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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무익한 일에서 떠나자/렘 2:9-13
9. 그러므로 내가 여전히 너희와 다투고 너희 후손과도 다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찌어다 심히 떨찌어다 두려워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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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성홍모 목사(영주교회)
한 주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보면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망한 꿈을 꾸고, 인생을 정말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두 번 사는 인생도 아닌데, 왜 그렇게 그의 생애를 아끼지 아니하고 허비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똑똑하고 총명하고, 출세 가도를 달리던 이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급변하는 이 사회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리고 또 하나의 현대인인 우리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분명히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을 보시면서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현대 지성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다 부평초 같고, 부나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진탕 먹고 놀고 화려하게 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물이 서서히 떨어지고, 자기가 살아가는 마을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물이 떨어지고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얼마나 불안한 일입니까? 어서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다" 소리치면서 누군가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분명히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발자국을 따라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땅에 새겨진 발자국을 자세히 보았는데 처음에는 발자국이 한 사람의 것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두 사람의 발자국이 되고 이제는 세 사람의 자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발자국을 다른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인 줄 알고서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날은 어두워졌지만,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북쪽 하늘에 북극성이 정말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방향이 마을이 있는 쪽이라고 힘을 다하여 그의 갈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갈 길을 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서 높은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땅에 새겨진 발자국만 따르지 말고 밤하늘을 비취는 영원한 목표를 따라야 합니다.
어떤 분은 현대인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자살 행위를 범하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현대인의 자살 행위는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을 외면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고, 자신이 창조주이며, 자기의 실력, 자기의 지혜,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자기가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조금 해놓은 업적에 만족하고, 성취감에 빠져 있을 때 자기의 밑바닥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파놓은 업적이라는 웅덩이를 보니 그 웅덩이 밑이 터저서 물을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웅덩이이었습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현대문명은 생수의 근원이 아닌 고인 물이나 받아놓을 수 있는 썩은 문화입니다. 그것도 새는 웅덩이여서 황폐한 영혼으로, 자멸하고 마는 정신 사회, 현대인이 그렇게 애써 모은 물질이라고 해도 그를 파멸로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겨우 팠다는 것이 터진 웅덩이여서 물을 담아놓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례미야 당시 유대인들이 범한 죄악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심각하게 보시는 두 가지의 죄악이었습니다. 한 가지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구원과 은총을 생수에 비유하시고 있습니다.
시원한 물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넓게 펼쳐진 바다는 물론이고 산 속을 흐르는 계곡의 물이라도 좋습니다.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아왔습니다. 큰 강을 끼고 인류의 문명을 발생하였습니다. 물은 곧 인간의 생명입니다. 물이란 화학적으로 보면 비교적 단순한 물질입니다. 수소와 산소의 공유 화합물인데 순수한 상태에서는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고 맛도 없는 투명한 액체로 이 단순한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은 인간을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물"을 가지고 아주 귀중한 개념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물은 물인데 단순한 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유지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2:3에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게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물은 생수가 솟아나는 곳인데, 여기서는 생명을 살려주는 구원의 우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생수를 길어오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 "물"을 생명에 비유하기도 하며 말씀을 나타내기 위해 비유하기도 합니다. 사55:1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목마른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영적인 기갈에 들은 사람입니다. 그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하시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외치셨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서 이른 바와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현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웅덩이 파고 고여진 물을 마시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기의 실력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의 지혜, 자기의 경험, 자기의 소유들, 자기의 명예가 그렇습니다. 이것 가지고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남은 것은 실망과 좌절, 허무한 탄식-비탄인 것입니다.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수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저수지를 만들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하여 웅덩이를 파고 석회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면 조금만 틈 사이로 물이 다 새어나가고 물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자 이러한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래 섬겨야 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전념했지만, 되돌아보니 남는 것이라고는 허무함이요, 좌절과 실망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참으로 두텁기만 합니다. 바울은 골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골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했습니다. 세간의 유명한 교도소를 탈출한 도둑이 잡혔는데, 그분을 면밀히 연구해보아야 합니다. 사회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신학자들이 합동으로 연구해서 그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상승작용 합니다. 차라리 없을 때에는 그냥 분수대로 있는 대로 살게 됩니다. 얼마간의 재산을 모으면 더 가지려고 합니다. 욕심을 끝없이 부풀어오르기만 합니다. 점점 욕심은 한없습니다.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도 모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줄도 모릅니다. 남의 눈총과 비난과 두렵게 여기지 않고 어리석은 부자처럼 날마다 자기의 창고에 모아들이기만 하였습니다. 어느 듯 돈과 명예의 노예가 되고, 볼품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해석하면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범죄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투시고 있습니다. 과거 선조들과 다투시던 하나님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투셨고, 앞으로 후세들과도 또 다투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쟁론하시고 있습니다.
"다툰다"는 말은 법정에서 심문한다는 말로 법적인 용어입니다. 피고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고 원고는 예례미야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죄악을 가지고 지금 따져 묻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근동국가들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맺은 조약이나 주군과 봉주가 맺은 충성 서약을 파기하였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형벌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잘못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에 증거 자료를 가지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깃딤의 섬이나 게달에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자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족속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의 해석에 따르면 본문의 깃딤이라는 섬은 오늘의 키프로스 섬을 말한다고 합니다. 구약 외경인 마카비1서에는 이 섬이 마케도냐의 영토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터어키의 영토로 그리이스와 영토 분쟁이 그치지 않는 섬입니다. 게달이라는 족속은 팔레스틴 동쪽의 사막에 거주하는 아랍의 한 부족을 말합니다.
