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의 작곡가 金東振 선생은 올해 95세이다. 주옥과 같은 名歌曲으로써
수많은 한국인의 마음을 달래주고 감싸주었던 분의 이름을 딴 거리가 하나 있음직 하지 않은가? 1999년 3월호 월간조선의 인터뷰 기사를
소개한다. [2007.1] 筆談인터뷰/「가고파」의 작곡가 金東振 87세의 巨匠의 청춘 「음정 聽力」을 잃고도
베토벤처럼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작곡한다 「봄이 오면」을 열 여덟에, 「가고파」를 열 아홉 살에 작곡한 뒤 판소리에 미쳤다.
서양의 발성법과 판소리를 결합한 新唱樂을 개척한 지 60년, 공산당에게 反動으로 몰린 뒤 월남하여 「행군의 아침」 「조국찬가」 등 수많은 군가와
국민가요를 지어 복수했다. 「목련화」 「내마음」 「수선화」 등 주옥같은 가곡으로 한국인의 心性을 쓰다듬어준 金東振, 그의 노래엔 恨의
찌꺼기와 그림자가 없다. 金東振은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좋은 것은 슬픈 것과 통한다」고 하면서 『나는 가곡 작곡가보다는 신창악 개척자로
음악사에 기록되길 원한다』고 했다. 金秉石 월간조선 기자
87세 巨匠과의 筆談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진이 빠져버렸다. 누구라고? 언제 보자고? 한마디 물을 때마다 꼬박꼬박 되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올해 87세에 접어드는 원로작곡가
金東振(김동진) 씨는 難聽(난청) 때문에 무척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老聲(노성)임에도 여전히 젊었을때의
美聲(미성)이 전해져 왔다. 金東振 선생과의 인터뷰는 자택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거실에 난방을 넣지 않고 있어 집이 춥다며 굳이 집 부근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겨울 비가 도심을 촉촉히 적셨던 지난 1월27일 낮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한 커피숍에서 金東振씨를
만났다. 4평 남짓한 커피숍 실내엔 클래식 음악이 적당한 음량으로 흐르고 있었다. 입구엔 전기난로 한 대가 바깥의 한기를 혼자 물리치고
있었다.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켰는데도 선생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검정색 코트를 꼭 껴입은 채 창가에 자리해 있는 金東振씨는 첫눈에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도 흐르는 세월만큼은 도리가 없는 듯 보였다. 「가고파」 「봄이 오면」 「목련화」 「수선화」…. 숱한 애창 가곡을 만들어
낸 한국 음악계의 巨匠(거장)이 아니던가. 기자가 속마음을 조금 털어놓는다면 이같은 분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우리 주변에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데 더 경이로움을 느꼈다. 대중음악의 위세가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일까. 『시간이 오래
걸려요?』 기자와의 첫 대면에서 인사 대신 불쑥 물어왔다. 이북 억양이 듬뿍 묻어 있었다. 저녁에 약속도 있고, 무엇보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어 듣기가 어려우니 질문은 글로 써 달라며 서툰 손 동작으로 귀에 보청기를 꽂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실내의 음악이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주인에게 음악을 좀 꺼달라고 양해를 구한 뒤 먼저 근황을 물었다. 『뭐라구요?』 상대가
難聽임을 순간적으로 깜박했다. 큰 소리로 즉각 되물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험난한 인터뷰가 예상됐다. 이후 질문은 내내 筆談(필담)과 큰 소리가
마구 섞인 채 진행됐다. 『요즘 하는 일부터 얘기할게요. 작곡하고 있어요. 서울 定都(정도) 6백년 위원회 있죠. 그 사업회에서
기념사업으로 작곡을 해달라고 해서 「자랑스런 서울시민의 노래」와 「강변에 살던 누이야」라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앞 노래는 일반인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고, 「강변에 살던 누이야」는 예술 노래인데 독창곡이에요. 두 곡을 어제 끝내고 모두 넘겨줬어요. 한달 동안 애써서 한 거예요.
그리고 중요한 건, 아직 작품 쓸 게 많이 있어요. 「아름다운 서귀포」라는 작품을 부탁받았고, 또 5월에 마산에서 「가고파」 관련 행사를
한대요. 「가고파」에 관계되는 오페라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것도 만들어야 해요. 내일부터 착수하려고 그래요』 金선생은 첫번째 질문은 미리
알고 왔다는 듯 거침없이 이어 나갔다. 듣는 건 힘들어도 말하는 데는 힘이 넘쳤다. 발음도 또박또박해 상대방이 알아듣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지난 1년 동안은 뭘 했는고 하니…』 묻지도 않은 말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동시에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방 지퍼를 여는 동작이 불편해 보였다. 미세한 동작이 요구되는 일은 이제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金옹이 탁자 위에 막 꺼내놓은
종이는 A4 용지 6백여 장 분량의 악보 뭉치와 시집 한 권이었다. 『「세계 속의 새한국」이라는 詩(시)예요. 趙永植(조영식)
경희대학원장님이 만든 詩인데, 1996년도에 곡을 붙여 칸타타(교성곡)로 만들었던 작품이에요. 이번에 이 곡을 편곡해 오케스트라로 만들었어요.
작년 봄부터 1년간 이 작업에 매달렸어요. 이 詩 작품 중에 「하나가 돼라」는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30분짜리 곡을 특별히 만들었어요. 남북이
하나가 되라를 강조한 거지요』 작곡을 의뢰한 경희대측은 趙永植 경희대학원장이 지은 시에 96년 金東振 선생이 이미 피아노 곡으로 만든걸
최근 交聲曲(교성곡)으로 다시 편곡했다고 말했다. 「문화세계 창조」라는 새 제목을 붙인 3시간짜리 이 작품은 올 5월 경희대 開校(개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初演(초연)될 계획이다. 학교측은 전부가 힘들면 일부만이라도 반드시 金東振 선생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金東振씨는 1963년부터 78년까지 15년 동안 경희대 음대교수로 재직했고, 1974년엔 음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金선생도 여건만 되면 이곡을 직접 지휘해보고 싶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근황을 들으면서 점차 87세라는 고령에 의심을 품게 됐다.
