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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do Harada Roshi: Nuclear Reactor of Zen
쇼도 하라다 선사: 선의 원자로
BY HOZAN ALAN SENAUKE| DECEMBER 1, 2006 호잔 앨런 세나우커, 2006년12월1일, 라이언스로어(선 잡지 ‘사자후’)
Although not widely known, Harada Roshi is one of the few Japanese Zen masters specializing in teaching Western students. Hozan Alan Senauke talks with this potent and surprising teacher about everything from kensho and the role of the body in zazen to the information society and the insecurity of our times.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하라다 선사는 서양인 제자를 가르치는 데 특화된 일본 선사 가운데 한 분입니다. 호잔 앨런 세노케가 강력하고 놀랄만한 스승에게 견성 및 정보사회와 불안한 시대에서 좌선하는 몸의 역할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 한다.
쇼도 하라다(原田正道, 1940~) 선사
A friend said that meeting Shodo Harada Roshi for the first time in sanzen, a private interview between student and Zen teacher, was like “sitting in front of a nuclear reactor.” That was my experience too, and it is not much different the next time either…or the time after that.
한 친구가 제자와 스승의 개인적인 만남인 산젠(叅禪을 일본말로 읽은 것인데, 여기에서 뜻은 獨叅독참, 선사와 개인면담을 가지면서 수행에 대하여 문답하는 것)에서 쇼도 하라다(原田正道, 1940~) 선사를 처음 만나는 것은 ‘원자로 앞에 앉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제가 그걸 경험했어요. 다음의 만남에서,,,또 다음의 만남에서도 역시 다르지 않았지요.
Shodo Harada is a teacher of extraordinary energy and depth. He is a Rinzai Zen priest with the unusual calling of teaching Westerners. He is abbot of Sogenji in Okayama, Japan, and Tahoma Monastery, on Whidbey Island in Washington. He also supports zendos and sitting groups elsewhere in the United States and in Denmark, Germany, Hungary, Poland, Switzerland, and India.
쇼도 하라다는 비범한 에너지와 깊이가 있는 스승입니다. 그는 서양인을 가르치는 걸 비상한 소명으로 여기는 임제종 스님입니다. 그는 일본 오카야마의 소겐지(曺源寺,조원사)의 방장이면서 워싱턴의 휘드비 섬에 있는 타호마 사원의 주지입니다. 또한 미국, 덴마크, 독일, 헝가리, 폴란드, 스위스, 그리고 그리스에 선방과 좌선 단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At Sogenji, Tahoma, and in his various travels, Harada Roshi works closely with Priscilla Daichi Storandt. Chi-san, as she is familiarly known, is his dharma sister and a fellow student of Yamada Mumon Roshi. She followed Harada Roshi to Sogenji and serves as his translator for talks and in the intimate environment of sanzen. Her warm, joyful, no-nonsense presence perfectly complements Harada Roshi’s drive. They are quite a team.
소겐지, 타호마와 그가 다녔던 여러 여행에서 하라다 선사는 프리실라 다이치 스토란트와 밀접하게 함께 일합니다. 치산-그녀가 스승과 아주 가깝다고 알려지는데-은 그의 법 자매(법맥상으로 여동생)로서 야마다 무몽(山田無文, Yamada Mumon,1900~1988) 선사의 동료 제자이다. 그녀는 소겐지에서부터 하라다 선사를 따르다가 독참이라는 내밀한 환경에서 이뤄지는 선문답의 통역자로 시봉한다. 그녀는 온화하고 유쾌하여 하라다 선사가 차로 이동할 때 완벽한 동행이 되어줌으로서 결코 의미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아주 좋은 팀을 이루고 있다.
Sogenji was built in the seventeenth century as a retreat for the Ikeda clan, who were warlords, or daimyo, in the Bizen region. Harada Roshi, Chi-san, and I met over two days in what had been the daimyo’s scriptorium, overlooking Sogenji’s garden and pond. We had a second interview at Tahoma, during sesshin. Roshi responded to each question in Japanese, with his deep and raspy voice, turning inward at times to search for words, which then emerged in bursts of urgent expression.
