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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물
- 낙동강 2
그리움에 미친년
꽃댕기 은비녀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옥양목 꼬장주 훌훌 벗어 던지고
은장도 하나 오로지 속살 깊이 품고
풀어헤친 머리칼 쥐어 뜯으며
타는 속 부글부글 거품 물고
그리움 찾아간다
그리움에 미친년
가도가도 끝없는 칠백리
물새도 울지 않는 그믐밤
초롱불도 없이
울부짖으며 울부짖으며
그리움에 미친년
어머니와 소풍
- 낙동강 4
진작에 귀띔이나 하였으면
뒷집 청송댁에서
쌀 한 되는 꿨을 텐데……
닭들만 퍼덕이는 이른 새벽
죽 끓이다 홀로 마당에 서서
소풍 간다는 말 차마 못해
전날 밤 자기 전에서야 말을 꺼낸
어린 나의 조숙함을 안쓰러워하며
흐르는 눈물 훔치며 하늘을 볼 때
쌀알 같이 촘촘한 새벽 별들은
메말라 평지가 된 당신의 젖가슴에
총알처럼 비수처럼 내려와 박히고
당신은 서럽게 서럽게 우셨습니다
끓는 죽에서 쌀알 건져
숯불에 졸여 밥처럼 만들어
백철 도시락에 꼭꼭 눌러 담고
고구마 두 개, 감 세 개
밤늦게 마련한 말표 사이다 한 병
보자기에 싸는 당신의 눈에선
피보다 진한 눈물 한없이 흘러내려
앞마당에 붉게 핀 맨드라미
더욱 검붉게 물들였습니다
삽짝문 나서는 철부지에게
십원짜리 하나 꼭 쥐어주며
잘 놀다 오너라 나직이 당부할 때
툇마루 밑 복실이도 쪼르르 뛰어나와
어머니 치마 물고 꼬리치며 까불대고
붉게 물든 앞산이 치맛자락 날리며
너울너울 춤추며 우리집으로 내려와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어서 데려 갔습니다
강굽이 내려다 보이는 검단동 산마루
보물찾기 노래자랑 정신없이 놀다가
소풍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야바위꾼
빙빙 도는 나무원판 위 닭털달린 작은 화살로
일 원 주고 꽂아보고 일 원 주고 또 꽂아보고
한푼도 남김없이 십 원 다 날려도
그 날은 그렇게도 즐거웠습니다.
저물도록 놀다가 돌아오는 방천길
저 멀리 뚝다리 위에서 나를 기다리며
노을에 젖어있던 당신의 모습
강물과 함께 세월은 흘러가도
당신의 모습 당신의 눈물
내 가슴 속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겁니다
장마철
- 낙동강 6
밤새 퍼부은 비로
학교 앞 샛강 넘치는 날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결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그런 날은
누나를 졸라서
사카린 물 풀어먹인
밀이나 콩 볶아
어금니 아프도록 씹으며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거나
배깔고 엎디어 만화책을 볼 때면
눅눅하고 답답한 여름장마도
철부지 우리에겐 즐겁기만 했고
아버지 수심에 찬 주름진 얼굴도
돌아서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형과 나는 은밀한 눈빛으로
내일도 모레도 계속 비가 내려
우리집만 떠내려 가지 말고
샛강 물은 줄지 않기를
낄낄거리며 속삭이곤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간절히 쉬고 싶을 때는
샛강 넘치는 꿈을 꾼다
감 꽃
- 낙동강 7
별을 닮은 감꽃
감꽃 실에 꿰어
가슴까지 길게
길게 목걸이 하면
죽어 별이 된 누이야
누이야 누이야
밤이나 낮이나 너는
너는 지지 않는 내 가슴 속의 별
누님과 사슴
- 낙동강 8
문풍지만 바르르 떨려도
까닭도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만 흘리곤 하던
가슴앓이 칠년 둘째 누님
밤마다 실날같은 호롱불빛 아래서
