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jn$aa는 sam*(함께)+√jn$aa(to know)의 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같게 인식하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즉 a1, a2, … 의 경우를 보고 a라고 뭉뚱그려 인식하는 행위라 보면 되겠다. 즉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종이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 글이 적혀 있고 제본이 되어 있는 그 무엇들을 보고 책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개념작용을 일으키는 경우와 같다 하겠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산냐를 문자 그대로 合知라 이해하면 되겠다.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notion)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naming) 작용을 기본적으로 산냐라 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초기경들에서 산냐는 별달리 정의된 말이 없다. 단지 푸르다고 아는(sam*jaanaati) 것, 누르다고 아는 것, 붉다고 아는 것, 희다고 아는 것을 산냐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perception(인식)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인식하는 정도의 영역을 나타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기경에서만 봐도 더 깊은 심적인 영역을 나타내는 술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 용어에 착안하여 요즘 몇몇 서양학자들은 apperception(통각)으로 옮기기도 한다.
역자가 조사한 바로는 초기경장에서만 이 산냐라는 단어는 6800번 이상이 나타난다. 그 정도로 많이 쓰이는 술어이다. 물론 이 중에서 3500번 정도는 모두 오온의 세 번째로서의 산냐로 나타나지만 나머지 경우,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산냐는 주로 수행 중의 경계와 관련되어서 나타난다 할 수 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초기 경에 나타나는 산냐에 대해서는 부록을 참조하기 바란다.
본 경에서도 산냐를 단순히 인식의 차원 정도에서 이해하면 본 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심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마라즙이 산냐의 일반적인 한문 역어인 想으로 옮기지 않고 (현장은 모두 想으로 옮기고 있다) 相으로 옮긴 것은 아주 고심한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본다. 본 경에서 그냥 想 정도로만의 의미로 산냐를 보기에는 더 심오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구마라즙이 산냐를 想이 아닌 相으로 옮긴 점은 정말 그 안목이 수승하다 하겠다.
<주: 그러나 구마라즙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산냐도 相으로 옮기고 니밋따(nimitta, 4장 4번 주해 참조)도 相으로 옮기고 있고 락샤나(laks*an*a, 5장 1번 주해 참조)도 相으로 옮겨서 원어 없이 한문본만 가지고 보면 아주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문권 특히 우리 나라에서 금강경의 제일의 사구게로 꼽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에 나타나는 상은 32가지 대인상 즉 락샤나의 번역어이지 본 경의 키워드인 산냐의 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범어 원문에서는 사구게가 아니다.>
단순히 인식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을 궁글리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마음에 어떤 모양[相]을 굳게 그리고 만들어 가지고 있는 상태를 산냐로 파악한 것이다. 그 마음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름 아닌 이념, 이상, 관념, 고정관념, 경계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사실 초기경들에서도 이런 의미로 산냐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합성어로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다 그렇다.
예를 들면 무색계 사선으로 후대에 인식되고 있는 사처(四處, aayatana)는 모두 이 산냐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즉 공무변처(空無邊處, aakaasaanan$-c-aayatana)는 다른 말로 공무변처 산냐로 나타난다. 허공이 무한하다는 산냐를 수행 중에 만나서 그 경계에 주저 앉아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래서 이 공무변처 산냐는 다음의 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an*an$caayatana)로써 극복하고 식무변처에 주저앉아 생기는 식무변처 산냐는 다시 무소유처(無所有處, aakin$can$n$aayata)로 극복하고 무소유처에 안주해서 생기는 무소유처 산냐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n$n$aa-na-asan$n$-aayatana)로서 극복하고 이 산냐도 산냐 아닌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의 경계는 상수멸(想受滅,san$n$aa-vedayita-nirodha), 즉 산냐와 느낌이 완전히 해소된 경지로써 극복하는 것을 초기경에서는 많이 설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산냐 놀음의 최상은 산냐인 것도 아니고 산냐 아닌 것도 아닌 경지 즉 비상비비상처요, 여기서는 산냐 놀음이 극대화되고 있다.(아래 15번 주해 참조할 것)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러한 산냐 놀음을 완전히 벗어난 경지로서 산냐웨다이따니로다(san$n$aa-vedayita-nirodha) 소위 말하는 상수멸(想受滅)을 설하셔서 이런 외도선에 빠져 있는 수행자들을 제도하신 것이다. 그 외 수꾸마삿짜산냐(sukuma-sacca-san$n$aa), 즉 진리에 대한 미세한 산냐 등 수행에서 나타나는 경지를 묘사한 경우가 허다하다.(부록의 ‘초기경에 나타나는 산냐’를 참조할 것) 문제는 이런 산냐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고 세존 이전의 모든 수행자들이 이 산냐놀음에 빠져서 그 경지가 최상이라 우기고 즐기고 안주하였지만 세존께서는 결연히 그것이 단지 산냐일 뿐임을 철저히 아시고 홀로 길을 찾아나서서 드디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법을 선포하신 것이다. 불교가 불교인 것은 바로 이 산냐에 속지 않고 산냐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본 경에서는 대표적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산냐를 4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한다.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그런데 현장은 여기다가 다시 5가지 산냐를 더 넣어서 9가지 산냐를 제시하고 있는데 현재의 범어본에는 단지 네 가지만 나타나고 있다. 4가지든 9가지든 이 산냐들은 다름 아닌 인도의 제 종교와 사상에서 구경의 경지로 설하고 있거나 아니면 실재로 존재한다고 굳게 집착하고 있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리고 본 경에서 눈여겨 봐두어야 할 점은 이 산냐가 집착(graaha, 그라하)으로 발전하고 이 그라하는 다시 견해(dr*s*ti, 드르슈티, Paali. dit*t*hi, 딧티)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4가지 산냐라는 말과 4가지 그라하라는 말과 4가지 드르슈티라는 말이 차례로 경에서 나타나고 있다.
첫댓글 일향전념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