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3회 텃밭시학상 심사평
감정과 실재, 혹은 멜란지(melange)의 시
모든 감정의 저변에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에 의하면, 그리움(desiderium)은 별을 의미하는 시데라(sidera)에서 나왔습니다.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고, 지상을 넘어 천상을 향하는 그것은, 서정시의 근본 기분-현상입니다. 딴은, 사물-초점의 내외와 경계로서 시, 멜란지(melange)의 시에는 서로 다른 색상의 실을 여러 겹 합쳐 꼬아 놓은 주름[紋]이 있습니다. 언어와 감정을 혼합해 직조해 낸 이 마음의 무늬와 결은 얼마나 새롭고 공교로운 것인지요. 서정시의 현은 노래이자 밝은 어둠이며, 현존재입니다. 서정-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느끼며,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문제는 서정시의 새로운 전통과 시선, 말과 삶의 조화, 구상화의 정도 등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논의한 결과, 다수의 투고작 가운데 공미의『노을 시계』와 김정화의『꽃의 실험』을 최종적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먼저, 공미 씨의 시는 인간적 시간과 자아를 본위로 한 말과 삶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말의 안과 밖, 그에 따른 마음과 사물의 관계로 보아 그녀에게 시는한밤중 아득히 넘어가는/ 꽃 여는 소리(「거울 앞」)를 애써 듣는 일입니다. 혼자서 듣는 그 소리는 놀(노을)이 갖는 양가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과 외로움, 기쁨과 슬픔, 존재와 부재 사이에 그녀는 온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초점화와 밀도 있는 구성, 언어의 운용 등은 향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김정화 씨의「애인」외 4편(꽃의 실험, 구름 가족 관계 증명서, 매화, 푸르게 닿는)은 내적인 절실함에 기반한 정서의 깊이와 길의 이미지가 새롭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녀에게 시는 일몰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생명의 탄생에 따른 피로, 뜨거운 불-길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결과 비롯되는하늘빛 말입니다.「애인」은 귀한 손[客]이자, 시인의 다른 명명입니다. 불편한 서정-감정의 이미지가 모호하게 처리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아연 긴장하게 만드는 상황과 심리도 그렇지만, 시의 처음과깊은 못에는 아닌게 아니라,시가 내게로 왔다.하여 그녀만의달빛 휘어진 그 밤과 흰 얼굴, 목소리와 떨림이 있습니다.「꽃의 실험」에서 모던한 서정시의 면모는 자아와 현실의 불협화음이 정중동의 기대 심리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스치는 이 하루의 순간이 영원입니다. 그리고 그(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동(空洞) 심리가 이른 사망 신고로 인한 반(反)감정과 함께 고조되면서, 그리움의 도를 더해가는「구름 가족 관계 증명서」.풍류는 추운 것이라는 말처럼, 바람과 꽃의 대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친연성을 부각시키는「매화」의 경우, 매화의 아름다움과 고절(孤節)한 면모 보다는, 동병상련으로서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으로,「푸르게 닿는」이란 제하의 시는 발상이 새롭고 참신합니다.그물 같은 잎줄기가 닿소리 같다는 도입부에서 시선을 멎게 하는 이 시는 자연과 사물, 사라진 언어(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긍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홀소리에 닿아야 나는 닿소리, 홀로 날 수 있는 홀소리의 의미를 진작에 알고 있는 그녀는, 말과 사물에 새로운 아름다움과 힘을 부여하고 있습니다.풀빛은 잎줄기 놀이/ 노래로 가는 첫 줄은 하나의 묘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나 이미지 전개의 유연성, 감정과 실재의 문제 등은 여전히 넘어야 할 산입니다.
