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눌의 법문 바른수행5
혹은 본질인 이치와 현상인 사물은 서로가 상즉하지 않았다
[이사불즉]해도 옳은 것이며,
왜냐하면 전체 사물 그 자체로 이치[전사지리]이므로 따라서 본질인 이치는 세상 사물의 의지할 대상은 아니며,
그 이치를 객관으로 의지하는 주체인 사물은 대상인 진제와 이치를 숨기지 않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전체의 이치로 이루어진 현상의 사물[전리지사]이므로
진여의 이치는 사물을 대상으로 해서 그것을 상대적으로 의지하는 주체가 아니며,
따라서 사물도 이치가 의지할 따로의 대상이 아닌것이다.
왜냐하면 속제의 사물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사물이 있는 그대로가 진여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이치와 사물이 동시에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 하나의 모습으로 맞닿아 있으며,
[존민일체]
평등성에서 차별상의 은둔과 관계성에서의 상대적인 모습을 나타남이 동시이다.[은현동시]
이는 원각경에서 보안보살의 법문을 천양했던 그 모두가 평등한 이치속의 의미였던 것과 같고 대천경권이 마음밖에 문자를 표시하지 않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를 대상이 실물로서 실제 있다고 여기고 분별하는 마음인 의식로 취향해 감이 있다면 그 지혜는 상대성을 떠난 조작이 없는 천연의 진실을 등질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경지를 얻을 것도 귀의할 곳도 없다고 깡그리 무시한다면 허무단멸의 허망한 마음이 나오리라.
단지 속제의 차별상인 유에서
그 현실적 응용을 구하지 않는다 해도 진실한 법도는 완연하고 평등한 무라고 해도 그 곳에 현실의 사물은 자연히 만족하여
오묘한 근본이념에 환하게 밝으리라.
그렇다면 고요하고 귀의할 바가 있고 편안한 마음은 간단이 없어
상대적인 이치와 사물의 집착을
단박에 초월하여 유와 무 그 어느 쪽에만 있지 않을 것이니,
이야말로 진실하게 귀의하여 지극한 도와 통할수 있다 할 것이다.
ㅡㅡㅡ묘주선원장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