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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의 “소은 박홍규론”에 대한 단상,
-이정우의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2016)를 읽고서.
류종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 04 05
* 사상의 재정립에서 개념작업과 배치
좋은 스승이 있어서, 스승의 어깨 위에서 저 멀리 본다는 것이 학문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삶은 과거를 일상의 동일 반복에서도 새로운 이질반복이 생기며, 즉 전진하지 못하고 동일반복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한 발작을 내디디면 새로운 길을 찾는 이질반복을 이룰 것이다. 아마도 다음세대는 이질반복으로 이어질 것이고, 저자가 말하듯이, 벩송을 빌려서 또한 들뢰즈에 힘입어 시간의 지도리가 벗겨지고, 앞으로 무한히 열려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도 소은 박홍규의 삶과 강의록 덕분이리라. 저자 이정우는 박홍규 강의록 전체를 읽고 나서, 소은의 사상을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그의 사상을 따라가는 방법과 사유의 이중성과 통일성, 즉 분화와 수렴을 죽 이끌어가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저자 자신이 오랫동안 동서양의 철학사를 재정립하기 위해 몇 권의 저술을 쓰기도 했기에, 자신의 관점을 지니고 소은 사상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장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선생님은 체계를 세운 글을 남긴 것도 아니고, 후학들이 강의록을 읽다가 보면 그의 개념작업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앞에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가 뒤바뀌는 것 같기도 하고, 같은 단어가 지닌 의미가 이중적 삼중적으로 들리기도 하며, 게다가 선생님도 어느 구절에서는 플라톤에게서도 혼동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고, 어느 시간에는 플라톤이 2원론자로 어느 때는 3원론자로 읽어야 한다고도 하였다. 이런 독해의 어려움은,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면 그 용어가 플라톤 자체의 오류처럼 들리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의에서 플라톤의 오류라기보다, 문맥상 또는 다루는 학문의 영역상, 문제제기 방식을 바꾸어보면, 난제(aporia)의 관점들 사이의 사유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왜 다른가? 대상자체가 다양체이기 때문일까, 인식의 차이를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차이는 뒤로 젖혀두자.
우선 지성(이성이라 표현 하든)으로서 이해하러 들어가는 방식과 지혜로서 자료들을 다루는 경향성이 다르다. 인식의 두 능력에서 차이가 이해되지 않은 가운데 어떤 문제를 다루는 과정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식의 대상(실재성)이 페라스를 갖는 것과 페라스를 갖지 않는 것이 동시에 주어지는 것을 사유하기란 어렵다. 대부분의 독자는 페라스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지만, 선생님의 설명에는 불쑥불쑥 둘을 동시에 배치시켜서 설명할 때, 지성으로 접근하는지 지혜로 접근하는지에 차이를 잘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전체를 한번 읽고 다음에 다시 읽으면, 뒤에 나올 이야기와 연관 속에서, 뒤섞인 듯이 보이는 주제가 갈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는 소은의 사유를 죽 따라가면서, 소은의 사유에서 일관성이 있음을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소은의 사유에서 “아페이론”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저자가 인용하여 제시한 글들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 점에서 소은이 “영혼”에 대한 의미와 규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마지막까지 문제 삼은 “방황하는 원인”은 인간 본성(la naturehumaine)을, 즉 그 “자연”을 이해하려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방황하는 원인이 아페이론으로서 경계가 없기에, 형상으로부터가 아니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경계 지워(정의하여 개념화하며) 다룰 것인지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소은은 그 새로운 방식을 베르그송에서 찾았던 것 같다. 둘을 같이 두고 나간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에서는 쉬운 것이지만, 운동(시간, 기억)의 사유에서 쉬운 것이 아니다.
덧붙여서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사유가, 즉 평준화의 평면에서 솟아나는 사유가 아페이론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을 때, 뒤나미스(dynamis)라는 개념작업이 나오고, 뒤나미스는 잠재성도 동력학도 아니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생명의 자기 권능과 자발성으로 성립하게 될 것이다. 정리의 차원에서 소은은 형상을 먼저 놓고 가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인다고 하면서, 이것은 쉬운 방식이라 하고, 운동을 먼저 놓고 가면 베르그송이 나오는데 지성의 역할과 다른 역할(직관)이 인간의 삶에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보자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식의 두 주제와 존재의 두 주제를 나란히 두고, 두 계열을 형성해 가면서 좀 더 깊이 있게 또는 세부적으로 다루어 갔던 과정을 서양철학사라고 본다. 현대에 와서 두 계열의 혼재 또는 조화에서 새로운 존재론의 성격을 지닌 철학적 과제가 있다고 보고, 저자는 이것을 “사건론”이라 제시한다.
