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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3장
야곱이 에서와 만남과 하나님의 보호
(찬송 166장)
2024-2-7, 수
맥락과 의미
야곱이 마침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창세기33장은 끝납니다. 28장에서 야곱이 밧단아람을 향해 가다가 벧엘에서 돌을 세우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다시 벧엘에 돌아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돌아와서는 벧엘까지는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입니다.
1. 야곱과 에서의 만남(1-4절)
2.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형에게 은혜를 구함(5-11절)
3. 야곱은 에서를 따라 에돔으로 가지 않고 약속의 땅에 머무름(12-20절)
1. 야곱과 에서의 만남(1-4절)
야곱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에서가 야곱을 만나러 옵니다. 에서가 온다는 이야기는 앞서 32장에서부터 나옵니다. 에서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야곱은 이미 자기 짐승들을 몇 떼로 나누어서 자기 앞서 보냈습니다. 먼저 보내어 에서를 만나게 했습니다. 에서가 보고 “이게 뭐냐?” 하면 “형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고 대답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납니다. 그가 저 앞에서 400명 무리와 함께 오는 것을 보고 자기 자녀들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종들의 자녀, 그리고 덜 사랑하는 레아와 그 자식들, 그 다음에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그 아들 요셉을 제일 뒤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맨 앞에 앞장서서 갑니다. 에서 앞에서 야곱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절을 합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또 절하고... 형이 가진 분노의 깊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만난 에서는 와서 야곱을 껴안고 입 맞추었고, 피차 울었습니다(4절). 에서와 야곱 두 형제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2.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형에게 은혜를 구함(5-11절)
그렇지만 야곱은 에서의 마음 속 분노의 깊이를 알기 때문에 마음을 놓지 않습니다. 에서가 먼저 묻습니다. “이 여인과 자녀들은 누구냐”. 야곱은 지혜롭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입니다.”
5절과 1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자기의 꾀를 의지하던 야곱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만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에서 자기 형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8,9절).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에서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그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에서가 화가 나서 이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 앞에서 에서가 꼼짝할 수 없게 그의 마음을 꽉 묶어버리는 말을 합니다. 이 자녀들은 내 자녀라기보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녀입니다.” 주의 종이라는 것은 에서 당신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준 것이지만 야곱은 에서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 자녀에 많은 사람이 관련돼 있습니다. 에서가 이 자녀를 볼 때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게 그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또 야곱이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 하기 때문에 에서가 야곱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아내와 자녀들이 나와서 절합니다. 빌하와 실바, 종이죠? 종과 자녀들이 나와 절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레아과 그 자녀들이 나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그 다음에 라헬과 그 자녀가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에서가 묻습니다. “내가 앞에서 만난 이 떼들은 무엇이냐?”야곱은 말합니다.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 에서를 다시 주라고 부르고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 합니다.
지금 야곱이 몇 번에 걸쳐 에서의 마음을 움직입니까? 양떼들을 한 여덟 떼쯤 계속 앞서 보내면서 그것을 이끄는 사람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다음에 야곱 자신이 말했습니다. 네 자녀들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한 열 두 번 정도 계속 에서를 설득시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 죽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입니다. 이 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내가 당신께 주는 것들입니다.”
9절에 형이 아주 대범해 보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다, 내게 있는 것이 많다,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고맙습니다. 형님 그러면 그만두겠습니다” 합니까? 아닙니다. 야곱은 에서의 마음 속 분노의 깊이를 압니다. 그래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형님께 은혜를 얻었습니다.” 원래는 형님께가 아니라 “당신의 눈 앞에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내 손의 예물(선물)을 받아주십시오. 은혜를 선물로 받아주세요” 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에서를 격려합니다. “형님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형님도 저를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시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 제물을 기뻐한다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에서에게 적용합니다. 에서를 신처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야곱이 지혜로운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비굴한 걸까요?
다시 야곱은 강권합니다. “내가 형님께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소서.” 여기서 예물은 “축복”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로 이 바라크, 축복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5장에 야곱이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받았죠? 장자권은 축복과 성경 원어에서 소리가 비슷하게 들립니다. 장자권 안에 축복이 있습니다. 26장에 보면 그 아버지가 고기국을 먹고 싶다 할 때 야곱이 또 엄마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삭을 속여 복을 받았습니다.
27장에 복, 복, 복이 계속 나옵니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그 복을 주십시오” 했지만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 이삭은 “너에게 줄 복이 없다. 다 주었다.” 그러자 27:36절에 보면 에서가 아버지 앞에서 야곱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가 나를 속인 것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전에는 내 장자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장자 명분과 함께 복을 빼앗겼기 때문에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야곱은 이제 형에게 선물을 주면서 그냥 선물이라 하지 않고 “복”이라고 합니다. “내가 형님의 복을 빼앗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복의 일부를 돌려드립니다.” 하면서 형을 설득합니다.
