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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 장군과 미 육군 동성 훈장 받게 된 사연 |
김일평 교수 회고록, 지리산 토벌작전과 제2군단 창설 |
나의 육군중위 시절 제2군단에서 1953년에 미국 銅星 무공훈장을 받을 때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육군 제2군단에 金雄洙 장군이 참모장으로 새로 부임해 왔다. 나는 정보처(G-2)의 브리핑 장교로서 새벽 6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구두도 반짝 반짝 하게 닦고, 단정한 장교복 차림으로 군단본부의 상황실로 나갔다. 그리고 미국 군사고문단을 위해 영어로 브리핑을 매우 유창하게 했다(그와 같은 나의 단정한 모습을 지켜본 김웅수 장군은 4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어느 만찬회에서 재일동포 최서면 한국학연구원장에게 나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 말한 바 있다고 최 원장이 귀띔해주었다). 우리 제2군단 본부에는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배속돼 함께 근무했다(<중앙일보>에 연재한 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의 ‘지리산의 숨은 적들’[151회]에도 한국 육사 8기생 31명이 남원의 100부대 전투사령부에 배치됐다고 기술돼 있다). 그중 4~5명은 화천의 제2군단 정보처에 나와 함께 근무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석정선 대위였다. 그는 훗날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창설된 중앙정보부(KCIA)의 김종필 부장의 차장으로 임명돼 활약했다는 신문 기사를 미국에서 읽은 바 있다.
사진 1.육군 제2군단 작전상황실 앞에서 정보참모와 함께. 왼쪽이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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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제2군단 정보처에 복무할 당시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작전상황실에 나가서 지난 24시간 동안 전선에서 일어난 모든 정보 상황을 한 시간 동안 지도를 펴놓고 파악했다. 그리고 오전 8시에는 군단장 이하 각 부처의 참모들 그리고 군단본부의 모든 장교들과 미군 고문단이 참석하는 상황실에서 조회를 하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G-1(인사처)부터 시작해 G-2(정보처), G-3(작전처), G-4(군수처)에 이르기까지 브리핑을 하는데 미군 고문단의 참모장교들 20여 명이 배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로 통역도 함께 했다. 나는 제일 먼저 북한과 중공군의 정보상황을 보고하고, 미국 고문단과 한국군 참모들의 집중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작전처와 군수처 브리핑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과였다.
육군 2군단에 새로 부임한 김웅수 참모장은 매우 우수한 장군으로서 실력이 있는 智將이었다. 그는 일본 국주의 시대 말기에 일본 교토[京都] 제국대학에 재학하다가 일본군 학병으로 선발된 후 만주에 파병됐다. 그리고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 즉 해방을 맞이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1952년 한국군 제2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후 1년 후에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하나 달았다. 그 분은 우리 연락장교들을 인텔리 장교(지식인)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호감으로 대해주었다. 또 여러 가지로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연락장교들은 김웅수 장군을 매우 우수하고 실력 있는 지장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했다.
金雄洙 장군은 누구인가
김웅수 장군은 한국육군의 강영훈 장군, 장도영 장군과 함께 한국군의 智將 즉 지혜가 많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강영훈 장군은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직후 옥고를 치르고 난후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워싱턴에 와서 ‘한국문제 연구소(Research Institutor Korean Affairs)’를 설립하고 <한국문제 저널(Journal of Korean Affairs)>을 영문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강 장군은 미국의 여러 한국인 학자를 동원해서 한국문제연구소의 자문역할과 학술지의 편집고문(Advisory Board)를 조직했다. 나는 강 장군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편집고문과 논문 집필에 참여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와 학술지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었고 또 박정희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의 참여를 적극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 정권의 홍보용 연구소와 어용 학술지가 되는 것을 막고 중도적이고 객관적으로 운용되는 연구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일역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그 반면에 강영훈 장군의 처남이며 동시에 한국의 육군 장성으로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쿠데타)에 참가하지 않았던 김웅수 장군은 쿠데타 이후 몇 달간 옥중생활을 한 후 미국 서부의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 와서 경제학을 전공해 학부(B.A.)와 석사학위(M.A.)를 끝마쳤다. 이어 워싱턴 D. C.에 있는 카토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Ph. D.) 학위를 받고 워싱턴의 모교인 카토릭 대학에서 20여 년간 경제학 교수로 70세까지 교수생활을 하다가 퇴임했다고 최근에 출판된 회고록에 기록했다.
