먼지 닦은 발자취도 이미 없어졌네.
奇語簫相後 말이나 서로 전해 후세에 남기자
師儉幕驕奢 선생은 검소하여 교만과 사치를 몰랐네.
26. [題杏村小婁]<陽村(權近.1352-1409)集에서>
외딴집에는 찾는 이 없고
집을 지은 지 한해정도 지났도다.
梧桐은 茂盛하여 해를 가리고
숲은 우거져 집이 감춰지도다
집터는 荒廢하고
賢哲들은 이미 얼어졌으니
서로 바쁘게 일깨운 뒤
儉素를 가르쳐 驕慢하고 奢侈하지 않게 하도다.라 하여,
그가 살았던 周圍 環境과 그의 儉素하고 奢侈하지 않는 生活方式과 姿勢를 말하였다.
27. [東邦의 趙子昻 杏村]<四佳 徐居正(1420-1488) 筆苑雜記에서>
‘동방 여러 명인의 친묵은 신라에 김생이 있고,
고려에 이군해(*이암의 초명)와 원천석 두 사람이 있다. . . . . 우
리 동방사람으로서는 조맹부의 필법을 터득한 이는 행촌 한 사람 뿐이다.’ 하였고,
<철성연방집>에서 행촌은 공민조에 낭묘(정청)에 두 번 들어가
공명과 사업이 일시에 으뜸이었으며, 진서. 초서. 행서의 삼법이
자앙 조맹부와 어깨를 거누었다고 한 다음 “문장은 고곡하고 간결하여
원나라 한림학사들로부터 탄성을 받았다.”라고 평하였다.
28. [杏村三世稱頌]<慵齋(成俔.1439-1504)叢話에서>
杏村의 詩와 詞가 簡潔하고 孤高하며, 筆法이 妙一하였고 또한 當時에 말하기를
杏村(李嵒). 平齋(李岡). 容軒(李原)은 祖. 子. 孫으로서
三世가 모두 文章과 德行으로 著名하였다. 라고 稱頌하였다.
29. [杏村三世稱頌]<芝峯(李晬光.1563-1628)類說에서>
‘書法에 있어서 世業이 많은데, 즉, 王羲之와 王獻之. 歐陽詢과 歐陽通 父子.
우리나라에는 李嵒. 李岡. 金希壽와 金魯 부자가 글씨를 잘 썼으니,
大槪 血氣에서 나온 까닭이라 하였다.’라고 自己의 見解를 吐露하였다.
30. [書藝大家 杏村]<眉叟(許穆.1595-1682) 朗善君畵帖에서>
杏村의 글씨를 評하여, “東邦은 新羅 以來로 金生이 第一이고,
侍中 李君侅(*李嵒의 初名)가 그 다음이다. 大傅. 史記. 太甲의 三編을 써서
王을 諫하였다.>라고 評하였다.
여기의 史記란 司馬遷의 史記인지, 檀君世紀인지 알 수 없으나,
杏村은 司馬遷의 史記를 쓸 時間的인 餘裕가 없는 將相이라고 볼때
檀君世紀로 想定하며 理解한다.
31. [杏村의 風竹]
<牧隱(李穡.1328-1396)東亭 廉興邦所藏 杏村墨竹에 題하여>
杏村心似竹心虛 행촌의 마음속이 댓속처럼 비었거니
瀟酒端莊兩有餘 맑고 깨끗함이나 단정 장엄함이 모두 넉넉하네
寫向晴窓宛相對 맑은 창을 향해 마주보며 그리지만
淸風萬古畵難如 청풍이야 같이 그릴 수 있나.
라고 읊었는데, 다시
[杏村의 露竹]
霧露朝夕送薄寒 산들한 안개 이슬 조석으로 내려주어
天敎淨洗碧浪玕 하늘이 벽옥을 깨끗이 씻게 하네
分明與杏村相似 분명 행촌과 서로 같으나
直節寧容俗眼看 속안이 곧은 절개를 알 리가 있나.