「그냥 쉬고 계시겠지」했던 애초의 짐작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다. 베르디도 여든이 넘어 그의 오페라 「팔스타프」를만들었다. 하지만 金東振
선생이 이렇게까지 왕성하게 음악 활동을 하고 있으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여기엔 분명 金東振씨만의 비결이 있을 것 같았다. 『밥 조금
먹는 거지요. 小食(소식). 그거예요. 과도한 운동은 안하고. 대신 하루도 안 빠지고 하루 3천 보 정도 걸어요. 집 뒤 인왕산에 매일 걸어
올라다니는데 높이는 못가요. 요즘은 추워서 오전 10시쯤 산에 올라가요. 그래서 오전엔 약속을 안해요. 그런데 요사이엔 힘이 들어 하루 너댓
시간밖에 작업을 못해요. 하루종일은 못하겠어요. 쉬고 또 하고. 그런데 작곡이라는 건요, 하루종일 하는 게 아니에요. 한참 생각하다가
樂想(악상)이 떠오르면 쓰는 거예요. 자다가도 樂想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써요』 작곡 얘기가 나오자 화제가 어린 시절로 옮아갔다.
金옹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음악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金옹은 1913년 平南(평남) 安州(안주)에서 부친 金化湜(김화식)씨와
조부 金燦星(김찬성)씨가 모두 목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 찬송가를 듣고, 당시엔 귀했던 풍금을 만지면서 음악에 눈뜨기
시작했다. 『유치원 시절에 할아버지가 거문고를 사다 줬어요. 할아버지는 국악밖에 모르니까, 그걸 사다 준 거예요. 그 큰 악기를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잖아요. 한달쯤 공부를 해봤는데 소리도 좋지 않고, 악보도 없고. 아무래도 재미가 안 붙더라구요. 그런데 당시 교회엔 풍금이
있었잖아요. 교회에서 풍금 소리도 듣고 찬송가도 듣고 하니까. 그게 좋아지더라구요. 화음도 있고. 그래서 나는 양악을 하겠다고 어른들 한테
말씀드린 거예요. 국악은 안하기로 했어요』(그러나 후에 金옹은 新唱樂을 주장하면서 다시 국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생을 어릴 때
音感(음감)에 대한 소질이 매우 뛰어났다. 이 때문에 열살에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선물받았고, 이 선물이 선생의 인생을 결정해
버렸다. 『천재라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노래도 잘 했어요. 예배당에서 독창도하고. 옛날 사람들 찬송가를 다 틀리게 부르잖아요.
내가 악보를 전혀 모를 어릴 땐데, 사람들이 찬송가를 틀리게 부르는 것 같아서 그걸 다 고쳤더랬어요. 나중에 내가 고친 게 원래 찬송가하고 다
맞아요. 音感이 그렇게 좋았던 거죠. 그 당시엔 정말 악기가 드물었어요. 피아노도 없고, 풍금도 많지 않았어요. 다행히 친척 목사 중에 풍금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분한테 배웠어요. 바이올린을 선물받기 전까지는 하모니카도 많이 불었어요. 당시엔 악기가 귀해 하모니카로 음악한 사람이
많았어요』
18세에 「봄이 오면」, 19세에 「가고파」 작곡 金東振씨는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처음 배운 뒤 교회
할머니들 앞에서 연주할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열두 살쯤 됐을 거예요. 교회 할머니들한테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어요. 연주 뒤에 그냥
들을 수 없다며 할머니들이 돈을 거둬 15전을 모아 준 거예요. 그게 최초로 음악해서 번 돈이에요. 요새 돈으로 1만5천원
될까요』 얘기를 나누는 동안 서서히 天才性(천재성)이라는 것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천재란 일정한 궤도를 거부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천재는 보통사람과는 분명 다르게 태어났다가 다른 궤적을 그리고 간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천재를 닮았다. 그는 생애 첫 작품인 가곡 「봄이
오면」을 중학 5학년 때인 열 여덟 살에 지었다. 멘델스존은 「한여름 밤의 꿈」을 17세에 지었고, 쇼팽도 C단조 소나타를 같은 나이에
작곡했다. 선생은 1978년 세광출판사에서 낸 가곡집 「목련화」에 「湖心의 獨白」이라는 회고담을 실은 적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봄이
오면」에 얽힌 얘기를 상세히 적고 있다. 〈나는 문학에도 적지 않은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당시(학창시절) 내가 갖고 있던 3인
詩歌集(시가집) 중 첫 페이지에 있는 金東煥(김동환)의 「봄이 오면」, 朱耀翰(주요한)의 「부끄러움」, 李光洙(이광수)의 「외붓 한자루」는 특히
내가 늘 외우고 다니던 애송시였다. 이 세 편의 시를 모두 작곡하고 싶었지만, 그 중 「봄이 오면」만이 그때에 작곡된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있었는데, 어느날 밤 나는 학교 음악실에 가서 혼자 바이올린 연습을 끝내고 풍금을 치며 발성 연습을 하던
차 내 머리에는 갑자기 「봄이 오면」 중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의 樂想이 떠올랐으며, 동시에 나의 손가락은 어떤 선율을 짚고
있었다. 나는 즉시 오선지에 그 선율을 옮기게 되었고, 그것이 끝나자 내가 지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통 황홀감에 차 있었다. 곡이
완성된 뒤 나는 한 방에서 지내던 張大郁(장대욱)에게 처음 그 노래를 배워주어 같이 불렀고, 그 후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기숙사에 퍼졌으며
