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바다로 유명한 충남 서산은 봄이 되면 바다가 아닌 꽃으로 더 유명해진다. 봄 여행은 자연스럽게 꽃길을 따라다니는 여정이다. 봄바람에 살며시 더해지는 꽃향기에 추운 겨울동안 얼어있던 마음은 열리고 우리의 가슴은 또 다시 설레인다. 아름다운 계절, 봄이 찾아왔구나!
봄 서산의 주인공은 노란 수선화다. 일제 시대 건축가옥인 유기방 가옥 주변에 넓은 수선화 밭이 있는데, 이곳이 SNS를 타고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 것이다. 수선화는 봄의 신호이자, 고귀한 자태의 꽃이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존심, 고결이다. 12월부터 개화하지만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가 수선화의 절정이다. 꽃이 늘 그렇듯이 봄이 끝나면 수선화 또한 화려함을 잃어버리지만, 수선화는 3~4월만큼은 고결한 자존심을 맘껏 뽐낸다.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수선화는 다름 아닌 나르키소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나르키소스의 또 다른 이름, 수선화
서산 유기방 가옥은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된 전통가옥으로 1919년 건립됐다. 송림이 우거진 얕은 산을 배경으로 마을의 가장 안쪽에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북으로 'ㅡ' 자형의 안채와 서측의 행랑채, 동측에는 안채와의 사잇담에 근래에 지은 주택이 안마당을 이루고 있다. 안채와 우측으로 'L' 자형의 사랑채와 행랑채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원래 안채 앞에 중문채가 있었던 것을 1988년 헐어내고 현재와 같이 누각형 대문체로 만들었다. 평상시에는 한옥 민박과 체험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지만 봄의 계절만큼은 수선화가 주연이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면 정 중앙에 고즈넉한 한옥이 자리하며 그 주변으로 노란 수선화 꽃이 한폭의 그림처럼 장관을 이룬다. 여기저기서 관람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1년에 한번뿐인 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기기 위한 카메라 셔터소리가 이어진다.
3월중순~4월중순이 되면 유기방 가옥에 멋진 수선화가 피어난다
100년이 넘은 전통가옥, 유기방가옥
슬픔은 꽃에게도 들키지 말아라
"깊은 슬픔에 잠긴 내 영혼
난 꽃들에게 내 아픔을 숨기고 싶네
인생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내 슬픔을 알게 되면 꽃들도 울테니까"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OST 중-
쿠바의 노장 밴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은 내가 가장 애정하는 음악 중 하나다. 쿠바는 가보지 않았지만, 내가 쿠바를 간다면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때문일 정도다. 1927년 출생인 이브라힘 페레르의 짙고 호소력있는 목소리는 언제나 나의 폐부 깊숙히에 숨어있던 감정을 들춰낸다. 이 음악은 기쁨이자 슬픔의 표현이었다.
30대 초반, 직장을 그만두고 동남아시아에서 작은 여행자카페를 시작했었다. 영업 노하우는 커녕 음식 레시피도 몰랐지만 젊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모든 것이 서툴러도 음악 만큼은 신중했다. 난 카페에서 늘 이 음악을 틀었다. 동남아시아지만 하루종일 쿠바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식당이었다. 몇몇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음식 보다 이 음악을 듣기 위해 오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노래 가사가 이렇게 슬픈 내용이었다는 사실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됐다. 지금도 난 이 음악을 들을때면 텅 빈 카페에 앉아 창 밖 풍경을 홀로 바라보던 그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노란 수선화 물결 속에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노래 소리에 화답했다.
'깊은 슬픔에 잠긴 내 영혼, 난 꽃들에게 내 아픔을 들키지 않으련다'
한 견공이 봄 향기에 취해있다
1년에 한번만 볼 수 있는 이 풍경. 이 아름다움은 4월말이 되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 체험은 4월말까지 운영되지만 4월 중순이 되면 수선화는 조금씩 잎을 떨어트린다. 봄이 아쉬운 이유는 아름다움이 금방 사라져버린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절이랄까. 꽃은 봄에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안타깝게도 그 순간은 너무나 짧다. 우리들의 인생과 꼭 닮아있다. 청춘의 시절은 아름답지만 금새 사라져버린다. 나이가 들수록 한창 피어나는 꽃보다는 시들어 떨어져버리는 꽃잎에 더욱 눈길이 가는 건, 그 시절이 일장춘몽과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선화 꽃밭은 천천히 걸어도 한시간이면 충분하다. 여기저기서 수선화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봄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계절인가보다. 이참에 노래가사를 바꿔 부른다.
'꽃은 깊은 슬픔 또한 사라지게 만드네'
한옥의 아름다움
나무로 만든 작은 현판에 '류기방'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개인정보가 예민한 요즘 시대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걸린 현판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왠지 반가운 마음이다.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한옥. 우리 전통 가옥은 이렇듯 크던 작던 마당이 중심에 있고 마당을 둘레로 툇마루가 있는 한옥집이었다. 한옥이 좋은 건 계절의 변화를 바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마당에 심어진 매화나무 새순을 보고 봄을 느끼고, 축축한 흙을 보며 여름의 장마를 실감했다. 요즘의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계절의 풍경이다.
툇마루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봄의 숨결을 느껴봤다. 난 지금 가장 아름다운 봄의 한 가운데에 있다.
유기방 가옥 입구
이름이 적힌 현판이 정겹다
한옥 툇마루에 앉으면 계절의 변화를 금새 감지할 수 있다
담벼락에 찾아온 봄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