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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 ( 아 8: 6-7 )
6절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너는 이라고 하시는 너는 신랑 예수를 오라비로 보는 그의 신부가 된 누이를 말씀하셨고, 나를 하는 나는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신랑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인 같이 마음에 품고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계약서를 작성하면 서로가 도장을 찍어서 반드시 그대로 책임지고 행할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의 자리에 있는 네가 신랑의 음성으로 들려주신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았느냐 이 말씀은 신랑 되신 예수께서 반드시 책임지고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랑 예수께서 책임지고 그대로 이루실 언약의 말씀으로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엡1:13)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는데 성령으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인치셨고 지식으로 전한 것이 아니고 신랑 예수께서 그 신부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시기로 인쳤으니 너는 믿으라는 말씀이고 결단코 그 자리까지 사람의 열심으로 달려가라는 말씀이 아닌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라고 하셨으니까 그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도장 같이 팔에 두라' 하셨는데 인은 마음에 품으라고 하셨고 도장은 팔에 두라고 하시는 뜻은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여 베드로를 끌어다가 순교하게 하실 것을 말씀할 때에 네 팔을 벌리리라고 하셨고,
(벧전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이 장막을 벗어 날것이 임박한 줄 앎이라 증거 하였는데 이것이 (요21:18)의 말씀을 마음에 인 같이 품고 있으면서 도장 같이 팔에 두고 있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은 모든 준비가 다 끝나고 순교의 그날을 기다리는 자신을 나타내고 있고 반드시 순교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찬송케 하시는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십 사만 사천의 영광을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순교하게 하시는 주님을 말씀하시느냐 순교의 과정을 거쳐서만 십 사만 사천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먼저 죽음 같이 강한 것은 무엇인가 목숨을 가지고 사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금수까지라도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강하고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것입니다.
죽을 때에 당하는 그 고통을 생각하는 그 두려움이 강하고 그러므로 죽기를 싫어하고 그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한 것을 말씀하셨는데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는 신부들의 마음에도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26:38) 예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말씀하셨고, (막14:34)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말씀하셨고, (눅22:40)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마26:39)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5)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눅22:41)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여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말씀하셨고,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십자가에 피로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영광된 죽음을 위해서 오신 것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셨고 마가복음에서는 땅에 엎드리셨고 누가복음에서는 무릎을 꿇고 세 번이나 기도하실 때에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같이 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고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세상 만민 가운데 가장 큰 죄인을 복음으로 부르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마침내 첫째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순교하게 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부 된 너희들이 마음 가운데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이 크게 일어날수록 너를 순교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고 있는 그 신부에게 대하여 신랑 되신 내가 신부 된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너희가 순교를 앞에 두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 이기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19:33)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았고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막15: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에게는 죽음의 고통과 죽는 시간도 단축시켜 주실 것을 보게 하십니다.
(행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증거 하는 스데반이 복음과 진리로 인하여 돌에 맞아 죽게 되는 그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있으니 하늘에 예비 되는 영광이 보이고 인자가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하신 것은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 하신 말씀과 같이 신랑 예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의 보좌를 보이시며 스데반의 머리에 씌워 줄 금 면류관을 손에 들고 서 계시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계2:17) 또 그 순간에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셔서 돌에 맞는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 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사랑하는 신부가 알지 못하고 죽을 자리에 뛰어들 때에 그 신부를 사랑하는 신랑이 자기가 사랑하는 신부가 혼자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부가 죽으려는 힘이 강할수록 그 신랑이 죽지 못하게 붙잡는 힘도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죽으라고 놓아주지 못하고 끝까지 붙들고 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첫째 부활의 영광까지 보여 주신 그 신랑 예수께서 그 신부 하나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주를 부인하고 도망가려 할지라도 결단코 놓지 아니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돌이켜 주시는 역사를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투기는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을 보는 질투심 곧 시새움을 말합니다.