숭실전문학교에까지 파급되어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애창되었다〉 「봄이 오면」을 작곡할 당시 金東振씨는 和聲學(화성학)이나
對位法(대위법)을 배우기 전이었다. 남해 바다의 밀물 같은 향수로 온 국민의 마음을 적셔 온 가곡 「가고파」도 그 다음해에 지은
것이다. 『和聲學이라는 건 문법과 같은 거예요. 아이 적부터 바이올린을 했으니까 음악 나라에 산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음악 나라의 언어는
작곡과 연주예요. 굳이 화성을 몰라도 작곡할 수 있어요. 어린 아이들이 문법을 몰라도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내가 작곡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해 본 건데, 「가고파」도 화성학을 모르고 작곡한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곡을 보이니까 작곡에 소질이 있다고 말해 준
거예요. 화성학과 對位法(대위법)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우라고 해서 그때 다 배운 거예요』 이때 金東振씨의 선생은 당시 선교사로
숭실학교에 와 있던 미국인 말스배리(Dwight R. Malsbary)였고, 그로부터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밖에 바리톤, 클라리넷 등
다른 악기도 이때부터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말스배리와의 인연이 음악 인생을 열어준 큰 계기가 됐다고 여기고 있다. 金선생은 음악 이외
다른 공부도 잘했다고 한다. 『중학교 1, 2학년 땐 거의 톱을했어요. 특히 영어를 잘 했어요. 졸업하고 미국 가서 음악 공부하려고
영어를 열심히 했어요(선생은 1936년 숭실학교 졸업 후 미국이 아닌 일본니혼고등음악학교에 유학, 2년간 음악 공부를 했다). 수학은 아주
싫어했어요. 그런데 5학년 올라가면서 음악에만 열중하다보니 학업 성적이 자꾸 떨어지더라구요』 金東振씨는 작곡과 나이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의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는 나이가 들면 신중해진다고 했다. 『작곡이란 건 어렸을 때 했다고 나쁘고, 어른이 돼서 했다고
좋고, 그런건 없는 것 같애요. 화성학 모를 때 작곡한 것도 다 유명하잖아요. 제대로 배워서 작곡해도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지. 다
비슷비슷해요. 대신 나이 들면 많이 생각하게 돼요. 조그만 작품하나 쓰는 데도 악보를 쓰고 또 쓰고. 같은 歌詞(가사)를 놓고 수십 개를 써요.
나이드니까 자꾸 생각이 많아져요. 그 만큼 신중해지는 거예요. 거기서 고르는 거야. 고르는데 첫번 곡으로 올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몰라 아주 고생할 때도 있어요. 젊었을 땐 빨랐어요. 악상이 떠오르면 그게 곡이 되는 거예요. 「가고파」 「수선화」 「봄이 오면」
다 빨랐어요』
『「가고파」는 人生을 노래한 것』 어린 시절 얘기가 대충 끝나자, 선생은 『배가고프다』며 대뜸
점심 먹으로 가자고 했다. 순간 기자는 당황했다. 점심을 먼저 먹고 왔기 때문이다. 멈칫거리는 기자에게 『우리, 점심 같이 먹기로 하지
않았어?』라며 일어설 것을 권했다. 이 모든 것이 선생의 聽力(청력)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점심여부가 미심쩍어 이날 오전 확인 전화를 했다가
선생이 계속 『뭐? 뭐』하는 바람에 전화를 끊고 서둘러 점심을 먹어 버렸다. 사태 설명을 하려다 그만두고 난생 처음으로 점심을 두번 먹겠다고
마음을 정한 뒤 선생을 따라 나섰다. 효자동 한옥촌 골목을 걷다보니 기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바둑은 두십니까? 바~둑~』
종이와 펜을 모두 가방에 넣은 뒤라 큰 소리로 두번 고함쳐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힐끗 쳐다봤다. 『언제 그런 거 할 시간이 있어야지.
음악 공부하느라 한번도 못해 봤어. 시간만 나면 바이올린하고, 노래 연습하고. 장기니, 화투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전혀 안해요. 담배도 안
피워요. 음악이 유일한 취미야』 기생집도 안가봤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어른돼서 학교 선생들하고 회식하면서 그런데 몇 번
가보긴 했지. 그냥 맥주만 마시고 왔어요』 식당에 도착했다. 선생이 가끔 들르는 한식당이라고 했다. 선생은 돌솥 定食(정식)을 시켰고,
필자는 궁리 끝에 국수를 시켰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가곡 「가고파」에 대해 얘기했다. 『숭실중학시절에 평양에서 玄濟明(현제명)씨가
독창회를 가졌어요. 자기가 작곡한 「가고파」를 연주해요. 그걸 듣고 저것보다 더 좋은 곡을 작곡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 마침 수업시간에
담임인 梁柱東(양주동) 선생님이 李殷相(이은상)씨의 신시조 「가고파」를 강의했어요. 현제명씨 노래를 들은 일도 있고, 또 시가 좋고해서 작곡을
시도한 거죠. 많이 생각 안했어요.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그 테마가 우연히 생각이 났어요. 「가고파」 후편의 작곡은
40년 뒤에 서울에 와서 했어요. 신시조인 「가고파」가 10수거든요. 처음엔 4수까지만 작곡했어요. 4수 정도면 독창곡이 충분히 되거든.
나머지는 이은상씨 古稀(고희)기념 음악회 때 완성했어요』 우리가 흔히 듣고 부르는 가곡 「가고파」는 4수까지의 노래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애창 가곡 순위를 조사하면 늘 「가고파」가 1등을 했는데 요즘은 「그리운 금강산」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 같다고 슬쩍
물었다. 『요즘 시국 때문에 그런 거 같애요. 금강산에도 가고 하니까…』 인터뷰 시작 후 그에게서 들은 가장 짧은 답변이었다.