콜록콜록 기침에 손끝 찔리면서도
사슴 한 마리 수틀 안에 정성껏 기르더니
누님의 손목처럼 앙상한 나뭇가지에
송이송이 하이얀 눈꽃이 피어나던 어느 겨울 밤
그 사슴을 데리고 영영 먼 길 떠났다
김천댁
- 낙동강 10
달비 장사에게 머리카락 팔아
식구들 겨울내복 사 오겠다며
머리 곱게 감아 빗고 장에 간
심성 곱기로 온 마을에 칭찬 자자한
나무꾼의 아내 김천댁은
해 지고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서서
사흘밤 사흘낮을 꼬박 찾았으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김천댁은
남편 박서방이 나무하러 가는 길목
마을 뒷산 어느 큰 소나무에
치마끈으로 목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뒷머리 몽땅하게 다 잘렸고
찢어진 꼬장주 가랭이에는
붉은 선혈이 얼룩져 있었다
흑심을 품은 못된 달비 장사에게
머리칼 잘리고 겁탈도 당하고는
서럽게 산 이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
세 살짜리 봉식이와 박서방의 내복을
보자기에 정갈하게 싸서 발 아래 두고서
안동댁 가던 날
- 낙동강 13
언 강 풀리고 새싹 돋아나는 강 언덕
단청 입히고 하얀 연꽃 봉황새로 단장한
어머니 태워 갈 꽃상여 앞에
마지막 작별 인사하는 복순이 누나
어매 어매 우리 어매요
받은 밥상 물리치고 황천길로 가는 어매요
저승길은 외길이라 오는 길이 없다던데
어매 어매 우리 어매요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날 찾아 오실랑교
서른에 청상과부되어 딸 하나 키운
한많은 안동댁 저 세상 가던 날
동네 아낙들 치맛자락으로 눈물 닦고
마을 상할매 복순이 누나 어깨 잡고
서산명월 다 넘어가고 꽃이 진다 설워마라
노고지리 지저귄들 떠난 봄이 다시 오랴
복순이 누나 통곡하다 상여 잡고 실신하고
다시 깨어나 땅 치고 데굴데굴 구르며
어매 어메 우리 어매요
근심걱정 다 제하면 석삼년도 못 산 세상
어매 어매 우리 어매요
동네 앞 고목나무 꽃피면 다시 오실랑교
산이 높아 못 오시면 학이 되어 오실랑교
먼 산 보며 눈만 껌벅이던 상두꾼들
복순이 누나 밀쳐놓고 무정하게 상여 메고
덧없는 것 세월이요 허무한 게 인생이라
어-허여 어-허여 어-허 어-허여
가네 가네 나는 가네 왔던 길로 나는 가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상두꾼들 구슬픈 앞소리 뒷소리 따라
우리도 눈물 훔치며 마을 끝까지 따라갔다
어머니 육아법
- 낙동강 14
밥투정하는 아이들
아내가 꾸짖으며 밥그릇 치우면
어머닌 며느리를 나무라며
밥그릇 다시 가져가
아이들 뒤따라 다니며
달래고 어르며 밥을 먹인다
요즈음 젊은 것들은 몰라
이 세상 제일 보기 좋은 게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
굶주린 자식새끼 입에
밥알 옴쏙옴쏙 들어가는 것
누님의 강
- 낙동강 18
누님,
오늘도 훈이를 데리고 저 선연한 핏빛 노을 강물로 넘쳐 흘러오는 이 강 언덕에 또 찾아왔습니다. 훈이도 이제 뭔가를 눈치챈 듯 왜 늘 이곳으로 데려오는지를 묻곤 합니다. 누님, 누님이 신행 가던 그 해 섣달 초이렛날이 엊그제 같은데 쑥쑥 뻗어나는 훈이를 보면 세월의 길이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누님이 시집간 그 이듬해부터 삼동이 되면 자형은 노름에 빠졌고 해마다 그 때 돈으로 육칠십만 원씩 날리지 않으면 그 마을에 봄이 오지 않는다 할 정도로 자형의 노름빚은 눈덩이처럼 불어갔지요. 견디다 못한 누님이 신통한 묘책도 없는 친정에 훈이를 들쳐업고 찾아오면 어머님께서는 계집질하러 간 서방 두고는 다리 뻗고 못 자도 노름하러 간 서방 두고는 잘 수 있는 법이라며 누님을 꾸짖어 쫓아 보내곤 했지요.