이해의 어려움 중에서 같은 단어의 이중성도 있다. 같은 단어 동일성/정체성(l’identité)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형이상학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한 단어 또는 개념(le concept)이 전혀 상반된 개념작용(la conception)을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선생님의 강의록에서는 매우 어렵다. 이 개념작용을 알아채는 경우에, 서양 철학사에서 형이상학이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어 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많은 문제거리들이 한 용어의 다의성에서 오는 혼동도 있지만, 그 다의성을 내포하는 각개별 학문들의 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학문의 체계에 통일성이 있고, 게다가 법칙화를 넘어서 일반화 또는 보편화로서 원리처럼 여겨지고, 그것을 다루는 지성(또흔 이성)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들이 지배해 왔다.
또 다른 의미에서 추상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우선 모든 질을 다 빼버린(추상하여) 형식(형상)만 남은 페라스에서 동일성은 자체적인 것(kath’ hauto)으로서 이데아들을 지칭한다. 이에 비해 형식을 모두 뻬버린(추상하여) 질과 흐름만 남은 아페이론을 (벩송의 경우에 흐름, 지속) 자기 동일성(인격의 정체성)이라 한다. 후자의 자기 동일성은 자기 스스로 인 것(to auto) 즉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to auto hauto kinoûn)을 의미한다. 이 둘은 상반된 경우이며 대립자 관계이지, 존재와 무와 같은 모순관계로 설정되지 않는다. 모순관계는 질과 형식이 모두 있거나(존재) 모두 없는 것(무)로서 가정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 있거나 모두 없거나를 동시에 평면위에 놓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순은 순수 사고 또는 정신의 극한에서 놀이하는 것이지 실재성이 아니다. 벩송은 이를 상징이라 부르고, 수학의 기호들은 어떤 공간(소위 절대공간)에서 점을 통해 선과 면과 체적을 동시에 놓고서 사고한다. 그러나 동일성/정체성의 문제제기에서 페라스와 아페이론 관계는 마치 자석의 북극과 남극과 유사하여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소은에게서 한편으로 공시태의 관점에서 중요한 개념작업(la conception)이 플라톤에서 존재론의 어떤 위계를, 다른 한편 통시태의 관점에서 벩송으로 넘어가는 또는 이어가는 과정에서 전개방식을, 저자가 배치하고 있다. 이런 두 방식, 공시태와 통시태로 나란히 또는 대립적으로 보면, 사실상 서양철학사의 발달사를 꿰뚫는 일이관지의 방식이 도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는 이런 공시태의 관점이 시대마다 재등장하여 용어 또는 개념화 작업을 달리 했지만, 여전히 고대 그리스적 사고의 공시태의 틀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고 보고(시간관념의 역사강의록), 또한 통시태적으로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겪는 다는 것이다. 실증적 사실들(les faits)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인식방식과 이론적인 틀의 변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그 변화 중에서 하나는 천체의 운동이 지구의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상대성 이론을 제기한 갈릴레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물질계를 다루는 방식과 생명계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과 생명을 다루는 이론에서도 새로운 지도 이념이 있다는 베르나르의 학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벩송은 1903년의 논문 「형이상학입문」에서는 영혼도 물질도 모두 흐름(운동)으로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실재성의 현존을 설명한다. 이로서 벩송은 고대철학에서 부동의 이데아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부동의 원동자를 마치 신화와 종교적 독단을 걷어내듯이 폐기하고, 자연 또는 우주 자체가 자기에 의해 자기 생성의 길을 간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주장은 벩송이 말하듯이 네오스콜라주의적인 주장과 같다. 세계와 물질은 요소와 기능으로 파악하려는 원자론적 분석적 논리로서는 실재성을 파악할 수 없기에 직관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냈으며, 이런 직관의 파악을 자연(물자체, 영혼자체) “안에서(dedans)”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자연 즉, 이 이질적 다양체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여 분화 또는 분열의 경향성을 드러내고, 그리고 생명체도 이런 발산의 길에서 또한 다른 경향성으로 수렴의 길을 만들어내는지를 탐색하는 것이 “창조적 진화”의 이론이다.
