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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14), 그리스도와 연합
2021. 4. 9. 이현래 목사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라고 했다. 그 말 속에는 천사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다 천사의 복음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격보다는 천사, 신비,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전달되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도 내용을 보면 천사의 복음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말을 선지자가 들었다는 뜻이니까 그것은 천사의 복음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은 같이 가도 못 듣는 것이다.
모세가 들은 말을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있는가? 못 듣는다. 모세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본 것이지 음성을 들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 말씀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일어났던 광경은 다른 사람은 못 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뇌성이 울었다고 했는데, 바울은 듣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하느냐.”(행9:4) 이렇게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못 듣는다. 이런 원칙은 어떤 인격이라기보다 전부 천사의 복음이라는 원칙에 속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듣고, 어떤 사람은 못 듣는 것이다.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사람이 한 것이니까 사람이 한 말이니까 누구나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늘의 말은 아무나 못 듣는 것이다. 왜? 그것은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이 말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놀라운 것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놀라운 이적으로 광경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은 거기 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모세도 가까이 오지 마라, 산 가까이 오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거기서는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고 살아나온 사람이 나와서 말을 하는 것이다. 모세도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와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식양을 보고 와서 성막을 지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런 말로 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다른 사람이 못 듣는 말을 어떤 광경 속에서 들은 것이다. 그 광경 안에 우리가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 사람에 속한 것이 아니고 천사에 속한 것이다.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듣는 언어로, 못 알아듣는 언어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는 것이니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가 여기 있다. 옛 언약은 대부분 다 사람의 입으로 말했어도, 사람이 했어도, 그 뒤에는 천사의 복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들의 복음은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다. 왜? 사람이 하니까 사람으로 말을 하니까 그렇다.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새 언약이라는 말이 옛날처럼 천사로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 안에 법이 있고 마음이 있어서 사람의 말로 사람의 마음으로 말을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그 신비가 없어서 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원칙에서, 그렇지 않으면 못 한다. 우리도 어디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어디 가서 뭐를 봤다거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지만 좀 시대착오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구약 시대 같으면 그럴 수가 있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미 아들의 복음이 나타났는데 어디 가서 자기 혼자 소리를 들었다든지 이래서 되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굉장히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런 소리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가서 들으려고 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증거)하는 것이니라.”(요5:39)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뭐만 들으려고 하는가? 신비로운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온 것도 그런 것 때문에 따라 왔다. 그 옛날식으로 그런 줄 알고 따라왔다. 그러니까 결국 실망하게 된다.
아들의 복음은 아주 중요하다. 로마서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다. 어떤 신비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처음에 얘기했다.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얘기했다. 칼빈의 말로 하면 전적 타락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좀 좋은 사람도 있고 괜찮은 사람도 많은데, 모두 하나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 말은 사람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행위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이미 다른 길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는 이것만 알고 있는데 로마서 3장 24절에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한다.
의롭다 하신 것은 우리의 어떤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믿음까지라도 그렇게 되면 우리가 좀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로마서 3장 23절에는 ‘믿음으로’라는 말이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구속 안에 있으면 그것이 다 의로운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사람은 다 의로운 것이다. 구속 안에, 원래의 상태에 있으면 다 의로운 것이다. 그것을 벗어났으니까 불의한 것이다. 거기서 믿음이니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영역 안에서는 믿어야 되니 안 믿어야 되니 이런 것이 없다.