소겐지는 이케다 가문을 위한 안거장소로 17세기에 세워졌다. 그 가문은 비젠 지역의 전사인 다이묘였다. 하라다 선사, 치산과 나는 다이묘의 영지인 소겐지의 정원과 연못을 둘러보며 이틀을 보냈다. 우리는 타호마에서 세신기간에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선사는 매번 질문에 그의 깊고도 귀에 거슬리는 음성의 일본말로 답했는데, 몇 번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안으로 응시하는 듯하다가 갑작스런 표현이 튀어나오곤 했다.
*참고: sesshin(세신, 接心 또는 攝心, 선방에서 1주일간 가열차게 정진하는 가행정진기간. 좌선과 매일 독참을 해야 한다)
I am deeply grateful to Chi-san for her on-the-spot translations, and to Tom Yuho Kirchner, who later meticulously transcribed and translated the interviews, checking with Chi-san to get the flavor of the moment.
나는 현장에서 즉시 통역해주었던 치산과 또 나중에 통역한 것을 솜씨 좋게 글로 옮기면서 치산과 검토하여 그 순간의 감흥을 살려주신 톰 유호 커치너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Hozan Alan Senauke 호잔 앨런 세나우
Alan Senauke: Roshi, how did you come to Zen training?
앨런 세노케: 선사님, 참선 수행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Harada Roshi: I was born in a Zen temple in Nara. But truly I began to practice because of a chance encounter with my teacher, Yamada Mumon Roshi. One day in high school, I was on an errand to Myoshinji for my father. I boarded a bus at rush hour and toward the back I noticed an old priest in robes, reading a book. As I stood in the aisle — a youth who lived in a temple because of the circumstances of birth — I was deeply moved by this man who seemed so deep and so still, and radiated such brightness of spirit. In comparison, the people around him seemed melancholy, weighed down by their thoughts and cares.
하라다 선사: 나는 일본 나라에 있는 참선하는 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스승인 야마다 무몽 선사를 만나는 기회 때문에 진짜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느 날 묘심사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어요. 러시아워에 버스를 탔는데, 뒤 좌석에 승복을 입은 노승이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어요. 나는 복도 쪽에 서있는데-내가 절에서 태어났기에 절에 살고 있는 청년으로서-깊고도 고요하게 보이는 이 분께 감동을 받았는데, 그분의 마음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와 대비되어 그 주변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생각과 걱정거리로 짓눌려 우울해 보였습니다.
I decided to see where he would get off. He left the bus at Myoshinji, exactly as I did. I followed him to Reiun-in, a subtemple of Myoshinji. Later I learned that this was Mumon Roshi, Reiun-in’s priest, abbot of Shofukuji monastery in Kobe and president of Hanazono College, the Rinzai Zen college in Kyoto.
나는 그분이 어디서 내리는지 알아내려고 작정했어요. 그분은 나와 꼭 같이 묘심사에서 버스를 내렸어요. 나는 그분을 따라 묘심사 부족 암자인 영운원(靈雲院)으로 갔었죠. 나중에 이분이 야마다 무몽선사이며, 영운암 스님이면서, 코베에 있는 성복사(聖福寺)의 주지이며, 교토에 있는 임제종 종립대학인 하나조노 대학 (花園大学)의 총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This encounter made me realize how limited my understanding of Buddhism was. I doubt I would have become a monk if I had not met Yamada Mumon Roshi. Because of him, I realized how a person’s inner qualities can shine clearly from their entire being. So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I entered Shofukuji to train under Mumon Roshi. My life today is entirely the result of my encounter with him.