金東振씨는 화제를 다시 「가고파」로 끌고 갔다. 『「가고파」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좋죠. 그래서 좋아들 하는데. 前篇(전편)은 고향을
그리는 노래지만, 고향이라는 건 상징이지. 그리움, 향수 같은 거. 이은상씨 말에 따르면 일제시대 일본에 핍박받지 않은 고향, 나라, 그런 걸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고향이라는 게 마산 앞바다만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정치적으로 말하면 해방된 조국,
이걸 바라는 거. 後篇(후편)은 좀 더 깊어요. 어릴적 놀던 동무 얘기가 나오다가 세월이 흘러 다 시집 장가가고, 처녀들은 어머니되고,
아이들은 아버지되고, 다 그렇게 됐는데, 인생이란 갈라져서 산다. 남북 분단의 설움이 표현된 거예요. 그건 내가 해석을 한 거예요. 마지막 편은
인생은 죄없이 살다가 고향에 가서 살기 원하는 거, 그러다 죽는 거. 그게 진짜 고향이라는 거지. 그래서 「가고파」는 전부를 보면 인생을 그린
거예요. 딴 사람들은 잘 몰라요.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 있어. 大曲(대곡)이지. 인생을 전부 노래한 거야』
『천
곡쯤 작곡… 어느 것이 제일 좋다고는 말 못해』 金東振씨의 초기 가곡에 대해 음악계는 우리의 가곡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가고파」를 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閔庚燦(민경찬·42)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金東振씨는
有節(유절)가곡에서 通節(통절)가곡을 만든 분입니다. 유절가곡은 애국가 같은 거죠. 몇 수의 시가 있다면 각 수마다 똑같은 멜로디가 반복이
돼요. 金東振씨보다 시대가 조금 앞선 홍난파와 현제명의 가곡이 유절가곡입니다. 그런데 통절가곡은 각 수마다 다른 멜로디를 붙여요. 「가고파」가
그렇죠. 각 수마다 그 詩語(시어)의 정서, 이미지를 살려 제각기 다른 곡을 붙이는 거죠. 가곡이 한국적이냐 아니냐라는 찬반론은 뒤로 하더라도
金東振씨가 한국 가곡의 한 정형을 만들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요. 우리 가곡을 애창 가곡 수준에서 예술 가곡으로 한 차원 높인
거죠』 도대체 金東振씨는 지금까지 몇 곡을 작곡했을까. 음악의 질보다 양을 한번 따져 보았다. 그 중 본인이 제일 아끼는 곡도 있지
않을까. 『쓰긴 많이 썼지. 나도 정확하게 알순 없지만, 전부 다 합쳐서 1천 곡 되는 거 같애요. 가곡, 교가, 군가, 국민가요,
오페라, 동요 전부 다 해서. 조그만 노래라 하더라도 좋은 곡 써야 돼요. 내가 내 노래 중 좋아하는 건 얘기 못하겠어요. 남들은 취향에 따라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할 수 있겠지. 예를 들어 자기 아이가 많잖아요? 아이들 중 누가 제일 좋냐고 물어 보면 다 좋다고 하지, 누구를 찍어
좋다고 할 수 없거든. 다 좋아해요. 그런데 남들은 「가고파」를 좋아한다고 하대요』 본인 노래 외에 좋아하는 노래를 물었다. 이 질문에
선생은 한참 웃기만 하다가 말을 이었다. 『말하기 어려운데. 글쎄, 요새 내가 노래 안하니까. 옛날에 노래할 땐 여러 가지
좋아했지.오페라도 좋아하고, 이태리 가곡을 특히 좋아했어요. 독일 가곡보다 더 좋아했어요. 요즘에 좋아하는 건 신창악, 신창악이라는 게 제일
좋아요. 판소리 갖고 만든 거 있어요』 新唱樂(신창악)은 사실 김동진씨가 평생의 話頭(화두)로 삼고 주창해 온 본인 노래이다. 신창악은
식사후에 다시 자리를 옮긴 뒤 물어 보려고 남겨둔 주제다. 다만 짧게 그건 선생님 노래가 아니냐고 따져 보았다. 『민요 중 「새타령」
같은 것도 내가 다시 만들긴 했지만, 원래 내 곡은 아니잖아요. 「새타령」 같은 거 좋아해요』 주문한 식사가 늦게 나왔다. 小食(소식)을
한다는 분이 생각보다 식욕이 왕성했다. 건강 비결이 딴 데 있는 것 같았다. 구운 조기에 젓가락이 많이 갔다. 떨어진 반찬은 더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돌솥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웠다. 선생의 식사 모습을 보고는 기자도 국수를 반쯤 비워냈다. 점심을 마친 뒤 다시 그 커피숍으로
향했다.
『클래식해서 돈 못 벌어』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또 客談(객담)을 나눴다. 먼저 가장 세속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음악하시면서 돈은 많이 벌었습니까. 『클래식하는 사람이 돈 벌었다는 소리 들어봤어요?』 ―요즘 고정
수입은 있습니까. 『요즘은 없죠. 학교 명예교수(경희대)로 나가는 거 하고, 예술원 수당 좀 있고. 조금밖에 안돼요』 ―생활은
뭘로 하십니까. 『저작권료 좀 나오는 거 갖고 살아요. 클래식은 저작권료도 얼마 안돼요. 지난달엔 60만원인가, 70만원인가
나왔대』 ―자식은요. 『아들 둘, 딸 하나』 ―음악 안 시켰습니까. 『딸이 피아노해요. 김신화라고. 아들 둘은 어릴
때 시켜봤는데 둘 다 1년하다 집어쳤어요. 내가 가르쳐야 되는데 내 할 일이 많아서 못 가르쳤어요. 아이들은 곁에서 가르쳐야지, 혼자서
안돼요』 커피숍에 도착했다. 커피숍 주인이 우리를 보자, 이번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웃으며 음악을 꺼 줬다. 다시 커피를 시켜놓고
요즘도 노래를 부르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귀가 못 쓰게 되니까, 노래가 되질 않아요. 그거 이상하데. 노래 부르면 나는
도-레-미 했는데 딴 사람들이 도-레-미가 아니래요. 음의 높낮이가 안 맞는대요. 그러나 작곡은 마음으로만 하니까, 마음속으로 음은 들리거든요.
실제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분간을 못해요. 화음도 분간이 안돼요. 그래서 요즘엔 피아노도 필요 없어요. 그냥 마음으로
작곡해요』 聽力(청력)과 노래에 이런 상관 관계가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약간 혼란스러웠다. 남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이라는 건
이미 짐작했지만, 본인이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金東振씨는 성악가이기도 하다.