집에 있을 때, 자식들은 부모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것이 없다. 그런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한 집안에 사는 식구니까 자녀니까 그렇다.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우리가 동거한다면 그러면 믿고 안 믿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거리가 생겼으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으니까 그 거리를 매우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니까 친구가 하는 말이 믿어라. 믿으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믿느냐? 뭘 알아야지 믿지 은행도 알아야 믿는 것인데 어떻게 그냥 믿으라 하느냐? 믿을 수 있도록 좀 알려 달라고 했다. 결국은 거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모른다는 것이 있으니까 모르는 것이고, 결국 ‘믿어라. 믿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그것이다. 불교는 들어가면 무조건 의심하라고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인데 그래야 깨달을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는 깨닫는 것이 아니고 주신 것을 받는 것이니까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에는 통했는데 앞으로는 점점 안 통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전부 합리주의가 되니까 무조건 믿으라 하면 통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아기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걸어놓고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시랑이라고 하는 산신을, 아기 낳게 하는 신을 노엽게 한다는 것이다. 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전염병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서 믿는 것이다. 그대로 믿고 오지 않는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다. 그냥 믿으라고 해서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 앞으로 그것은 없어지게 된다. 안 된다. 순진한 사람들이나 거기 있지, 좀 반질반질하면 안 된다. 다 이성이 있어서 자기가 판단해야 된다. 그러니까 불교가 앞으로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그것이다. 거기는 무조건 의심하라고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의심이 많은데 무조건 의심하라고 하니까 더욱 좋다. 의심해야 깨닫게 되지 의심하지 않고 깨닫겠는가? 불교는 들어가면 쉽다. 입문은 쉽다. 그런데 수행을 하려면 어렵다. 입문은 쉬운데 수행을 하려면 어렵다.
아들의 복음!
이것은 최종적으로는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는 복음이라야 된다. 믿으라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이다. “나의 법을 그들의 속(생각)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그 날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아니할 것은 저들이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왜 알아라, 말아라, 하겠는가? 모르니까 믿어라, 알아라, 하는 것이다. 그 날에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어라, 알아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최종목표는 이것이다. 믿어라,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세계가 신약에 약속된 세계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람의 복음이니까 아들의 복음이니까 그렇다. 아들의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복음인지 모른다. 만민에게 전파될 수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이 어떻게 만민에게 전파되는가? 이것이 한 사람 문제이다. 사람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온다. 우리는 70억을 생각하는데 바울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죄인도 한 사람, 의인도 한 사람이다. 이것이 아주 놀라운 발견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언제 우리가 먹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일이 없으니까 대답하기 참 어렵다.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니까 앞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안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담과 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담 다르고 내가 다르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아담과 나는 한 사람이다. 운명적으로 한 사람, 존재적으로 한 사람이다. 지식은 다르다. 아는 것은 다르다. 그러나 존재는 하나다.
개는 다 개다. 무슨 개가 되었든지 간에 개는 다 개다. 소는 다 소다. 우리가 볼 때는 그렇다. 소는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하면 다 뜯어 먹는다. 풀 뜯어 먹는 놈이 소다. 풀을 안 뜯어 먹고 사는 소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소이겠지만 풀 안 먹고는 못 사는 게 소다.
시골에 가면 소 병 가운데 피부가 불거져 나와 있는 게 있다. 의사들이 칼로 가죽을 터버리는데 그 안에 공기가 들어서 픽 소리가 난다. 그런 것을 시골에 계신 분들은 봤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병이 생기는가? 풀을 먹지 않아서 건초를 안 먹어서 그렇다. 풀을 먹어서 배가 차야 하는데 배가 차지 않은 것이다. 짚이라도 먹어서 그것을 반추하고 반추해서 오랜 과정을 거쳐 소화를 시켜야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사료만 먹으면 껍데기가 들떠서 피부가 들떠서 공기가 들어가서 놔두면 죽는다. 그래서 칼로 뚫어버린다. 그러면 픽 소리가 난다. 소는 빈 짚이라도 계속 먹어야 한다. 계속 먹고 일 없이 반추를 해야 한다. 위가 4개라서 그냥 소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놈은 소가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놈은 다 소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한 사람이다. 아담이 그러면 다른 사람도 다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닐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아담이 그런 것은 존재적으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담의 행위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존재적으로 그렇다.
만들어지기를 혼자는 못 살게 되어 있다. 뭔가 있어야 되게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뭔가 있어야 되도록 만들어졌다. 지식이 생명이 되든지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되든지 좌우지간에 생명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결국은 무엇을 먹어도 먹어야 된다.