이라고, 牧隱集에서 記錄되어 있다.
32. [渡江]<杏村(1297-1364 實紀拾遺의 詩에서>
江南非不好 강남땅을 좋아하지 않음은 아니로되
楚客自生哀 초나라 나그네 절로 슬픔 이는 구나.
搖楫天平渡 노 저어 수평선 따라 강을 건너니
迎人樹欲來 강변의 수목 사람 맞으러 닥아 오는구나
雨餘吳岫立 비 온 뒤라 오의 묘는 선명히 바라 뵈고
日照海門開 해 비치는 바다 문 <하구> 훤히 트였네.
雖異中原險 중원의 기험한 경치와 비록 다르나
方隅亦壯哉 이 땅 한 모퉁이도 또한 볼만하다.
33. [春雨]<杏村(1297-1364 實紀拾遺의 詩에서>
花盡春猶冷 꽃 지는 봄날에도 날씨 아직 차가우니
羈心只自驚 나그네의 마음은 절로 놀라네.
孤鶯啼永晝 외로운 꾀꼬리는 긴긴 날을 울어대고
細雨濕高城 가랑비는 높은 성을 적시고 있네
擾擾成何事 분분하게 움직여서 무슨 일을 이루었나
悠悠送此生 유유히 이 한 생애 보내 리로다
蛛絲閃夕齋 저녁 비 개일 제 거미줄 반짝 이네
隨處有詩情 곳곳마다 시정은 담겨 있도다.
34. [畵像讚]<後孫 槐山 李陌(1453-1528)의 杏村 墨竹에 題하여>
蓍龜元老 나라운명 결정하는 원로되시어
鎭福輿望 뭇사람 바라는 바 충족시켰네
獨立擔卷 우뚝이 홀로 서서 자임하시어
扶存儒脈 유맥을 붇 잡아 후에 이으셨네
萬古遺像 만고의 세월에 남겨진 초상
一氣光明 한결같은 기운으로 전해진 광명
家世趾美 집안대대 이어질 아름다움의 터전
永垂嘉畵 고귀한 이 그림을 길이 간직할진저.
이 詩는 太白逸史의 著者 玄孫 李陌이
高祖父 杏村의 尊影(肖像畵)을 保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5. [類寓李嵒]<江華府誌 卷下 記錄에서>
字古雲有文武全才 자가 고운인데 문무전재하고
好賢愛士 어진선비를 사랑하였는데
苟其名行치折輩于 이의 선후와 신분의 격을 뛰어 넘어
與之爲友官左政丞 친구로 사귀어 관직이 좌정승에 이르렀다.
嘗曰事君當格君心 일찍이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일은 군자의 행할 일이다.“하고,
書太甲篇獻恭愍 태갑편을 써서 공민왕에게 바쳤다.
及卒王親圖其眞 갑자기 죽으니 공민왕이 친히 그 초상을 그려주고,
賜諡曰文貞 시호를 문정이라 내렸다.
杏村老相築山臺 행촌 노재상이 정자를 세웠는데,
息影禪師共往來 식영선사와는 서로가 왕래하였으니
果是當年明哲計 그 때에는 밝은 정략 있었으련만
海雲堂上絶浮埃 해운당 정자에는 먼지만이 그득 하네
3. 행촌(杏村) 삼서(三書:태백진훈. 단군세기. 농상집요)의 의미(意味)
1332년 이후 행촌(杏村)은 시서(詩書)에도 출중(出衆)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촌음(寸陰)을 아껴 민족(民族) 철학(哲學)인 태백진훈(太白眞訓)과 민족(民族)
역사(歷史)의 뿌리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著述)한 사학자(史學者)이기도 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단군(檀君)과 단군시대(檀君時代)를 편년체(編年體)로
집필(執筆) 서술(敍述)한 체계(體系)있는 상고사(上古史)로서 그
중요(重要)한 위치(位置)가 된다.
