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상 탄(船上歎) - 박인로- 민근홍 언어마을
[1] 늘고 병든 몸을 주사(舟師)로 보내실새 늙고 병든 몸을 수군으로 보내시므로
을사(乙巳) 삼하(三夏)애 진동영 나려오니 선조 38년 을사년 여름에 부산진에 내려오니
관방중지(關防重地)예 병이 깁다 안자실랴. 국경의 요새지에서 병이 깊다고 앉아만 있겠는가?
일장검(一長劍) 비기 차고 병선(兵船)에 구테 올나 한자루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구태여 올라서
여기진목(勵氣瞋目)하야 대마도을 구어보니 기운을 떨치며 눈을 부릅뜨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 조친 황운(黃雲)은 원근에 사혀 잇고 바람을 따라 흐르는 누런 구름은 멀고 가까우 곳에 쌓여 있고
아득한 창파(창파)는 긴 하늘과 한 빗칠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구나.
[2] 선상(船上)에 배회하며 고금(古今)을 사억(思憶)하고 배 위를 이리저리 거닐며 옛날과 오늘을 생각하며
어리미친 회포(懷抱)애 헌원씨(軒轅氏)를 애다노라 어리석은 생각에 헌원씨(배를 처음 만든 황제)를 원망하노라
대양(大洋)이 망망(茫茫)하야 천지예 둘려시니 큰 바다가 넓고 아득하여 천지에 둘러 있으니
진실로 배 아니면 풍파(風波) 만리 밧긔, 어내 사이(四夷) 엿볼넌고. 진실로 배가 없었더라면 풍파가 많은 만 리 밖의 사방에서 어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엿볼 수 있겠는가?
무삼 일 하려 하야 배 못기를 비롯한고? 무슨 일 하려 해서 배 만들기를 시작하였던가?
만세천추(萬世千秋)에 가업슨 큰 폐(弊) 되야, 길고 긴 세월에 끝없는 큰 폐단이 되어
보천지하(普天之下)애 만민원(萬民怨) 길우나다. 온 천하의 만 백성의 원한을 키우고 있구나
어즈버 깨다라니 진시황의 타시로다. 아, 깨달으니 (왜적의 침입은) 진시황의 탓이로다.
배 비록 잇다 하나 왜(倭)를 아니 삼기던들 비록 배가 있었다고 해도 왜적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로 뷘 배 졀로 나올넌가 일본 대마도로부터 빈 배가 저절로 나왔겠는가?
뉘 말을 미더 듯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그대도록 드려다가 진시황은 누구의 말을 믿어 듣고서, 동남동녀를 그렇게까지 들여다가
해중(海中) 모든 셤에 난당적(難當賊)을 기쳐 두고 바다 가운데 있는 모든 섬에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들을 남겨두고
통분(痛憤)한 수욕(羞辱)이 화하(華夏)애 다 밋나다. 그 분통한 수치와 모욕이 중국에까지 미치게 하였는가?
장생(長生) 불사약(不死藥)을 얼매나 어더 내여 장생불사한다는 약을 얼마나 얻어 내어
만리장성 놉히 사고 몃 만년을 사도떤고, 만리장성을 높이 쌓고 몇 만 년이나 살았던가?
남대로 죽어가니 유익한 줄 모라로다. 남들처럼 똑같이 죽어가니, 동남동녀를 보낸 일이 유익한 일인지 모르겠다.
어즈버 생각하니 서불(徐市) 등(等)이 이심(已甚)하다. 아, 돌이켜 생각하니 서불의 무리들이 매우 지나친 일을 하였다.
인신(人臣)이 되야셔 망명(亡命)도 하는 것가 진시황의 신하가 된 몸으로 망명도주를 한 것인가?
신선을 못 보거든 수이나 도라오면, 신선을 만나 불로초를 얻는 일을 못 하였거든 얼른 돌아왔더라면,
주사(酒師) 이 시럼은 전혀 업게 삼길럿다. (일본 해도에 섬나라 오랑캐의 씨가 퍼지지 않았을 것이며) 오늘날 수군인 나의 이 근심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으리라.
두어라, 기왕불구(旣往不咎)라 일너 무엇 하로소니 그만 두어라, 이미 지난 일을 탓할 것이 못 되니,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쇽졀업슨 시비(是非)를 후리쳐 더뎌 두쟈. 공연한 시비를 내던져 두자
잠사각오(潛思覺悟)하니 내 뜻도 고집(固執)고야.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하여 깨달으니 내 뜻도 고집스럽구나.