이 만남은 내가 불교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야마다 무몽 선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스님이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분 때문에 한 사람의 내적 자질이 주위의 전 존재를 환히 밝혀준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무몽선사 밑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성복사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날 내 인생은 전적으로 그분과의 만남의 결과입니다.
When did you come here to Sogenji?
언제 소겐지로 오셨습니까?
One day Mumon Roshi said, “There is a temple in Okayama called Sogenji, and the old priest is having a hard time keeping it up by himself. Would you help him out?” The old priest was the late Kansei-san, the retired abbot of Sogenji. That was more than twenty years ago.
어느 날 무몽선사가 말하길 “오카야마에 소겐지라는 절이 있는데, 늙은 중이 혼자 꾸려가는 데 어려움이 많다. 네가 가서 도와주는 게 어떠냐?” 그 노승은 돌아가신 칸세이 화상으로 소겐지에서 은퇴한 주지였다. 그게 20여년을 더 된 것 같아.
The training dojo at Sogenji had closed seventy years earlier. We started doing things as we had at Shofukuji — getting up early, spending our days doing zazen, cleaning, and so on. At the beginning there wasn’t much of a plan. There were only two or three of us here.
소겐지의 훈련 도량은 70년 전에 벌써 문을 닫았어요. 우리는 성복사에서 처럼 다시 시작했지-일찍 일어나서, 좌선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며, 청소 기타 등등을 했지. 처음엔 계획이 많지 않았어. 거기엔 우리 둘이나 셋 밖에 없었으니까.
Sogenji and Tahoma have developed uniquely as training centers for Westerners. How did that unfold?
소겐지와 타호마는 서양인을 위한 훈련센터로 독특하게 발전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Mumon Roshi emphasized that in spiritual practice there is no East or West; what is important is the bodhisattva’s presence. It doesn’t matter whether one is lay or ordained; the desire to seek the Way is the sole criterion for training. In Japan, Zen priesthood has become a kind of occupation. For those who cross the ocean to practice, Zen is more than a mere job. People put their futures on the line for the sake of practice.
무몽선사는 수행에는 동서양이 따로 없다는 걸 강조했어요. 중요한 건 보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건 속인이건 스님이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도를 구하려는 갈망이 훈련에 유일한 판단근거가 됩니다. 일본에서 선종의 스님은 일종의 직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수행하려고 바다(태평양)를 건너온 사람들에겐 선이란 단순히 직업이기 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죠. 그 사람들은 수행을 위해서 자신의 미래를 걸었죠.
In the last forty years, many great Japanese teachers have come here because they found in themselves an affinity for the West. Why?
지난 40년 간 일본의 많은 큰 스님들이 미국에 왔다는 건 그들이 서양을 좋아해서 입니까? 왜 그런 겁니까?
It’s a natural flow. Humans lean in the direction of what they are seeking. It is natural to want to teach those who have a desire to learn. Even if you are in the land where you were born and brought up, if nobody around you is interested in what you have to teach, you are not going to be interested in teaching them. Same goes for Ichiro Suzuki, the baseball player. It makes sense for him to want to be in a country where they really get his sense of playing.
그건 자연스런 흐름이예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찾는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태어나서 자라난 나라에 살더라도 주변의 어떤 사람도 당신이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당신은 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야구선수인 이치로 스즈키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이 그가 경기를 잘한다고 알아주는 나라에 있기를 원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죠.
What do you think we Westerners need in order to develop our understanding?
서양인들이 이해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The most important thing to develop is love for people and love for one’s country. Without that, we fall into conceptualization.
개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게 없다면 관념으로 빠져들고 말지요.
What do you mean by “love for one’s country”? How do we express that in our practice?
‘나라에 대한 사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런 게 수행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What we receive from our country — our safety, our livelihood, our upbringing, our cultivation as a human being — does not refer to a political system, or to a present government, but to this place where we live. I don’t mean profit making or benefiting the country’s political situation, but appreciating our home, this place.