사람들은 학문의 발달이란 한 거장의 어깨 위에서 보다 멀리 조망하는 것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거장의 문제거리를 그 다음 세대에서 또는 세월 밑으로 흐르다가 어느 시기에 갑자기 거장과 연관 없이도 등장하기도 하며, 서로의 소통 없이도 동시대에 다른 지역 다른 방식에서도 솟아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철학사에서는, 마치 난문제 또는 문제거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처럼, 전시대의 문제제기를 후대에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풀려고 한다. 이런 과정은 지성의 발달과 더불어 직관의 확장에도 기여하였고, 거장의 어깨 위에서라기보다, 각 학자들에게서 위상들의 중첩(과 다음측정)에서 한 발걸음 한 발걸음 나아간 선들(계열)들의 역사이다. 멀리 내다보았다기보다는, 각 시대의 위상의 구(球, 원이든 타원이든)들의 중첩과정의 마주치는 부분에서 해결의 실마리들을 찾아서 점진적으로 전진하며, 이들을 수렴하는 노력에서 새로운 학설 또는 이론이 성립하였다. 인간의 또는 생명체의 지속에는 초월과 같은 불연속적 뛰어넘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원들의 사이에 마주치는 점에서 증폭과 소멸의 과정에서 증폭으로 상승하는 경향에서 새로움을 창안하였다.
자연에서는 초월이 없다.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 안에 있는 인간은 기나긴 과정에서 고통과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런 해명의 배경에 이데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임의적 기호(상징)로서 이데아와 비슷한 개념을 설정하고 또는 목표로 두고 나가는 것이다. 사유의 방향은 이데아 설정 또는 이데아에 의존한 방식이 아니라고 할 때, 서양학문 발달사는 근세 이래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콜라주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아버지를,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죽 올라가서 유일한 아버지가 있다는 일반화와 추상화의 정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다. 자연의 자발성에 의해서,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인 방향에서 보면, 아버지, 할배, 전할배, 전전할배는 현존하는 인간의 후배들이다. 그 할배들의 역능을 이어받아(유전) 확장하면서, 다음측정(le recoupement)에 의해 스스로 개척하고 창안하며,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인의 어깨에서보다, 사실의 선들에서 아직 풀지 못했던 문제거리를 올바로 제기하여 새롭게 풀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은, 세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는, 자연사는 지성과 직관을 통하여 끊임없이 다음측정을 하면서 진행한다. 이 다음측정이 다양화 되었기에(개별학문의 발단은 19세기 후반에서 정립되었다) 여러 분야에서 여러 별종들의 같잖은 이야기들로부터 중첩과 더불어 미래의 전망으로 향하고 있다. 이 다양한 영역들을 다양체라고 부른다면, 다양체를 태워서 가는 큰 수레를 인민들은 조금씩 끌고 밀고 가는 셈이다. 개별학문의 발달에서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학문의 선두와 고수가 중요하였으며, 그 스승 또는 선각자를 모범으로 삼았다. 이제는 여러 다음측정들이 위상적으로 중첩되는 방향에서 학문과 세상을 달리 생성하고 확장할 것이다. 이 다음측정의 만나는 점이 뚜렷하고 말끔하게 보이는 것은 선현의 오랜 노력의 과정에서 경험적 자료들의 축적과 수렴을 실행했던 인류의 거장 또는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소은 같은 거장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박홍규 전집의 이해를 위한 한 배치.