따라서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투기하는 불길도 크게 타오를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사랑하는 신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가서 잘못 되어 고생하고 형편이 처참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보는 전 신랑은 네가 나를 버리고 가서 잘 될 줄 알았었느냐 하면서 더 처참하게 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라고 말씀하시는 신랑 예수께서는 첫째 부활의 영광까지 주신 사랑을 버리고 다시 세상을 사랑하여 (눅4:5) 천하 영광을 보여 주는 마귀를 따라가는 간음하는 여자가 되었을지라도 그가 걸어가는 그 길은 음부의 불꽃 가운데로 가는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바라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잔혹하다 곧 누가 보아도 잔인하고 혹독하다고 할만큼 때려서라도 기어코 돌이켜 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7:25) 한때 두 때 반 때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부들에게 세상의 미련을 끊어주시기 위해서 첫 삼년반 환난을 예비해 두신 주님께서 일년이 지나서 순교할 기회를 주실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미련이 남아서 나 예수 몰라요 부인하는 그들을 위해서 2년 동안 갑절의 환난으로 세상의 미련을 끊어주시고 다시 순교할 기회를 주셨을 때에 또 다시 나 예수 몰라요 부인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마지막 반년 동안 더욱 지독하리 만큼 큰 환난으로 인하여 기어코 신부 중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순교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막차 타려고 기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마치 무엇과 같은가 농부가 밭에 콩을 심어 가꾸어서 거두어 들여 타작 마당에 널어 놓고 도리깨로 칠 때에 처음에는 크게 때리지 아니합니다.
콩알이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적당히 치고 나서 보니까 떨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는 뒤집어 놓고 갑절이나 크게 때리고 그 때리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다시 살펴보니까 아직도 남아 있는 콩꼬투리가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뒤쳐 놓고 나서는 콩 집이 부셔져라 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크게 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콩 한 알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그 콩은 그 짚과 함께 불타서 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자기가 농사 지은 콩 한 알을 불타게 하지 아니하려고 세 번씩이나 콩 집이 다 부서지도록 도리깨로 있는 힘을 다해서 치고 있거든 하물며 신랑 예수께서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그 신부 한 사람인들 음부로 끌려가게 내 버려 두실 수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잔혹하게 치셔서라도 돌이켜 주고 계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환난의 때에 맞는 신부의 자리에 서는 자의 영광과 그들을 때리게 하는 자들의 멸망을 구별해 보게 하십니다.
(살후1: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십니다.
이 말씀을 미리 들어 두어야 환난의 날에 깨닫고 찬송하는 자리에 설 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했고, (요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또 (마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씀하셨는데 겨울에 추워하는 자들은 환난까지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악한 자의 권세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리라 첫째 부활의 영광을 버리고 주를 부인하는 그들을 보시는 신랑 예수님의 심령에 긍휼이 불붙고 있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말씀하시는 긍휼의 불 같이 타 올라서 주를 부인하는 신부를 결단코 버리지 못하십니다.
따라서 신랑 예수의 긍휼의 불길이 크게 일어날수록 악한 자를 일으켜 때리게 하시는 고통은 더 크게 하실 것입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신 그 신랑 예수를 부인하는 그 신부일지라도 때리고 또 때리고 또 때려서 기어코 돌이켜 주심으로 보여 주신 그 첫째 부활의 영광으로 입혀 주시는 주님의 긍휼이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왜 미리 말씀하십니까? 이 말씀을 들어 둬야 그때 가서 네가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 (눅22:34)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께서 베드로야 지명하시고 내가 네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듣게 하셨고,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지명하여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닭의 울음 소리를 들을 때에 자기에게 하신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함께 있던 제자들은 듣기는 들으면서도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닭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하시는 신랑 예수의 말씀을 내게 하시는 신랑 예수의 말씀으로 들을 때에 첫 삼년반 환난의 때에 이루시는 역사를 밝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 볼 것은 그 기세라고 하셨는데 첫 삼년반 환난의 때에 신부가 된 내가 비록 신랑 예수를 부인하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돌이켜 주시고자 하시는 긍휼의 불길의 기세가 강하게 일어나고 악한 자들의 너를 치는 그 기세가 함께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첫째 부활의 영광까지 보여 주시고 그 자리까지 이끌어 주시는 신랑 예수께서는 그 첫째 부활의 영광을 버리고 주를 부인하는 그 신부 한 사람을 보실 때에 그 심령에서 긍휼의 불길이 맹렬할 것이고 그 첫째 부활의 영광을 불태우는 음부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악한 자들을 들어 잔혹하리 만큼 때리게 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7절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리니' 이 사랑은 어느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까? 