황제 작주거(黃帝作舟車)는 왼 줄도 모라로다. 황제가 배와 수레를 만든 것이 꼭 잘못한 것만은 아니다.
장한(張翰) 강동(江東)애 추풍(秋風)을 만나신들, 저 진나라때 북으로 벼슬살이를 갔다가 가을 바람에 사향심이 일어나 강동으로 돌아간 장한이 가을 바람을 만났어도
편주(扁舟) 곳 아니 타면, 천청해활(天淸海闊)하다. 만일 작은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하늘이 맑고 바다가 넓다고 할지라도
어내 흥이 졀로 나며, 삼공(三公)도 아니 밧골, 어떤 즐거움이 저절로 일어나며,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꾸지 않을
제일강산(第一江山)애, 부평(浮萍) 갓흔 어부생애(漁夫生涯)을, 경치좋은 강산에 개구리밥풀처럼 물에 떠다니는 어부의 생활은
일엽주(一葉舟) 아니면, 어듸 부쳐 단힐난고? 한조각 작은 배가 아니었다면 어디에 의지하여 다닐 것인가?
일언 닐 보건든, 배 삼긴 제도(制度)야 이런 일을 보면, 배를 만든 제도야
지묘(至妙)한 덧하다마는, 엇디한 우리 물은 지극히 묘하지만, 어찌하여 우리들은
나는 듯한 판옥선(板屋船)을 주야의 빗기 타고 나는 듯한 판옥선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
임풍영월(臨風永月)호대 흥(興)이 전혀 업난게오? 풍월을 읊되 흥이 전혀 없는 것인가?
석일(昔日) 주중(舟中)에는 배반(杯盤)이 낭자터니, 옛날 소동파가 적벽강 위에 띄운 배에는 술상이 어지럽게 흩어졌더니
금일(今日) 주중에는 대검장창(大劍長창) 뿐이로다. 오늘 우리가 탄 배 가운데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다.
한 가지 배언마는 가진 배 다라니, 같은 배이건만 가진 바가 다르니
기간(其間) 우락(憂樂)이 서로 갓지 못하도다. 그 흘러간 시대만큼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못하도다.
시시(時時)로 멀이 드러 북신(北辰)을 바라보며, 가끔 머리를 들어 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며
상시노루(傷時老淚)를 천일방(天一方)의 디이나다 시대를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편에 떨어뜨린다.
오동방(吾東方) 문물(文物)이 한당송(漢唐宋)에 디랴마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찬란한 문물을 자랑하던 한나라와 당나라와 송나라애 뒤지겠냐마는
국운이 불행하야 해추흉모(海醜兇謀)애 만고수(萬古羞)을 안고 이셔, 나라의 우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빠져 만고에 두고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고 있어
백분(백분)에 한 가지도 못 시셔 바려거든 백분의 일이라도 못 씻어 버렸기에
이 몸이 무상(無狀)한들 신자(臣子)ㅣ 되야 이셔다가, 이 몸이 변변하지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궁달(窮達)이 길이 달라 몬 뫼압고 늘거신들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고 늙어간들
우국단심(憂國丹心)이야 어내 각(刻)애 이즐넌고? 나라를 걱정하며 임금을 향한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때라고 잊겠는가?
강개(慷慨) 계운 장기(壯氣)는 노당익장(老當益壯)하다마는 나라와 세상 일을 근심하고 분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 장한 기운은 늙으면서 더욱 씩씩하다마는
됴고마는 이 몸이 병중에 드러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설분신원(雪憤伸寃)이 어려올 듯 하건마는 분함을 씻고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기가 어려울 듯 하다.
그러나 사제갈(死諸葛)도 생중달(生仲達)을 멀리 좃고 그러나 죽은 제갈공명도 산 중달을 멀리 쫓았고
발 업슨 손빈(孫빈)도 방연(龐涓)을 잡아거든 발이 없는 손빈도 발이 성한 방연을 잡았는데
하믈며 이 몸은 수족(手足)이 가자 잇고 명맥(命脈)이 이어시니,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성하고 목숨이 붙어 있으니
서절구투(鼠竊狗偸)을 저그나 저흘소냐 쥐나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이나 두려워하겠는가?
