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집,
소설가 박완서의 집서재 통창으로 아차산의 밤나무숲이
벌거숭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마당에서 노란 국화 한송이를 꺾었다.
첫눈이 내린 후였고, 12월의 마지막 꽃송이였다.
" 요놈이 여직까지 살아남아 있었네 "
얼마 전까지 백일홍이 빨갛게 피어 있었다고,
살구와 자두와 매화도 있었다고,
1년초 토종꽃들이 차례로 움트면
이곳은 사방천지 꽃대궐이라고,
수선화처럼 여린 몸피의 할머니가 마른 꽃잎처럼 웃었다.
집 안은 빈약한 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쌓여 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백 년도 더 된 장식장,
문갑 위에 사별한 남편의 사진 액자.
그 아래로 정갈한 꽃무늬 이부자리 한 채가 놓인
구리시 아천동 노란 담벼락. '그 여자네 집'
젊을 땐 개성식 한과와 찻잔을 다소곳이 내놓았을,
그 후엔 손주들의 장난감이었던 개다리 소반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앉은 일흔 넷의 박완서.
햇빛이 방금 까 놓은 귤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스며든다.
" 일흔이 넘으니, 나이가 들수록 새처럼 자유로워져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어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도 기분 좋아요,
이만큼 살아냈구나, 싶은게."
소설가로 데뷔하던 34년 전,
마흔 무렵에 그 여자네 집은 얼마나 많은 소리로 북적거렸던가.
식솔들의 밥 냄새가 갈라진 벽 사이에 혼곤히 배어 있었을
부엌 한 켠엔 젊은 박완서가 흑백사진 속에 웃고 있다.
보문동 한옥집 마루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성장한 네 아이들과 자매처럼 뒤엉켜 웃는,
한여름 해바라기 화단 같던 그 여자네 집.
" 그거.....한 89년도 쯤 됐나 봐요,
마흔일곱인가? 맨 왼쪽에 첫째 딸만 결혼했을 거예요.
그 사진보고는 다들 좋다 그래요. 아마 신문사 사진 기자가
마당에 있는 장독대 위에서 찍었을 거예요 "
눈 감고 들어도 '아, 이 여자는 얼굴이 작겠구나' 싶을만큼
박완서의 봄날 새댁 같은 단정한 음성.
그 시절 한옥 마당엔 다들 겨울날 보물단지 처럼
장독대를 쟁여 놓았지만, 지금 아차산 밑 박완서의 집엔
식어버린 바비큐 그릴이 나무 옆에 서 있다.
" 근처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이웃끼리 같이 고기도 굽고 술도 하고 그래요.
근데, 내가 술이 세서 웬만한 사내도 나를 못 당해요.(웃음)"
그래서 냉기가 지독하게 서린 지하 서고에
빈 와인 병들이 책과 동거하고 있었구나.
집 안 곳곳엔 좋은 그림들이 가족처럼 걸려있다.
박수근의 아이 업은 엄마 그림, 권옥연의 괴팍한 여자 그림,
김점선의 노동화 풍의 그림, 그리고 종이를 태워 겹겹이 얼굴을
만들어 낸 정규리의 여백 많은 젊은 그림,
중학생 아이가 쓱쓱 그려 준 좁은 어깨의 '박완서 할머니'
연필 초상화까지.
노란 대문 집으로 들어서기 전, 사진작가 김용호와 나는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전쟁과 역사를 재현하는 '답사형' 작가도 있고,
방대한 자료가 농축된 '도서관형 작가'도 있다.
박완서는 어느 쪽일까?
나는 그녀처럼 부엌의 요리와 거리의 풍속을 제대로 묘사해 내는
작가를 본 일이 없다. 보리고추장 푼 물에 애호박을 넣어 끓인
민어찌개니, 새파란 실파가 동동 뜬 준치국.
분홍빛 국물에 순 서울식으로 담근 오이 소박이,
잘 말린 어란과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굴비, 낙지에 전복,
젓조기, 석이버섯이 들어간 개성식 제육 보쌈.