배고프면 사람이 똑같아진다. 흉년이 들어서 밥을 못 먹게 되면 모든 인간이 다 똑같아진다. 옛날에는 형무소에 가면 콩밥을 준다. 요즘에는 밥을 많이 먹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 콩밥을 주면 콩을 셀 정도로 주는데 콩을 먹으면 단백질이 있어서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겠는가? 콩밥 먹으로 간다는 그것을 못 견뎌서 형무소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에는 그것 때문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혼자 놔두니까 외로워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교도소는 침대까지 주는 교도소도 있다. 옛날 안양 교도소를 처음 만들었을 때 침대까지 주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농촌에 살던 사람들은 군대가 더 좋듯이 교도소가 더 좋다.
옛날에 시골에서 밥 굶고 하다가 군대 가니까 먹을 것이 있고 얼마나 좋은가. 옷 주지 밥 주지 훈련 받는다고 해도 농촌의 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군대가 더 좋았다. 중공군이 그렇게 모두 들어왔다. 농촌에 먹을 것 없던 사람들이 중공군에 들어오면 먹고 입고 다 한다. 그래서 중공군이 숫자가 한도 없고 한국전에 참여한 사람만 백만 명이다. 주은래가 한국 전쟁이 일억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억이 우리에게는 엄청나지만 사람이 원체 많으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일억이 아무것도 아니다.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대를 가니까 좋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배고프면 사람은 다 똑같아져 버린다. 학자고 도덕자고 소용이 없고 다 똑같아져 버린다. 한 사흘 굶겨놓으면 다 똑같다. 금식기도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참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도 없고, 오로지 먹을 생각 밖에 안 난다고 한다.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거룩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모든 생각이 다 없어지고 먹는 생각 밖에 안 난다고 한다. 해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는데 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먹을 것밖에 생각 안 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그것은 아니고 뭔가 좀 신비로운 소리를 듣기를 원하니까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 금식기도 해보고 나는 인간이구나. 사흘 굶으면 담을 안 넘어갈 수 없구나. 이렇게 깨달으면 아주 좋은 것인데 그것을 깨닫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인간은 하나다. 우리가 이탈할 때도 하나다. 그러면 간단하게 의롭게 되는 것도 하나라고 했다. 그러면 너무 쉬운 것이다. 예수 안으로 돌아와 버리면 하나다. 예수님 자신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이 보여지기 까지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니까 아주 쉽다.
고난의 예수, 고난의 종,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겉으로 보면 그것이 다 고난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고난에 참여하는가? 이번에 누가 고난의 종을 얘기했다. 고난의 종을 어쩌란 말인가? 예수가 고난의 종이면 어쩌자는 말인가? 우리가 거기에 참여해야 되는데 그렇게 참여가 되겠는가? 나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못해 보았다. 50년 목회하면서 한 번도 나는 고난의 종 얘기를 못해 보았다. 내가 감당을 못하겠는데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그것을 얘기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자신이 없어서 한 번도 못해 보았다. 십자가 하면 고난으로만 모두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그 십자가 얘기는 못 하겠다. 이것이 목사가 엉터리다. 고난의 십자가를 말을 못 하니 십자가를 잘 말해지겠는가? 아마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한 번도 내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다.
내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밤낮 얘기하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그것은 내가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내가 자랑을 해도 부담이 안 되니까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부담이 돼서 못한다.
부활하신 예수도 말하기가 어렵다. 내가 아직은 부활이 이런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고 까지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부활이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만약 다르다면 할 수 없다. 아직 못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부활해서 찾아갔으니까 알지 어디 베드로가 찾아갔는가? 어디 가서 부활하신 분을 찾는가? 또 바울도 만났다고 한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냐고 했는데 그것이 바울이 찾아가서 만났는가?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부활하신 분은 찾아왔지 누가 찾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부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분이 나를 찾아와야 한다. 와서 옆구리를 보여주고 봐라, 이렇게 해야 되지 내가 어디로 찾아가서 옆구리를 보겠는가? 부활을 못 봤다고 걱정하지 마라. 보여줄 때가 되면 주님이 와서 보여줄 것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내가 찾을 것을 안 찾았으면 내 책임이지만 내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찾아오셔야 되는 것이지 찾을 수가 없다.