단군세기(檀君世紀)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사(民族史)는 비록 부실(不實)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때문에, 상고사(上古史)가 없는 삼국시대(三國時代)로 끝났을 것이다.
전술(前述)한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저술(著述)하였을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구전(口傳)과 비기(秘記)로 전승(傳承)된 고기(古記)를 저본(底本)으로 심혈(心血)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는 오직 투철(透徹)한 행촌(杏村)의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 민족정신(民族精神)에서만이 울어 나올 수 있는 역작(力作)임을 분명(分明)히 인식(認識)되는 것이라 보아진다.
이에 관하여는 전술(前述)한 귀중(貴重)한 화남(華南) 등의 해운당(海雲堂)에 관련(關聯)된 기록(記錄)을 중심으로 방증(傍證)이 심정적(心情的)으로 입증(立證)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경세 실용주의 학자(經世 實用主義 學者) 행촌(杏村)
행촌(杏村) 이암(李嵒)은 1353년에 춘성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5년간에 걸쳐 원(元)나라에서 가져 온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우리 토양(土壤)에 맞도록 실험(實驗) 재배(栽培)하였다.
그리고 이를 개찬(改撰)하여 생질(甥姪)인 강시(姜蓍)에게 전해 주었고, 이를 김주(金湊)가 인쇄(印刷)하여 백성(百姓)에게 보급(普及)하였으며, 목은(牧隱)이 서문(序文)을 썼다.
그리고 근세조선(近世朝鮮)의 [농사직설(農事直說)]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이렇게 행촌(杏村)은 경세실무(經世實務)도 기꺼이 해내며, 각분야(各分野)를 통하여 오직 조국(祖國)과 민족(民族)만을 위하여 한 평생(平生)을 다한 장상(將相)의 학자(學者)이다.
행촌(杏村)의 서랑(壻郞)으로 풍양인(豊壤人)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使) 조신(趙愼.초명:趙思謙)의 부인(夫人) 숙인(淑人)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전설(傳說)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조신(趙愼)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친밀(親密)하였고,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의 어릴 때 스승이었다. 태종(太宗)은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친히 조신(趙慎)의 묘지(墓地)를 보게 하였고, 그의 후손(後孫)들은, 효명세자비와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였다.
5. 3대 명필서예가(名筆書藝家) 행촌(杏村) 이암(李嵒)
행촌(杏村)의 필적(筆跡)은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孟頫)’과 쌍벽(雙璧)으로 비견(比肩)되는 명필(名筆)로서,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毆陽詢)의 서체(書體)까지도 섭렵(涉獵)하여 예서(隸書). 초서(草書)와 묵죽(墨竹)에 능한 대가(大家)이다.
왕희지(王羲之)를 능가(凌駕)하는 해동서성(海東書聖) 신라의 김생(金生.711-791)과 왕희지체(王羲之体)에도 능하며 청평문수원중수비(淸平文殊院重修碑)를 쓴 승려(僧侶) 손탄연(孫坦然.
1070-1150)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필가(名筆家)로 꼽힌다.
특히 청평사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는 원(元)나라 태정제(泰政帝)의 황후(皇后)가 황태자(皇太子)와 왕자(王子)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한 비문(碑文)을 이제현(李齊賢)이 짓고, 행촌(杏村)이 썼던 고려(高麗) 쌍벽(雙璧)의 작품(作品)이다.
이는 원(元)나라에 뒤질 수 없는 자존심(自尊心)으로 이루어진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담은 민족주의(民族主義) 발로(發露)임을 엿 볼 수 있다.
원(元)나라에 갔을 때 황제(皇帝)에게 “연화경(蓮花經)” 8폭을 쉽게 그려 탄복(歎服)케 하여 한 폭을 하사(下賜)받아 지금 후손(後孫.李庭秀家)이 보존(保存)되어 있다고 한다.
일설(一說)은 15세 나이 때에 썼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바와 같이, 행촌(杏村)의 서체(書體) 유작(遺作)은 약간 남아 있다.
