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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윗 왕보다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통해, 자서전적 신앙고백서를 쓴, 심복순 권사님은, 결혼한 이듬해인, 1934년부터 호두과자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호두과자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이렇게 산 사람도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책을 통해서 말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전 정명여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귀하게 자랐지만, 열 아홉에 결혼한 남편은, 한량이었고, 천안에서 이름난 제빵기술자였습니다. 남편은, 밀가루와 설탕만 주면, 못 만드는 게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호두과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남편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천안의 명문, 호두과자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남편의 바람기와 아들의 보증으로 인해, 재산을 몽땅 잃었고, 둘째 아들의 죽음을 겪는 가운데, 여느 사람 같았으면,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냐?”라며, 여러 번, 신앙을 떠났겠지만, 오히려, 그 시련 속에서, 믿음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권사님은, 자신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제과 사업이 번창할수록,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 빵 뿐 아니라, 생명의 빵을 공급하는 복음 사역자로도 쓰임 받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한 기도의 응답으로, 자신의 사업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위해, 여러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합니다. 시 62: 5을 보시면,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라고 했으며, 시 42: 5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리전트 칼리지의 명예교수인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을 주의하십시오.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에 대해 배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선을 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리에 서서 으쓱대며,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신 분의 곁에 선 것임을 잊어버린 겁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라고 합니다. 한 수도원 원장이 보잘것없는 아이 하나를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시기하며 따졌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아이들에게 과제를 냈습니다. 새 한 마리씩을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몰래, 해 질 때까지, 새를 죽여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해 질녘이 되자,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만큼은, 새를 산채로 가져왔습니다. 그 아이의 말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 하셔서 찾아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원장이 아이들에게, “이래서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한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대면하여 계십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놀랍게 축복받은, 오벧에돔의 모습을 살핌으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고 합니다. 지식없는 자의 열심은, 실패를 가져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자 생활을 할 때, 오랫동안 블레셋에 거주했습니다. 그는 추종자들과 블레셋에 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블레셋의 풍습과 규례에 젖게 되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과 가깝게 지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생활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다윗의 블레셋에서의 삶은, 그로 하여금, 본문에서 중요한 실수를 하게 합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벧세메스로 보내는 사건이 삼상 6장에 기록되었는데, 여기 8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라고 합니다. 블레셋은, 신을 포함한 모든 운송에 있어서,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민 4: 15을 보시면, 하나님은,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라면서, 고핫 자손이 메라고 했습니다. 또, 출 25: 14 – 15을 보시면,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라고 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모든 것을 잊은 채, 법궤를 옮기는 것에만 흥분되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리 기쁘고, 흥분되어도, 말씀에 따라, 검토를 하고 실천해야지, 여기서 벗어난다면, 그 열심에 대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긍휼을 베푸실 때는, 한없이 베푸시지만, 그 분의 말씀에서 벗어남에 대해서는, 냉정합니다. 그 냉정은, 북극의 심해보다도 더 차갑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셨지만,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른, 열심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7: 22 – 23을 보시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본문 앞의 8절을 보시면,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고 하는, 이렇게 좋고 감격스러운 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의 대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역동적인 예배가 진행되며, 언약궤가 예루살렘을 향해 오고 있는 가운데, 수레를 몰던 “웃사”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슬픔과 분노로 끝을 맺습니다. 궤가 전복된 것이 아니라, 흔들리기만 했는데, 일반인의 신분으로,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댄 것은, 그의 충성으로도 볼 수 있으나, 말씀을 모름으로 인하여, 자신을 이탈한 행위입니다. 이로 인해, 웃사가 죽자,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이는, 그의 얼굴이 붉어지도록, 온 몸에 핏발이 서도록, 분노하는 것이며, 자신의 잘못을 그제서야 깨닫고, 자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기대하며, 기뻐하던 다윗과 모든 사람들의 열심과 헌신 속에, 하나님은 찬물을 끼얹었던 겁니다. 그 이유가, 법궤 운반에 대한, 율법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들 하지만, 정작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법궤는, 구별된 자가 메고 가야 함을, 수 3: 6; 6: 12; 대상 15: 14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가 끈 것은, 편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편리가 원인”이었습니다. 민 4: 15에서, 법궤는 아무렇게나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운반법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기에, 절대적으로, 소가 끌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0: 2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웃사의 잘못은, 기쁨에 들뜬 가운데, 율법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고, 다윗은, 율법을 잊은 것이 최대의 잘못이었습니다. 법궤에는 고리가 달려 있고, 그 고리에 채를 꿰어서, 고핫 자손만이 나를 수 있었습니다. 법궤운반이 땀 흘리며, 어깨가 아프더라도, 메어서 운반해야 합니다. 그랬기에, 시내산에서 가나안까지 40년간 어깨에 메고 나르는 가운데, 요단강이 갈라졌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힘들다고 요령 피워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안에도, 이러한 “웃사의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은, 피와 땀과 눈물로 받들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하는 가운데, 깊어지는 것이지, 편리에 의해서는, 성장하지도, 깊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교회까지도 해를 끼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16: 24; 막 8: 34을 비롯하여, 눅 9: 23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이 힘들어도 예배를 드려야 하며, 힘들어도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떤 분은, 목사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그 말은, “나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합니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를 위해서 중보하라고 하셨지, 그를 위해서, 충성하고, 그를 위해서 믿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그 순간은, 그 누구를 위해서 서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독대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바빠도 전도하고, 봉사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만 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 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고 합니다. 