(렘2:10-11)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이 같은 일의 유무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 "무익한 것"이라는 말은 우회적으로 바알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여러 나라에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이 믿어온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신봉한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죄악을 지금 이스라엘이 범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근동국가들은 고대로부터 자기 민족이 섬기던 신들을 바꾸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참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일관되게 섬기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무익한 것과 바꾸고 있었습니다. 무익한 것은 곧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출20:3-6)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지난 7월 4일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 근처에 있는 오학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던 단군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인근 세 곳의 초등학교에서 단군 상의 목을 잘려지는 같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언론에서는 이것을 "단군 괴담"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원혼끼리 치고 받는다는 진짜 괴담처럼 단군 괴담은 우리 사회를 종교 논쟁으로 몰아가고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민족 정신을 회복하고 통일을 기원한다는 취지에서 여러 학교에 단군 동상을 세워주고 있었고 이를 두고 기독교 단체들과 마찰을 빚어오고 있었던 시기에 훼손사건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단체들이 단군상 건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화적인 인물을 동상으로 만들어 이세 교육의 현장인 초등학교 등지에 건립한다는 것은 비교육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종교를 비롯하여 단군을 믿는 종파가 국내에 무려 7개 종파에 이르는데 종교 시설물을 공공 학교에 설치한다는 것은 위헌이라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이를 볼 때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물론이고 두 번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놓고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고, 편협하다고 질타하는 소리가 팽배한 것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면 단군신화를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고려 말기의 승려였던 일연이라는 사람으로 그가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지배층은 몽골의 침략을 겪은 뒤에 외세에 맞서 온 백성을 단합하고 통합시킬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상징적인 실체로 단군 신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해석이나 견해는 일부 재야의 학자들에게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해석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이나 종교 집단이 단군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은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할 때마다 단군신화를 들먹였습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가운데 단군릉을 발굴하였다고 하면서 상고사를 재해석하고 그들의 정권이 마치 단군 조선을 이어가는 것처럼 강조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4공화국 당시 서울 사직공원 안에 단군성전을 짓겠다고 하다가 여론에 밀려 무산된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전국적인 기독교회의 반발에 물러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전국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 단군상을 건립하고 있는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는 기 수련 단체인 단학선원을 모태로 한 단체인데, 기(氣)수련단체가 종교단체로 탈바꿈하고 있는 과정이기에 우리는 경계하고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운동 연합회라고 하다가, 슬그머니 종교 단체로 탈바꿈하여 사회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서울에 46곳, 경기도에 81 곳, 전국적으로 366곳의 학교와 공원 등지에 단군상을 설치했다고 하며, 하나에 390만원이 드는 동상을 내년까지 3,600기를 건립한다고 말하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그냥 학교나 공원에 주어서 다른 시설물이나 장학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운다든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운다든지 하는 것은 좋습니다. 학생들에게 산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무시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일본사학자들이 왜곡 변질시킨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단군상을 건립함으로 국론이 하나되고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세워진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회가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렘2:12)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라고 하신 것은 이 백성의 행위가 참으로 악하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조차도 그런 방탕하고 부정한 일을 바로 보지 못할 정도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 자세히 번역한 것을 보면 "하늘아, 이것을 보고 너도 놀라고 떨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려라 나 주의 말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도 기막혀서 하늘도 땅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알이라는 신은 어떠한 신입니까? 이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믿었고 특별히 베니게 지방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주로 믿는 신이었습니다. 바알이라고 함은 "주인 혹은 소유자"라는 뜻인데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주신으로 섬김을 받은 남성의 신이었습니다. 토지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이며 농경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이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옮긴데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잘 살아야 하겠기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바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풍요를 가져다주고, 잘 살게 한다는 말에 누구나 그에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알을 살리기 위하여 아주 음란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번영과 화려함, 음란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종교였으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 것입니까?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번영과 명예욕으로 꽉 들어찼습니다.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었으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부패공화국, 뇌물 공무원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들어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세기로 나아가면서 아직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부패지수가 너무나 높습니다. 개혁의지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개혁 프로그램이 실종되었습니다. 아직도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벌어들인 것만이 내 것이지, 공돈으로 생긴 것은 자기나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땀을 흘려 내가 벌어야 내 것입니다. 돈의 가치를 아는 만큼만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관리 능력이 있어야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이란 기회입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돈은 은사입니다. 돈은 사명입니다. 많이 소유하였으면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세대에 부한 사람으로 그치지 말고 저 세계를 위하여 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39:6-7에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39:6-7)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헛된 일에 분요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씀하신 것처럼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익한 일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바알을 버리라는 말씀이었지만, 오늘의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헛된 일에 분요하던 자리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터진 웅덩이에 물이 고이기를 바라지 말고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안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 분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머니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아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기에 좋습니다. 세상에 아내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세상에 가장 볼품없는 나를 그래도 지아비 남편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왜 그렇게 좋습니까? 세상에 누구도할 수 없는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아직도 무익한 일에 매달려 있습니까? 그 무익한 일은 곧 우상 숭배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세요., 우리 교회 깊숙이 들어오세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셔들여야만 합니다. 말씀 안에 굳건하게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