꼭 자기가 찾아가서 만난 것처럼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헷갈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왜 못 만나는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니까 자기도 헷갈리고 남도 헷갈리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는가?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아마 베드로가 만난 것처럼 그렇게 만나게 하려면 그분이 나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찾아온다. 그래야 알지 어떻게 알겠는가? 찾아가도 몰라서 헷갈려서 마지막 떠나시면서 하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하고 물었는데 그것은 잘 못 보았다는 얘기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제대로 못 보았다는 것이다. 40일 동안 같이 있었다는데 40일이 아니라 400일을 같이 있어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이렇게 마지막에 물었다. 그랬더니 “때와 시기(기한)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했다. 봐도 모르는 것이다. 베드로가 봤다는 그 부활하신 예수는 봐도 모른다. 우리한테 찾아와도 우리가 잘 모를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는 ‘함께’라는 말을 썼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함께 죽었으면’하면 과거다. ‘함께 죽었으면’은 부정 과거형이다. 그러면 당연히 함께 산다는 것이다. 함께 살면 됐지 꼭 베드로가 봤다는 부활 그것을 봐야 되겠는가? 그분과 함께 살면 된다.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산다고 했으니까 죽은 것만 확실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죽으신 분 안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이 발견되면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내가 언제 죽었는가? 내가 언제 십자가를 졌는가? 아니다. 나는 십자가를 진 일도 없고 죽은 일도 없다. 그런데 예수한테 가보니까 나는 죽었다. 예수를 보니까 내가 죽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뛰어내려 왔는지 안 내려왔는지 어떻게 아는가? 내가 못 내려오니까 아는 것이다. 나도 못 내려오니까 예수님이 못 내려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믿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못 내려오니까 못 내려온 것 아니겠는가?
그분이 내려왔다고 하면 나는 모른다. 그러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사람은 모른다. 예수님이 내려왔다.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았는데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는 모른다. 여러분은 그 사람을 알겠는가?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고 하면 알겠는가? 직접 현장에서 봐도 모른다. 그런데 남의 말을 듣고 그것을 알겠는가? 그것은 안 된다.
모르는 것은 말하지 말고 아는 것만 얘기하자.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모르는 것을 말한다. 모르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한다. 부활절 아침이라고 사랑방이 뜨끈뜨근하다. 논쟁이 벌어졌다. 보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부활에 대해서 얘기를 하느라고 뜨끈뜨근하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본 일도 없는 사람들이 뭘 그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정통이니 아니니 할 일이 되는가? 아는 것만 말하면 인생이 조용하다. 모르는 것까지 말하려니까 인생이 시끄럽다. 아는 것만 말하면 된다. 아는 것만 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성경을 모른다고 그것이 죄인가? 아니다. 아는 것만 말하면 되지 모르는 것까지 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처음에 내가 해보니까 성경을 진짜로 아는 분을 만나니까 내가 완전히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전에는 다 알았는데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겠는가? 그것을 안다고 하겠는가? 모른다고 하겠는가? 그래서 성경책을 덮어놓고 보지 않았다. 봐도 모르는데 그래서 안 봤다. 보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다 알겠는데 내가 보려니까 하나도 안 보인다. 안 보이면 말할 필요 없다. 안 보이는 것을 찾아서 말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것을 찾아서 말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무는 우리에게 없다. 아는 것만 말하면 된다.