6. 국가보위(國家保衛)를 다한 충신(忠臣)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투철(透徹)한 조국관(祖國觀)의 사상가(思想家)임을 비추어볼 때 국가안위(國家安危)를 위해 부심(腐心)했음은 너무나 당연(當然)히 짐작(斟酌)이 갈 것이다.
고려(高麗)는 1357년부터 홍건적(紅巾賊)에 대비(對備)하고 있던 중 1358년 8월에 공민왕(恭愍王)은 청평산(淸平山)의 행촌(杏村)을 수시중(守侍中)에 발탁(拔擢)하였다.
1359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하였는데, 행촌(杏村)은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서 공성전법(空城戰法)을 구사(驅使)하여 4만명이 밀물처럼 쳐들어오는 적을 저지(沮止)하였다.
3남 이음(李蔭)은 대승(大勝)하였고, 2차 홍건적침입에서는 3남 상장군 이음(李蔭)이 장렬(壯烈)하게 전사(戰死)하였다.
1361년에 10만명이 몰려 와 공민왕(恭愍王)을 호종(扈從)하여, 4남 이강(李岡)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는 복주(福州)에 무사히 안착(安着)해 전략기지(戰略基地)로 삼았었다.
그리고 전국(全國)에 근왕병(勤王兵)과 의병(義兵)을 최초(最初)로 모집(募集)하여, 공자(孔子)를 모시는 유생(儒生)들이 의병(義兵) 모집(募集)에 거부(拒否)하여 이를 병력화(兵力化)한 것은 너무나 유명(有名)한 일화(逸話)이다.
이로 인하여 후세(後世)에 성리학(性理學) 정통(正統) 대열(隊列)에서 제명(除名)된 또 하나의 빌미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적정(賊情)을 살피며 후방(後方)공급(供給)을 튼튼히 하여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반격(反擊)을 개시(開始)하여 개경(開京)을 수복(修復)하였다.
관직(官職)을 사직(辭職)한 말년에도 “태갑편(太甲篇)을 필사(筆寫)하여 왕(王)께 바치고, 4남 이강(李岡)에게는 군신(君臣)의 도리(道理)를 다 하라는 당부(當付)로 끝까지 국가안위(國家安危)와 충성심(忠誠心)을 보여 주었다.
이강(李岡)은 경상도(慶尙道) 안렴사(按廉使)로서 상하(上下)를 유지(維持)함에 공(功)이 제일(第一) 많았다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3. 인척
1) 처계 가문(妻系 家門:남양 홍씨) 배위(配位) 부친(父親)은 우대언(정3품) 홍승서(洪承緖)이고, 조부(祖父)는 첨의부 찬성사(정2품) 홍경(洪敬)이다.
증조(曾祖)는 첨의부(僉議府) 중찬(中贊종1품) 홍자번(洪子藩)이고
남양(南陽) 홍씨(氏)는 고려조(高麗朝)의 명문(名門)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시조(始祖)는 홍관(洪罐)이며 예종(睿宗)때
편년통제를 선정(選定)하였다.
홍관(洪灌)은 인종(仁宗)때 상서부(尙書府) 복야(輻射.정2품)로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피살(被殺)되어 충의지사로 되었다.
홍자번(洪子藩)은 홍관(洪罐)의 5대손이고 밀직사 동지사 홍예(洪禮)의 아들로서
원종(元宗)때 첨의부 중찬 경흥군 개국후의 봉호(封號)를 받았다.
고려(高麗)는 원(元)과 강화(講和)를 맺은 원종(元宗)과 충렬왕(忠烈王)때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일본(日本) 정벌(征伐)시 병선(兵船) 및 파병지원(派兵支援) 등으로 고초(苦楚)가 많았다.
이때 행촌(杏村)의 조부(祖父) 이존비(李尊庇)가 백성(百姓)의 피해(被害)가 없도록 잘하였고
홍자번(洪子藩)과 이존비(李尊庇)는 상호(相互) 걸 맞는 관계(關係)였던 것 같다.