신창악을 하면서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불렀고, 이의 전수를 위해 레코드를 위해 레코드를 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최근 작곡한 노래를
피아노로 옮길 수도, 남의 연주를 통해서도 들을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아니,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곡을
만들어내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총소리 듣고 음정 분별 기능 상실 『10년 전 미국 알래스카에 교수 몇몇과
갔다가 뱃전에서 고기 사냥을 구경하게 됐어. 바로 곁에서 누군가 총을 쐈는데, 그 총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귀가 못쓰게 됐어요. 그때부터 귀가 딱
막히데요. 병원갔더니 음정을 분간하는 신경이 못쓰게 됐대요. 소리는 들리지. 그런데 노래는 못해. 안돼. 음정이 안돼요. 나는 이걸 냈는데,
실제로 그 소리가 안나온대요. 신창악할 땐 매일 발성 연습을 했는데』 기자는 나이에 의한 청력의 자연 감퇴 정도로만 여겼는데, 사고
때문에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도 다소 의외였다. 베토벤의 운명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베토벤은 아주 못 들었지. 나는 들리는데도 분간을
못해. 그래서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거든. 음악도 들으면 내 노래는 얼핏 짐작이가요. 짐작으로 알아 들어요. 그런데 딴 사람 노래는
전혀 몰라요』 金東振씨의 노래엔 恨(한)을 찾기가 어렵다. 예술은 그 시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恨의
시대가 아닌가. 그가 생각하는 그의 음악의 主調(주조)가 궁금했다. 우수의 노래인가, 아니면 힘찬 노래인가. 『서정적인 노래가 많지.
가곡들은 다 서정적이지. 서정적이라고 해서 恨이 맺힌 노래는 아니야. 서정적인 건 멜로디가 좋다는 얘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악 2악장 말이에요(이 대목에서 선생은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선율을 들려 줬다). 아주 경쾌한 노래예요. 그런데 들으면 슬퍼져요.
일종의 감격이란 게 느껴져요. 감동을 주는 노래는 아름답고, 힘있게 하면 힘있는 거죠. 아름다운 선율이 있는 음악은 다 슬퍼요. 좋은 건 다
슬픈 거와 통해요』 金東振씨는 일본 유학 후 1939년 만주 新京(신경)의 교향악단에 입단,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 6년간 활동했다.
자신의 곡을 발표할 땐 지휘를 맡기도 했다. 지휘자 수업은 이때 쌓았다. 가곡 「내 마음」과 「수선화」가 이 시절 작품이고, 그의 첫 관현악곡인
「제례악」도 이때 완성했다. 「新(신)아리랑」 「넝쿨타령」 등 수많은 민요도 양악으로 편곡을 시도, 후에 신창악으로 표출되는, 민족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金東振씨는 이때 당시 「내 마음」이라는 詩에 곡을 붙이기 위해 실제 호수를 찾기도 했으나, 악상을 떠올리는 데 실패한
경험이 있다. 『작곡이라는 거, 자꾸 장소를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데, 장소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 마음은 호수요」도 만주에 있을
때 호수를 찾아가 실제 앉아봤더니 영 마음에 드는 테마가 안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침 출근길에 길에서 악상을 얻었어요. 극장 앞을 지나다가
그 테마를 잊어버릴까봐 계속 입으로 노래하면서 연습장까지 갔어요. 거기 가서 오선지를 얻어 악보를 썼거든.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거야. 그
악보를 테너 李仁範(이인범·작고)씨가 가져 갔어요. 이인범씨가 서울에 가지고 가서 그 노래가 빨리 퍼진 거예요』 「내 마음」이 애창
가곡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시대였고,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부르고 있는 건 절박한 시대상황과 동떨어진 게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지나치게 한가로운 게 아니냐고 물었다. 『노래는 가사 때문에 불리는 게 아니에요. 예술가곡은 특히. 음악 자체가 좋아야지요. 외국
가곡도 가사 때문에 부르는 게 아니에요. 곡이 좋으니까 부르는 거지. 우선 거기서 출발해야 돼요. 이 노래가 많이 불리는 건 선율이 좋거든요.
그래서 많이 부르는 거예요』 金東振씨는 해방되던 날인 1945년 8월15일 정오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현재 평양
국립교향악단 및 합창단의 前身(전신)격인 평양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 지휘자 및 작곡가로 활동하게 된다. 『내가 만주에서 해방되는
날 돌아왔거든요. 음악하는 사름 다 모아 합창단과 교향악단을 만들었어요. 처음엔 잘해 나갔죠. 초창기엔 공산당 간섭을 안 받았어요. 그때
아버지는 교인들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했어요. 처음엔 정당을 조직해도 괜찮다고 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아버지가 검거당했어요. 이후 나도 자연히 반동으로 찍혀 1년 만에 교향악단에서 숙청됐어요』 金東振씨는 숙청 이후 일체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숭실학교 시절 말스배리 선생한테 배운 피아노 조율로 생계를 유지했다. 『1946년 내가 숙청된 뒤 딴 사람이 악단 지휘를
맡았고, 이름도 국립교향악단으로 바꿨어요. 1·4후퇴 때까지 평양에 남아 있었죠. 피아노 조율을 했어요.밥은 먹고 살아야 되니까. 학교 다닐 때
내가 피아노 조율을 잘 했거든. 나같은 사람은 남한으로 넘어가기도 힘들었어요. 동생이 그때 내려가다 행방불명됐어요. 딴 집은 괜찮은데 우리 집은
반동 집안으로 찍혀 힘들었지』 金東振씨는 1·4 후퇴 때 바이올린 하나만 챙겨들고 파괴된 대동강을 곡예하듯 건너 서울에 왔다. 서울에
도착해 헌병에게 검문을 당했을 때 「가고파」 때문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그 당시 서울에 와도 아무나 통과
안시켰거든요. 데려다가 조사하고, 그랬어요. 찻길로 걸어왔으니까. 그때는 빨갱이도 섞여 내려올 수 있고 하니 많이 경계했죠. 일행도 몇명
있었어요. 그때 검문하던 헌병한테 평양에서 왔다 하니까 자기도 평양에서 왔대요. 1·4 후퇴 전에 유엔군 환영 음악회를 부친이 목회를 맡았던
평양 章臺現(장대현)교회에서 했거든요. 내가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어요. 헌병이 그걸 봤대요. 그런데도 내가 그 지휘자인지 믿을 수 없대요.
