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4장 사적 감정이 아니라 진리에 이끌려야 한다 (찬 390)
1.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특별히 사랑했다는 증거는 많다.
압살롬이 암논 다음의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압살롬은 탁월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25).”
압살롬이 그술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애절했다(삼하 13:37~39).
이런 다윗의 마음을 읽은 요압은 한 여인을 사주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불러올 꾀를 낸다.
요압의 사주를 받은 드고아의 여인에 대한 ‘지혜로운’이란 표현은 ‘간교한’으로 번역되어야 하며(2) 그녀는 마귀적 점장이로 선지자 나단을 흉내내고 있다고 아더 핑크는 말한다.
여인은 요압이 꾸며준 대로 다윗에게 말하고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아들을 사면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11). 그리고는 이 일이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면서 압살롬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이 여인이 한 모든 이야기는 사실상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의 이야기 속의 두 아들은 서로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하나가 죽게 된 경우였지만, 압살롬은 계획적인 살인 즉 모살을 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으로 볼 때 두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우발적 살인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모살을 한 자는 단에서라도 끄집어내서 사형에 처해야 했다(출 21:14).
그녀의 이야기 속의 남은 아들은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다윗은 압살롬 외에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 비록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애정이 특별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 같지만(14), 회개했다는 증거도 없고 희생 제사를 드리지도 않은 압살롬에게 은혜가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그녀는 간과하고 있다.
결국 이 여인은 요압의 말로 다윗을 속인 것이다. 이 시도는 겉으로는 용서와 화해의 시도로 보였지만 사실 교활한 마귀의 계략에 불과했다.
회개 없이 죄 용서는 없다. 그러나 다윗은 대충 넘어가라는 유혹을 받은 셈이다.
2. 다윗은 이 여인이 요압의 사주를 받은 것임을 알았음에도 결국 압살롬은 돌아왔다.
다윗은 아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들이고도 그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다시 반역의 길을 걷게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압살롬은 겉으로는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것처럼 묘사되지만(25), 그의 내면의 지혜나 경건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두 해가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을 보지 못한 압살롬은 요압에게 거의 강제적으로 아버지 다윗이 자기를 부르게 하라고 재촉한다.
결국 다윗은 압살롬을 불렀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춰 화해를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것이 화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 많은 사람에게 이 본문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아님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탕자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아들이었지만 압살롬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윗이 아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윗은 고의적인 살인자인 압살롬을 벌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사적인 감정에 이끌린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것 같고 화해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런 다윗의 실수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문은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적 감정이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야 살아야 한다.
4.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모든 상황에서 사적 감정에 휘둘려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저희의 우물쭈물한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고 최상인 선택임을 아는 믿음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