선생님의 이론화 작업에 대해 제자들의 공통적 견해가 있다. 하나는 「고별강연(1984)」에서 마지막 언급으로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 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을 놓았고, 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 그 이외는 없어요.”(54쪽)라 한다. 이 견해는 서양 철학사를 관통하여 일이관지하여 이해할 수 있는 명제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강연의 서두에서 데이터에 관해서 문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요컨대 고전의 학문 정신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무엇이냐(What is it)>라고 묻습니다. 그 <it>이 바로 데이터입니다.”(13쪽) 우리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 데이터 속으로(dedans) 들어가 그 시대의 사유방식을 찾아내고, 나아가 플라톤의 영혼의 작동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였을 것이다. 그 노력의 과정을 차례로 후학에 알기 쉽게 알려준 것이 아니라, 마치 플라톤의 대화록들처럼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지만, 강의록을 안으로 들어가 주의해서 읽으면 그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초보자나 그리스 문헌에 접해 보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내용들을 분류하고 또는 정리하여 배치하는 작업과, 또한 난해한 개념작업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작업은 후학들의 과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 이정우는 그리스 어휘들을 각 장에서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중요 개념들을 뽑아 올리고, 그리고 소은의 강독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선생님의 논문과 강의록을 나름으로 배치하고 그리고 개념화 작업을 하며, 다른 설명들이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추려서, 소은 사상을 이해하는 한 통로로서 드라마와 같이 생각하여, 아래와 같이 배치하였다. 우리는 그의 배치에 따라 논문들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하여 전체에 관심이 아니라하더라도 개별학문을 하는 이들이, 플라톤 사상의 어떤 부분과 자기들의 연구부분에서 필요한 부분인지를 알고자 할 때, 그 부분이 플라톤 사상에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좌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연결 고리들에 대해 섭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에 소개한다. 목차는 저자의 것이며, 전집과 연관하여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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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전집 I,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1967)
전집 III, 철학이란 무엇인가?(1988)
전집II, 앎의 개념(1987)
1부 존재론의 탄생
1장 헬레스 존재론의 뿌리와 구도
전집 III, 희랍 철학의 이면(1992)
전집 III, 플라톤과 허무주의 극복(1989)
전집 III,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1990)
전집 I,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1967)
2부 플라톤의 존재론
2장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77
전집I, 프로타고라스편에 대한 분석(1977)
전집I, 유티데모스편에 대한 분석(1978)
3장 ‘자기운동자’에서 ‘자기차생자’로
- 참조: 원문 파이드로스(245b-246a)
전집 II, “자기 운동 II: 파이드로스(245c-246a)(1986)
전집 II, 자기운동I(1986),
4장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연135
전집 II, 「고별강연(1984)」 검토(4)(1989)
전집 II, 「고별강연(1984)」 검토(3)(1988),
전집 II, 방황하는 원인(1987)
5장 아페이론의 문제169
전집IV, 티마이오스편 강의(1978)
전집 IV, 파르메니데스편 강의(1979)
전집IV, 필레보스편 강의 III (1981)
- 참조: 원문 필레보스(16c-17a)
전집IV, 필레보스편 총정리(1981)
6장 존재, 인식, 실천207
전집 II,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1986)
전집 II, 인식과 존재: 소피스트편(1986)
3부 서구 존재론사의 전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까지
7장 플라톤 이후의 서구 존재론사
전집 III,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1988)
전집I, 서양 고중세 철학사 개관(1967)
4부 베르그송의 존재론
8장, 9장, 10장은 베르그송의 창조직 진화(1907)의 설명이다.
전집 V,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1981)」
저자는 창조직 진화의 제4장 먼저 다루고, 제3장을 다룬다.
저자는 소은의 강의록 속에, 벩송의 앞선 두 저작 시론(1889)과 물질과 기억(1896)에 대한 전모를 알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소은의 벩송 강의록은 전집5권이 전부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노트는 남아있을 것이다. 이 수업 중에 제자 이창대는 옛 강의 노트를 보면서 설명상의 차이를 질문하곤 했었다.