비선(飛船)에 달려드러 선봉(先鋒)을 거치면,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들어 선봉을 휘몰아치면
구시월(九十月) 상풍(霜風)에 낙엽가치 헤치리라. 구시월 상풍에 낙엽지듯 해치우리라.
칠종칠금(七縱七擒)을 우린들 못할 것가. 제갈공명이 맹획을 마음대로 놓았다가 잡은 일을 우리라고 못할 리가 있겠는가?
[3] 준피도이(蠢彼島夷)들아 수이 걸항(乞降) 하야스라. 벌레처럼 꾸물거리는 저 섬나라 오랑캐야, 얼른 항복하여 용서를 빌려무나.
항자불살(降者不殺)이니 너를 구태 섬멸하랴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나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조리 다 죽이겠느냐?
오왕(吾王) 성덕(聖德)이 욕병생(欲竝生)하시니라 우리 임금의 거룩한 덕이 너희와 같이 잘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니라.
태평천하애 요순 군민(君民) 되야 이셔,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 시대와 같은 화평한 군민이 되어서
일월광화(日月光華)는 조득조(朝得朝)하얏거든 광명한 해와 달의 빛이 아침이요 또다시 아침인 태평성대가 계속되면
전선(戰船) 타던 우리 몸도 어주(漁舟)에 창만(唱晩)하고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 몸도 고기잡이 배로 바꿔 타서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
추월춘풍(秋月春風)에 놉히 베고 누어 이셔 가을 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성대(聖代) 해불양파(海不揚波)를 다시 보려 하노라. 성군치하의 태평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노계집>-
[작품 해설]
‘선상탄’은 ‘태평사’와 함께 가사 문학사상 몇 안 되는 전쟁 가사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선조 38년(1605), 박인로가 통주사로 부산에 가서 왜적의 침입을 막고 있을 때 지은 전쟁가사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이지만, 전쟁의 아픔과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은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직접 전란에 참여한 작자가 왜적의 침입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뼈져리게 되새기며, 왜적에 대한 근심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 놀이배를 타고 즐겼으면 하는 뜻과 우국 충정의 의지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배의 유래와 무인다운 기개, 그리고 왜적의 항복으로 하루빨리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원하는 내용도 아울러 표현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가사가 현실을 관념적으로 다룬 데 반해, 이 작품은 전쟁의 시련에 처한 민족 전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사가 개인적 서정이나 사상의 표출만이 아니라 집단적 의지의 표현에도 적합한 양식임을 실증하고 있다.
표현상 한문투의 수식이 많고 중국의 고사와 한시구를 그대로 인용할 뿐 아니라, 직서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결점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쟁 문학이 일반적으로 범하기 쉬운 속된 감정에 흐르지 않고 적을 위압할 만한 무사의 투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작가가 타고 있는 배를 중심 소재로 내세워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눈여겨 볼 만하다.
[요점정리]
■ 갈래 : 조선후기 가사, 전쟁 가사 ■ 연대 : 선조 38년(1605년). 노계 45세 때 ■ 율격 : 3(4).4조 4음보 연속체 ■ 문체 : 가사체, 운문체 ■ 표현 : 인용법, 대구법, 은유법 ■ 구성(짜임) [1]기 → 작자가 전선(戰船) 위에서 적진을 바라보는 정경 [2]서 → 선상에서의 회포와 우국지정 (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것을 배 때문이라 하여 배를 만든 헌원 씨를 원망함. 흥취가 있었던 옛날의 배와 칼과 창밖에 없는 지금의 배의 비교. 해추 흉모에 대한 적개심과 우국 단심 왜구를 추풍 낙엽같이 무찌르겠다는 무인의 기개) [3]결 → 태평성대가 돌아오기를 기원함 ■ 주제 : 우국지정(憂國之情)과 태평성대 기원 ■ 의의 : ‘태평사(太平詞)’와 함께 전쟁가사의 대표작. 감상에 흐르지 않고 민족의 정기와 무인의 기개를 읊었다. ■ 기타 : 표현상 예스러운 한자 성어와 고사가 지나치게 많다. 왜적에 대한 적개심은 그럴 만하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나타나는 점이 흠이다. ■ 출전 : <노계집(蘆溪集)>
[참고]
▣ ‘선상탄’의 창작 배경
‘선상탄’이 창작된 시기인 1605년은 우리 민족이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란인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로서, 악화된 대일 감정이 지속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반일과 극일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고, 또한 정세아(鄭世雅) 휘하의 의병으로 또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일본에 대항, 항전에 직접 참여했던 노계의 기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시적 재능을 지닌 노계가 전란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에 다시 통주사로 나라 수비의 임무를 맡게 됨에 따라 반일과 극일의 정서, 나아가 우리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 애호의 정서를 뚜렷이 의경화한 의론지향의 시가인 ‘선상탄’을 지은 것은 매우 시의(時宜) 적절한 시가 창작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작품의 창작 배경은 조선 후기의 군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과 굴욕적 침략을 현실적으로 견딘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이런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 