아무쪼록 영예의 수상자에겐 갈채와 작약(雀躍)을, 아쉽게도 선에 들지 못한 분들께는 발심하여 차후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정하해 / 김상환
수상작 애인 외 4편
애인
김정화
눈부신 하얀 배꽃 얼굴로 왔다
바람이 창가에 누운 꽃잎을 만질 때,
산 그림자 바라보던 멀건 눈망울
깊은 못을 말하고 싶었지만,
물속 꽃잎이 떠올라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 피던 애틋한 입김
눈썹과 눈썹 사이 낮달로 왔다
그 떨림, 스치는 손끝
몇 방울 설레며 왔다
다문 입술은 고요를 깨고
애인은 달빛 휘어진 그 밤에 왔다
꽃의 실험
소리마디가 가득한 길턱에서
겨우 하나 받았다
5, 4, 3, 2,
1,
0.5
하얗게 덮어쓰고 앉은 침묵
아름다운 꿈길에 앉아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뽀글 파마 정거장에서 헤맸다
저마다 별로 가려고 몸을 싣고
지긋이 눈 감고 별맞이 기차를 탄다
스치는 이 하루만을 본다
꽃을 여는 길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 버렸다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
하늘과 땅 사이, 꽃 덤불 핀다
그 사람
돌아선 가을은 붉은 길이었네
다시없을 뭉게구름과 함께
와 곱네, 등 뒤에서 말하던 바람
아직, 두 눈에 들일 마음은 적지만
고운 옷 입고 떠나려 하는 이파리
노을에 젖은 산 그 사람 닮았네
아련히 붉게 물던 보고 싶은 그 사람
붉은 물 뒤에 숨겨 둔 슬픔 하나
잊는다 말해 놓고 울어버린 그 사람
매화
바람이 불자 꽃나무가 소리를 지른다
등성이 한 바퀴 돌고 온 자리
그때 겨울 나도, 매화도 추웠다
바람은 치근거리듯 웃고
눈물로 들썩이며 새벽에 안겨 울던
싸늘하던 그 밤 나도, 매화도 추웠다
푸르게 닿는
그물 같은 잎줄기가 닿소리 같다
잎 다섯 달걀꼴은 홀소리이겠지
말마다 힘줄 다 드러낸 나뭇잎
닿다가 홀로 모여서 숭숭 난 구멍
바람이 들어오면 옹크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풋풋한 닿소리
촘촘하게 쌓이는 ㅂ ㄷ ㄱ……
한 칸 한 칸 별빛으로 얼기설기 짜며
저 단단한 심줄 같은 글 바탕 될 결
풀빛은 잎줄기 놀이
노래로 가는 첫 줄
수상 소감
내 빛깔 내 소리가 흐르는 시를 쓰고 싶다
날마다 종이에 끄적이고 토닥토닥 글판을 두들기지만 늘 돌아보는 몇 마디. 내가 쓸 자격이 있나? 시를 알기나 하는가? 더 배우고서 써야 하지 않을까? 난 뭘 쓸 수 있을까? 늘 뭐라도 적어 보는데 글이 될는지 모르겠다.
둘레에서 “이런 시가 좋아요.”라든지 “이 시처럼 써 보세요.” 하면 어느새 눈이 간다. 좋다고 하는 시집을 읽고 나면 ‘좋다고 하는 기성 시인처럼’ 쓰려고 든다. 이런 시를 읽다가, 아뿔싸! 내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쁜 옷을 걸치고 뽐내려는 듯하다.
둘레에서 잘 보아줄 시가 아닌, 내 삶 자리에 있는 하루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마음에 떠다니는 목소리를 고스란히 꺼내자고 다잡는다. 내 빛깔 내 소리가 흐르는 시를 쓰자고 생각한다.
길지 않아도 좋지. 멋이 안 나도 되지. 스스로한테 되묻기를 거듭하면서 내 목소리를 담아내면 어느덧 저절로 노래로 나아가는 글을 쓰는 길이 열릴지 모른다. 그렇게 쓰고 싶다고 바란달까. 자꾸 뭔가 꾸며대거나 붙이는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더라도 그쪽을 쳐다보지 말자고, 나는 내 길로 가자고, 사람들하고 다른 길로 거꾸로 가는구나 싶어도 내 삶과 내 글을 사랑하자고 돌아본다.
열 해나 스무 해 뒤를 떠올린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내 글을 물려받아서 즐길 수 있을까? 맑은 물은 다른 맑은 물을 보태지 않아도 맑은 물이다. 맑은 말을 덧바르지 않아도 찬찬히 내 마음을 담아낼 수 있겠지. 오늘 심는 말씨가 앞으로 열매로 맺을 수 있겠지.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은 시인이다.
