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산천마다 봄이 한창이다. 개나리도 지천으로 피었고 목련도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다. 도봉을 지나고 있다는 친구를 기다리며 역사 안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을 시키고 어묵과 국물 한 컵으로 허허로운 시간을 채운다.
대동여지도에서 '양주의 진산'이라 했다는 불곡산을 탐방할 요량이다. 한적한 양주 역사 앞을 지나는 '평화로(平和路)' 건너 전답과 야트막한 산군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도착한 친구를 태우고 들머리가 있는 양주시청으로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북서쪽에서 뻗어 온 불곡산 줄기의 남동쪽 끝자락에 2011년 이전한 양주시청이 자리한다. 시청 시의회 보건소 어린이집 등 건물들이 번듯하다.
불곡산 들머리는 시청 좌우로 나뉘어져 있지만 시청 뒤쪽에서 하나로 만난다. 시청 좌측으로 돌아 현충탑 쪽 들머리로 향했다. 현충탑은 6.25 참전 등 조국수호와 국토방위에 공헌한 호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2월에 건립했다고 한다. "천지인의 형상, 민·관·군의 희생, 과거·현재·미래의 역사적 전통"의 의미를 원형, 삼각형 사각형의 화강석, 강철, 오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현충탑 앞에 누군가가 헌화한 국화 화분이 쓰러져 있어 바로 세워놓고 우측으로 난 들머리 임도로 올라섰다. 산기슭에 순진한 시골 처녀처럼 참꽃이 군데군데 소담스럽게 피었다.
임도를 따라 500여 미터를 오르면 시청 우측에서 올라오는 주 능선 등산로와 합류한다. 들머리에서 멀지 않은 능선 마루에서 고구려 때 쌓은 제1보루를 만났다. 북쪽의 도락산과 함께 양주 분지의 중앙에 자리한 불곡산의 좌우로 임진강을 건너 남하하는 교통로가 지나고 있어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안내판에 따르면 불곡산 능선을 따라 고구려 보루 아홉 개가 자리하고 있다.
제1보루는 돌로 쌓은 축대의 흔적이 희미하다. 뒤돌아 서면 도봉산과 삼각산이 아파트 군락 뒤로 선명히 보이고 앞쪽엔 불곡산 봉우리 두 개가 익선관처럼 서로 가까이 솟아 있다. 숲의 나무도 끼리끼리 모이는 사람의 속성을 닮았는지 능선 왼쪽은 소나무 오른쪽은 참나무로 나뉘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보루성이라 이름 붙은 널찍한 제2보루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등산로 옆에 불쑥 '참고 견뎌냄'이라는 꽃말의 회양목 군락이 나타났다. 진녹색 작은 잎사귀가 무성한 모습이 헐벗은 참나무 숲과 대조적이다.
정상 턱밑 능선에 서면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과 그 사이로 멀리 잠실의 L사 빌딩도 눈에 들어온다. 암반 능선길을 오르면 제5보루 터가 나오는데, 3,4 보루는 중간에서 갈라져 내린 능선에 위치한다는 설명이다. 제5보루에서는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며 우뚝 솟아 있는 정상 암봉과 툭 터인 사방과 좌측으로 광활하게 펼쳐있는 백석면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주저앉은 능선 건너 상봉이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서서 수락산 불암산 롯데월드타워 도봉산 북한산 홍복산 일영봉 호명산 챌봉 한강봉 앵무봉 은봉산 팔일봉 노아산 등 안내판에 나오는 산과 타워를 하나씩 확인해 본다.
계단과 비탈진 암릉을 올라 상봉으로 향한다. 가파른 암릉 비탈에 '펭귄바위'가 미끄러질듯 말듯 붙어 있다. 불곡산 정상 해발 470미터 상봉이 왼쪽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세운 난간 너머 멀리 모습을 보인다. 바위 틈 사이에 완만한 곡선의 고구마처럼 생긴 '불곡산 상봉'이라 쓰인 표지석이 서있다.
상봉에서 급전직하 절벽에 놓인 계단을 지나고 상투처럼 생긴 바위를 이고 있는 해발 431미터 상투봉에 올라섰다. 지나온 상봉이 적나라하게 천애 절벽을 보여준다.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바람은 차갑기 보다는 오히려 시원하다.
