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山行은 가까운 성지곡수원지에서 시작한다.
주말이라 많은 인파들이 산으로~산으로 밀려 올라간다.
부산이 영하권으로 떨어진다는 일기예보는 햇살이 퍼지면서 기온도 올라가고 콧등을 스치는
바람은 오전시간대라 아직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곳은 우리의 놀이터이기에… 산은 계
곡과 어우러져야 제 멋이 있고, 겨울철이지만 물이 있으면 청량감까지 담뿍 주며, 며칠 전 내
린 비로 수량(水量)은 넉넉하고 하나도 바쁠 것이 없는 山行의 움직임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신문의 활자가 흐려지더니 저만치 떨어져서야 겨우 보이고, 피부는 검어지고
머리털은 점차 하얗게 변한다. 아! 늙었구나. 이것은 누구의 허물도 아니고 본인의 자화상(自
畵像)이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젊게 살기 위해 엄청 노력을 한다. 무엇보다도 60세 이후에
는 건강한 신체와 체력이 필수 조건이고 크게 아픈 데 없는 건강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며, 단련은 필수(必須)였다.
그 옛날 전차(電車)를 타고 서면역에서 하차하여 이곳까지 걸어와 김밥을 나눠먹던 까까머리
중학생시절 소풍나들이가 생각이 난다. 허나 세월이 변하듯 이곳도 편리하게 구조물을 만들어
배치하여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휴식공간으로서 한층 여유롭게 공유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때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 더는 볼 것이 없었고, 가끔 용봉탕(龍鳳湯)의 주 재료인 ‘자라’
가 심심찮게 도로로 기어 올라오곤 했다. 또한 그것이 신기하여 친구들과 한바탕 웃고, 꿈같은
옛 기억을 유추해 내는 나의 작은 두뇌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에 스스로 탄복을 한다.
이렇게 2시간여 걷다보면 편백나무 숲도 만나고, 폭포수의 장쾌한 소리를 들으며, 작은 쉼터
에 걸터앉아 공간의 여백을 관조하는 시간은 길어지고 그러나 금세 한기(寒氣)가 들어 다시금
길을 나선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양지녘 넓은 공간은 만남의 광장이라 이름 짓고 널찍하게
들어선 탁자와 의자가 고정되어 지나가는 산방객은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겨울하늘은 높고
햇살은 따사하고 뜨거운 생강차 한잔으로 피로를 푼다.
아주머니 한분이 합석(合席)을 원하기에 기꺼이 양해했다. 그건 약자에 대한 애정발로의 시작
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애기하다보니 그녀는 나와 동갑(同甲)이었고, 슬하(膝下:무릎아래)에 딸
만 넷인데 이제 다 출가(出嫁)하여 홀가분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위자랑으로 이어지고 젊은
날 남편과 이혼하고 여태껏 혼자 살았으며, 살기위해 공장을 전전했었고, 월급을 받으면 먼저
한 달 먹을 쌀·보리·밀가루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그랬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어려웠
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그분의 진솔한 삶을 여과 없이 듣는 입장에선 때론 공분을 느끼고, 동감하며, 호기롭게 칭찬
도 해줄 때, 햇살은 중천을 설핏 기울고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이렇게 버티며 살 수 있은
원동력은 딸들이었고, 그 아이들이 탈 없이 잘 커주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막내아이 시집보낼 때까지 전쟁 치르듯 세상을 살았다.”는 말에 그만 ‘심
쿵’해지고 오늘 기막힌 사연을 山中에서 전해 들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여운이 자못 상
큼했다. 그분의 삶에는 감정의 물결이 씨실과 날실처럼 한 폭의 영화를 직조(織造)해 가며, 감
정을 눌러 담았다가 조금씩 발산하는 입언저리에는 간간히 미소가 엿보였다. 지금 우리도 정
국(政局)을 바라보며 느끼는 좌절감은 어쩌면 더 나은 사회로 한 발짝 내딛기 위한 옴츠림인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굴곡을 관통하여 직선으로 전진하진 않았지만
촘촘한 단결력과 상당한 의지력으로 매번 고비를 넘기며 지금 여기까지 왔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