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일 밤, 뉴욕 패션계는 잔뜩 긴장한 채 워싱턴을 주시했다. 패션계와 밀접한 직물업계 관계자들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낮 워싱턴에서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이 열렸다. 패션계가 주목한 것은 이날 밤 백악관에서 열리는 취임식 무도회였다.
과연 영부인 미셸 오바마는 무엇을 입을 것인가. 1월 초부터 미국 패션 관련 온라인 미디어에서는 미셸 오바마의 무도회 드레스를 놓고 이런저런 추측성 기사들이 흘러나왔다. ‘제이슨 우를 또 입을 거다’ ‘이번에는 프라발 구룽을 입을 것 같다’ ‘행운은 한 번으로 그칠 것이다’…. 미셸 오바마는 1960년대의 재클린 케네디 이후 패션감각이 가장 탁월한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받았고, 당연히 그가 두 번째 취임식에서 누구의 옷을 입느냐는 뉴욕 패션계의 최대 관심이었다.
미셸의 선택은 ‘제이슨 우(Jason Wu)’였다. 퍼스트레이디 미셸은 제이슨 우가 디자인하고 만든 광택이 도는 시폰과 벨벳 소재의 루비색 드레스를 입었다. 이번에도 미셸의 건강한 어깨와 미끈한 팔이 시원하게 드러나는 홀터넥(halterneck) 디자인이었다.
제이슨 우는 2009년에 이어 또다시 2013년 취임식 무도회에서 영광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패션계 일각에서는 취임식 무도회의 주인공은 미셸 오바마가 아니라 제이슨 우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미국 USA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미국 퍼스트레이디가 초선과 재선 축하 무도회에 같은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고 나온 것은 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 이후 처음이다.
미셸의 선택
1982년 대만 태생인 패션디자이너 제이슨 우. 중국 이름 우지강(吳季剛). 패션의 최전선인 뉴욕에서 동양계로 당당하게 톱클래스 반열에 올라선 제이슨 우.
제이슨 우는 1982년 9월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바느질에 재능을 보였다. 다섯 살 때 웨딩숍 쇼윈도에 전시된 드레스를 노트북에 스케치했다. 무역업을 하던 부모는 아들이 손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모는 섬나라 대만에서는 아들이 미래를 펼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제이슨 우는 아홉 살 때인 1991년 부모를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다. 태평양 연안의 밴쿠버는 특히 대만과 홍콩 이민자가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이슨 우는 현재 대만 국적과 캐나다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국 동부와 일본 도쿄, 프랑스에서 중·고교를 다녔다.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도 취미로 인형옷을 만들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는 조소를 배우기도 했다. 제이슨 우는 열여섯 살 때 인형옷 회사를 차렸고, 인형회사에 인형옷을 납품했다.
그가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프랑스에서 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그는 2001년 다시 뉴욕으로 와서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본격적으로 패션공부를 시작했다.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뒤에 유명 디자이너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밑에서 인턴을 했다.
그는 이때 LA, 애틀랜타, 시카고 등의 유명 의상실을 돌아다니며 고객의 기호와 분위기를 파악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시카고의 의상실 이크람에서 그는 디자이너 이크람 골드만을 알게 된다. 이크람 골드만은 제이슨 우가 미래의 퍼스트레이디와 연결되는 데 막후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선 전 미셸 오바마는 골드만을 통해 무명 디자이너의 옷을 1000달러도 안 되는, 원가나 다름없는 가격에 구입했고 이 옷을 입고 ‘바버라 월터스 쇼’에 출연하게 된다.
제이슨 우가 뉴욕 패션계에 데뷔한 것은 2006년 2월이었다. 맨해튼 37번가 웨스트의 작은 스튜디오에 직원 3명을 고용해 회사를 차렸다. 사업 자금은 부모로부터 일부 도움을 받고 자신이 10대 시절부터 인형옷 회사를 운영해 번 돈을 합쳐서 만들었다.
패션계의 신예로 부상
제이슨 우가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미셸 오바마로 인해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셸 오바마는 제이슨 우의 옷을 입고 바버라 월터스 쇼에 출연했다.
대통령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된 직후였다. 제이슨 우는 무작정 미셸의 드레스 스케치 몇 점을 그려 골드만에게 보냈다. 며칠 뒤 골드만에게서 연락이 왔다. 스케치를 아이보리색 드레스로 만들어보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드레스를 만들어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날아갔다. 만에 하나 미셸이 입지 않는다면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트에 기증해버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2009년 1월 21일 취임식 무도회에서 미셸 오바마가 제이슨 우를 선택하면서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미셸은 그가 디자인한 아이보리색 시폰 드레스를 입었다. 미셸 오바마는 내로라하는 패션 디자이너 의상 대신 제이슨 우를 선택한 이유와 관련,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셸은 취임식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보그’의 표지인물로 나왔는데, 그때 입은 자홍색 실크 원피스 역시 제이슨 우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미셸은 같은해 4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유럽 방문 때도 제이슨 우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런던에 나타났고, 그 다음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역시 제이슨 우의 옷을 입고 갔다.
대만의 국민영웅
그는 불과 27세에 스타가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3명이 작업하던 회사는 맨해튼 미드타운의 사무실에 직원 30명의 회사로 커졌다. 그는 2009년 초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전보다 더 중압감을 느낀다.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어떤 트럭운전사가 창문을 열더니 나를 안다고 했다. 패션업계와 관련이 없고, 내가 만든 옷을 살 수 없는 사람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제이슨 우는 대만의 국민영웅이다. 2012년에는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의 부인 저우메이칭(周美靑) 여사가 국경절 행사에서 그의 작품을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됐었다. 제이슨 우는 지난해 고향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고향에서 그는 수만 명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만이 언제나 내 정체성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만을 대표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척 동안이다. 머리도 짧다. 얼핏 보면 기숙학교에서 사고를 쳐 퇴학당한 학생 같다. 외모는 이렇지만 그는 뉴욕 패션계에서 유명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만일 그의 부모가 인형옷 바느질을 좋아하는 아들을 보고 “사내 자식이 무슨 바느질이냐”고 핀잔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이슨 우의 스토리는 앤디 워홀의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 자식이 잘하는 것을 적극 권유하고 장려하는 부모 밑에서 자녀는 날개를 편다는 사실을 제이슨 우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