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22. 서역구법승들의 활약
‘죽음의 길’ 헤치고 불교 발상지 ‘현장학습’
동양불교사상 서역구법승들의 활약이 이룬 공헌과 그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들은 구법의 일념으로 신명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열 명이 가서 한 두 명 밖에 살아오지 못하는 험난하고 머나먼 길을 나섰다. 서역에서 온 포교승들에 의해 후한 이래 여러 대소승 경율론이 번역 소개되어 왔지만 삼장의 완본이 두루 갖추어지지 못한 가운데 미진한 번역문을 통해 난해하고 방대한 교리의 바다를 헤치고 전체 교의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인도에서 새로운 대승경론들이 연이어 나와 유행하고, 이것이 중국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면서 이 새로운 사조의 불교를 이해하는데 자료의 미비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인도 전통 승가제도-계율 익혀와 중국불교 미비점 보완
東晉 법현 14년간 30개국 순방…경론 율전 수집해 전파
최초의 서역구법승인 삼국위(三國魏)의 주사행(朱士行, 203~282)은 〈도행반야경〉을 강독하다가 문구가 간략해 그 의리가 통하지 않아 완본의 범본을 구하기 위해 260년과 282년 2회에 걸쳐 우전(于, 신강성 코탄)에 가서 〈대품반야경〉을 사경해 얻었다.
동진의 법현(法顯, 337?~422?)은 삼장 중에서도 특히 율장이 크게 잔결된 것을 안타까워해 이를 구하고 수학하고자 인도로 출발했다. 당의 삼장법사 현장(玄, 600~664)은 경론의 해석에 여러 이설이 난립해 따라야 할 바를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법여행을 결행했다.
의정(義淨, 635~713)은, 계율의 이해와 해석에 여러 분란이 있고, 승가 내부에 계율을 지키는 풍토가 크게 해이해진 시폐를 통감했다. 그는 인도 전통의 승가 제도와 계율을 현장 학습하고, 이를 정통의 규범으로 삼아 중국불교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사진> 중국 서안 자은사에 조성된 현장스님 동상.
수많은 서역구법승 가운데 법현.현장.의정 3인의 활약과 공훈이 가장 크다. 이하 이 3인을 중심으로 서역구법승의 활약과 그 의의를 간략히 정리하겠다.
법현은 평양군(산서성 임분시) 출신이다. 그는 후진(後秦) 홍시원년(399)에 동학 수십인과 함께 장안을 출발해 실크로드 남로를 통해 인도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 50여세였다. 그는 인도 전역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며 범문을 학습하고, 〈마하승기중율〉、〈살바다율초〉 등의 율전과 여러 경론을 수집했다. 이어 사자국(스리랑카)에 2년간 머물면서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던 〈미사새율〉 〈장아함경〉 〈잡아함경〉과 〈잡장〉 등의 경전을 얻었다. 그는 해로를 통해 의희9년(413) 산동성 청주에 도착했다. 법현은 14년에 걸친 기간 동안 30개국을 순방하면서 견문하고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법현전 (또는 불국기)〉을 지었다.
각지의 불교성지에 관련된 고사와 현지 승원의 여러 모습들을 기록했다. 육로와 해로를 겸한 그의 여행 기록이 온 천하에 알려지면서 이 힘든 여행에 과감히 도전하는 많은 후배들이 배출되었다. 머나먼 이국이었지만 이제 부처님의 나라 인도가 한층 가까이 다가온 셈이 되었다. 그가 불타발다라 등과 함께 번역한 경론은 〈마하승기률〉40권, 〈대반니원경〉6권을 비롯해 총 6부 63권이다. 나머지 경론들은 미처 다 역출하지 못한 채 86세로 강릉에서 입적했다. 그가 가져온 율전은 소승 전체 6부의 율전 가운데 3부에 해당해 율전의 미비를 크게 보완해주었다. 또한 역출된 〈대반니원경〉으로 인해 열반학이 크게 일어났다.
현장은 낙주 후씨현(현 하남성 언사현) 출신이다. 11세부터 낙양과 사천성 성도, 장안 등에서 여러 대덕으로부터 폭넓게 대승 경론을 수학하고 강독했다. 그는 인도에서 〈유가사지론〉을 수학해 당시 중국에서 유행중인 〈섭론(攝論)〉과 〈지론(地論)〉 간에 논란이 되고 있던 문제들을 회통하고자 했다. 현장은 당 태종 정관3년(629년) 육로로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도중에 여러 지역에서 많은 대소승경론을 폭넓게 수학하는 한편 강의도 하고 있다.
인도에서 여러 성지를 순례하고 마침내 나란다사에 와서 계현(戒賢, labhadra)에게 〈유가사지론〉을 비롯해 십여종의 경론을 배우고, 여러 지역의 명사들로부터 경론을 수학했다. 그는 스승 계현의 부탁으로 대중들에게 〈섭대승론〉과 〈유식결택론〉을 강의했고, 유식과 중관의 교의를 회통한 〈회종론〉3천송을 저술해 칭찬을 받았다. 또 하르샤왕의 청을 받아 〈파대승론(破大乘論)〉을 굴복시키기 위해 〈제악견론(制惡見論)〉을 저술했다. 이 두 논서에 대한 토론회가 18일간에 걸쳐 거국적으로 열렸다. 모두들 현장의 논설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대중들로부터 ‘대승천’ ‘해탈천’의 존칭을 얻었다. 그는 하르샤왕의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으며 다시 육로로 귀국길에 올라 657부의 범본을 지니고 정관19년(645) 장안에 도착했다.