우리는 나라에서 안전, 생계, 교육, 및 인간다운 삶을 부여 습니다. 그건 정치제도나 현 정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토를 발하는 겁니다. 정치상황으로부터 득을 본다든지, 혜택을 입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이 땅에 고마워한다는 거죠.
How does one love one’s country without succumbing to nationalism?
어떻게 하면 국가주의(혹은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기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As the sutras say, we must let go of all notions of a self, a being, a life, or a soul. Unless we overcome these, we go astray in our attempts to love other people and love our country.
경에 이르기를 자아, 존재, 생명, 혹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금강경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내려놓으라는 대목).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나라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This is a difficult question right now in America. The deep love we have for our country is often confused with the political system that supposedly maintains that nation. Our leaders play on our patriotism when they undertake political and military adventures. One might call it nationalism. This is a dangerous tendency, I think. How can we cut through such delusions?
이것은 지금 현재 미국에서 당면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기 나라를 깊게 사랑한다는 것이 가끔은 나라를 유지한다고 믿어지는 정치체제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사람들의 애국심을 이용합니다. 우리는 그걸 국가주의(민족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건 위험한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망상을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습니까?
People should not support a system in which humans kill other people. We can’t support that as Buddhists.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체제를 지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불자로서 그럴 걸 지지할 수 없습니다.
You can’t answer this question in the abstract, though. We have to go case by case. But to draw a clear line, it is the teaching of the Buddha that we must not create conflict and we must not kill. If at some point one had to choose between what the country is doing and one’s beliefs as a Buddhist, one should certainly choose the point of view of the Buddha.
당신은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선을 긋는다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경우에 국가가 하는 일과 불자로서 자신의 신념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경우에는 확실하게 부처님의 관점을 선택해야 합니다.
Zen at War
전쟁 가운데 선사들은
Roshi, I know you have been concerned about the role that Japanese Buddhism, and particularly the Zen schools, played in World War II. Why did the Zen organizations fall into error?
선사님, 당신은 일본불교, 특히 2차세계대전 당시 모종의 역할을 했던 선종에 관심을 죽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일본선종은 그런 실수(전쟁에 동조내지 협조)를 저지르게 됐습니까?
Overcoming the concepts of self, being, life, and soul must be accompanied by a strong social sense, a consciousness of the true social situation in the world. Without this, one can inadvertently be swept along by circumstances.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극복하고, 거기에 강한 사회적 의식, 즉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의식이 수반되어야 했습니다. 그게 없으면 본의 아니게(의도하지 않게) 상황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습니다.
What is the true social situation in the world?
‘세계 속에서 진정한 사회적 상황’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There are different views of the world. For example, there is the scientific view, which lacks the spiritual point of view. And what people are getting from various media is often filtered through the wish to make profit, the wish for people to see things a certain way — it’s totally undependable. So we can never know what is really happening in the world. This has always been the case, but it is especially true right now. In the past, people were handicapped by not having dependable information. But today, the distortion of information is a great problem.
세계를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적 관점이 있겠지요. 그런 관점엔 정신적 부분은 결여되어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하여 얻어들은 것은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려는 욕망으로 자주 물들여지는 데-그건 완전히 믿으면 안 되는 것이었죠.
(참고: 하라다 선사는 일제의 침략에 동조했던 동료선사나 전 세대 스승들을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군부의 조작된 정보에 세뇌되었거나 선전선동에 동화되어서 자의반타의반, 의도치 않게 군국주의 침략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실재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은 늘 일어납니다. 그런데 특히 바로 그런 일이 진짜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믿을만한 정보를 얻는 데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정보의 왜곡은 큰 문제입니다.
Apart from the media, what do you see as the true situation in the world?
언론매체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은 세계적 상황의 진실을 보십니까?
Countries and their leaders don’t see existence as made up of individuals. They mainly see what is going to bring material profit. People in a country are like parts of a machine, to be used for that end.