누님, 훈이가 네 살 되는 해였던가요. 연례행사로 누님은 또 울며불며 친정에 와서 이젠 계집질에다 여차하면 두들겨 팬다며 복스런 입술 다 터지고 눈언저리 시퍼렇게 멍들어 차마 보기 민망한 몰골로 서럽게 서럽게 울었고 그 날도 어머니께서는 누님을 꾸짖고 달래어 또 쫓아 보냈지요. 그 날은 언강 다 풀려가는 포근한 보름밤이었지요. 그날따라 누님은 훈이를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 해질 무렵 바로 이곳에서 누님의 시신은 저아래 사는 나루터 송영감에 의해 웃저고리 벗겨지고 머리 다 풀어 헤쳐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누님, 비록 어렸지만 그 날 훈이를 데려오지 않았던 누님에게서 뭔가를 미리 예감하지 못했던 나의 둔함이 오늘까지도 내 가슴 속에 빼낼 수 없는 쓰라린 회한의 옹이로 박혀 있습니다.
누님의 시신은 저 쪽 집안의 통사정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놈의 집에는 시체도 줄 수 없다며 눈에 불을 켜고 반쯤 미쳐버린 아버지에 의해 화장되어 바로 이 시각쯤 여기 차가운 물에 뿌려졌고 그 때 나는 저녁노을이 콸콸 피를 토하며 각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있어서 노을은 아버지의 충혈된 눈과 어머니의 실성한 눈빛과 더불어 변함없는 핏빛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누님, 내년이면 훈이도 대학에 갑니다. 대견하지 않습니까.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지요. 오늘은 훈이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 했는데 대학시험이 몇 달 남지 않아 그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누님, 보고 계십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저 노을을 닮은 눈빛으로 누님이 한 줌 재로 흩어진 저 강물을 서러운 듯 굽어보고 있는 훈이를.
구포댁
- 낙동강 20
배고프면 고모집 긴 골목 끝 대추나무 밑을 요리조리 눈치만 살피며 서성거리곤 하던, 아랫동네 사는 구포댁의 어미 없는 친정조카 점태가 어느 날 샛강 돌다리를 건너다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다가 죽었다.
콩밭 메러 간 시어머니, 그 별나고도 표독스러운 시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하나라도 더 먹여 보내려고, 코흘리개 점태를 부뚜막에 앉혀놓고 펄펄 끓는 수제비를 건져내어 찬물에 겉만 얼른 식혀 먹였기 때문에 배 속에 열이 차서 샛강도 건너기 전에 죽었던 것이다.
말도 못하고 냉가슴만 석 달 앓던 구포댁이 마침내 미쳐 집을 나가서는, 윗동네 아랫동네 온 동네 아이들 노는 곳만 찾아다니며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엄마 엄마 나 죽는다고 울부짖곤 했다.
그 부드럽고 시원하던 구포댁의 눈빛이 때론 점태의 눈을 닮은 듯 멍청하게 변했다가 때론 시어머니의 눈빛을 닮은 듯 독기를 내뿜었고, 마을 사람들은 혀만 끌끌 찼다.
온종일 헤매다가 해거름이면 샛강 돌다리에 퍼질고 앉아, 점태야 점태야 수제비국 끊여줄게, 머리 쥐어뜯고 발악 발악 악쓰며, 점태야 점태야 외쳐댔지만, 무심한 샛강물은 제갈길만 찾아, 타는 노을 속 서쪽으로 서쪽으로 말없이 흘러갔고, 점태가 묻혀있는 저 멀리 앞산은 언제나 언제나처럼 빈 메아리만 되풀이했다.
