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重水復疑無路 ( 산중수복의무로 )
산 넘고 물 건너 길이 없나 했더니
柳暗花明又一村 (유암화명우일촌)
버드나무 무성하고 꽃이 활짝 피었는데
마을이 또 있다~
유산서촌(遊山西村 산서촌에서 노닐며) - 육유(陸游1125~1210)
莫笑農村臘酒渾 막소농촌랍주혼 豊年留客足鷄豚 풍년유객족계돈
山重水復疑無路 산중수복의무로 柳暗花明又一村 류암화명우일촌
簫鼓追隨春社近 소고추수춘사근 衣冠簡朴古風存 의관간박고풍존
從今若許閑乘月 종금약허한승월 拄杖無時夜叩門 주장무시야고문
농가의 그믐 술이 익어간다 웃지 마라.
풍년에 손님 잡기에 닭도 돼지도 풍족하다
첩첩 산중 강 건너 또 강이니 길이 없는 듯한데
버들은 짙푸르고 꽃 만개하니 또 마을 하나
피리소리 북소리 다가오니 춘사가 가깝거늘
의관이 소박하니 옛 모습이 남아 있네.
지금에 한가히 달빛에 거닐며
지팡이 짚고 무시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리라
육유(陸游 1125-1210) 자는 무관(務觀), 호는 방옹(放翁),
산양(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사람.
어릴 때부터 금에 저항하는 뜻을 세웠으며, 일찍이 여러 관직에 있었으며.
노년에 관직에서 물러나와 고향에서도 애국 활동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일생을 애국에 대한 시를 썼으며, 현재에도 구천 여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육유는 남송의 위대한 애국 시인이고, 시풍은 호기스럽고 청신하며 언어는 간결하며
여우모,(如牛毛) 양만리(楊萬里), 범성대(范成大)와 함께 남송 사대가라 불렸다고 한다
[ 이하 출처-라듸오시사고전(KBS 1R) ]
당시 남송은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온 사회가 불안해했습니다.
조정은 화친을 맺자는 주화파와 나가서 싸우자는 주전파로 나뉘었습니다.
육유는 전쟁을 주장하다 한직으로 밀러났고, 결국 벼슬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육유는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어느 날 산책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계속가다 보니 길은 좁아지고 인적도 드물어졌습니다.
그만 돌아갈까 싶었지만 내친 김에 그는 계속 걸었습니다.
그때 눈앞에 뭔가 아른거리더니 마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復疑無路)”
“산 넘고 물 건너 길이 끊긴 듯하나”
“류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버드나무 그늘 짙고 꽃 환한 마을이 보이네.”
“소고추수춘사근(簫鼓追隧春社近)”
“피리 소리 북 소리 잇따르니 봄 제사 가까운 듯”
“의관간박고풍존衣冠簡樸古風存”
“차림새 소박하여 옛 모습이 남아있네.”
육유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길이 끝난 곳에서 만난 마을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는 길가다 뜻하지 않게 마을을 만났지만 이제는 틈나면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금약허한승월(從今若許閒乘月)”
“이제 한가하면 달빛 따라 나서서”
“주장무시야구문(拄杖無時夜扣門)”
“지팡이 짚고서 아무 때나 문 두드리리.”
육유의 시를 읽으면 절망 끝에 희망이 느껴집니다.
육유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여기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마을을 이리저리 걷다가
길이 끝난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또 하나의 마을을 만났던 것입니다.
“산중수복의무로”가 절망이라면 “류암화명우일촌”은 희망입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마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각자 저마다의 “류암화명우일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길이 막혀 없는 듯한데...
버드나무 숲을 뚫으니 또 하나의 마을이 있다면 그것은 別有天인가 봅니다.
그러한 희망에 사람들은 오늘을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도전과 응전속에 살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하루 하루를
보내는 인생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