그래서 「가고파」를 아느냐고 물었지. 교과서에도 나오고하는데, 그 노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그래요. 내가 작곡했다고 얘기했더니 보내
주더라구요』
軍歌답지 않은 멜로디 공산 정권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남한으로 넘어온 金東振씨는 곧바로 육군의
종군작가단에 들어가 군가보급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수많은 군가를 작곡하게 된다. 「가고파」의 명성에 가려진 그의 또 다른 일면이다. 지금도
군대에서 새벽 구보 때나 행군 때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인 「행군의 아침」을 그가 작곡했다. 군 복무 경험자들에 따르면 새벽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늘 뭉클한 마음이 솟곤 했다고 한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비록 군가이긴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새겨보면 결코 군가 답지 않은 金東振씨의 독특한 분위기가 풍긴다. 『「행군의 아침」은 내려와서 맨 처음 작곡한 거예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찻간에서 작곡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短調(단조), 마이너를 좋아해요. 그래서 短調를 썼지. 종군작가단에 있으면서
바이올린으로 공연도 많이 갔어요. 시인 楊明文(양명문)하고 많이 다녔는데, 향로봉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갈 때마다 부대가와 사단가를
지어주었어요. 뒤에 해군 정훈음악대 창작부장까지 했지. 지휘도 하고, 심청전 뱃노래도 이때 처음 연주했어요』 국방부가 1996년에 발간한
「군가 총록집」을 보면 군가 편에 실린 2백25곡 중 16곡이 金東振씨가 작곡한 것이다.대표적인 곡으로 「행군의 아침」 외에도 「육군가」 「멸공
돌격가」 「조국수호의 노래」 「이등병의 노래」 「우리는 육군」 「월남 파병의 노래」 등이
있다.
조국찬가 총록집에 수록돼 있지 않은 부대가나 사단가도 많다. 군복무자에게 많이 알려진 노래로는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로 잘 알려진 「제2훈련소가」가 그의 노래이다. 논산 훈련소를 거친 사람은 모두 아는 곡이다. 이외 2군사령부의
部歌(부가)인 「제2군가」를 비롯, 수도기계화사단, 1, 6, 12, 26, 32, 65사단의 사단가도 그가 지었다. 총록집의 건전가요 편에
실려 있는 힘찬 노래― 「동방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의 「조국찬가」도 그의 곡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1946년 1월 국방경비대
창설 이후 우리나라 군가는 제대로 갖춰진 게 없어 주로 외국의 행진곡들을 연주하거나, 애국가를 많이 연주했다. 1948년 건국 이후 국방경비대가
군으로 승격된 뒤에도 「진군가」 등 몇 곡을 빼면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면서 군가도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국방부에 정훈음악대가 조직되어 朴是春(박시춘)씨를 비롯한 전문 음악인들이 활동했고, 이와 별도로 육군에 종군작가단이 만들어져 金東振씨가
참여하면서 현대적인 군가 체계를 갖추게 됐다. 金東振씨는 휴전 이후 서라벌예대 교수로 일하면서 「진달래꽃」 「못잊어」 등 시에 곡을 붙인
노래와, 「건설의 노래」 「근로의 노래」 등 많은 국민 가요를 작곡했다.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을 맞아 金東振씨는 毛允淑(모윤숙)의 詩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 곡을 붙여 교성곡 「승리의 길」을 작곡했다. 그는 또 5·16 혁명 1백일제 경축음악회에서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국재건 등 교성곡 「조국」 3부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金東振씨는 인터뷰에서 이 시기를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음악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문공부장관 했던 吳在璟(오재경)씨 알죠. 그 양반이 음악도 잘 아는 사람이거든요. 그 분 부탁으로 「승리의 길」이라는
칸타타(교성곡)를 작곡했지. 건국 10주년 때일 거야. 그걸 직접 지휘하고 연주했어요. 「조국」 3부작도 직접 지휘하고. 문공부 일을
많이 했어요. 오재경씨가 내 실력을 아니까, 특별히 부탁한 거지. 그 당시가 가장 활발했을 때인 것 같아요』 가곡 같은 고급 음악이나
국민 가요만 추구해 온 金東振씨에게 문득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을 묻고 싶었다. 먼저 요즘 10대들의 우상인 HOT, 젝스키스, SES, UP,
태사자, 핑클 등 그룹 이름을 들려줬다. 『하나도 몰라요. 뭐예요?』 ―요즘 가수들이에요. 『난 듣지도 않아요. 흔들고
뒹굴고. 그게 뭐예요? 그게 다 타락하는 길이에요. 건전하지 못하거든. HOT는 얼마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거 맞아요?』 ―HOT는
아시네요.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다가 봤어요. 그 사람들 서양사람들이에요?』 ―우리나라 가수들이에요. 혹시 김건모나 서태지는
아세요? 『서태지 이름은 들어봤는데 노래는 안들어요. 내가 제일 반대하는 거예요. 이런 음악들. 가끔 유흥이 필요하긴 하지. 그런데 전부
그런 것뿐이야. 방송국에서도 클래식은 양념으로 조금 내놓고, 전부 그런 음악만 해요』 ―그럼 얼마 전 타계한 孫牧人(손목인) 선생의
「목포의 눈물」이나 「타향살이」는 어때요. 『손목인은 친하게 지냈지만, 노래는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젊은 세대는 가곡을
듣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싫어하는 음악만 고집하죠. 『孔子(공자)가 그랬지요.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 음악을 들으면 안다고. 음악이
淫蕩(음탕)하면 나라가 음탕하고, 음악이 건전하면 나라가 건전하다고 했거든. 이런 음악만 성행하면 백성들이 망해요. 어린애들 사탕 좋아한다고
사탕만 먹여봐요. 어떻게 되나』 ―대중 음악 자체를 무척 싫어하시네요. 『대중 예술이라는 말부터 싫어요. 가끔 휴식으로서 들을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데 취하면 좋은 예술을 몰라요. 그런 음악만 아이들한테 자꾸 들려주면 타락하기가 쉽다 이거죠. 세종문화회관에서 HOT가 인기
끈다고해서 스트립쇼 한번 해 보세요. 진짜 스트립쇼. 아마 손님들이 더 많이 몰릴거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다 좋은
거예요?』
新唱樂에 도전 60년 본인이 추구해온 음악을 위해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는 老(노)작곡가는 대중음악을
얘기하는 내내 표정이 일그러졌고, 목소리는 격앙됐다. 일세를 풍미했던 가곡이 새로운 장르가 나올때마다 하나 둘씩 영역과 관심을 뺏겨온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대중음악에 대한 그의 反感(반감)은 더욱 커 보였다. 미뤄뒀던 新唱樂으로 화제를 옮겼다. 신창악은 金東振씨의 필생의
話頭였다. 그의 평소 주장에 따르면 신창악은 서양 발성법을 토대로 우리의 판소리 기법을 접목시킨 한국 국적이있는 최고 수준의 성악 음악이다.