좌우로 밧줄 난간이 쳐진 아찔한 통바위 암릉, 가파른 계단, 밧줄과 사다리가 놓인 절벽, 줄을 엮어 이은 난간 등 임꺽정봉으로 가는 길은 거칠고 험난하다. 깊이 패인 V자 계곡을 지나고 '생쥐 바위'라 이름 붙은 앙증맞은 바위에 잠시 눈길도 준다.
움푹 꺼진 능선 건너편의 임꺽정 봉은 헐벗은 나무가지 사이로 쌓인 낙엽이 드러나 단풍이 든 것처럼 붉다. 임꺽정봉 못 미쳐서 좌측 능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바위 능선을 따라 공기돌바위, 코끼리바위, 악어바위, 삼단바위 등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상봉 임꺽정봉 등과 더불어 불곡산의 백미나 다름없다.
일단의 암벽등반객이 악어바위 아래에서 바위에 박힌 볼트에 연결된 자일에 의지해서 절벽을 오르고 있다. 임꺽정봉 밑에서도 클라이머들이 암벽과 씨름하며 정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과 발을 옮긴다.
특이한 모습의 바위들을 둘러보고 능선을 다시 거슬러 올랐다. 제법 많은 산객들이 오르고 있는 임꺽정봉으로 난 가파르고 긴 암벽을 밧줄과 난간을 잡고 오른다. 임꺽정봉에 올라서니 입과 목이 바짝 마르고 숨은 가쁘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서울산악회' 여성 산우 한 분이 정상의 벼랑 옆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며 뒤따르는 대원을 기다리고 있다.
임꺽정봉에도 상봉, 상투봉과 같은 모양새의 표지석이 놓여있다. 봉우리 아래 유양리에서 태어났다는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의적으로 알려져 있다. 표지석 옆 안내판은 임꺽정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전하는 실존 인물로 명종 때 3년간 황해도를 중심으로 평안 강원 경기 충청까지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감악산에도 임꺽정봉이 있었다. 칠장산 산행 때 들렀던 안성의 칠장사에서도 임꺽정 관련 설화가 눈길을 끌었었다. 당시 관료들의 세금 징수와 수탈은 백성들이 도적을 의적으로 부를만치 극에 달했다는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지당하다.
앞쪽으로 산세가 밋밋해 보이는 도락산을 두고 우측 부흥사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도락산 너머 좌우로 감악산과 소요산이 훤히 보이는 능선 너럭바위에 앉아 배낭을 풀고 허기를 달랜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길을 덮었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는 계곡 주위에 생강나무들은 가지마다 노란 꽃을 피워냈다. 부흥사 뒤 계곡 바위 아래 약사 부처님과 약왕 보살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여름에도 덥지 않고 한겨울 추위도 견딜만 해 보인다.
소담한 대웅전과 산신각이 전부인 부흥사는 지은 지 오래지 않아 보인다. 부부로 보이는 처사님과 보살님이 부흥사 옆 밭을 갈고 있다. 고추와 상추를 심을 요량이란다. 계곡을 따라 얼마간 내려와서 산자락을 휘도는 산길을 따라 5km 남짓 거리의 시청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양봉터 법집 주위를 꿀벌들이 윙윙대며 춤을 춘다. 개울을 두세 곳 건넜다. 울창한 숲길 '작은 산대 쉼터' 근처 벤치에 앉은 중년부부와 딸은 얼굴이 쌍둥이처럼 서로 닮았다. 군 부대 사격장 뒤로 난 길은 희미하다. 가로누운 고목을 림보 동작으로 지난다.
괴물처럼 생긴 바위가 굽어보는 '바위쉼터' 아래를 지나고, 장끼 한 마리가 낮게 날아 오르는 헐벗은 산기슭 위쪽을 가로지르니 어느덧 들머리였던 현충탑에 닿았다. 참꽃 하나를 따서 입에 넣고 씹어 본다. 무미한듯 순박한 맛을 혀가 잊지 않고 기억해 낸다. 시청 뒤쪽으로 휘돌아 시청 우측으로 내려섰다. 날머리 바위 절벽 아래 개나리꽃이 흐드러지다.
그리 높지 않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다양한 볼거리와 얘깃거리를 품은 불곡산은 산객에게 지루해 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별산대놀이, 소놀이굿, 들노래 등 이곳에 전해오는 유산과 의적 임꺽정의 전설과도 같은 얘기에 이는 궁금증을 뒤로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가증스럽고 실망스런 세태에도 '감동 양주'라는 시(市)의 모토처럼 일상 여기저기 '감동'도 적지 않은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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