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성당을 돌아보고 09:40분쯤 경기전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한옥마을 관관안내소에서 10시부터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한옥마을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왕이면 해설사의 안내로 돌아보는것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관광안내소로 갔다.
처음에는 데이지와 나 둘뿐이어서 두명이라도 안내를 해주냐고 물어보니 두명이라도 안내를 해준다고 한다.
조금있으니 한국청년과 일본아가씨 한쌍이 더와서 네명이 오붓하게 해설사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이날 해설을 맡으신 분은 양순자 해설사님. 좋지앟은 날씨에 자세하고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다.
한옥마을 관광코스는 반일, 1일, 1박2일로 나뉘고 반일일코스는 또 단숨, 골목과 체험, 산책과 샤색이 있는 코스로 나뉘는데
자세한 내용은 한옥마을 홈페이지를 참고 하시라. http://hanok.jeonju.go.kr/default.aspx
우리는 관광안내소- 전통한지원 - 술박물관 - 공예공방촌 지담 - 승광재 - 최명희문학관 - 경기전순으로 둘러보았다.
그중 술박물관, 지담, 승광재, 최명희문학관, 경기전 등은 별도로 포스팅 하려 한다.
한옥마을의 역사
을사조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群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
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
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골목길
골목길 곳곳에 아담하고 소박한 가게들이 있다.
전통한지원.
우리나라의 한지는 닥나무가 많이 분포되고 오랜전통이 있는 전주, 안동, 원주 등에 한지와 관련된 박물관, 한지공장 등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며 한지를 생산하고 관련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한지원은 안동보다는 규모가 작다.
한지 생산과정
한지제조의 유래에 대하여 기록이 없어서 처음에 어떻게 하여 만들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신라시대에 대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설(薛)씨 성을 가진 주지승이 살고 있었다. 이 절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 주지승이 닥나무를 꺾어 지팡이 삼아 가지고 놀다가 절 앞의 반석에 앉아 이를 두드리며 놀았다.
다음날 다시 와보니 닥나무의 껍질이 반석에 말라 붙어 얇은 막처럼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번엔 일부러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돌로
짓이겨 반석 위에 늘어놓고 다음날 다시 와 보았다. 역시 나무껍질이 엉켜 붙어서 말라 있었다. 여기서 착상을 얻은 주지승은 이를 발전시켜 한지를
만들어 쓰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지를 제조하는 과정은 손질이 많이 가는 일이며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종이를 일백백(百)자를 써서 백지(白紙)라고도 하는데
그 만큼 손이 많이 가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질이 좋은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데,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란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한지 생명력은 1,000년
을 보장한다. 만약 어느 화가의 작품이 1,000년동안 보존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일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렌즈에 김이서려 뿌옇게 보인다.
한시간 반동안 전부를 둘러봐야 하기에 해설사께서 많이 서두르신다. 할수없이 그냥 찍었다.
이분은 노무현 대통령이 전주에 왔을때 한지제조 공정을 시연했다고 한다.
한지를 말리는 공정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예븐공방들이 골목마다 한두군데씩 있다.
온고을 소리청. 부부가 국악을 하시는 분인데 여기서 드라마도 찍었단다. 안에는 못들어 갔다.
소리문화관이라고 별도로 있다.
공예명인관도 있고
토담집. 1936년 한옥 10채를 매입해서 지은집. 대지 482평, 건평 50평. 몇대가 함께 살았다는데
대문이 굳게 잠겨있고 안을 들여다 볼수도 없다.
익산 함라의 3부자집을 연상케 한다. 조경이 잘 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후손들이 계속 거주하며 관리를 잘 하는것 같다.
청계천을 본따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옥마을의 중심쯤 되는것 같다.
새로운 건물을 제한하니 슈퍼도 예전 모습으로 정겹다.
한방문화센터. 여기도 그냥 지나쳤다.
공에품 저시관. 여기서 오목대로 올라갔다.
한옥마을을 제대로 체험하고 돌아보려면 1박2일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다. 수백년 내려온 전통을 어찌 하루만에 다 볼수 있겠는가?
다음엔 한옥마을만 별도로 보러와야겠다.
첫댓글 한옥마을이 이리도 큰줄 몰랐어요~~다음에 한번 가보고싶네요~~
해설사님이 함께 해주시면 더 좋은 여행이 되는거 같아요...
남창당 한약방에서 운영하는 2층에서 전통차 드셨보셨나요~
친한집인데 한방차가 기가 막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