그는 신창악의 결정제로 1993년에 신창악 오페라 「沈淸傳(심청전)」을 완성했고, 1997년에 「春香傳(춘향전)」을 완성해 그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외에도 「새타령」 「농부가」 「뱃노래」 등 민요를 신창악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유치원시절 할아버지가 사 준 거문고를 버리고,
아버지가 사준 바이올린을 택했던 그였다. 무엇이 그를 신창악으로 이끌었을까. 『1935년 숭실전문학교 4학년부터 신창악에 대해 관심을
가졌어요. 사실 60년이 훨씬 넘은 거예요. 당시 평양에 판소리 명창 李東伯(이동백)이 심청전과 춘향전 공연을 했어요. 그때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판소리가 이렇게 좋은 데가 있구나. 이걸 오페라로 만들면 세계적인 작품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이후 일생 동안 판소리 연구와
採譜(채보), 발성 연습을 공부해서 나온 게 신창악이에요. 심청전과 춘향전 오페라도 만들었고, 민요로 새타령 농부가 등을 레코드까지 만들었지.
직접 노래해서 만들었어. 그 길을 내가 개척했지』 金東振씨 설명에 따르면, 그는 오페라 「심청전」의 경우 신창악을 시작한지 58년 만에,
「춘향전」은 62여년 만에 완성했다. 우리나라 가곡의 선구자로만은 부족했을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실제 가곡이나 국민가요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신창악에 쏟아부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거기에 미쳤다고 했다. 『처음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해도 못하고,
판소리를 갖고 장난치냐며 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하면 목소리 버린다고 못하겠다고 그러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평양 중앙교향악단을 지휘할 때 소련사람들이 자주 왔어요. 한번은 너희 음악 들려달라고 그래요. 판소리를 들려줬지.
그건 옛날 노래니, 요즘 너희 노래를 들려달래요. 그래서 내가 지휘하다 말고 신창악을 직접 불러줬지. 그때 그 사람들이 바로 그거라는 거예요.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지 몰라요』 金東振씨는 만주시절부터 틈틈이 작곡해 온 「심청전」을 남한에 내려 온 뒤 거의 작업을 끝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還都(환도)하자, 「심청전」을 오페라로 만들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음악계의 완강한 반대와 비협조로
初演(초연)이 무산됐다. 음악인들이 반대한 이유가 『심청전에 이북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월남했을 당시 이같은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첫번째 일화이다. 『6·25 때 「육군가」 만들 때도 이북노래라고 음악가들이 반대한 적이 있어요. 작곡 공모를 했는데 내가
당선됐거든. 나중에 재판까지 했잖아요. 군인들이 있는 데서 반대하는 편과 나하고 붙었어요. 결국 내가 이겼어요. 그래서 「육군가」가 나온
거예요. 그때 고생도 하고 미움도 받았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심청전」도 이북 냄새 난다고 반대한 거예요. 첫 상연 때 반대가 많았지만, 뒤에
결국은 했어요. 이북에 있을 때 사실 내가 전부 한거거든요. 내가 그걸 주장해서 사실 만들어 놓은 건데, 이북식이라고 그래요. 요즘은 그런 말
못하죠』 또 다른 일화다. 『국악계 쪽에서는 별 비난이 없었어요. 오히려 좋아했지.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이 비난한 거야.
1950년대에 문공부에서 판소리 채보 사업이 있었어요. 그때 나운영, 김성태, 나 셋이서 춘향전 판소리 채보하는 사업을 맡았는데, 처음에 나는
끼워주지도 않았어요. 김성태하고, 나운영이는 여기 사람이니까. 그런데 후에 누가 알고 나를 추천해 끼워 줬어요. 金東振이는 채보사업을 많이 했고
권위자라고 추천해 준 거야. 전편은 내가 맡고, 중편은 나운영, 하편은 김성태가 맡았더랬어. 그때 金素姬(김소희·작고)한테 가서 1년 동안 집을
드나들며 배웠어요. 심사결과 내 것만 오케이가 됐어. 국악하는 사람들 모아놓고 채보한 대로 내가 실제 노래불렀거든요. 판소리 명창
林芳蔚(임방울) 알죠? 그때 그 사람이 새로운 판소리 명창이 나왔다고 그랬어요. 신창악에서도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인재가 나와야
되요』 金東振씨는 판소리에 처음 매력을 느낀 뒤 만주에서 오페라 「심청전」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서양냄새가 난다며 본격적으로 판소리
연구에 들어갔다. 『심청전을 만주에서 작곡하다 다 찢어버리고 말았거든. 한국 냄새가 안나요. 아무리 애써도 깊이가 없어요. 심청이나
춘향전을 하려면 판소리를 알아야 되겠다 해서 심청전과 춘향전 판소리 레코드를 사서 자꾸 듣고, 베끼고, 노래해보고, 흉내내보고. 판소리는 음정이
정확하지 않거든요. 내 나름대로 음정을 완전히 정하고, 그걸 하느라 애썼어요. 그 전에는 내가 오페라도 공부하고, 서양음악을 많이 했거든.