결론: 소은과 우리
* 사유의 단초로서 존재와 영혼
서양철학사 또는 사상사의 전개는 이중성 또는 분할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선생님의 강의록을 읽으면 이런 이분법적인 관계를 어느 쪽에 먼저 중요시하고 보느냐는 문제보다, 어느 쪽에서 문제제기를 야기하느냐는 탐구의 논리 또는 방식을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 철학사가 신화의 이야기에서 지성을 통한 추론의 방법으로 체계 또는 이론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당연히 선생님은 신화를 벗어나 지성의 시대로부터 철학사가 시작됨을 설명한다. 들여다보면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인물이 남긴 글로 된 자료(데이터)가 없으니, 플라톤의 자료들로부터 시작한다. 여러 번 강조하듯이 철학이나 모든 학문은 데이터로부터 시작한다. 그 데이터가 학문에 따라서 글로된 것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일 수도 있고, 현대에 와서는 원자의 내부로, 또는 세포의 내부로 들어가서 구체적 실증적 자료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 관한한 플라톤의 저술이 일차적 자료(텍스트)이다. 선생님은 평생 동안 이 자료를 탐구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프쉬케(psychē)가 플라톤 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먼저 문헌적으로 따져보고, 그 용어가 어원적으로 신화의 시대와 페리클레스의 사회 문화적 시대의 용어적 의미도 비교해보고, 게다가 플라톤을 이어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심지어는 벩송에 이르기까지 각 철학자들이 시대에 따라서 개념화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를 연구하였다. 대부분의 철학사가들이 어원적인 탐구에서, 시대 문화적 접근으로 개념을 정립하고서는 이를 철학사에 적용 또는 다른 학문들에 응용하는 경향을 취하였다. 이에 비해 선생님소크라테스를 여러 문헌을 통해서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있게, 플라톤의 작품 안에서 자료들을 통해서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심층적 사유를 따라가는 방식을 찾아내는 노력을 했다고 보여 진다. 프쉬케에 관한한 우주영혼의 의미에서야 여러 방식으로 다룰 수 있지만 한 개인의 인격성의 영혼은 겉으로 보아 표상적 용어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영혼에 대해 다룬다면, 영혼은 변하지만, 이데아처럼 자체성을 갖지 않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도대체 ‘뭣’인지에 대해 선생님의 사유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드라마와 같은 점이 있다.
영혼의 문제가, - 그 자체로서 경계를 갖고 자체성인 이데아들과, 그리고 이데아들과 성질과 특성 그리고 능력과 기능에서 전혀 다른 경계없는 덩어리, 이 둘 사이에서 - 왜 어떤 자리 또는 위상을 갖는지를 선생님은 강의록에서 끊임없이 되물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라고 한 것은 사유의 과정이 하나의 방식으로 일관된 점도 보이지만, 갈래로 갈라져서 두 가지 길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세 갈래, 어떤 때는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하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갈라지는 여러 길에서도 그 갈래의 본래적인 또는 기원적인 토대가 하나이지 않는가를 버리지 않은 것 같다. 저자 이정우는 이 끝내 남겨진 그 밑바탕이 “존재”라는 용어일 것이라 여기고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프쉬케를 예로 들었지만,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선생님의 주요 관심사는 페라스(peras, 경계있는 것)과 경계없는 것(apeiron, 아페이론)을 설명하는 플라톤의 자료들을 세세하게 섭렵하였다는 것이다. 페라스라는 개념에서 정지와 자체 동일성과 연관지어 추론하고 일반화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고, 아페이론이라는 개념과 연관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온갖 잡다한(또는 같잖은) 게다가 ‘사생아적 논리’라고 불리는 이 뒤엉키고 혼재하는 덩어리에 대한 고민을 떨쳐내지 않고서(배제하거나 비하하거나 무화하지 않고서) 실재성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관점에 이르는 것은 어쩌면 철학사에 낯선 또는 불가사의한 현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마도 벩송을 여러 번 읽으면서 거의 확신했던 것 같다. 이 아페이론으로 다 설명하지 못했던 영혼이 실재성으로 존재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으로 보아 ‘존재’이지만, 벩송은 분명하게 “현존”으로 쓴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존재론의 개념작업으로 보아, 이데아도 존재이며 아페이론도 존재라고 자연스럽게 설명하게 된다. 강의록 본문들에서 존재와 현존을 구분해야 될 때는 꼭 “제3자”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이 제3자인 현존은 존재와 무 사이를 잇는 현실적이고 활동적인 사실들 또는 상태들에서 쓰이는 것이다. 게다가 독일 실존주의에서 쓰이는 실존은 용어상 “현존”과 같음에도 실존이라 함은 인간에 관하여 쓰여지는 것으로 여긴다. 이에 비해 벩송의 현존은 존재와 다르다. 즉 중세의 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도 “현존” 증명이었으며, 추론적 사고가 사물들에 적용하여 재현하는 현상으로서 재현(표상)도 현존이며, 물체의 활동성이 구체화 되면서 현실적인 물체화에서도 현존이다. 이보다 더 다양한 방식에서 현존이란 용어를 라이프니츠가 썼으며, 그의 충족이유율에서는 현존의 상태들 또는 사실들(les faits, 만들어진 것)에 관하여 다양하게 썼다. 벩송은 의식, 기억, 생명을 다루면서 “현존”의 실재성을 다루었지, 존재와 무에서처럼 일반화를 넘어서 추상화된 상징으로서 “존재”로 다루지 않았다. 아마도 선생님은 플라톤의 독서에서 끊임없이 난제로서 제기되었던 아페이론이 벩송에서 의식, 영혼, – 이 용어는 심리학의 “심리”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생명으로 이어지는 내재적 본성에 관한 논의임을 알아채고 죽 연결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과 벩송 사이의 연속은 무엇이 될까?
