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이성과 감정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그대 영혼의 방향키이며 돛이다. 돛이나 키 중 어느 하나가 부러져도 그대는 정처 없이 표류할 것이다.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 멈춰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홀로 다스리게 하면 경직된 힘이며, 감정이란 홀로 내버려 두면 스스로를 태워 파괴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영혼으로 하여금 이성을 감정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려 노래 부르게 하라.
-이성과 감정에 대하여 중에서-
칼릴 지브란, <예언자>, 류시화 옮김, 무소의 뿔, 2018, 74-75pp
E54060 교육공학 및 교육행정 융합학과 한수진
홍영일 교수님의 수업을 듣기 전에는 몰랐다. 나는 내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그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직관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매순간의 직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음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연이은 취업 실패로 우울을 경험하고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와 심리학과를 복수전공한 학생이 들어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반 년간 땅을 파던 나에게 마찬가지로 취준생이던 친구의 연락이 왔다. 내 모교에서 인턴을 모집하니 지원해보라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 직관적인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내 미래의 첫 번째 단추인지도 모르고 나는 인턴에 지원해 합격했다. 단지 집에서 놀고먹기 싫었을 따름이었다. 합격할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1년간의 인턴 생활 동안 나는 새로이 외교관이라는 꿈을 가졌다. 이성이 시키는 일이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5급 공무원인 외교관을 양성하는 국립외교원입교시험을 준비하고, 고시학원을 다녔다.
누구나 그렇듯 고시공부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힘든 공부를 하면서 나는 한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영화 장르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장르와 관련된 소설을 써서 개인 블로그에 연재하고 친구와 함께 즐겼다.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직관이 시키는 일이었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다. 연재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팬이 생겼다. 팬들은 인터넷으로 연재한 글을 책으로 내달라고 요청했고, 관련 행사에 참여해 판매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난 그저 내 글을 읽어주는 팬들에게 고마워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판이 커졌다.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정기적으로 책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공식 루트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해당 분야에서 마이너하지만 꽤 인기를 얻었다.
그 대가였을까. 2년 연속 국립외교원입교시험(외무고시는 내가 외교관을 준비하던 해부터 폐지되었다)에서 미끄러졌다. 지금까지 해온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기에, 그것이 매몰 비용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할 순간이 왔다. 3년째에도 실패한다면 이것이 나의 길이 아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나는 세 번 실패했다. 외교관 입교 시험을 포기하자 그 순간 당장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이성은 나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한 분이 내게 직장을 소개해주었다. 스타트업기업인 기획회사였다. 그곳에서 내가 그동안 쓴 글을 보고 내 실력을 인정해주었다. 단순히 하고 싶어서 한 일들이 나의 실력으로 인정받자,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까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8년간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셨는데 이때 딱 한 번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렇게 기획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고 생각했다. 5명이 전부이던 회사에서 대표와 마찰이 생겨 한 명 한 명 직장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4개월이 지나자 회사에는 대표와 나,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한 달 후에는 나 또한 대표와의 ‘소통’을 문제로 일을 그만두었다. 상당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직관이 시키는 대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이다. 다시 이성이 시키는 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는 싫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나날이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일을 구하라고 닦달하기 시작하셨다. 결국 구직사이트를 뒤적거리며 그날 마감인 구인 공고를 확인했다. OO대학교 입학사정관을 선발한다는 글이었다. 그때까지 입학사정관이 무슨 직업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그전까지 고시공부를 했기에 면접 준비나 제대로 된 이력서용 사진조차 없었다. 나는 마감 당일 아침 이력서용 사진을 찍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마감 1분 전이었다.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며칠 뒤까지 다른 공고들을 검색했다. 그런데 1차 서류심사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제서야 당황하며 공고를 다시 읽었다. 2차 직무적성검사, 3차 실무면접, 4차 임원면접으로 꽤나 복잡한 임용 절차가 나를 반겼다. 중간에 당연하게 떨어지겠거니 생각하며 집 근처 구인공고를 열심히 뒤졌다. 그렇다고 아예 준비를 안 하기에는 또 아쉬워서, 직무적성검사 NCS를 공부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을 보러 가니, 직무적성검사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인적성 검사였다. 돌아와서는 이번에야말로 떨어지겠구나, 생각하고 게임회사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2차를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차라리 탈락하면 마음 편히 다른 곳 준비를 하겠는데, 이렇게까지 합격을 하고 있으니 자꾸 기대가 됐다. 부모님은 그냥 면접 연습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보라고 하셨다. 3차 실무 면접을 보러 가서 정말 ‘편하게’ 면접을 치렀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소통’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팀장님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던 키워드가 소통이었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심적 부담이 이를 데가 없었다. 임원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긴장으로 혀가 꼬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떨어지리라는 생각으로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특히,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취업이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모든 면접 과정에서 직관적으로 행동한 것임이 틀림없다. 결국 그날 저녁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직관의 승리였다.
일을 하는 기간 동안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꾸준히 써야 했고, 나는 내 직장에서 뜨는 모든 채용공고를 아버지께 전해 드렸다.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한 것이었을 뿐, 우리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연락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락이 왔고, 면접을 봤고, 아버지 또한 계약직으로 같은 재단 타 캠퍼스에서 일하게 되셨다. 친척들에게 나는 ‘아버지를 취업시킨 딸’로 거의 영웅이 되었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채용 공고를 보내드린 일 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입학사정관’으로 일하며 이 직업에 매력과 흥미를 느꼈고, 국어국문학과와 심리학과를 전공한 나에게 어울리는 직업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약이 만료될 즈음 교육대학원 면접을 보았고 합격했다. 내 커리어를 더욱 살리기 위해서였다.
한편 내 계약서 내용에는 2년의 계약기간이 종료된 후 일부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문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7명 중 4명에 한정된 것이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직장 내의 사람들끼리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던 탓에 솔직히 그곳에서 더 일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다. 가족들은 모두 실망했고, 직장 동료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나 또한 원하던 결과였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무기계약으로 전환된 사람들은 세상에 승리자로 보일 것이고, 나는 일종의 실패로 보일 것이다. 더욱이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기로 결심한 것이었는데 나의 계약 연장 불가 사유를 ‘대학원에 다니면 야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라는 것으로 들은 상황. 해당 직장에는 더 볼 일이 없었다. 게다가 계약 연장은 1년이 최대이며 2년까지 연장한 후 다시 같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3~4개월의 공백이 있어야 했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함께하자며, 다른 곳에 취업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희망 고문을 더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모두를 무기계약직으로 바꿔줄지 모른다는 거짓말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라고 속으로 외치며 채용 공고를 뒤졌다.
그때 같은 재단 타 캠퍼스, 바로 아버지께서 현재 일하고 있는 그곳의 한 부서에서 올린 공고를 발견했다. 이전에 내가 일한 곳과 같은 부서였다. 나는 곧바로 지원해서 면접을 봤고 1순위로 합격했다. 그래서 다행히 공백 없이 바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출퇴근을 편리하게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도 가까웠다.
내 인생의 순간순간에 있었던 선택들. 이성적으로 한 선택들은 모두 좋지 않은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어쩌면 다분히 감정에 휩쓸려 내린 선택은 결국 좋은 귀결을 보였다. 그때 내가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공고를 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대학원에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모든 선택들이 나를 만들어왔음을 알고 이에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실패했을지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실패했고, 기획작가로서 실패했고, 무기계약 전환에 실패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을 존중하고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
완벽히 이성적인 선택을 내릴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그러나 저 멀리 있는 이상을 꿈꾸는 인간으로서, 내 직관으로 선택한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지금, 여기, 직관으로 만들어온 나 자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