삶이 벅찰 때 숨구멍 같은 시가 버팀목이 되어 길을 잃지 않게 잡아 주는 줄을 문득문득 느낍니다. 시집『꽃의 실험』을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텃밭시학》에 고맙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도록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신작시〉
매직아이 외 2편
1
물레방아 따라 돌다가, 하얀 수국 젖가슴에 손을 얹고 더듬다가, 질린 얼굴을 보았다. 볼을 쓰다듬으려다 풀이 움직여 매직아이처럼 이마를 찡그리고 눈을 반쯤 떴다. 아득한 도랑 풀밭을 스캔하는 동안, 푸른 옷을 입은 독사 한 마리가 긴 몸을 구부리고 돌벽 앞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옹달샘 조롱박에 분홍 패랭이꽃 하나 띄워 보냈다. 법당 옆문에서 염불을 듣는 뱀을 보며, 우리는 왜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지 얘기 나누고 싶었다.
2
비파를 뜯고 있는 돌부처 앞에 두 손 모으고 절을 했다. 소원을 빌어 보라지만, 두 손을 모으다가 깜박 잊어버렸다. 저 높은 풍경소리를 들으면 꿈이 떠오를까? 그때 몸을 뚫는 숲은 목소리가 휘청이며 기우뚱했다. 귀가 멀어 버렸을 그 젖은 나뭇가지로 몸을 바꾸었다. 살아서 건너갈 수 있을까 그 바람은,
3
돌이 많고 탑이 많은 연못을 지나 소원문으로 들어갔다. 맞은 개가 절을 하는 동안 눈빛이 젖어있었다. 목줄을 묶인 그 개는, 납작 엎드리고 발등에 턱을 괴고 있었지만, 어딘가 보고 있었다. 나는 영취암에서 주운 불성을 개한테 주었다.
4
아득하였으리라! 세 군데 아니 네 군데, 그 개 얼굴을 빠르게 넘겼다. 돌아앉은 구름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뒷산은 물비린내 올라오고 비가 그치면, 귀뚜라미 노래에 매직아이가 되겠다고 하였다. 초점을 잃은 그 꽃도, 절간 탑을 돌며, 왜 싫어하는 계곡물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온다
아버지가 온다, 금성산 골짜기 구름바다
저녁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온다.
흠흠, 헛기침 두어 번 하고 고샅길 어스름 걸어 오신다
장독대에 떨어진 감잎 주워 들여다보다
민망해하던 아버지
경주 수막새 웃음 닮은 아버지
여느 때처럼 새벽 네 시에 나가서 들 밭일 하느라
해 빠진 줄도 모르고 늦지나 않을지
ㅡ한 해 만이네
삼켰던 말 다 그러모아도 이 하루면 넉넉하다
시름시름 일곱 달 만에 잠든, 책만 보면 벽에 기대 읽던 그 아버지가 가을에 온다
그곳은 구월이지요, 여긴 시월 마지막 날이에요
오늘 모처럼 밥을 잡수시는 얼굴 보겠네요
현관문을 제가 열어 놓을게요
아직도 말보다 기침이 편하면
둘째 셋째 넷째가 하는 이야기
절 받으면서 가만가만 들어도 괜찮아요
떠돌다가
처음에는 뒷문으로 살금살금 나가서
마을을 돌아보고
골목을 느끼면서
햇볕을 듬뿍 쬐고
풀벌레 소리도 들었다
비슷한 때에 살금살금 나가서
같이 뛰놀던 이웃 아이들은
다 집으로 왔는데
한 아이만
돌아오지 않았다
집이 어디였을까
깃들던 자리는 어디였지
내내 집에서만 지냈기에
처음 바깥바람을 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냄새를
찾아내지도
맡지도 못했다
이날 밤
떠돌고 또 떠돌다가
별이 돋은 하늘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별이
하늘에 하나둘 돋으면서
어둡던 길이 달라 보인다
하룻밤 이틀밤 사흘밤
한달밤 두달밤 석달밤
어느새 길에서 지내는 나날이 익숙하고
스스로 길을 느끼고 찾아보기도 한다
발이 닿는 대로 간다
눈이 닿는 대로 본다
한 걸음씩 떠돌고
한 군데씩 돌아본다
■ 김정화(숲하루) → 《문장21》시 등단(2021). 시집『꽃의 실험』, 자연에세이집『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아르코 문학창작(발간)기금 수혜(2022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2023년). 대구시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