선생님은 서양 철학사에서 세 가지 전개방식이 있다고 하면서, 우선 플라톤처럼 정지와 운동을 함께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지로부터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벩송처럼 운동으로 상태들과 사실들을 다루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선생님이 이런 관점을, 나로서는, 서양철학사 속에서 찾아냈다는 것은 놀랍고도 굉장한 것이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서양철학사를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이런 놀랍고 멋진 관점은 아마도 들뢰즈가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으나 조금은 느낀 철학자일 것이다. 들뢰즈의 이런 이분법적 분열과 조화로서 철학사에서 “차이”도 “반복”도 개념상으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선생님은 플라톤에서 두 갈래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벩송이라는 이중주의 교향곡 같은 음악을 그 중간의 2천 여 년을 뛰어넘어 연결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서양철학사가 크게 보아 이중주 또는 다중주(다양체)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쪽의 이오이나 사상의 휠레(물질, 운동)와 이탈리아 엘레아의 존재(정지)의 사상이 아테네에 와서 혼융되고 뒤섞이면서 이 둘 사이의 기원과 이유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인격이 제기되면서 참주(황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례의 신화가 아닌 의식의 정체성을 탐구했던 소크라테스가 프쉬케의 “현존” 또는 개인 영혼을 아테네 길거리에서 문제거리로 던졌다가 독배를 마셨지만, 철학사에서는 여전히 문제거리로 남아 있었다. 허무주의를 넘어선다는 과제로 보아 종교가 사상을 지배하면서 중세를 거쳐 가는데, 로비네의 프랑스 철학사를 보면 파리 대학의 학파가 생기기 전부터 수도원 등에서 이중성의 논의 있어 왔고, 또한 르네상스, 계몽기를 거치면서 한쪽으로 쏠리는 듯하지만, 그래도 이원론 이란 이름으로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보다 ‘현존’이 문제거리였다. 19세기에 새로운 실증과학의 소용돌이에서 그리고 수학의 완전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었던 영혼(심리)을 구체적 실증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 시기에 벩송이 태어났고 이런 문제를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재조명하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이런 철학사를 프랑스에서는 상식에 기반 한 아리스토텔레스 개별학문이 양식을 통해서 무너지는 과정이라 한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성립이후에 마지막 남은 것이 의식 활동으로서 영혼에 관한 영혼학(심리학)이었을 것이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철학자는 벩송이다.