태초의 말씀으로 아들의 영들을 지으실 때에 미리 아신 자로 택하셨고 아담과 함께 무화과나무 아래서 가죽옷으로 지어 입혀 주셨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죽어라고 믿지 아니하는 나를 기어코 복음으로 불러 믿게 하셨고 그 중에서도 택함을 입어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영광된 열매를 맺게 하셨고 마침내 신랑 예수로 오셔서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그 영광에 합당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 신랑 예수 마저 부인하는 나를 잔혹하게 때려서 돌이켜 주시는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불들은 아무리 큰 불이라도 많은 물로 꺼질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 사랑은 제아무리 많은 물로도 능히 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물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창13:10)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니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고, (나2: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말씀하여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풍성한 곳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으로 유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22:37) 이 사랑의 불길을 보지 못하는 발람은 모압왕 발락이 특별히 두 번이나 높은 귀족들을 보내서 부를 때에 따라가고 있는 사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창13:7) 그런데 특별히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롯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소돔으로 따라갔던 많은 목자들과 양 무리들이 하나도 구원받지 못하고 유황불에 멸망당하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신랑 예수의 이 사랑이 내 가슴에 불붙는 신부의 믿음에 서 있다면 불타 버릴 세상의 부귀와 영광으로는 유혹할 수가 없는 것을 밝히 나타내십니다.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리니' (창7:23)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에 모든 사람이 땅에서 쓸어버림을 받았으나 노아와 그 가족 여덟 명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벧후2:5) 그 당시에는 홍수로 인하여 육신이 죽었지만은 오늘에는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기뻐하는 그들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 곧 첫 삼년반 환난의 때가 눈앞에 있는 오늘 온 세계가 과학 문명과 물질문명으로 인하여 세상에 치우치게 하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 그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 감투싸움까지 벌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벧전1:24) 풀의 꽃과 같은 세상 영광을 자랑하는 그들의 권세가 결단코 첫째 부활의 영광을 엄몰 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엄몰이라는 낱말의 뜻은 물의 세력이 배를 덮어서 침몰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자랑하는 그들의 권세가 첫째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신부 한 사람을 능히 사로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라고 하신 말씀은 용이 그 입을 벌려 토한 강물은 세상 영광이고, 교회 안에서 세상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이 보는 높은 지위를 말하고 따라서 첫째 부활의 영광을 보는 그 신부들도 마음으로는 은근히 사모할지라도 땅에 속한 자들이 앞다투어 그 감투는 다 잡아 쓰게 하여 지극히 작은 자리 하나도 차지하지 못하게 지켜 주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현실에서 교회 안에서까지 높고 권세 있는 감투를 몰아 쓰고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누리고 자랑하는 그들을 노아의 때에 홍수에 엄몰 당하여 죽어 가는 자들과 같이 보는 눈을 가진 그 신부가 복된 것입니다.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온 가산은 사람이 일평생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평생 동안 충성된 신앙 생활로 이루어 놓은 상급과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70 또는 80을 살면서 제아무리 충성하는 신앙 생활로 이루어 놓은 상급과 영광이 크다고 해서 (계20:6) 첫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여 천년 왕국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제사장 노릇 하는 그 영광에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70년을 산다고 해도 하늘나라의 영광된 열매를 맺는 날 수도 얼마 되지 못하고 또 몸 안에 원죄가 있어서 그 영광을 불태우는 둘째 사망까지 역사하고 있습니다.(계20:15)
그러나 원죄도 없는 신령한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제사장 노릇하는 천년 동안에 이루어지는 그 영광은 아무도 측량할 수가 없으니 그것과 바꾸려 하는 자가 있으면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 곧 첫째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이 사랑 내가 그 주님을 부인할지라도 잔혹하리 만큼 때려서라도 돌이켜 주시는 이 사랑 세상의 부귀와 영광으로도 유혹할 수 없는 천년 왕국의 영광이요 일평생 충성하는 그 신앙 생활로 이루는 하늘의 영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년 왕국에서 왕노릇 하고 제사장 노릇하게 하는 영광으로 찬송케 하시는 이 사랑이 충만케 하여 이김을 주시는 신랑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