한 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왔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아주 귀중한 말이다. 우리가 정말로 내 개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인데 이 안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내 스스로 내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떠날 데를 알아야 만날 데를 알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서 떠난 줄을 알아야지 내가 찾아가지 길 잃어버린 사람이 자기 떠난 데를 알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 자기 떠난 데를 모르니까 못 찾아가는 것이다. 성경에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성경에 죄인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인이 아닌데 어디를 찾아가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할 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으니까 이것이 참 답답한 일이다. 성경은 다 그렇게 써 있다. 내 죄 때문에 죽었다고 써 있고 부흥사도 와서 맨날 그런 얘기만 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누구를 죽게 할 죄를 내가 지었느냐는 것이다. 듣지 않았더라면 모를 얘기를 들어서 괜히 병 된다. 괜히 교회 다녀서 죄인 된 것이다. 교회를 가지 않았더라면 죄인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인데, 내가 교회를 갔기 때문에 죄인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못 내려오는 것을 보고 나니까 ‘아! 나는 가짜로 살았구나.’ 이렇게 안 것이다. ‘나는 가짜로 살았구나. 저 사람이 진실이구나.’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을 보고 ‘야, 위대하다.’고 하고 살았다. 어떤 사람들을 보고서는 ‘야, 위대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가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 살았다. 그러니 끝이 있겠는가?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을 놓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나는 어떻게 하면 저런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러고 있었으니까 되겠는가?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인생고가 되었다. 교회를 갔으니까. 안 갔으면 모를 일인데 교회를 가니까 그게 인생의 고통이 되었다.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저렇게 못 사나? 어떤 사람들은 선교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 이런 문제가 생겼다. 저 사람은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하는데 나는 왜 이러는가? 이런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기도원으로 쫓아 다녔다. 미친놈이 되어 쫓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니까 미친놈이다. 죄가 탄다는 데 앉아서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 지 맡아보고 있었으니까 그게 미친놈이지 제 정신인가? 그래도 안 하면 안 되었다. 그때 그런 분위기가 한참 한국 교회에 유행했었다. 뭣도 모르고 목회한다고 나왔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쫓아다녔다. 별 것을 다 보았는데 그때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봤다.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저런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아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이게 이상한 삶을 산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사람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만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분을 본다는 것은 참 놀라운 축복이다. 너무 큰 축복이다. 그 사람을 보고 나니까 내가 할 말도 없고, 미친놈이 되어서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사람이 거기에 딱 있는데, 진실한 사람이 거기에 있는데, 방황하고 다닐 필요가 없다. 본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민수기에서 장대에 달린 뱀을 보고 모두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살아났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함께’라는 말은 여기서 ‘함께’라는 말이다. ‘함께’라는 말이 손잡고 갔다는 말이 아니고, 특별히 친한 관계라는 말도 아니다.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사람인데 괜히 헛 사람을 찾아 다녔다. 얼마나 어려운가?
지금도 천주교 안에는 그런 사람이 많다. 천자, 복자라고 해서 많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해 보려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생을 보낸 사람도 많다.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하다. 한 사람만 보면 될 것인데 무슨 수양을 해서 별난 사람이 된다고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 어떤 사람은 원래 가톨릭 신자였다. 처음에 우리 교회를 나오다가 수사가 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당당하게 그랬다. 가족도 다 천주교인이다. 아버지가 순교자 집안인가 그래서 못 말렸다. 그래, 가 봐라 했다. 그런데 얼마 못 있다가 못 견뎌서 나와 버렸다. 수도원에 가면 그냥 가만히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담당 신부가 있어서 면밀히 뒷조사를 하는 모양이다.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조사를 하는데 한 번 부르더니 넌 도저히 여기서 못 살겠다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너는 여기서 살 사람이 못 되니까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쫓겨나서 왔다. 쫓겨나니까 갈 데가 없어서 우리 교회로 다시 왔다. 지금 우리 교회에 있다. 그 형제는 우리 교회가 없었더라면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천주교에서 쫓겨났으니까 어디를 가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뭐가 될 줄로 생각한다. 뭐가 되면 이런 사람이 되겠지, 저런 사람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도 없고 저런 사람도 없다. 다 똑 같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거기 가서 보면 다 똑 같다. 다 한 사람뿐이다. ‘함께’다.
‘함께’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신비주의가 나왔다. 한기총에 가면 이단 대책 위원회가 있다. 거기 위원장이 최*경 목사인가 그렇다. 그런데 지방교회를 보고 이단이라고 신인합일주의라고 써 놓았다. 나도 거기에 아류라고 붙어 있다. 내 이름 밑에 신인합일주의라고 붙어 있다.
