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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마8:1-17. 기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권능
오늘 말씀은 3가지 기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갈리리 사역 초기때 있었던 기적입니다. 언뜻 보면 5장에서 1절에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했는데 오늘 8장에서는 1절에 산에서 내려오시니 하고 되어 있어 7장에서 이어지는 사건이라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4:23-25의 천국복음전하시며 치유를 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어 그때의 일들을 모아서 기록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은 첫째 기적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든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1-17절에 3가지 기적에 나오고 있습니다. 1-4절은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5-13절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것, 그리고 14-15절은 베드로의 장모를 그리고 귀신들림, 모든 병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2가지로 8:-9:에 9가지 기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 하나는 치유기적이고 둘째는 자연기적으로, 그 하나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되심을 의미하고 후자는 자연의 주되심을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오늘 덧입히시기를 축복합니다.
1절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모습. 5장 1절에는 산에 올라가 앉으시는 예수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미가 있겠지요, 마태제자가 이렇게 배열한데에는,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하늘나라 진리를 선포하심이었습니다. 내려오신 것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제입니다. 하늘에서 인간의 땅으로 오신 것을 비하라고 합니다.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땅에 그곳도 왕궁이 아니라 짐승이 머무는 우리속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했습니다. ‘허다한 무리’‘오클로이 폴로이’ 직역을 하면 ‘수많은 군중’인데 이단어는 호기심이나 병고침, 혹은 어떤 도움이나 유익을 얻기 위해 따라 다니는 무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다니는 교회안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 예수의 제자만 있습니까? 모두다 그리스도의 제자 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복을 얻기 위해 병을 고치기 위해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혹은 종교로 교회를 나오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따라 다니던 무리는 먼 훗날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함성을 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반열에 설수 있어야 합니다.
2절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는데 ‘카이 이두’가 맨 앞에 나오고 있는데 번역을 한다면 ‘그리고 보라’ ‘한 나병 환자가 그에게 절하고 말하였다’입니다. 이 나병환자에 대해 살펴보면 이들은 일반인들과 함께 살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성밖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을 보게 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사람들과 부딪치지 아니하도록 외쳐야 했습니다.(레13:44)건강한 사람이 나병환자를 만질 수 없고 인사하는 것조차 불법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을 만지면 부정하게 되고 저주를 불러 오기때문입니다.
회당이나 성전출입도 금지되어 있었고 부정과 부끄러움, 그리고 죄인의 모형으로 간주되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문둥병자는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 주님 앞에 제일먼저 나와서 절하고 간청을 드립니다. 자신의 민족의 규례를 어기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 왔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시는 것일까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을 얻으려면 그분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험이 있다고 해도 열정을 가지고 사모하며 찾아야 합니다.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잠8:17)
다시 2절에서 문둥병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둥병자는 민중속으로 들어 올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하여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합니다. 그 규례를 어길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민5:2,3)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죽을 각오로 예수를 찾아오십니까? 죽을 각오의 열정을 가지고 주 앞에 헌신을 하십니까? 열정이 식어지면 형식만 남고 모양만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 하라구요(계3:15)
문둥병자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랍비여 즉 선생이라고 하지 않고 ‘주여’‘퀴리에’ 일반적인 의미는 ‘주인’이지만 종교적인 의미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절대자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구원자입니다.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그 사실이 믿어지면 머뭇거리지 않고 이 문둥병자처럼 열정을 가지고 죽음을 극복하고 주 앞에 나올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주앞에 나오자 그 앞에 절했습니다. 절대자 앞에서 겸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주여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간청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주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기도를 마치 요술램프로 생각하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전혀 기도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면 들어 달라고 구합니다. 육의 부모도 이런 자녀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늘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돼 너는 예수 믿으니까 죽어도 천국에 가, 속지 마세요.
그러한 문둥병자에게 주님은 손을 내밀어 만져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주님이 친히 손내밀어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구약 민수기를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을 했는데 미리암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합니다.(민12:1-15)그때 하나님이 오셔서 저주를 하셨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 진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를 만질수 없는 것은 전염성 때문이 아니고 부정한자를 만지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오게 되어 있어 법적으로 금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문둥병자를 만지심으로서 문둥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심으로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가 예수님으로 인해 끊어져 나가는 것을, 그래서 그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3절에서 ‘저에게 대시며’ ‘대시며 헵사토’는 대다라는 뜻 외에 ‘껴안다’‘만지다‘라는 뜻도 있어 주께서 의도적으로 문둥병자를 만지시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깨끗케 하시는 신적인 존재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절에서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 고치는 자로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하늘나라를 전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데 그 목적을 두셨습니다.(막1:38)‘내가 다른 지역에 가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바리새인들은 자기 선행을 광고하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숨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께서 베푸신 은혜에는 반드시 예물을 드려 감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입으로만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5절입니다. 13절까지 중풍병자의 대한 기사입니다. 두 번째 사건에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고치신 것, 그런데 그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을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도 황제에 권위아래에서 부하들에게 말하면 그대로 복종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만 하셔도 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또 엡2:12-13절에 “멀리 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외인인데 그 막힌 장벽을 제거하시고 고쳐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는 또한 중보기도의 힘이 큼과 응답이 신속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행12장에서도 베드로는 옥에 갇혀있고 교회는 기도했을 때 천사를 동원하셔서 베드로를 구원하시는 것을 봅니다. 지금 한국에는 에스더 중보기도 단체가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팀입니다. 나라를 위해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로 유대인은 주께로부터 경고를 받고 그들의 왕국을 잃어버릴 것과 그 왕국을 이방 사람들이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4-17절에 열병을 치유하시는 것과 무서운 질병인 문둥병에서 일반적인 병으로 상황이 바뀌어 졌는데, 그리스도는 이들을 모두 정복할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아내가 있었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그의 후계자들“인 교황들이 따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면 말씀에 도전 이라고 볼수 있습니다.(고전 9:5 참조) 주님께서 그녀를 고치시자 그녀는 주님께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뜻하며,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그녀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적인 병자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사도는 문둥병자 치유사건을 맨 시작에 놓았습니다. 문둥병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백부장의 하인도 죽어가고 있엇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그 당시에 열병은 죽어가는 위험한 병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가 힘든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건져 주시고 깨끗하게 치료하여 살려 주실 분이 누가 있는지요?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엡2장에서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죽은자를 살리신이가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엡2:4-5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주가 필요합니다.
질병치유와 함께 죄가운데서 건지실 메시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 동영상방에 가면 데이비드차 형제의 간증이 올려있습니다. 오전 오후가 있는데 현재는 오전 것만 올렸습니다. 사 단의 정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될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건지실 분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을 받는 조건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음의 채널을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누누이 강조합니다. 아는 것이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얼마나 교회를 오리락 내리락 했느냐가 믿음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그날에 주님 앞에서 좇겨나서 슬피운다는 것이 안믿는 자들을 향해 한말이 아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믿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날에 주께서 모른다고 할 때 억울해서 통곡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생사의 기로에 있음을 분명히 자각하십시오,
영적으로 죽은 자는 밖에 버려져서 울며 이를 간다고 마8:12절에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누가 구원받을 회개 관계회개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상대하지 마세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개가 토하였다가 도로 먹고 돼지가 씻고 도로 구덩이에 들어가 눕고 이렇게 하는 자들은 차라리 주를 모른 것이 더 나았다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우리도 이 세가지 치유의 기적을 받고 구원받아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