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김학중목사/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막 10:51)
일본 메이지대학교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2009)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첫 번째 힘이 ‘욕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욕망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주장하며,
현대인은 ‘스스로 만들어낸 열망에 춤추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바로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의 냉철한 이성조차 사실상 욕망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안 돼!’라고 말하지만, 몸은 이미 욕망을 향해 달립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 듯,
때로는 뻔히 위험한 줄 알면서도 욕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뛰어듭니다.
그래서 경제가 아무리 불황이라도 소비자의 욕망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기업은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욕망을 파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욕망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올라섭니다.
예를 들어 TV 홈쇼핑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TV 홈쇼핑을 보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물품에 대하여,
TV 홈쇼핑을 한참 본 후에는 ‘꼭 필요하다. 반드시 사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처럼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욕망을 심어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애플사의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듣기보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진정 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한글성경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마가복음 10:32-52절에는
‘원한다’ 또는 ‘구한다’, 즉 인간의 욕망에 관한 표현이 무려 6번이나 등장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진정 소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1. 탐욕은 마음의 귀를 닫는다.
영생을 얻기 원하는 부자 그리고 보상을 원하는 베드로와 대화를 마치신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세 번째 설명하셨습니다.
그것도 이전의 두 번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생생하게 자신이 당할 고난을 설명하셨습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마가복음 10:33-34).
하지만 제자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니, 이전보다 세력다툼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아끼시던 3제자들,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나머지 9제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베드로의 보상을 요구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제일 높은 자리를 약속해주시지 않자,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잽싸게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두 제자는 “예수님의 다음 자리들, 즉 넘버 2와 3의 자리를
저희가 모두 차지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즉 야고보와 요한은 같은 편이었던 베드로조차 밀어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가장 아끼시던 제자들마저 ‘높은 자리의 영광’에만 집착하자,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마가복음 10:38).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원칙적인 대답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든 말든, 그건 내가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넘버 2와 3의 자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얻게 될 것이다.’
결국 야고보와 요한도 ‘높은 자리’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엄청났습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나머지 9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은 온통 싸움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의 귀’가 닫힌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양쪽 귀는 멀쩡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귀’가 닫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조차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그것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듣고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반복하여 외쳐도,
제자들은 마치 사오정처럼 엉뚱한 말만 내뱉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가는귀가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청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이 제자들의 마음의 귀를 완전히 틀어막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분쟁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각자 자신들의 귀를 틀어막은 채, 자신들의 원하는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귀들은 멀쩡하지만, 마음의 귀들이 모두 닫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요구하며 고함을 지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말이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 부모자녀 사이, 형제자매 사이라도,
일단 서로를 향한 마음의 귀가 닫히면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들의 일터와 교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다툼과 분쟁도
사실상 우리들의 마음의 귀가 닫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오정처럼 딴소리 하는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기가 조금 불편할 뿐,
마음만 넓게 가지면 상대방의 엉뚱한 대답조차 애교로 넘길 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의 귀가 완전히 닫히면,
웃어넘길 수준의 해프닝이 아닌 비극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울부짖는 고통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귀가 닫히면, 우리는 매우 잔인한 동물로 타락하게 됩니다.
최근 한 20대 여성을 횟감처럼 잔인하게 난도질한
오원춘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지난 1월 16일에 확정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오 씨의 귀에는 피해자의 절규가 들리지 않았을까요?
들렸겠지요. 분명히 그리고 생생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 씨의 마음의 귀가 철저히 닫혔기에,
피해자의 피를 토하는 목소리는 전혀 오 씨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보통사람이었다면 단 한 순간도 견디지 못했을 비명을,
오 씨는 매우 담담하게 들으며 태연하게 범행을 저지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자들도 얼마나 잔인합니까?
당시 예수님께서는 ‘나 죽는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당신은 죽든 말든, 내가 차지할 자리나 확실하게 말씀하시죠’라며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이어폰으로 MP3를 크게 듣는 사람들이 주변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듯,
탐욕이 우리들의 마음의 귀를 틀어막고 굉음을 내는 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의 귀를 틀어막고 있는 탐욕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 후에야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2. 열정은 마음의 눈을 열어준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던 길 가에,
시각장애인 거지 ‘바디매오’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예수님과 함께 몰려가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사렛의 예수가 여기에 왔대!’
‘뭐, 나사렛의 예수님이라고?!’
이 때부터 바디매오는 정신 없이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가복음 10:47).
예수님께서 어느 방향에 계신지는 몰랐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심하게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감히 너처럼 천한 것이 예수님을 찾아!