중국 사람들은 합일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는 합일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 한자를 써도 우리와 다르게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상호간에 하는데 그 사람들은 호상 간에 라고 한다. 같은 글자인데도 거꾸로 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합일이라는 말을 잘 쓴다. 그래서 신인합일주의라고 알지도 못하고 거기다 써 놓은 것이다. 이단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LA 지방교회에 김*울이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 김 목사도 만나 봤다고 하는데 그 사람과 최*경 목사와 지상논쟁을 했다. 지상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완전히 케이오 패 당해서 오히려 최*경 목사가 이단으로 몰렸다. 한 동안 이단이라고 했는데 자기들끼리 뭐라고 해서 도로 복귀했다고 한다. 김*울이라는 분이 써 놓은 글을 보았다. 그렇게 많이 아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거기다 대놓고 무슨 논쟁을 하겠는가? 지상으로 하니까 몇 년간 했다. 하다가 자기가 오히려 이단으로 몰렸다. 지식이 너무나 많다. 그렇게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감탄했다. 신문 한 면에 다 써 놓았는데 한 장 밖에 안 봤는데도 이 사람과 무슨 논쟁을 한다고 했는가? 자기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래서 졌으니까 한기총 이단 명단에서 지방교회는 빼 버렸다. 그런데 나는 안 빼고 그냥 놓아두었다. 지방교회의 아류라고 써 붙여놓았다. 몇 번 편지를 하여 지우라고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 지 유령 단체인지 대답이 없다. 이런 사람과 싸우려니 지식도 모자라고 치사하고 지금 15년인가 20년이 지나갔다. 하려면 마음대로 해 보라는 것이다.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정말 많이 알았다. 교회사고 뭐고 모르는 게 없다. 지방교회와 붙었다가는 박살난다. 우리나라에 신학자들이 많지만 신학자들이 그렇게 아는가? 자기가 아는 부분만 알지 전체를 그렇게 알 사람은 없다.
‘함께’라는 말 때문에 오해가 많이 생긴다. 사람 속에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은 신선사상이 있다. 그 사람들은 일체주의이기 때문에 신비주의적이기도 하는 신선사상이 발전했다. 그래서 대추 한 알 먹고 바둑 한 판 두고 내려와 보니까 500년이 지났다거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선사상이다.
인도 불교에는 신선사상이 아니고 초월주의다.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사상이다. 하나님까지도 다 초월해 버렸다. 아무 것도 없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그런 세계를 찾고 있다. 철학적이다.
기독교는 신비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분 부분에 신비주의라는 것이 있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다거나 죽을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이런 것은 신비로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이것이 지나쳐서 흐르면 신비주의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신비주의라고 안 하고 다 넘어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혜택을 받고, 어떤 사람은 혜택을 못 받는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경험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경험을 못한다.
나도 내 일생에서 어떤 부분은 그런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규정을 못 하겠다. 나는 원래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에서 나온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기적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 해보았다. 두 달 만에 결핵균이 없어지겠는가? 그렇게 객관적으로 해석하면 기적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나왔다. 남이 그래서 알았다. 너는 죽을 자리에서 하나님이 살려주어서 살았다고 해서 알았다. 그것도 몇 년 후에 알았다. 7년 후에 친한 친구가 말해주어서 알았다. 그러니까 그런 게 없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신비로운 우리가 모르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들의 복음의 주요 골자는 그것이 아니다. 그런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요 골자는 아니다. 그러니까 ‘함께’라는 말도 무슨 신비주의가 아니다. 연합이라는 말이 맞다. 연합이라는 말은 둘이 합해서 한 덩어리의 떡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 아니고, 각자는 각대대로 그냥 있는데 합해서 아들을 낳는다. 이것이 연합이다. 합해서 아기를 낳는 것이 연합이다.