국가들과 그 지도자들은 (국가라는 것이)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존재라고 보지 않아요. 그들을 주로 어떻게 해야 물질적 이익을 얻을까 라는 관점에서 보지요.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기계부품과 같아요.
(참고: 여기서 하라다 선사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고 전체주의적 전횡을 했다고 진술하면서, 일본불교지도자들도 그로 말미암은 피해자였음을 알아달라고 변명하고 있다)
In the case of Japan during World War II, would you say that the Buddhist priests and leaders who supported the war were realized people?
2차대전에서 일본의 경우, 전쟁을 지지했던 불교 승려들과 지도자들이 깨달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These Buddhist leaders may have been less than completely liberated from the concept of ego. One can be internally liberated and still have much work left to realize liberation in the context of society.
그런 불교지도자들은 자아의 관념에서 완전하게 해탈됐다고 하기엔 덜 된 것 같습니다. 자기 내면적으로는 해탈할 수 있지만, 사회라는 맥락에서 해탈했다 하기에는 작업을 해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아 있지요.
But often it is extremely difficult to express a position that goes against public opinion and the government’s interests. This applies also to the situation in America after the terrorist attacks. We mustn’t fear this challenge, however.
그러나 여론이나 정부의 이해에 거슬리는 위치를 드러낸다(참고: 전쟁중에 공공연하게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천황제를 거부한다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학살하지 말라거나 하는 연설을 하거나, 글로 써서 발표한다거나 하는 정의로운 행동)는 건 극히 어렵습니다. 이건 미국에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있은 다음에 벌어진 상황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지요. 어쨌든 우리는 이런 도전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Although Buddhist leaders during World War II may have had great individual insight, they had a very limited understanding of the world outside Japan. This, I believe, was one of the main reasons for their serious errors in judgment.
불교지도자들이 2차대전 중에 위대한 개인적 통찰(말하자면 깨달음)이 있었겠지만, 일본 바깥 세계에 대한 그분들의 이해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점이 바로 그분들이 사리 판단을 할 때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But what was their understanding of Buddhism?
그렇다면 그분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의 속뜻은 세계 정세에 어두워서 전쟁에 동조, 협조, 심지어 선동까지 했다면, 일본선사들의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불교의 기본이 되는 불살생과 자비와 화해를 팽개치면서, 일본제국의 아시아 제패, 남경대학살, 조선침탈, 영미 타도를 동조하고 주창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 라는 것이다. 일본선이 자랑하는 소위 “깨달은 선사들”이 전체주의적 폭력이나 일본제국의 힘에 의한 세계정복을 긍정했느냐 고 따져 묻는 것이다)
Of course they understood and admired the Buddha, or they would not have been teachers.
물론 그들은 부처님을 이해하고 존경하였지요. 그렇지 않다면 스승이 될 수 없었겠지요.
What allowed them to support a violent kind of nationalism, on the one hand, and support Buddhism on the other? It seems there is a kind of split.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폭력적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걸 수용하게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불교를 지지하게 했단 말입니까? 여기에 어떤 (의식의) 분열이 있어 보입니다.
There is a teaching of the Buddha about unifying the whole world in the dharma. That is probably how the Zen teachers would have supported the Japanese military. But the question is why would they agree, misinformed as they may have been, to the use of force to accomplish this? In the scriptures, the Buddha intervened three times when his country was threatened, but to the end, he refused to sanction the use of force to protect his country.
전 세계를 다르마(법)으로 통일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참고: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아쇼카 대왕이 다르마로 인도천하를 통일하여 다스리고자 했다. 지금 일본선사는 이걸 착각하여 말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마도 선사들이 일본 군국주의를 지지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군국주의를)긍정했는지-아마도 그들이 거짓된 정보에 홀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달성하려고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것까지 긍정했다는 건 의문입니다. 경전에 부처님은 자기의 조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세번이나 중재를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물리적 힘을 사용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