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고등 공민학교 학생들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권 영창 요아킴
송도성당의 주임신부 소 알로이시오 슈월쓰 신부는 마리아수녀회 설립자로 빈첸시오성인과 같은 정신,(봉사, 자선)으로 살아온 사제이다.
아미동 산 19번지 일대는 해방 후에 일본에서 귀국한 이들이, 일본인의 공동묘지와 산비탈에 (루핑) 판자집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소 신부는 그들이 병이 나도 돈이 없어 제때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지역주민을 위한 구호 진료소를 개설했다.
1967년 3월4일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마리아수녀회의 명의로 진료소 신축을 위하여 아미동지역 189,7평, 감천동지역 679평을 매입하여 진료소 건축에 들어갔다.
1967년 9월20일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교구 초대 주교 최 재선 (요한)주교와 함께 아미동과 감천동의 가난한 지역 주민을 위한 천주교의원 축성식(현재 아미성당 사제관)을 가졌으며 부산시장, 서부경찰 서장, 지역주민 등 각계 인사와 함께 천주교의원 개원식에 참석했다.
그날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아미동의 이 진료소는 ‘마리아의원’ 이 아니고 가난한자들의 의원이다. 가난한 이는 항상 우리들의 주인이므로 우리 마리아 회원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불우한 이들을 영육으로 보살피고 모든 면에서 정성껏 돌보고 봉사할 의무를 하느님께 받았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때 진료의사는 최 중욱도밍고박사 (현 서면복음병원외과원장)와 마리아수녀회의 간호사가 매일 이곳에 와서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1969년 7월23일
최중욱 도밍고박사가 장림동 행려환자 구호소로 옮겨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로 안 용일, 서 병채 이 완일 문 정남, 의사들이 차례로 진료를 하였으며 1983년 천주교 의원이 문을 닫고 암남동 구호병원으로 통합시켰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천주교 의원을 시작으로 이 지역에서 가난으로 인하여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과 아울러 사목을 함께 할수 있는 일에 뜻을 함께할 사제들을 찾았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현 아미성당 자리에 학교를 신축하고 학교명을 아미고등공민학교 (중학교과정)로 하였다.
이 때에 뜻을 함께할 신부로 아일랜드계 30대 중반의 미국택사스주 휴스턴 교구소속의 고 야고버 신부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이곳으로 왔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8년 2월18일 아미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동년 12월5일 인가를 받아 초대 교장에 고 야고버 신부를 임명했다.
가난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지역주민들을 성당으로 인도 할 수 있는 전교 사업을 위하여 두분 신부님이 의논을 하여 학교 교실 2칸을 수업시간에는 교실로, 주일에는 성전으로 바꿔가며 고 야고버 신부가 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이 아미성당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 후 1969년 8월10일 준 성당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978년 12월31일에 아미고등공민학교를 폐교 하였다.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는 아미성당의 모태는 마리아수녀회의 구호사업을 시작으로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전 생애를 바쳐 가난한 이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룩되었다.
또 소년의 집, 알로이시오 병원 등 많은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도 현세의 삶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첫댓글 아미본당 신자인 요아킴께서 알로이시오병원에 입원하신 후 옛날 사례들을 이야기해줄것을 부탁드리자
이 귀한 자료들을 전달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