신기하다. 사람의 개념 속에서는 둘이 한 떡이 되어 버려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 또 그렇게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창세기 2장 마지막에 그 말을 넣어 놓았다.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될지니라. 하나님 창조의 모든 일은 전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마지막 결론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이것도 이루어지려면 연합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또 동산에 두시고 경작하게 하신다는 것도 연합이다. 씨와 흙의 연합이다. 그렇다고 씨가 흙이 되고 흙이 씨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 때문에 지방교회는 오해를 많이 샀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어패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이 연합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연합은 떨어져도 존재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연합했다고 해서 다른 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연합의 좋은 예다. 미합중국이라고 할 때 각 주가 각각 독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연합해서 연방정부를 가지고 있다. 연방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각 주가 섞어져 버리는가? 섞여지지 않고 따로 있다. 경찰도 따로 군대도 따로 다. 뭐든지 다 따로 있다. 그런데 연방 정부 안에서만 하나다. 연방적인 문제에서만 하나다. 특이한 나라다.
우리 같으면 전라도 따로 경상도 따로 전부 독립해 놓으면 큰일 날 것이다. 한때 그런 말이 나왔는데 그렇게 해 놓으면 죽판 될 것이다. 다 무기 가지고 있다면 뭐가 되겠는가? 서로 싸워서 큰일 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다. 둘이 연합하여 뭐가 되는 게 있다. 그러니까 둘이 연합이 필요하다.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남자와 여자다. 그런데 둘이 합해서 아기를 낳는다. 차이가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라는 말은 예수와 연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연합 안에서 우리 혼자 못하는 것이 생긴다. 나 혼자 안 되는 것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4~8)라고 했다.
죽음에서 하나였으면 삶에서도 하나라는 말이다. 부활이 따로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 밖에 모르겠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산다. 십자가 안에 있는 나를 보고 나니까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고도 다르게 살 수는 없다. 내 존재를 그렇게 보고서도 다르게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을 보고 ‘새 생명’이라고 한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이라는 말을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생명이라는 말을 ‘삶’으로 해석하면 좀 낫지 싶다. 생명이라고 하니까 독립된 어떤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 보다는 ‘삶’, ‘살아 있는’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새 생명이라는 말은 새로운 삶을 산다는 말이다. 새로운 삶으로 산다. 새로운 삶 안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더 쉽지 않겠는가.
새 생명이라고 하면 새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생겼는가? 자꾸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새 생명이 어떻게 생겼는가? 옛 생명도 사실 설명하기 어렵다. 숨 쉬는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밥 먹는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새 생명을 그렇게 이해하려고 생각하면 아주 곤란하고 어렵다. 생명은 삶이 있게 마련이니까 옛 생명은 옛 사람의 삶, 새 생명은 새 사람의 삶이다. 생명인데 삶이 없는 생명은 없다.
우리말로 하면 삶 다르고 생명 다른데 영어로는 이상하게 단어가 하나밖에 없는 것도 많다. life, live라고 하는데 똑 같은 말이다. 같은 단어를 써 놓고도 삶이라고 번역하고 생명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사랑도 그렇다. love 해 놓고 모든 것을 다 love로 한다. 나는 돈을 사랑한다. 나는 집을 사랑한다고 한다. 우리가 들으면 말이 이상하다. 나는 집을 사랑한다. 나는 차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상하다. 차를 좋아한다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다 통 폐합시켰는지 모르겠다. 다른 것은 다 분석해서 말하면서 이런 것은 통 폐합시켜서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I love You.’ 해도 싱겁다. 자동차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I love my car.’ 와 ‘I love you.’ 하면 그 love가 무슨 뜻인가? 자기들은 다 구별해서 하겠지만 말이 그렇다.
‘생명’이라는 말을 명사로 하지 말고 동사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모든 단어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사가 원형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롬6:8) 죽은 것도 동사다.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삶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것 밖에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은 부활해서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했는데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했다. 예수님이 일정한 곳에 계시지 않았다. 방 안에 우리끼리 앉았는데 갑자기 들어오시기도 하고, 문도 안 열어두었는데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화면이지만 확실하다. 그런데 화면이 아니라도 써 놓은 것을 보면 애매모호한 것이 참 많다. 어떤 사람은 봤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 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까지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부활하신 예수를 봤다는 사람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렇게 묻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소박하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함께 죽으면 함께 사는구나. 함께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함께 사는구나. ‘같은 모양으로’라고 했다. 옛날 성경에는 ‘같은 모양으로’라는 말이 없다. 이번에 번역하면서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롬6:5) 연합이 좋은 말이다. 존재가 분명하면서 함께 사는 것이 분명하다.
