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로 접어들자 이땅에도 살금살금 미국의 청바지문화가 상륙하기 시작했다.
장발‧청바지‧사이키델릭 사운드로 대표되는 청바지문화는 기성문화를 거부하는 ‘反 문화운동’으로 불릴 만큼 저항적이었다.
그러나 풍요와 자유가 넘치는 서구 청년들의 청바지문화는 상륙하자마자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1인당 국민소득 243달러로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고, 장발로 길거리에 나서면 가위를 든 경찰이 달려드는 통제가 기다렸다.
경제 발전을 최우선 국가과제로 매진하는 당국과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타협점으로 등장한 게 청평포크페스티벌이었다.
청평 포크 페스티벌은 1970년 8월 17일부터 6일 동안 개최되었다.
북한강 위에 설치된 무대에는 신중현‧히식스‧키보이스 등 국내 최고의 연주자들과 그들의 직계후배인 통기타 1세대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연주자들이 총집결하여 그야말로 밤낮 가리지 않고 젊음을 마음껏 불태웠다.
축제를 즐기러 찾아온 관객들이 너무 많아 출연자들은 배를 타고 빙 돌아서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이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 등 젊은이들의 억눌린 감성을 분출할 수 있는 무대가 속속 생겨났다.
이즈음 37세의 이백천은 방송사 근무로는 장래가 암담하다는 판단으로 특별한 계획도 없이 동양방송에 사표를 냈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충무로 YWCA로부터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광장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왔다.
무대는 직원식당을 개조하여 공연공간을 마련한 청개구리집으로 젊은이들의 반항과 도약정신을 함축한 절묘한 이름이었다.
성능 좋은 음향시설이나 조명시설은 없었지만, 10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은 음악감상실로서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다.
99원을 내고 제 손으로 콜라 한 잔을 뽑아 마시며 질릴 때까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1970년 6월 29일 19시, 청개구리집이 문을 열자 쎄시봉이 문을 닫은 뒤 1년 동안 쉼터를 잃었던 포크 마니아들이 줄을 이었다.
이후 오후 7시가 되면 아마추어들이 먼저 기타를 치고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판을 벌였다.
이백천은 쎄시봉 시절의 <Date with Petit Lee>라는 이름을 다시 내걸고 사회와 연주를 맡았다.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김도향 손창철 은희 한민 최안순 김영세 등은 가장 자주 무대를 찾은 가수들이었다.
서유석은 <아름다운 사람><파란 많은 세상> 등 명시에 곡을 붙여 부르며 청년문화를 이끌었다.
김준과 김세환도 가끔 어울렸다.
본인이 작곡한 <아침이슬>로 훗날 운동권의 대부가 되는 김민기는 김영세와 도두비라는 듀엣을 결성하여 잠시 활동했다.
청개구리집이 쎄시봉과 달랐던 점은 외국 곡을 들려주던 관행을 탈피하여 창작곡 위주로 무대를 장식했다는 점이었다.
김도향과 손창철이 결성한 듀엣 투코리언스는 청개구리집의 터줏대감이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Keep on Running><I Can Stop Loving You> 등을 부를 때면 모두들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그들의 대표곡인 <벽오동>도 청개구리집에서 첫선을 보인 뒤 방송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황진이의 시에 김도향이 군살을 붙여 작곡한 <벽오동>은 굿거리장단을 도입한 독특한 형식이었다.
‘와뚜뚜뚜뚜뚜…’ 하는 후렴구에서는 누구나 속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워낙 소리가 우렁차다 보니 행여 음향기기가 깨지지 않을까 싶어 마이크에서 좀 떨어져 부르라고 요청하는 업소도 있었다.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양희은은 친구들이 상심에 잠겨 있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데려온 특별한 케이스였다.
누군가 경기여고에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던 친구라며 이백천에게 쪽지를 건네주어 무대로 불러 올렸다.
선머슴 같은 차림새로 쭈뼛쭈뼛 무대로 올라온 양희은은, 그러나 서유석의 기타 반주가 시작되자 딴사람으로 돌변했다.
<예스터데이><일곱 송이 수선화><세노야><검은 장갑 낀 손>등을 잇달아 불러제낀 양희은은 그 자리에서 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선머슴 같은 외모답게 서유석 김민기 등 남자 가수들을 모두 형이라고 불렀다.
그해에 서강대에 합격한 양희은은 친구들에게 보답하겠다며 청개구리집에서 첫 리사이틀을 열겠다고 자청했다.
열아홉 살의 양희은은 이미 방송을 통해 명성을 떨치고 있는 중이었다.
목소리가 고우면서도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꼿꼿한 창법은 독특한 소리세계를 간직하고 있었다.
김민기가 기타 반주를 자임한 양희은의 첫 리사이틀 ‘노래하는 새’는 경기여고 동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무엇이 이 숲속에서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
양희은의 대표곡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것들>에는 작고 아름다운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이 노래는 이화여대 미대생 방의경이 존 바에즈의 <Mary Hamilton>을 번안한 곡이다.
방의경은 서울대 문리대 축제에서 부르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을 준비해 갔는데,
양희은이 곡을 달라고 사정하자 두말없이 양도했다.
방의경은 그 곡 외에도 <불나무><하양나무> 등 좋은 자작곡을 여럿 준비해 갔었으니까.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 1호 싱어송라이터라는 짧은 족적을 남긴 채 1976년 홀라당 이민을 가버렸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공전의 히트를 쳤던 <사랑해>는 은희가 애인과 헤어진 뒤 목로주점에 앉아 취중에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부른 노래였다.
그러다가 청개구리집에서 한민을 만나 라나에로스포를 결성하여 리바이벌하면서 크게 히트했다.
<꽃반지 끼고>도 청개구리집에서 첫선을 보인 뒤 크게 유행한 노래다.
청순하고 가녀린 외모에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지만, 은희는 작사‧작곡‧노래에 두루 숨은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미대생이면서도 음악적 재능이 조영남보다 더 뛰어났던 김민기의 등장은 매우 독특했다.
이백천이 습관대로 영어를 마구 섞어가며 포크송을 해설하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제기랄, 영어 안 섞으면 어디가 덧나냐?’ 하고 중얼거렸다.
돌아보니 스무 살 새파란 김민기였다.
서울대생으로 청개구리집에도 자주 들리던 김민기는 검정물을 들인 군복차림에 검정고무신을 신은 남루한 행색이었다.
17년 후배의 욕설 섞인 핀잔이 거슬렸지만 이백천은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의 구수한 목소리와 빼어난 재능에 마음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주일 뒤, 김민기가 무대로 올라와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불렀다.
특유의 저음으로 원곡보다 깊은 느낌을 주는, 남자가 들어도 반할 수밖에 없는 가창력이었다.
“제기랄, 영어 말고 우리말로 노래하면 어디가 덧나냐?”
이백천도 혼잣말 하듯 소리를 높여 빈정거렸다.
사람 좋은 김민기의 얼굴이 누가 봐도 표가 나도록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대를 내려온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말없이 돌아갔다.
다시 1주일 뒤였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바닷가로 야영을 갔다가 익사한 절친을 그리는 노래 <친구>였다.
‘우리말로 노래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빈정댄 이백천에게 우리말 노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김민기의 대답이었다.
이후 김민기는 <아침이슬>을 필두로 아름다운 우리말 가사로 된 많은 명곡들을 작곡하여 우리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계속)
첫댓글 내 젊은 시절에 나를 지켜준 가수들, 오늘 이 글에 몽땅 등장하는구만...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라나에로스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