홍자번(洪子藩)은 그 다음 왕 충선왕(忠宣王) 때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오래
누적(累積)된 폐단(弊端)을 시정개혁(是正改革)코자 시도(試圖)되었는바,
그 주역(主役)을 행하였다.
2) 여서가문(女壻家門: 강릉인 김광병. 풍양인 조신)
(1) 서랑 김씨(金光雨)의 가계(家系) 강릉김씨의 시조(始祖)는 김신달(金信達)인바,
사위 김광병(金光丙)의 부친(父親)은 밀직사(密直司) 부사(副使) 김계초(金繼貂)이다.
김계초(金繼貂)는 이우(李瑀)의 서랑 김상(金鏛)의 부친(父親) 대장군
김칠초(金七貂)와 4촌 형제(兄弟)간으로 보아진다.
판사(종2품) 김광병(金光丙)은 김광우(光雨)로 개휘(改諱)하였으며,
어느 부처의 판사(判事.정3품)인지 알 수 없고, 그의 아들 김보손(金寶孫)도
판사(判事정3품)로 알려졌다.
김광병(金光丙)은 홍건적(紅巾賊)의 침입(侵入)시에도 참전(參戰)하여 개경 수복공신(收復功臣) 2등에 훈봉(勳封)되었다.
(2) 서랑 풍양(豊壤) 조씨(趙愼)의 가계(家系) 풍양인 회양 부사(정3품) 조신(趙愼)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초명(初名)이 조암(趙岩) 개명이 조맹(趙孟)이다.
그의 조부(祖父)는 형부(刑部) 낭중(郎中) 조령(趙領),
부친(父親)은 밀직사(密直司) 우부대언(右副代言.정3품) 겸 좌상시(左常侍.정3품)
조염휘(趙炎輝)이다.
조염휘(趙炎輝)는 복위(復位)한 충숙왕(忠肅王)의 명을 받아 민상정(閔祥正)과 함께 윤석(尹碩) 윤지표(尹之彪) 부자(父子)와 행촌 이암(李嵒)과 이우(李瑀) 부자(父子)가 숙청(肅淸) 유배(流配)시에 집행관(執行官)으로 온 인물(人物)이다.
조신(趙慎)에 관한 기록(記錄)이 상세(詳細)하지 않아 탐구(探究)상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행촌가(杏村家)와 조염휘(趙炎輝)의 양가(兩家)는 분명(分明)히 모종(某種)의 깊은 관계(關係)가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전조(前朝)에서 숙청(肅淸)의 집행자(執行者)와 피집행자(被執行者)의 관계(關係)로서 바로 혼인(婚姻)을 하였기 때문이다.
회양공(淮陽公) 조신(趙慎)은 그의 백형(伯兄)이 봉선대부 조사충(趙思忠)과 상서(정3품) 조사공(趙思恭)이다.
아들은 공조좌랑(工曹佐郞) 조안평(趙安平) 사옹원(司饔院) 정(정3품) 조개평(趙開平)이다.
일찍이 조신(趙愼)의 백형(伯兄) 상서(尙書) 조사공(趙思恭)이 신돈(辛旽) 세력(勢力)을 제거(除去)하려는 과정(過程)에서 발각(發覺)되어 조씨가문(趙氏家門)은 화(禍)를 입게 되었다.
이때에 조신(趙慎)은 무사(無事)히 피난(避難)을 하게 되어 가세(家勢)가 여의(如意)치 않은 것으로 되었다.
이로 인하여 풍양조씨(豊壤趙氏)는 근세조선(近世朝鮮)에 들어 와 번성(繁盛)하여 장상(將相)의 많은 인물(人物)들을 배출(輩出)하여, 지금도 양가(兩家) 가문(家門)간에는 돈독(敦篤)한 관계(關係)를 유지(維持)하고 있다.
[출처]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의 위상|작성자 강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