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숭릉 (현종과 명성왕후을 모심)... 쌍릉이다
조선 18대 현종(1641~1674. 33세 승하. 재위:1659~1674. 18년간)과 명성왕후의 묘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있을때 심양(현 요녕성 선양)에서 태어났으며 후궁을 한명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북벌론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과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에 가려서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 정국의 균형을 일정하게 맞추려고 노력했고, 여기에만 매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건해 수습하는데 노력하고 최악의 대기근인 경신대기근을 넘기는 등, 치적을 많이 남겼다.
2번 혜릉 (조선 20대 경종의 첫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를 모심)... 단릉이다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 32세)는 1696년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 세상을 떠났다
3번 경릉...삼연릉이다
조선 24대 헌종(1827~1849. 22세 승하. 재위:1834~1849. 15년간)과 첫번째인 효현왕후, 두번째인 효정왕후를 모신 능이다.
순조가 죽자 8세에 즉위하여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새로 외척으로 등장한 풍양조씨가 한동안 세도를 잡기도 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1841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과거제도.삼정의 문란으로 국가 기강이 흔들렸다.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고 모반사건,이양선 출몰 등으로 민심이 흉흉했으며, 기해박해로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고 신부 김대건을 처형했다. 1849년 22세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후사도 없었다.
4번 원릉... 쌍릉이다
조선 21대 영조( 1694~1776년.82세. 재위: 1724~1776. 52년간 재위 )와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묘이다.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다. 나아가 균역법실시 등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안정을 통해 민심을 추스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끌었다.
5번 휘릉... 단릉이다
휘릉(徽陵)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1624~1688. 64세)의 능이다
인조(1595~1649. 54세. 재위: 1623~1649. 26년간) 는 즉위 이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등 내우외환을 겪었으며,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친명배금정책을 취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받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였으나 40여일만에 항복하였다. 이후 건국 이래 지속되어온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청산하였다. 인조의 묘소인 장릉은 경기도 파주에 있다.
*휘릉은 이번에 답사하지 못함
6번 건원릉 ... 단릉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 73세, 재위: 1392~1398. 6년간)의 묘.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고려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조준, 남은, 정도전, 윤소종 등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토지개혁과 과전법 시행 등을 비롯한 각종 사회개혁을 단행하였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5번째 아들 이방원(후에 태종)은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정도전의 참살과 계모 신덕왕후 소생인 세자 이방석을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거치며 부자간 갈등의 골이 깊었다.
태조는 생전에 사랑했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덕수궁 근처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7번 목릉... 3개의 단릉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되어있다(동원이강릉)
목릉(穆陵)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1552~1608. 56세. 재위:1567~1608. 41년간)와 정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다
재위기간 중, 사림에 의한 정계 장악이 확고해진 후, 1575년에 동서분당 사건으로 인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어 당파들의 경쟁이 심했다. 1589년에는 정여립이 연류된 기축옥사가 발생하여 많은 인재들이 숙청되는 일이 있었다. 또한, 1592년에 일본의 침입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이 7년간 이어지며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이 전쟁터가 되어 개국 이래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1600년 의인왕후가 먼저 세상을 뜨자 유릉에 안장하였다. 1608년(선조 41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능을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하고 능호는 숙릉(肅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능호가 숙릉(淑陵, 정숙왕후의 능)과 음이 같아 이내 목릉으로 고쳤고, 1630년(인조 8년)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穆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 10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이라 했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
*목릉은 이번에 답사하지 않음
8번 현릉... 정자각에서 보았을 때 좌측 능선에 문종을, 우측 능선에는 현덕왕후를 모셨다 (동원이강릉)
현릉(顯陵)은 조선 제 5대 문종(1414~1452. 38세, 재위:1450~1452. 2년간 )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1421년부터 1450년까지 29년간 왕세자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 세종의 맏아들로 정치를 보필하였다. 문신과 무신을 골고루 등용하였으며, 언관의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폄으로써 언론을 활성화해 민심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1442년(세종 24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세종을 대신하여 8년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국사를 처리하다가 1450년 음력 2월에 세종이 승하하자 왕으로 즉위하였다.
문종은 재위기간이 2년 3개월에 불과하나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왕세자 시절에 진법을 편찬했을 만큼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서 병력 증대를 통해 병법의 정비와 국방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9번 수릉... 합장 단봉릉
수릉은 추존 문조(효명세자:1809~1830. 21세) 와 신정왕후 조씨의 묘이다
문조는 효명세자인 시절에도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였다. 1830년(순조 30)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고, 같은 해 서울시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인 서울 의릉(懿陵) 좌측에 무덤을 만들어 연경묘(延慶墓)라 하였다. 1835년 헌종 때 효명세자가 왕(익종)으로 추존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그 후 풍수상의 문제로 2번에 걸쳐 능을 옮겨 1855년(철종 6) 현재의 위치인 구리 동구릉의 태조 무덤 건원릉 좌측에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왼쪽에 왕이 위치하고 왕후는 오른쪽에 위치하나, 이와는 달리 수릉은 합장릉이지만 왕이 오른쪽에 위치하는데 승하했을 때의 신분상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