안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이 안 들리는데, 더 시끄럽게 하지 말고 썩 물러가!’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럴수록 더 큰소리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가복음 10:48).
예수님께서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이 시각장애인 거지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 (마가복음 10:4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입고 있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바디매오는 사람들로부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원자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3년을 붙어 다녔던 제자들조차 해보지 못한 고백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직 바디매오만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마 바디매오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께서 숱한 장애인들을 고쳐주시고,
온갖 귀신과 질병을 다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만나면 자신도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바디매오는 더 열심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구원자’라는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비록 바디매오의 두 눈은 시력을 잃었지만, 마음의 눈은 활짝 열린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의 눈이 열렸다는 것은 두 번째 특징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바디매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예수님에게 나아갔습니다.
손을 이끌어 준 사람도, 길을 인도해준 사람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즉시,
자기 혼자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어느 방향에 계신 줄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스스로 찾아 갔겠습니까?
바로 바디매오의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그의 마음의 눈을 활짝 연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시각장애인이 바디매오가 아니라,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흔히 ‘사업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업 아이템으로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즉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서,
사업가들은 새로운 사업의 소재를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최근 중국의 대기오염이 말할 수 없이 심각해지자,
드디어 ‘캔 공기’가 출시되었습니다.
지난 1월 30일,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중국 자원재활용유한공사의 회장인 천광뱌오(45)씨가
최근 ‘캔 공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는 청정지역에서 모은 공기를 캔에 담아 1캔당 약 800~900원에 파는데,
이 캔에 담긴 공기는 보통 음료수처럼 마개를 딴 뒤 입으로 마시거나,
입구에 코를 대고 흡입하면 된다고 합니다.
캔 공기라니,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약초 전문가들은 잡초더미에서도 진귀한 약초를 골라내고,
골동품 수집가들은 켜켜이 먼지가 쌓인 고물 쓰레기 속에서도
가치 있는 옛 보물을 찾아냅니다.
도대체 보통 사람들의 눈과 이런 전문가들의 눈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아무리 사물에 대한 해박한 전문지식이 있어도,
열정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열정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열정만큼, 그리고 그 열정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정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우리는 잘못된 것에 눈을 뜨게 됩니다.
작년(2012)에 ‘우유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 중독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
최근까지도 프로포폴 중독 문제는 우리사회의 고민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로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상상하기도 힘든 숫자의 사람들이 프로포폴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미 프로포폴에 중독되어 수억 원의 재산도 잃고, 가족과 친지도 잃고,
건강과 생명까지 잃은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프로포폴 투약이 이토록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커진 데에는,
이 약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알면서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불법투약을 자행한 비양심적인 의사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이 의사들의 눈에는 환자들이 위로와 치료가 필요한 불쌍한 생명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줄 돈주머니로밖에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돈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열정을 예수님에게 집중시켜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모든 열정을 집중시킬 때,
우리는 참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꿈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3. 가장 필요한 것을 선택하라.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앞으로 오자,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가복음 10:51).
그러자 바디매오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51).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의 대답이 참 특이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0:52).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어도,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받았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은
마가복음에서는 단 두 명뿐입니다.
한 사람은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12년 동안 자궁출혈을 앓던 여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오늘 말씀의 바디매오입니다.
결국 이것은 바디매오가 단순히 눈만 뜬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변화는 바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52).
여기서 우리는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한’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가라”고 하셨지만,
바디매오는 오히려 시력을 찾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시력만 되찾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구걸하며 살았기에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 인맥도 없었을 텐데,
눈을 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과거에는 시각장애인 거지였다면,
그 이후에는 눈 뜬 거지로 바뀌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참 구원의 길, 진정한 생명의 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을 발견하기 원했습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렵고 극도로 살기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아우성을 치게 됩니다.
일자리만 얻을 수 있다면, 한 푼이라도 버는 길이 있다면,
물 불 가리지 않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 입니다.
따지고 보면 온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쏟아 부으시는 것이 대수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아무리 많은 복을 내려주셔도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설사 변화가 있더라도 단지 좀 더 잘 먹고, 잘 입는 것으로 끝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의 삶에 대박을 터뜨려주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쏟아 부어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더 잘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돈 자체가, 명예 자체가, 권력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탐욕이 기도의 목표와 내용을 결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졌으니까 나도 가져야 한다는 논리도 안 됩니다.
무조건 남들보다 위에 올라서겠다는 욕심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현재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하여,
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를 파악하십시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시력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건강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직장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배우자나 파트너가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더 높은 직책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여러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원리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