성대한 환영을 받은 현장은 대대적인 번역사업의 지원을 받아 이후 입적하기까지 19년 동안 총 75부 1335권의 경론을 번역하고, 구법 여정을 기술한 〈대당서역기〉를 저술했다. 또 동인도 동자왕의 부탁으로 〈노자〉를 범문으로 번역했고, 〈기신론〉을 읽고 싶어 하는 인도승들을 위해 이를 범문으로 번역해 인도에 전했다.
현장 공로로 인도불교 결실 대부분 중국에 전해져 수용
의정 인도서 12년간 수학…현장 譯經서 빠진 경론 번역
그는 중국에 전해져 있지 않거나 완본이 아닌 단편으로만 전해진 수많은 경론들의 신본과 완본을 처음 중국에 전했다. 그가 이룬 역경의 성과는 그 방대한 양에서 뿐 아니라 구역의 오류를 교정하고, 수많은 용어를 적합하게 안립했으며, 문의를 쉽게 소통케 하는 등 질적인 면에서도 큰 공훈을 거두었다. 그리해 역경사상 소위 ‘신역(新譯)’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결실은 그의 교학 전반에 걸친 연찬과 범문에 대한 정심한 조예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중국불교는 현장의 활약에 의해 7세기 중엽까지 이루어진 인도불교의 결실 대부분이 중국에 전해지고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인도 나란다사 불학의 5과인 인명.아비달마.계율.중관.유가를 각각 고루 망라해 번역 소개했다. 특히 난해한 유식의 교의가 완본 〈유가사지론〉100권을 비롯한 ‘일본십지(一本十支)’의 유식 경론들이 번역 소개됨으로부터 널리 이해될 수 있었으며,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자 원측과 규기 등이 많은 주소(注疏)를 펴내면서 유식 법상종이 성립되었다. 〈대반야경〉600권의 완역 또한 실로 거대한 작업으로서 반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는 지리지(地理志)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당시 각 지역의 인문지리를 전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정은 제주(齊州, 산동 제남) 출신으로 14세에 출가해 먼저 율학을 수학하고, 이어 여러 경론을 폭넓게 연찬했다. 그는 35세 되던 671년 광주에서 페르시아 상인의 무역선을 타고 해로로 여행길에 올라 673년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인도 각지를 순례하고 나란다사에 와서 12년 동안 불학 전반을 수학했다. 그는 범본 약 400부 50여만송을 지니고 다시 해로를 통해 693년(1차 귀국은 689년) 광주에, 695년 낙양에 도착해 측천무후의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천축으로 가는 구도승의 모습을 그린 상상도.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는 측천무후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66세에서 77세(711년)에 이르기까지 노령의 12년 동안 63부 280권(〈정원록〉)을 번역했다. 그는 삼장 중에서도 특히 율전의 연찬과 교육에 힘썼고, 스스로 계율을 엄수해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여러 율전을 집중적으로 역출했고, 당시 유가학 편향의 나란다 학풍에 따라 〈금강반야논송〉, 〈집량론〉, 〈관총상논송〉, 〈성유식보생론〉 등 현장의 번역에 빠진 유가 경론을 다수 번역해 보완했다. 또한 당시 밀교가 뜨고 있던 분위기에 맞추어 〈금광명경〉을 중역하고, 다라니경을 역출했으며, 그의 〈구법고승전〉에서 다라니장을 개략한 글을 기술해 밀교의 원류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의정의 위대한 공훈은 〈남해기귀내법전〉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저술한데서 더욱 빛이 난다. 전자는 인도와 남해 여러 나라 불교교단의 현황과 계율, 사원의 운영과 생활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그 학술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승단과 승원의 옛 가풍을 회복하고 계승해 가는데 중요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후자는 당 태종15년(641)부터 측천무후 시기까지 약 40여년간 인도와 남해에 구법여행한 61인의 승려를 전기 형식으로 간략히 소개한 책이다. 의정이 직접 만난 이들이 다수이고 전문(傳聞)으로 알게 된 이들도 있다. 이 중에는 신라 출신 승려 7인과 현재의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러시아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부터 온 승려들도 들어 있어 아시아 불교문화권 전지역에서 구법여행이 널리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서 모두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위 3인을 비롯한 서역구법승들의 활약과 성과가 지니는 의의는, 새로 번역 소개된 경론이 갖는 가치에서 만이 아니라 중국.중앙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이 이들의 활약과 여행기 등의 저술에 의해 교류와 상호 인지가 이루어지면서 아시아 불교공동체로서의 동질성을 불교인들에게 심어주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보여준 구법의 열정과 끊임없이 배우며 연찬하고 정진하는 모습은 후대 불자들에게 항상 귀감이 되고, 나태함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박 건 주 / 전남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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