판소리 시작하고는 일체 안했어. 이렇게 좋은 게 있는데 뭐하러 외국음악을 하나 싶었지. 판소리를 새로 공부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야 거기에
미친 사람들이지. 이게 한국음악이에요. 「가고파」 「내 마음」 등은 모구 성양식 한국 가곡이거든. 한국적인것이 외국사람한테 먹혀
들어가요』 金東振씨는 그러나 판소리와 신창악은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판소리의 기법과 그 맛은 좋아하지만, 판소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판소리는 좋아하지만, 그 목소리는 싫어해요. 판소리는 과학적인 발성법이 아니야.
판소리는 과학적인 게 아니거든. 자꾸 해서 목이 쉬고, 성대가 못쓰게 되고, 마지막엔 탁성이 되잖아요. 得音(득음)했다고 하는데 사실 목이
못쓰게 된거거든. 그걸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대로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판소리는 테너 알토 소프라노가 하나도 없어. 아름다운 목소리, 음악의
목소리로는 이태리 벨칸토 밖에 없지. 그러나 서양 발음은 안돼. 한국말을 똑똑히 할 줄 알아야 돼요. 판소리의 기법이나 특색을 잘 터득해서
벨칸토에 접합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어려워요』 신창악에 대한 우리 음악계의 평가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뤄진 게 없다. 국악과 양악의
접합점을 찾는 민족음악의 여러 가지 시도 중 하나로는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반응이 뜨겁지는 않다. 金東振씨도 신창악을 이어갈 후계자가 마땅히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新唱樂 계승이 소원 『내가 후계자를 양성해봤는데, 하나 기대했던 사람은 목사가 돼
버렸어요. 남원 사람인데, 잘해요. 또 한 사람은 박치우라고 죽었고, 이남철씨라고 그 사람은 아파서 못해요. 지금은 내가 나이가 들어 배워주지도
못하고, 발표도 못해요. 그런데 방법이 하나 있어요. 한국 예술종합학교 국악과에 신창악과가 하나 있으면 돼요. 그걸 자꾸 주장하는데 내 말
들어야지(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평양에는 음악학교에 新민요학과가 있어요. 그건 洋樂(양악) 공부한 사람들, 발성을 다 완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서 공부하는 데야. 그건 신창악이 아니고, 新민요학과가 있어요. 그건 洋樂(양악) 공부한 사람들, 발성을 다 완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서 공부하는 데야. 그건 신창악이 아니고, 新민요지. 이북사람들은 민요를 주로 해요. 판소리가 없으니까. 우리 음악대학에도 신창악과가
있으면 발전할 수 있어요. 그게 안되면 나중에 누가 하겠어요?』 이 대목에서 金東振씨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쓴웃음 쪽이 더
가까웠다. 金東振씨는 그때쯤 목이 쉬어 있었다. 인터뷰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흘렀다. 외로움이란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예술은 외로운 사람들의
몫일 거라는 결론 하나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기자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외로워 보인다고. 『사실 외로워요. 왜냐하니 정말 지금까지 나
혼자 한 거예요. 그래서 늘 얘기하잖아요. 왜 정부에서 이런 데 눈을 못뜨냐 이거죠. 찬성하는 음악인들은 또 왜 없나 이거야. 우리나라는
질투들이 많아요. 남이 하면 그저 깎아내리려고만 하고. 추켜세워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게 안돼요. 내가 만주있을 때 「양산가」 갖고 오케스트라를
연주했어요. 그때 일본 신문에 평이 어떻게 났느냐 하면 「한반도에 혜성이 나타났다」고 추켜세웠어. 그 사람들은 잘하면 추켜세울 줄 알아. 우리는
남이 하면 깎아내릴 생각만 해요. 그러니까 발전을 못하는 거예요. 신창악과 하나 만들어달라고 내가 몇 군데 부탁을 했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이
먼저 반대해요』 金東振씨는 남은 여생에 대해 『큰 작품은 이제 힘들어 못할 것 같고, 조그만 소곡들이나 작곡하겠다』고 말했다. 건강에
애쓰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가곡 작곡가」보다는 「新唱樂 개척자」라는 이름으로 음악사(史)에 남고
싶다고. - - - - - - - - - - - - - - - - - - - - - -
新唱樂 新唱樂(신창악)은 金東振씨가 제창해 직접 붙인 이름으로 서양 발성법과 한국 판소리 기법을 접합한 새로운
성악 창법이다. 金東振씨는 1979년 이 창법의 보급을 위해 「신창악회」를 결성, 지방 순회강연을 갖는 등 본격적인 신창악 연구 및 보급 활동을
벌였다. 金東振씨는 이 운동의 결실로 신창악 오페라 「沈淸」과 「春香」을 만들어 1993년과 1997년에 공연을 가졌다. 신창악은 동서양
唱法(창법)의 만남이지만, 발성법의 무게 중심은 서양 쪽에 있다. 우선 판소리엔 소프라노와 알토 같은 음의 높낮이가 없고, 높은 음에서 미세하게
울리는 비브라토가 없다. 또 보통 판소리에서 得音(득음)의 경지로 여기는 탁성을 성대가 못쓰게 된 것으로 보고 있어 金東振씨는 판소리의 발성법
자체엔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판소리엔 우리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다. 예을 들어 「농부」를 「노흥부」로 발음하는 「군음」이나, 가성으로 자연의
소리를 내는 발성 등이다. 이같은 판소리의 기법을 차용,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노래하는 게 신창악이다. 한국 국적의 서양 음악인 셈이다. 이
때문에 新唱樂은 판소리 명창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발성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게 金東振씨의 설명이다. 이같은 신창악
운동은 양악과 국악을 접합하는 유사한 운동이 많았다는 이유로 현재 우리 음악계에선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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