아마 에서는 그 단어를 들을 때 20년 전의 일, 어릴 때의 일이 그림처럼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래 네가 내 복을 뺏아갔지,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서 400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여기서 아마 성령께서 에서의 마음을 설득한 것 같습니다. “복,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에서는 그 선물을 받습니다.
야곱의 지혜와 꾀: 야곱에게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혜도 있고, 또 하나님을 덜 신뢰하는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로 예정하셨지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는 아주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겸손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때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를 질투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질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뭐 질투냐? 말도 안 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어루만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이 분노 때문에 나쁜 일을 더 하지 않도록 더 그 사람을 만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3. 야곱은 에서를 따라 에돔으로 가지 않고 약속의 땅에 머무름(12-20절)
에서는 여전히 단순합니다. “자, 가자. 내가 너를 앞장설 테니까 세일(가나안 땅 동쪽)로 가자.”고 합니다. 야곱이 갈 수 있겠습니까? 형을 따라 가면 다시 어떤 사고를 당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준다고 했는데 약속의 땅을 떠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야곱이 형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이 약속의 땅, 아브라함 우리 할아버지에게 약속하신 그 땅, 이 가나안 땅을 나에게 주셨으니 못 떠납니다.” 에서가 완전히 더 분노가 치밀겠죠? “그래 네가 약속의 땅을 받아갔지!”
하지만 야곱은 또 아주 지혜롭게 이야기합니다. “내 자식들은 아직 어립니다. 가축도 아직 어린 떼가 있는데 급히 몰면 다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이 먼저 가십시오. 그러면 내가 여기 짐승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또 말합니다. “아니다, 내가 내 종자(하인들) 몇명을 남겨두겠다.” 하니까 야곱이 아주 사정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나죠? 그들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먼저 세일로, 자기가 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야곱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숙곳으로 갑니다. 여기서 야곱은 또 속입니다. 또 거짓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에게는 약속의 땅에 있어야 된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습니다. 또 형의 분노가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그것을 막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지혜는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야곱은 또 속이는 것, 인간의 꾀가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 그들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이 믿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복 주실 때, 우리는 거짓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야곱의 믿음과 연약: 야곱은 숙곳에 자기를 위해 집을 지었습니다. 가축의 우리까지 지었습니다.
여기에 지으면 안 되죠! 야곱은 어디에 가야 하죠? 자신이 20년 전에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벧엘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머물렀습니다. 그 근처에 있는 세겜에 천막을 치고, 천막 친 밭의 한 부분을 기업으로 샀습니다. 한 부분은 “기업”이라는 뜻도 됩니다.
야곱이 옳기는 하지만 틀렸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에 미리 사는 것도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순서가 잘못 되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물 것이 아니라 먼저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 가라는 그곳까지 계속 가야 하는데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믿음은 있습니다.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로 불렀습니다. “엘”도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엘로헤”도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입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야곱)의 하나님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앙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 싸워서 이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과 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머무르는 것과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지혜를 우리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있고, 그렇지만 여전히 죄가 스며드는 우리의 현실, 바로 이 현실 가운데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복 주셨고 이런 우리 가족, 이런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가 이야기하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번성해왔습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번성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믿고 복종할 일
나는 예수님을 믿고서 왜 이리 변하지 않는가?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은 지금 97세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부족함이 있고 변해 가는 중입니다. 야곱은 언약의 배필을 만나기 위해 70세가 넘는 나이가 될 때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다가 77세에 외갓집 밧단아람으로 갔습니다. 84세에 두 여인과 결혼하고 20년 동안 고생하고 97세에 에서를 만났습니다.
야곱에게 은혜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어떤 선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계속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나아왔습니다. 죄의 본성 때문에 야곱처럼 거짓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도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지금 회개하고 나아갑시다.
우리가 연약한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 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항상 죄인의 심정으로 겸손히 주님 은혜만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주님께 구합시다. 성도들의 가정마다 직장마다 복을 내려 주셔서 신령한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님께 은혜를 구합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5절, 주
주라는 것은 ‘아도나이,’ ‘하나님께서는’ 이라는 말인데 사람들에게도 높임말로 씁니다. 헬라어로 ‘큐리오스’입니다.
<참고> 10절, 기뻐하심
기뻐하시다(10절, ‘라차)는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 제물을 받을 때 그 향기를 기뻐한다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참고> 10절, 예물(축복)
예물(축복, 바라크)은 장자권(버코르)과 비슷하게 소리가 들여 연결되어 비슷하게 들립니다.
<참고> 19절, 한 부분을 삶
한 부분(할라크)은 기업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야곱이 산 땅은 기업의 한 부분입니다.
7절은 여성형입니다. 야곱이 이끈 소와 양떼도 군대와 같이 보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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