사진 2. 김웅수 장군의 『회고록-송화강에서 포토막강까지』표지에 나오는 군복차림의 준장 사진은 육군 제2군단에서 준장으로 진급하고 제2사단장으로 떠날 때 찍은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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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雄洙 장군은 우리 연락장교들이 韓美 간의 공조와 협력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文官 취급을 당하고 있다면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1953년 한국군 제2군단에 복무하고 있을 때 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서 미국 銅星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제2군단의 몇 명의 장교들과 함께 추천해 주셨다. 우리가 근무하고 있었던 한국군 제2군단에는 육사 8기생들이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함께 근무했다. 6·25 전쟁이 나기 직전에 5~6개월간의 훈련도 받지 못했을 때 한국전쟁이 나서 임관된 장교들이 육사 8기생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확장됨으로써 많은 수의 초급장교가 필요했던 시절이라, 사병에서 현지 임관된 8기생도 있었다. 양적으로는 많은 수의 8기생(1천200명이 넘었다고 백선엽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 기록했다)들이 초급장교로 임관됐으나, 우리와 함께 복무하는 미군 위관급 장교들과 비교해 보면 질적으로는 떨어졌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연락장교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열등감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볼 때가 많았다. 연락장교들은 6년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다가 6·25 전쟁이 나서 육군에 복무하게 됐던 이들이다. 그러나 육사 8기생 1천200명 중에는 대학교 문턱에 들어가 본 사람은 일제시대에 10여명 내외에 불과했다고 들었다. 6·25 전쟁이 발발해 현지 임관된 장교들 중 대부분은 육사 8기생으로서 훈련 도중에 장교로 임관 됐다는 것이다. 한국 육사 8기생들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는 육사 8기생들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정부 요직에 등용됐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의 차장을 역임한 석정선 대위는 육군 제 2군단 정보처에서 우리와 함께 근무한 8기생이다. 육사 8기생 중의 한 명인 최 아무개 대위는 연락장교인 김일평 중위가 미국 동성훈장을 받는 데 대해 시기심을 나타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유재흥 군단장과 김웅수 참모장은 “미군고문단이 김일평 중위의 업적을 인정해 적극적으로 추천했으며, 또 한국측 참모들도 협조해서 추천한 것이며, 다른 분야의 장교들도 많이 동조하고 추천해서 동성훈장을 받게 됐다”라고 내가 동성훈장을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불만을 조용히 무마시켰다.
6·25 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의 한국 국방경비대는, 미국의 군사원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한국방위를 담당할 국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 장교를 대량으로 양성할 계획으로 운영됐던 곳이다. 따라서 육군 경비사관학교 후보생과 육군간부 후보생들을 많이 증집해 단기 군사훈련을 마친 뒤 후 초급장교로 임관했기 때문에 8기생들을 훈련시키고 교육 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육군사관학교 8기생부터는 모집인원을 대량으로 증가해 8기생은 1천200명이 넘는 간부호보생을 뽑게 된 것이다. 따라서 8기생은 한국전쟁 중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우리 제2군단 정보처 (G-2)에도 5~6명의 8기생이 배속돼 왔던 것이다.
전쟁중 현지임관된 육사 8기생들
그러나 8기생들은 양적으로는 많은 수가 임관 됐지만, 질적으로는 매우 약세였다. 그들은 위관급 중위와 대위 계급에 걸맞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학식과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것은 6·25 전쟁 때문에 사관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속성으로 임관돼 1년에 진급을 거듭해 중위와 대위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업무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육사에서 5~6개월 교육받았다는 8기생들 중에는 속성으로 중위와 대위가 된 장교도 있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병출신이 현지 임관으로 소위와 중위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우리가 연락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을 때 우리 7기생을 매우 혹독하게 훈련시킨 신 중위는 사병출신 장교였다. 그는 아무런 일자리를 찾지 못해 낭인으로 방황하다가 육군 사병모집에 지원해서 사병으로 5~6개월 복무한 후 6·25 전쟁을 맞았다. 그는 큰 공훈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현지임관된 장교라고 자랑하곤 했다. 한국 국방경비대 시절의 한국군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진 3. 한국육군 면관증명서와 서울 중부경찰서장의 신원보증서가 여권수속에 필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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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부터의 한국장교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미국의 4년제 육군사관학교)와 똑같이 4년간의 대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육사 11기생 이후의 한국군 장교는 미국장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매우 훌륭한 장교들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군복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기 때문에 한국육사 제11기생들과 함께 복무할 기회는 없었다. 육사 11기생으로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된 다음 진급을 거듭한 후 1960년대에 미국에 유학 온 육사출신 장교 여러 명을 만나 본 일이 있다. 때문에 나는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의 한국군의 여러 가지 변화를 그들로부터 들은 바 있으며 또 내 눈으로 직접 관찰도 했다. 후에 기록하겠지만 1990년대 한국에 학술회의 때문에 나가면 학술회의를 마친 후 육사 골프장에서 골프를 함께 치면서 육사 11기생들의 육사교육 과정과 훈련 내용을 엿볼 수 있었으며 또 관찰 할 수도 있었다.
나는 1953년 육군장교로 3년간의 일선 복무를 끝마치고 명예 제대를 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수의 육군장교 출신 유학생이 됐다. 미 육군 銅星 훈장을 받은 것이 큰 효과를 발휘해서 국방부의 수속은 쉽게 잘 진행됐다. 문교부의 역사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외무부의 영어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외무부의 영어 시험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내 기억에는 아직도 남아있다.
참고삼아 부연한다면, 6·25 전쟁 (1950~1953) 당시에 미국 군인의 전사자(KIA)는 3천300명이고, 부상자는 10만3천명이라고 미국의 한국전쟁 역사책에는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