제육을 썰어 넣은 호박김치찌개...........
궁핍한 시절을 지나왔으나
마음과 범절이 찌들지 않은 것은
참기름 병과 햇장독과 물 좋은 생선 덕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그 여자, 박완서가 차려 낸 책갈피의 음식상은 풍요로웠다.
" 친정이나 시가가 옷이나 집치레는 안 해도 음식 치레는
꼭 했어요. 식탐하고는 다르게 때마다 절기마다
제대로 만들어 먹었어요. "
밖에서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속이 느글거려
집에 오면 된장찌개로 꼭 입가심을 해야 한다고
튼튼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소설 제목에 '집' 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집에는 영혼이 있다고.
박완서의 소설을 만들어 낸 곳이 전쟁터도 도서관도 아닌
일가붙이 모여 지지고 볶던 '집'이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일상, 박완서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과
40년 뒤에 서 있는 내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은
왜 그리도 같고도 왜 그리도 다른가.
철부지 시절 사치같은 첫사랑이 있었고,
그즈음 '삶의 비리'를 선험한 것처럼 서둘러
'비둘기 집' 을 지을 남자와 결혼하고, 정이 들어 잠잠하다가,
폭풍처럼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랑'이 그리운,
마냥 일탈하지도 정주하지도 않는 박완서의 여자들.
삶에서 한 걸음 비껴서 던지는 농담, 바로 그것이 문학이라고.
그러나 나는 일흔네 해 동안 그녀가 청춘에 바치던 그 비정한
스타카토조의 후렴구들을 떠올렸다.
죽을 날을 시름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일흔넷이 좋다지만,
허물어 가는 눈가에 여전히 보얗게 서린 새침떼기 소녀다운
그 생기는 어쩌지 못한다.
"난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격이 똑같아요, 소녀적이나 아줌마나
할머니나........내가 구현하는 여성성........아휴, 난 그런 거
말 못해, 내가 경험한 근세사를 생각해 봐요,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시대가 축척돼 있겠어요,
전후의 궁핍한 시절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근세사는 여성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요. ' 그 남자네 집'에 나온 여자들도
그렇잖아요. 집에선 하숙 치고, 시장에선 좌판 내고,
양놈에게 몸 팔고.....
박정희 산업화 시대에도 값 싸고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한 게
여자들이야, 난 소설에서 양공주가 돼서 식구들 먹여 살리고
훗날 이민 간 춘희 캐릭터에 애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뒤에 춘희의 장광설 같은 푸념이 이어지잖아,
그게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했으니 알아 달라. 이게 아니야.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아 냈다'는 거에 대한 애정이에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를 살아온 여자라는 생명체에
대한 필연을 그리고 싶었어요."
시간의 나이테가 침잠한 야윈 얼굴로, 결혼할 때 말고는
마사지 한 번 못 해 봤다는 박완서는 이제는 분가한 딸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쯤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지구에서 분리되지 않으려고 점점 매달리게
된다고들 하지만, 그녀는 깊숙한 걸음으로 자신의 용기 안에
기거하고 있었다.
"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목욕을 해요.
소설도 아침에 주로 써요. 나는 소설 쓰는 걸 아주 즐겨요.
힘든 건 있죠. 그런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소설은 자기 위안이 되니까, 또 좋아서 써요"
아치울에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한옥이 좋아 작정하고
삼청동에 한옥 구경도 갔더랬다고. 그런데 그렇게 천정으로
서까래도 있고, 조선 여자 비녀 꽂은 머리처럼 대문도 반듯한
' 그 여자네 집'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되어 살고 있을까?
아치울 마당으로 두텁게 가라앉은 겨울 공기가 하늘 높이
이랑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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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보그의 김지수 기자가 예전에 쓴 박완서 선생
인터뷰 글입니다.
첫댓글 박완서님의 "한말씀만 하소서 ~!!"를 마지막으로 읽은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