잘못하면 그런 말도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땅에 왔으니까 하늘에는 아무도 없는가? 이런 질문도 한다. 우스운 질문 같지만 그런 질문이 많다. 하늘에는 누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가 대단히 곤란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땅에 와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늘에는 누가 없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나는 별 사람도 다 만나 보았다. 그게 대답하기 난처한 말이다.
연합하기 때문에 존재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 그대로다. 삶이다. 다른 삶이 있다. 새로운 삶이 있다. 결혼하기 전의 삶과 결혼한 후의 삶이 다르다. 그와 마찬가지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결혼한 것만 다른 것이다. 결혼하고 나면 생활이 다르다. 아무래도 다를 게 아닌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다르고, 밥을 먹고 다니는 것도 다르고, 결혼하고 나면 다른 게 많아진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나면 다른 게 많아진다. 일부러 그런 삶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결혼을 하지 않고서 한 체 하고 살려면 제대로 되겠는가? 결혼한 사람들이 사는 그런 모양으로 살려면 되겠는가? 안 된다. 어디에서라도 표가 나기 마련이다.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사는 것이다. 밥해주는 것 먹고 다니고, 옷도 깨끗하게 입고 다닌다. 혼자 살 때와 다르다. 목욕도 자주 하게 된다. 혼자 살 때 목욕을 안 하던 사람이 목욕하라고 조르니까 할 수 없이 한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누구라고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옛날 시골집에 목욕탕이 있는가? 뭐가 있는가? 일부러 목욕탕에 가야 목욕을 하는데 거기에 살던 사람이 집 안에 목욕탕이 있는 집에 사니까 잘 이용이 안 된다. 그런데 아내가 씻지 않는다고 자꾸 뭐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씻는다고 한다. 자연히 삶이 달라진다. 억지로 안 해도 저절로 달라진다.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 일부러 가서 죽는다고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가 안 죽는가? 이렇게 어려운 사람도 있다. 죽어야 되는데 안 죽는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성질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닌가? 자기 성질이 죽어야 되는데 안 죽어서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을 보고 내가 그냥 ‘내가 죽었구나.’ 하고 손을 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해놓고 우리에게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 좀 하라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다 해놓았다. 다 해놓고 와 보라. 다 준비해 놓고 먹으라. 이게 복음이다. 왜 그런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놓으면 복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 조상들이 해도 해도 안 되는 것, 도저히 못 한 것, 그것을 해놓고 오라는 게 복음이다. 조금이라도 내가 힘을 써야 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 되더라도 온전한 복음이 못 된다. 왜냐하면 그 ‘조금’이라는 것 때문에 걸려서 못 오는 사람도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저것 조금만 하면 되지.’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또 율법이 된다.
내가 어떤 형제에게 이렇게 좀 해라, 될 것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해서 돌아버린다. 그렇게 심각할 줄 몰랐다. 나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것 좀 이렇게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어서 저렇게 되어 버렸다. 내가 쉽다고 다른 사람도 쉬운 것이 아니다.
완전한 복음이 되려면 이런 것도 없어야 된다. 이런 것마저도 없어야 된다. 이런 것이 있으면 천국이 되겠는가? 한쪽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천국이 되겠는가? 그래놓고 좋다고 잔치를 하고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한쪽에서는 울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노래 부를 생각이 나겠는가?
원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다 창조해 놓으셨듯이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완전하게 해놓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사람으로 회복되기만 하면 사람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이 다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한 번도 안 살아 봤으니까 뭐가 옳은지 다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중 완전한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로마서에서 나오는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들의 복음이니까 완전해야 되지 않겠는가? 혹시 로마서가 부족해도 우리가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로마서가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사역해서 완전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만민을 부를 수 있다. 안 되는 것을 불러서 왜 못하느냐고 하면 되겠는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