철학사의 진행과 확장의 과정에서 선생님은 철학사의 중간을 거의 생략하고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조금 언급하고 바로 벩송으로 넘어갔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소은의 사유과정으로 보고, 논문들과 강의록의 전체를 재구성하였다. 일반 독자로서는 소은 사상의 접근에서 용어든 설명방식이든, 게다가 대화로서 녹음되고 기록된 자료들(데이터)이든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과정을 밟는 것이 좋은지를 알 수 없다. 물론 한번 읽고 두 번째는 순서를 잡아서 읽고, 그리고 사상의 맥락을 잡아서 같은 개념이라도 문맥에 따라 구별해서 읽어나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는 박홍규의 연구와 강의가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자 이정우의 노력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은, 저자가 사상의 순서를 가려내고 배치를 하면서 전집을 다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이면 소은의 사상을 관통하여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독자가 읽는데 어려움은, 소은의 강의록들의 양이 많다는 것뿐만도 아니고, 또한 독자들에게 마주치는 생소한 용어들뿐만도 아니며, 시대 때도 없이 등장하는 희랍어, 게다가 라틴어, 불어, 영어, 독어 등에도 있다. 저자는 독자에게 생길 수밖에 없는 이런 독서의 어려움에서, 등장하는 용어와 문제거리에 알맞는 개념의 설명을 해주고, 인용을 통해 구체적 작품들을 맛보게 한다. 우리는 저자가 소개한 순서에 맞는 강의록들을 앞에서 목차에 따라 소개했다. 철학 관심자나 연구자로서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관심있는 문제를 찾기 위한 독자라면, 그 강의록의 중심논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소 제목의 배열과 연관된 논문들에 대해 저자가 잘 정리하기도 하였고, 중요한 계기가 되는 문장들 선별해 놓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중간 중간에 동양철학적 관심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크게 보아 동양의 기론(氣論)이 아페이론의 논의와 같은 궤를 간다고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저자는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변혁에 관심을 내보이면서 주역(周易)의 변역(變易)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 이쯤에서 존재론과 비존재의 접촉을, 또는 페라스와 아페이론의 혼재를, 나아가 전(前)인격적인과 인격적인 것이 세상사에서 생성되고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이 확장은 두 계열에서 사건들을 만든다고 하면서, 저자는 차후에 이런 온사건(Evenement)과 사건들(les evenements)에 관심으로 사유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저자는 “사건 존재론”이라 이름 붙일 정도로 저술도 있고, 애착을 갖는다. 선생님도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그 뒷이야기는 어쩌면 깊이 있게 관심을 기울였던 초기 제자들(윤구병, 이태수)에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앞의 제자들의 방담 참조].
세계와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만큼이나, 현존하는 인간이 사는 세상사의 문제인 한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자에서보다 현자에서 더 많은 관심을 표현하였다고 여긴다. 소크라테스가 지자보다 현자 쪽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그의 개인 영혼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선생님은 강의에서 존재, 이데아, 에이도스 등의 단어를 더 많이 썼지만, 그래도 내면에서는 영혼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다고 느낀다. 아마도 우리가 선생님의 세상사 관심도 동양철학에서 이원성으로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철학의 유학 부분에서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일반적으로 8항목으로 설명하지만 줄여보면 4가지로 물질, 의식, 도덕, 국가에 관하여 것이고, 둘로 줄여보면 서양에 비추어 보면 개체의 탐구와 사회성의 탐구로 나누어 불 수 있다. 이런 과제들에서 중국의 선진유가 이후로 개체보다 사회성으로 치중되었다. 그리고 한때 신유학이 불교의 도래와 영향이 깊어짐에 따라 자신을 반성하면서 격물치지를 마땅히 해야 한다고 했지만, 중국의 오랜 과정은 사회성으로서 평천하가 중심이었다. 이에 비해 불교의 염처경에서 사유의 머무는 곳에 대해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 네 단계를 말하는데, 이를 과정상으로 보면 신체와 더불어 살아야하는 영혼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벩송은 불교에 대해 알긴 알았지만, 이런 관점의 불교를 알았던 증거는 없지만, 플로티노스에서 비슷한 관점을 볼 수 있다. 벩송에게 매우 깊이 영향을 끼친 플로티노스는 크게 보아 일자에서 세계영혼, 개별영혼, 물질의 4단계를 연속의 과정으로 보고 상향의 길과 하향의 길로 설명을 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영혼론과 벩송의 영혼론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여기는데, 이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아페이론(운동, 지속)으로부터 사유하는 하는 사상가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21세기를 향하는 시점에서 철학이 나아갈 방향으로 세 가지를 말한다. 그 “첫째는 철학에 수학을 상감해 넣는 것이다. 둘째는 ‘생명’을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셋째 문제는 사건의 철학이다.” 사건의 철학은 생성존재론의 여러 형태들을 잇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단계를 열어갈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철학은 플라톤적인 본질주의와 베르그송적인 지속철학을 화해시키는 한 방법일 수 있다고 한다.