작품 해설 '선상탄'은 '태평사'와 함께 가사 문학사상 몇 안 되는 전쟁 가사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이지만, 전쟁의 아픔과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은 때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직접 전란에 참여한 작자가 왜적의 침입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싸움배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아 부산에 부임하여 지은 것으로, 왜적에 대한 근심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 놀이배를 타고 즐겼으면 하는 뜻과 우국 충정의 의지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가사가 현실을 관념적으로 다룬 데 반해, 이 작품은 전쟁의 시련에 처한 민족 전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사가 개인적 서정이나 사상의 표출만이 아니라 집단적 의지의 표현에도 적합한 양식임을 실증하고 있다. 임진란이 발발한 해에서 1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은 가시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뒤를 이어 화친(和親)을 맺고자 교섭이 잦았던 때이다. 노계 박인로가 이 때에 진동영을 부방(赴防)했으니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 작품에 투영해 보면 어주(魚舟)에 창만(唱晩)하고 성대(聖代)를 누리고 싶다는 작자의 소회(所懷)에 십분 공감이 간다. 표현상 한문투의 수식이 많고 직서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결점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쟁 문학이 일반적으로 범하기 쉬운 속된 감정에 흐르지 않고 적을 위압할 만한 무사의 투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작가가 타고 있는 배를 중심 소재로 내세워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 심화 학습 자료
ㅁ '선상탄'의 구성
'선상탄'은 내용을 기준으로 삼을 때,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노계가 왕명으로 통주사가 되어 배 위에 올라 대마도를 굽어보는 모양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勵氣瞋目?야 본다'는 데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선상탄의 기본 정서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단락에서는 배를 맨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헌원씨와 왜국에 사람이 살게끔 함으로써 호전적인 족속을 만들어 놓은 진시황 및 그 사신이었던 서불(徐市)을 탓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침략의 주체, 도구의 근원에 대한 원망을 통하여 반일의 정서를 뚜렷이 한 단락이다. 셋째 단락에서는 배의 유용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였던 과거와 그렇지 못한 현재의 상황을 대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넷째 단락에서는 비록 젊은 몸은 아니지만 우국충정으로 왜적의 무리가 무찌를 수 있다는 노계 자신의 기개와 기백을 토로하고 있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왜인들이 항복하여 태평스러운 시대가 오면 고깃배를 타고 즐기는 생활을 영위하겠다는 기원을 노래하고 있다.
ㅁ '선상탄'의 창작 배경
'선상탄'이 창작된 시기인 1605년은 우리 민족이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란인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로서, 악화된 대일 감정이 지속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반일(反日)과 극일(克日)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고, 또한 정세아(鄭世雅) 휘하의 의병으로 또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일본에 대항, 항전에 직접 참여했던 노계의 기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시적 재능을 지닌 노계가 전란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에 다시 통주사로 나라 수비의 임무를 맡게 됨에 따라 반일과 극일의 정서, 나아가 우리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 애호의 정서를 뚜렷이 의경화한 의론 지향의 시가인 '선상탄'을 지은 것은 매우 시의(時宜) 적절한 시가 창작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작품의 창작 배경은 조선 후기의 군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과 굴욕적 침략을 현실적으로 견딘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이런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 지은이 :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조선 시대 무신.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임진왜란 때에는 수군에 종군하였고, 3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에 이르렀으나, 후에 벼슬을 사직하고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안빈낙도하는 도학사상, 우국지정이 넘치는 충효 사상, 산수 명승을 즐기는 자연애 사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송강과 함께 가사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며, 가사 7편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와 ‘오륜가’ 등 시조 72수가 <노계집(蘆溪集)>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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