점태야 점태야
돌 탑
- 낙동강 44
당신이 그리운 날은
저물어 오는 강둑에 서서
표적도 없이 돌팔매질을 한다
던질수록 가까이 떨어지다가
결국은 내 가슴에 박히는 돌들
먼 훗날
당신이 이 곳을 지나더라도
돌탑의 사연을 묻지 말라
모난 돌
모난 돌이라 욕하지 마라
둥근 네가
온 세상 굴러다니며
세상 잡것들과 몸 섞으며
온갖 저지레를 다하는 동안
모가 나서
어느 쪽으로도 구를 수 없는 나는
해와 달, 저 철새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여기 이 자리에 붙박이로 살았노라
때론 모난 돌이
떠돌이들의 이정표임을 잊지 마라
편지
그대와 함께
동화사 염불암, 은해사 중암암
깊은 산속 외딴 기도원에 오르고 싶네
달빛 너무 황홀하고 고요해
잠들지 못하는 산사의 밤
별빛 달빛으로 기와 빚어
천년을 버티는 집 한 채 지어
젖빛 은하는 우물로 삼고 싶네
그대 맑은 새벽을 위해
그대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종소리를 위해
나 한 마리 목어가 되리라
세속은 잠시이고
그대 맑은 눈빛 영원하리니
나 은하에 몸 씻고
바람에 오욕 날려 버리고
그 대 귓가에
청량한 솔바람 소리 전해주는
미풍에도 흔들리는 풍경이나
기도원 작은 종으로 매달려 있고 싶네
개망초
스물 하나에 청상 되어
아들 하나 키우며 잡초처럼 살다가
며느리 들어오자 살림 물려주고
툇마루에 앉아 종일 흰 구름만 바라보며
어디든 훨훨 날아다니고 싶다던
영천댁 꽃상여 나가던 날
유월 뭉게구름 하늘에서 내려와
길가 가득 개망초로 흩어졌다.
새하얀 두건 쓴 개망초들
바람에 온 몸 흔들며 곡하다가
꽃상여를 메고 산으로 올라갔고
할머니는 구름이 되어 영영 먼 길 떠났다
욕창
여름이 다가오자
아버지의 욕창은
만개한 꽃처럼 절정에 달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흘러내리는 진물에선 술과 마늘 썩는 냄새가 났고
개장국 비린내와 풍년초 댓진 냄새가 났다.
밀폐된 아파트
그 창틈을 용케 비집고 들어온 떠돌이 바람이
흐물거리는 상처를 핥아주면
바람처럼 살아 온 아버지의 어두운 사건들이
구멍난 피부를 통해
바람과 은밀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의 목에서 가래가 끓을 때마다
헐벗은 내 유년의 허기진 숨소리
화투소리, 고향장터 작부의 육자배기
저물녘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흐느끼던 어머니의 까닭모를 울음
잊고 싶은 그 모든 소리들이 귓가에 쟁쟁거려
아버지의 85년 생애가 미웠고
욕창과 가래 끓는 소리가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백일 탈상 날
아버지의 무덤엔 어느새 날아와 뿌리내린
들꽃 한송이 천상의 향기를 내뿜었고
아이들은 내 몸에서 풍기는
술과 담배 냄새가 싫다고 했다
호수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대는 잔잔한 주름으로
고운 결을 만들며
스스로 깊어지고 있다
그리움
끝없이 차올라
출렁이는 파문으로
잠 못 이루는 불면의 시간
나는 그대
가장 깊은 곳에 닿기 위해
밤마다 홀로 깊어지고 있다
윤일현 : 대구출생. 계간『사람의 문학』에「흐르지 않는 강」, 『현대문학』에
「되새 김질」 등의 시를 발표하고 시집『낙동강』을 출간하며 등단.
시집 『꽃처럼 나비처럼』, 교육평론집『불혹의 아이들,』,
『부모의 생각이 바뀌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시지프스를 위한 변명』,
대구시인협회 회장
첫댓글 4명 낭송인 선착순 댓글 부탁드립니다
욕창, 해보겠습니다.
강물
-- 낙동강 2
낭송. 신청합니다~~()
어머니와 소풍
-낙동강 4
낭송 신청합니다.
죄송합니다~!
뜻하지 않는 일이 잡혀
시간이 늦을듯 하여 낭송하기를
포기 합니다!
다른분 신청기대합니다!!
편지, 해보겠습니다
회원님들 한 명 더 신청 부탁드립니다^^