오벧에돔은, 오직,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분노도 했지만, 두려워했습니다. “두렵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입니다. 여기에는, “경외하다, 존경하다, 무서워하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대하면서, 본문의 사건을, 과거 속의 일순간적 사건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 롬 14: 12에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삶을 직고하는 그 날이 있고, 하나님은 그 직고한 사실을, 판단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가운데, 정성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웃사의 사건이 있자, 언약궤는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지 않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갑니다. 그를 “가드사람”이라 함으로, 블레셋의 5대 성읍 중의 하나인 “가드”를 말하기도 하지만, 웃사의 사건 이후로는, 궤를 수레에 실었다고 하지 않고, 메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핫 자손인 오벧에돔에게 맡겨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드”는 블레셋이 아니라, 레위사람인 고핫 자손에게 할당된 “가드림몬”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을 보면, 법궤로 인해, 웃사가 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법궤를 모시겠습니까? 자칫하면, 여러분의 집에도, 법궤로 인한 화가 임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왕의 어명이라 해도, 선뜻 나서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오벧에돔은 순종함으로, 법궤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법궤를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거절하는 법궤를, 믿음으로, 순종으로,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이러한 오벧에돔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신앙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 없이,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내”라는 자양분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믿음이, 내 앞에 뚝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기다리며, 고통 속에서 훈련받고, 매달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우시고, 이끄시고, 일으켜 주시며,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기쁘고, 좋고, 이익이 되는 것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피하거나, 눈감거나, 벗어 버리는 성도가 된다면, 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영원토록 은혜와 축복 주변에서, 서성이게 되며, 피해다니는 성도가 될 겁니다. 오벧에돔처럼 모두가 포기하고 외면하는, 법궤를 겸손히 모시는 용기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시간, 건강, 물질 모든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전도와, 기도와, 봉사와, 헌신과, 충성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이 시대의 오벧에돔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충성하는 자에게 복이 임합니다.
모두가 회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맞이한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은 통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복을 주셨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머무는 석달동안, 그가 얼마나 잘 지켰던지, 언약궤를 맞이한 것과 언약궤를 지키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복은, 소문난 복이었습니다. 그를 아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복이었습니다. 삼하 6: 12을 보시면,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라며, 보고합니다.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만 했지만, 삼하에서는, 어떤 사람이 왕께 아뢸 정도로, 소문난 놀라운 복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복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소유의 복입니다. 물질과 재산의 복입니다. 여기서, “소유”란, 가축이나 논밭의 소산을 말합니다. 즉, 농사도 잘되고, 가축도 잘되어 번창했다는 말입니다. 언약궤가 있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자신의 열심만 내세웠던 웃사에게는, “베레스의 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충성한 오벧에돔에게는, “축복의 궤”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을 지키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대상 16: 4 – 5을 보시면,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아삽은 우두머리요 그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라고 합니다. 오벧에돔은 성가대로 직분을 받았습니다. 또, 38절을 보시면, “오벧에돔과 그의 형제 육십팔 명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를 문지기로 삼았고”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문지기는, “성전을 지키는 자”입니다. 셋째, 후손이 복을 받았습니다. 대상 26: 4 – 8을 보시면, 오벧에돔의 아들은 8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 중에서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가 나오고, 큰 용사 및 능력있는 자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오벧에돔의 후손이 62명이라고 합니다. 오벧에돔은, 언약궤를 맞이하고, 충성함으로, 후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번성하되, 다 능력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시 112: 1 – 2을 보시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복은, 하나님이 베푸셔야 합니다. 시 127: 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파수꾼이 없어서,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업,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 버지니아 주에서 농사를 짓던, “존 영”이라는 흑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얻어, 겨우, 농사를 짓는 형편이었지만, 신앙만큼은 남달랐습니다. 농사를 짓다가도, 시간이 나면,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집 안에 화재가 나기도 했고, 온 가족이 전염병에 걸려서, 고생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그는 가훈을, “우리 집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로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가훈을, 자녀들에게 늘 강조하다시피 했습니다. “우리 집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 집의 뿌리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존을, 마을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존의 신앙을 보면서, “그렇게 신앙을 가질 바에는, 차라리 책을 읽고 공부하라”고 했고, “자녀가 너무 많기에, 분명히 그들 중 몇은, 죽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14명의 자녀가 모두 무탈하게 성장해서, 각자의 꿈을 펼쳤습니다. 자녀들 중, 일부는, 코넬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일부는, 음악가와 의사,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비웃으며 했던 말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4명의 자녀들 중, 어느 하나도, 인생의 실패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판단, 우리의 경험을 모두 초월합니다.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선택할 것은, 좋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나와 우리 가정의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는 겁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맞이함으로, 또, 맡은 직분에 충성함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본문의 오벧에돔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충성함으로, 그와 같이, 우리의 가정과 모든 소유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