벩송은 형이상학이 나아갈 길을 1903년에 서술하면서, 우선 새로운 형이상학은 “안에서(dedans)” 위치하면서 직관과 공감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철학과 과학이 나란히 간다고 하면서, 과학이 경계를 그은 그 부분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확장해 사유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라 한다. 선생님이 논한 페라스와 아페이론이 형상과 흐름으로 분할 분열되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가면서 상호보조를 맞추어 나갈 것이다. 철학사에서 가장 행복한 철학자를 플라톤이라 한다. 왜냐하면 스승으로서 소크라테스와 제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졌다는 것이다. 강의록에 읽다가 보면, 제자들의 입장들도 드러나는데, 페라스의 입장에서선 이태수가 있고, 아페이론의 위상에 선 윤구병도 있다.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과 더불어 시대를 뛰어넘어 아리스토텔레스 계보와 벩송 계보를 함께 엮는 수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속에서도 서양 연구자들에 수입 없이도 수학의 공리와 언어의 논리가 계열로서 발전하는 만큼이나 영혼(의식)과 생명의 학문 계열도 확장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에 관하여 사족 같지만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선생님은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들이 선생님의 저술이 없는 아쉬움으로 녹음한 노력 덕분으로 활짝 열린 지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문턱을 넘느라고 다음세대가 또 동일반복을 했을 것이다. 이제 이질 반복의 터전에서 사건들을 형성한다고 여긴 저자가, 사건의 하나로서, 박홍규 사상도 정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은 사상을 정리하는 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할 때이다. 그 강의록과 원문을 읽는 깊은 탐구와, 다른 영역으로 확장과 적용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논문이 필요할 때이기도 하다. 페라스와 아페이론 사이에 분열 또는 분화의 측면으로 또는 전개와 발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후대들의 몫이다. 게다가 선생님이 플라톤의 정치가편에서 강의했듯이, 이런 사유의 궁극적 목표가 용기와 지혜를 갖는 지도자에 있다는 의미에서, 학습과 연구에 병행하여 활용과 실천의 장이 열리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만큼 소은 박홍규의 사상에 관한 연구가 우리 시대에 사유의 깊이, 표면의 넓이, 미래의 확장과 전망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10:14, 55OKE)
# 덧글 ***
서평을 쓰라고 해서 덜렁 받아들였는데, 나의 수준으로서는 선생님의 작업에 대해 잘 이해하지도 못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저자 이정우의 이해 방식에 대해서도 한번 죽 읽고 평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으로 선생님 사유의 일부를 이해했다고 하지만, 내가 쓴 글에 대해 지금까지 여러 비판을 받아 왔기에 별 할 말이 없었다. 저자가 ‘소은 박홍규론’을 정리하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썼다는 것을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로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다는 것을 느끼면서, 서평을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조각글들을 연결해 보았다.
세상에는 ‘같잖은(같지 않은, 이질적) 이야기’가 널려 있다고 느낀다. 독자로서 사람들은 만일 이런 글에서 같잖은 이야기처럼 조각글들이 누더기라 느끼실 수 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한 사람의 삶을 다 알 수 있는 신은 없다. 그리고 당신도 천년만년 사는 천사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꼭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 시절을 사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이 남긴 그 지층이 지구상에 어디인가 있기를 염원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물이선소이부위(勿以善小而不爲)하고 물이악소이위지(勿以惡小而爲之)하라고 할 것입니다. 지식을 통한 이익으로 사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넓고 깊은 직관의 상호침투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리.
“사는 것이 먼저다”(라틴어 문구, PM 54), “철학하기에 앞서서 살아야만 한다”(벩송이 프랑스어로 쓴 문구이다, PM, 152)” 누구나 산다는 것은 한 평생일 뿐이다. 생명체가 토지 위에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니체가 말한 “토지(지구)에 충실하라(bleibt der Erde treu)”(선생님도 고별강연 중에 이 명구를 인용한 적이 있다)는 표현은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중요한 한 이유율 일 것이다. - 중국 북송시대 시인인 소동파 인간도처 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라 하고, 우리 문화 답사의 이야기로 유명한 유홍준은 인생도처 유상수(人間到處有上手)라 하였다. 세상사나 인간사에서, 삶이 먼저이며 철학이 다음이라 할 때, 삶은 하늘도 공상의 세계의 세계도 아닌 토지 위에서 산다 라는 것이리라. 대륙에서 동쪽의 아름다운 나라, 금수강산 유고수(錦繡江山 有高手)이라 하는 것도 토지 위에서 이다. 기나긴 지구역사에서도 고원들이 있었고, 현재에도 곳곳에 고원이 있다. 고수는 인간만이 아니라 사건들도 포함한다. 아름다운 땅에서 어린이-청소년 교육이 있을 것과, 토지 위에서 4세대가 늙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55OKE, KF, 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